공리주의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2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7년 4월
구판절판


<옮긴이의 들어가는 말>

밀이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정신적 쾌락에 집중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밀은 또한 인간이 사회적 감정을 타고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끼며 일체감을 느끼는 사회적 존재가 바로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다.-8쪽

<여기서부터 본문>

쾌락의 질적 차이가 무슨 뜻이냐 또는 양이 더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쾌락을 보통의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만일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 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에 대해 확실하게 잘 아는 사람들이 엄청난 불만족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를 분명하게 더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더욱 선호되는 즐거움이 양의 많고 적음을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27쪽

도덕적인 속성이나 그 결과와 상관없이 두 종류의 쾌락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지, 또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쾌적한 기분을 안겨줄지 결정해야 할 때, 각각에 대해 정통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 또는 이들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중 다수의 판단이 가장 존중되어야 한다. 쾌락의 질을 놓고 볼 때, 이렇게 도출된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양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도 달리 의견을 물어볼 만한 심판관이 없기 때문이다.-31쪽

'최대 행복 원리'를 따를 경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든 앙니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든, 가능한 한 고통이 없고 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상태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된다. 나머지 모든 것은 이 궁극적 목적에 비추어서, 그리고 그것에 도움이 될 때 바람직한 것이 된다. 자기 경험,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자의식과 자기 관찰의 습관을 ㅌ오해 최선의 비교 수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런 궁극적 목적을 선호한다. 따라서 이것은 질을 검사하고 양과 대비해서 그 질을 측정하는 규칙이 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 행동의 목적일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도덕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인간 행동을 위한 규칙과 지침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을 잘 준수하기만 하면 최대한 많은 인류가 앞에서 묘사한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 인간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이 허용하는 한, 감각을 가진 모든 피조물 역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32-33쪽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황금률에서 바로 그러한 공리주의 윤리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를 너 스스로 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가르침이야말로 공리주의 도덕의 완벽한 이상을 담고 있다. 이런 이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공리주의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첫째, 모든 개인의 행복 또는 (보다 실감나게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가능하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법과 사회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교육과 여론은 사람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모든 개인이 자신의 행복과 전체의 이익 사이에, 특히 보편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행동 양식과 자신의 행복이 서로 끊을 수 없는 관계임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41-42쪽

(위에 이어서) 그래야 어느 누구든 공공의 이익과 배치되는 행동을 통해서는 지속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해야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직접적인 충동이 각 개인의 습관적인 행동 동기 중 하나가 되고,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모든 사람의 일상 속에서 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42쪽

공리주의 도덕 이론가들은 동기를 통해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의 값어치를 판별할 수는 있을지언정, 동기와 그 행동의 도덕성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다른 어떤 이론가들보다 더 분명하게 주장해왔다. 그런데도 이러한 특정 오해 하나 때문에 매도당하는 것은 공리주의자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해주는 행위는 그 동기가 의무감에서였든 아니면 그런 수고를 통해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든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옳다. 자신을 신뢰하는 친구를 배신하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의 더 큰 의무를 지고 있는 또 다른 친구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러나 의무감에 의해서, 그리고 어떤 원리의 명령을 좇아서 한 행동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더라도 공리주의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 세상 또는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성에 입각해서 살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선한 행동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 개인들의 이익이 모여 사회의 이익이 형성된다. -43-44쪽

어떤 대상이 가시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밖의 다른 것도 우리의 실제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무엇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얻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공리주의 이론이 스스로 목적이라고 제안한 것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하나의 목적이라고 인정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든 그것이 목적이 된다고 믿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자가 행복을 획득 가능하다고 믿고 행복을 갈망한다는 사실 외에, 왜 일반 행복이 바람직한지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경우를 통해 행복은 좋은 것이라는 점에 관한 모든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를 통해 각자의 행복은 당사자에게 좋고, 따라서 일반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좋다는 사실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사람들의 행복이 지향하는 목적 중 하나로, 나아가 도덕 기준의 하나로 위치를 굳혀 온 것이다.-75-76쪽

효용 원리는 특정 쾌락(이를테면 음악) 또는 고통이 없는 상태(혹은 건강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불리는 포괄적인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거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갈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 스스로 갈망의 대상이 되고 바람직하다. 따라서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적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공리주의 이론에 따름녀 덕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원래부터 목적의 일부였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사심 없이 덕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덕이 목적의 한 부분이 되고,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행복의 한 부분으로서 갈망되고 소중히 여겨진다. -78쪽

공리주의 철학에 따르면, 덕이라는 것도 이런 성질을 대단히 많이 띠고 있다. 쾌락을 얻는 데, 특히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성질을 빼고 나면 덕을 갈망하거나 추구해야 할 원초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관계 때문에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느낄 수 있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강렬하게 갈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덕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에 대한 사랑과 차이가 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후자와 같은 것에 집착하는 개인은 때로 그가 속한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해로운 존재가 되는 반면, 사심 없이 덕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다시없이 귀한 존재가 된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 철학은 일반 행복을 해치지 않고 그것을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 사람들이 습득하게 된 다른 욕구들을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한편, 일반 행복을 달성하는 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덕을 최대한 사랑하며 쌓을 것을 명령하고 요구한다. -80-81쪽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옳은 일이 아니면 하지 않을 사람은 제쳐두고, 덕스러운 의지가 아직은 미미해서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을 두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 어떻게 하면 그 의지를 키울 수 있는가? 아직 덕스러운 의지가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떻게 그 의지를 심어주거나 일깨울 수 있는가? 방법은 딱 하나, 그 사람이 덕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덕에 대해 생각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반대로 덕이 결여되면 고통을 느끼게 해야 한다. 옳은 일을 하면 즐거움이, 옳지 않은 일을 할 때는 고통이 연상되게 하거나 아니면 전자의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내포된 즐거움이, 후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고통이 생긴다는 것을 그 사람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깨닫고 깊이 인식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만 덕스러워지고자 하는 의지가 단련을 거듭하면서 쾌락이나 고통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절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의지는 갈망의 자식이다.-84-85쪽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정의롭지 못한 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현상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법이 정의에 관한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이익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의와 정면 배치되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법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할 때, 그것은 이를테면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함으로써 법을 위반했을 때 정의롭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경우 그것은 법적 권리가 아닌 다른 이름, 즉 도덕적 권리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두 번째 경우의 불의는 누구에게나 인정되어야 하는 도덕적 권리를 빼앗는 것과 관련이 있다. -93쪽

심지어는 평등론을 주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편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만큼이나 정의에 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 노동의 산물이 완전 평등 원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나눠지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강조하는 데 비해, 어떤 사람은 쓸 곳이 가장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받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일을 많이 하거나 생산량이 더 많은 사람 또는 사회적으로 기여가 더 큰 사람이 생산물의 분배 과정에서 더 큰 몫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자기 입장에 따라 자연적 정의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다. -97쪽

(위에 이어서) 이처럼 '정의'라는 말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됨에도 그 개념을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런 차이들을 관통해 연결하고 그 말 특유의 도덕적 감정을 연상시키는 정신적 고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 말을 둘러싼 어원의 역사를 훑어보면 어느 정도 단서가 밝혀질지 모르겠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언어에서 '정의'에 해당하는 말들은 그 어원이 법의 명령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라틴어의 경우 justum은 명령을 받는다는 뜻을 가진 jussum의 한 형태다. ... 옳은과 의로운이라는 말의 뿌리가 되는 독일어 Recht는 법과 동의어다. 따라서 정의의 심판장, 정의의 집행이란 곧 법정, 법의 집행을 의미한다. ... 중략 ... 그러므로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감정은 일체의 법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단지 반드시 존재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법에 대한 위반, 그리고 법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것을 지니지 못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성질을 띠는 법에만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법의 정신과 그 명령은 여전히 정의의 개념을 둘러싸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97-99쪽

칸트가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을 핵심 도덕률로 주장했을 때, 그는 행위자가 자기 행위의 도덕성에 대해 양심적으로 결정하는 상황에서 마음 속으로 인류 전체 또는 적어도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공이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칸트는 아무 의미 없이 그런 말을 한 셈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성적 존재가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규칙을 채택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든가, 또는 그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격률이 의미를 지니려면, 이 말은 공공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가 채택할 수 있는 어떤 규칙에 맞추어서 사람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닫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107쪽

나는 지금까지 권리라는 개념이 피해를 입은 사람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피해로 인해 권리가 침해됐다는 것, 그리고 이때 그 권리가 개념과 감정의 혼합물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요소가 함께 엮어내는 여러 형태 중 하나라는 사실을 주장해왔다. 이 두 요소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특정 개인 또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벌을 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정신을 잘 분석해보면, 권리의 침해라고 말할 때 이 두 요소가 우리가 뜻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가 어떤 사람의 권리에 속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사회를 향해 법 또는 교육과 여론의 힘에 의해 자신이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음을 정당하게 주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08쪽

지금까지의 분석이나 그와 비슷한 것이 정의라는 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되지 못하고, 정의가 효용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준이 되며, 인간 정신이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정의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정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명령이 왜 그리 불분명하고, 수많은 사안들에 대해 동일한 잣대를 갖다 대는데도 왜 어떨 때는 정의롭다고 하고 또 어떨 때는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것인가?

우리는 효용이 사라마다 모두 다르게 이야기하는 불확실한 기준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ㄷ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개념 규정할 수 있으며, 세상 생각과 무관하게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만일 이들의 말이 옳다면 정의라는 문제를 둘러싼 그 어떤 논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든, 마치 수학 공식을 대입하듯이 처리하면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111쪽

(위에 이어서)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너무나 먼 이야기다. 무엇이 사회에 유익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듯이, 정의가 무엇이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숱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로 다른 개인들과 민족들 사이에서만 정의에 대한 생각이 엇갈리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상황에 따라 정의를 하나의 일관된 규칙, 원리 또는 격률로 이해하지 않고 다양한 성질을 띤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끼리도 늘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어떤 사람이 외부의 특정 기준과 자신의 주관 중 어느 것에 따라 행동을 해야하는지 판단할 때 별 도움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111-112쪽

나는 효옹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정의에 관한 가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모든 이론을 반박하는 한편, 효용에 바탕을 둔 정의가 모든 도덕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그 어느 것보다 더 신성하고 구속력도 강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것은, 인간 삶을 이끄는 어떤 규칙보다 더 진지하게 인간의 참된 복리에 대해 염려하고, 따라서 어느 것보다도 더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종류의 도덕적 규칙을 지칭한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라는 개념의 본질적 요소라고 규정한 것, 즉 모든 사람이 권리를 지닌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보다 강한 구속력을 암시하며 정당화한다.-118-119쪽

정의란 사회 전체 차원에서 사회적 효용이 아주 높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예외적 상황 아래에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요구되는 몇몇 일반적 격률을 무시하는 것이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는 특정한 도덕적 요구를 지칭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면, 힘으로라도 필요한 양식이나 약을 구하거나 훔치는 것 또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전문의를 납치해서 강제로라도 환자를 돌보게 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덕스럽지 않은 것을 정의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가 어떤 다른 도덕적 원리를 위해 포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정의지만, 다른 도덕적 원리에 비추어볼 때 특정 상황에서는 정의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말의 의미를 이정도로 적당하게 변용하면, 어떤 경우에도 정의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불의를 용인해야 하는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125쪽

여기서부터 <옮긴이 해제 중>

희생 그 자체가 선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을 증대시켜주는 등, 행복의 전체 양을 증진시키지 않는 희생이란 쓸데없는 허비라고 보는 것이다.-134쪽

밀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감정이 자연적 감정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사회적 감정이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인데, 이것은 이미 인간 본성에서 강력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굳이 인위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에 비례해 점점 강해진다. 그래서 마치 본능적인 것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존재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들에게 좋은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마치 생존을 위한 물리적 조건인 것처럼 되는 것이다.

결국 밀이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정신적 쾌락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끼며 일체감을 느끼는 사회적 존재가 공리주의적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벤담의 공리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137쪽

밀은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효용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합리적 선택을 내릴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관련 사실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은 뒤 오랜 시간 숙고하면, 대체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욕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밀은 '이성의 객관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 문제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합리적 토론을 거치면 합의 도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밀은 이런 전제 위에서 가치의 객관성을 주장한다. -141쪽

밀에 관한 전통적 해석은 밀이 공리주의의 한계를 직시하며 그것을 극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영국의 저술가 벌린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밀은 자유가 수단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공리주의적 시각과 반대로 전체 복리의 증진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도덕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라는 생각, 이 두 상반된 관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채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 밀은 직관이 아니라 이론을 추구한다면서 공리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유라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직관적 당위론을 주장했다. 밀이 이러한 모순의 늪을 헤쳐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벌린의 생각이다.-144-145쪽

각주 25

밀이 직관주의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당시 사회의 윤리적 편견이나 모순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밀이 살았던 19세기 유럽 사회를 지탱하던 도덕률이나 사회 문화적 제도는 모두 일정한 가치 기준 위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구시대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서는 직관주의적 인식론으로 무장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세력과 힘든 싸움을 벌여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경험과 관찰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직관주의자들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자유라는 것도 다수의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정한 기준에 의해 왜곡, 변질될 가능성이 높았다. 교양 없는 다수의 호불호가 도덕의 기준이 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자유는 심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밀이 직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178-180쪽.-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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