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5
한학성 지음 / 책세상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참여한 학자와 작가 등의 지식인들은 꽤나 많다. 복거일이 시작했지만 찬성논증보다는 반대논증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논증을 펼치는 이들이 모두 같은 위치에서 복거일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자라고 하더라도 각자의 입장이 있고, 어떤 이는 복거일의 탈민족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비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영어공용어화로 빚어지는 신계급문제에 대해 들고 일어서기도 하며, 어떤 이는 민족어 순결주의의 입장에서, 어떤 이는 영어전문가의 입장에서, 교육학자의 입장에서 복거일을 비판한다. 각자 영어공용어화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논거는 각기 조금씩 다르다. 2000년에 나온 한학성이라는 영어교육학과 교수의 <영어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또한 영어공용어화가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반대의견이지만,  무조건 복거일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문제가 어디에서 촉발되었는가, 또 그 과정은 어떠한가, 반대의견들과 찬성의견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름의 대안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선보인 책 중에 가장 낫다고 할 수 있다.

  매우 적은 분량의 책세상문고이지만 이 책 안에서 한학성은 다양한 관점에서 영어공용어화의 허와 실에 대해 살피고 있다. 크게 논쟁을 복거일의 1차 논쟁, 문인들간의 2차 논쟁, 일본내의 영어공용어화 논쟁으로 인한 3차 논쟁으로 시기를 세 갈래로 보고, 각 시기마다 어떻게 논쟁이 벌어졌는가를 살피면서, 그간의 논쟁을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평등주의 대 계급주의' '외래어 수용주의 대 민족어 순결주의' '전 국민 영어론 대 영어 전문가론' 으로 대결구도를 분류하고 있다. 영어를 대세다. 세계어다. 국제어다, 등의 주장으로 일관된 세계주의는 영어 공용어화 논쟁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민족의 정체성, 주체성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민족주의파다. 민족어는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정신을 담고 있는 것으로, 언어를 단순히 도구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쪽의 의견인데, 극단으로 나아가서는 지 엄마를 갈아치우는 자식 놈이 어디에 있느냐는 비약으로까지 치고간다. 평등주의 대 계급주의는 영어를 모두 사용함으로써 모두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주장과 오히려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잘하는 자와 못하는 자, 고급영어를 구사하는 자와 방언을 구사하는 자 간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는 주장으로 나뉜다. 또 전 국민 영어론은 모든 국민이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 이는 영어는 특정한 분야의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이 하면 된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한학성은 이렇게 논쟁의 구도를 살피고, 바로 영어공용어 논쟁의 헛점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복거일이 내세우는 이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반박하고 들어간다. 후손들의 모국어 선택권론, 지구 제국 중심부로로의 진입론, 보편어 문학론, 실시간 정보 획득론, 전 국민 영어론, 언어도구론, 언어진화론, 외국어습득론 등등 복거일이 내세우는 근거들에 이름을 붙여 이에 대한 일대일의 반박을 통해 복거일을 넉다운 시킨다.

  "복거일의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그의 주장을 한번 뒤집어보기로 하자. 그의 주장은 결국 '영어 공용어화로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단지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 구사력이 현저히 향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중략... 결국 영어의 공용어화는 그 자체로 영어 교육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묘책이 아니라 영어 교육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달성이 가능한 목표라는 점에서 영어 공용어화로 영어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복거일이 갈망하는 것처럼 전 국민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마련하지도 않고 무조건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닫는 것은 이제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테니 국민들은 알아서 영어를 배우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일 뿐이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즉시 어떤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교육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때는 이미 모국어를 습득한 후가 됨을 의미한다. ...중략... 사람들에게 모국어 선택권은 없다. 모국어는 단지 그가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환경 속에서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후손들의 모국어 선택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복거일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

  그러나 한학성의 반론에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어도구론에 대한 반박으로서 촘스키의 이론을 들고나오며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며,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이고, 교육, 문화, 종교, 예술 등의 것들이 부여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러한 간편한 반박으로는 무력화시키기엔 부족하다. 그저 학자들간의 이론적 견해차일 뿐이라고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문고판 책인지라 분량이 작고 많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좀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반박을 했어야 했다. 한학성이 이에 대한 다른 근거를 들지 못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말을 줄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복거일에 대한 반박이후에 한학성은 영어공용어화 논쟁이 빚어지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처방을 내린다. 영어에 대한 투자에 비해 우리가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영어 교육에서부터 그 문제가 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어교육학자 답게 이에 대해 자세한 처방을 내린다. 덴마크나 네덜란드 같은 어원은 영어와 동일하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이 우리와 비슷한, 하지만 투자에 비해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그들의 교육방법을 이용해야 한다고 한다. 동시에 또 우리나라 영어교사자격이 주어지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한다. 너무나 쉽게 자격이 주어지고 있으므로 좀더 엄격하게 소수에게만 자격을 주도록 하고 이들을 해외연수를 시켜 능숙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거나 안식년같은 것을 주어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오도록 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한학성은 복거일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어공용화에 찬성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현실이 이에 부적합하고 이러한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뿐. 그는 복거일과 다른 방식으로 한국인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다음의 맺음말은 이를 시사하고 있다.

  "영어 공용어론은 현재로는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나라 영어 교육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고 말로만의 개혁이 아니라 실질적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증폭시킨다면,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영어 교육이 한 단계 올라가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 주장은 훗날 좀더 현실성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우리 나라에서의 영어 공용어 논쟁은 무의미한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견을 몇자 첨언하자면, 나는 영어 공용어화에 반대이다. 실현가능성이 좀더 높아진 다음에도 나는 반대이다. 한학성이 인용한 촘스키의 말마따나 언어라는 것은 단지 도구로서 활용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온갖 것들, 문학, 역사, 유머 등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로 언어가 사라지면 이러한 하나의 민족의 문화가 함께 소멸되는 것이며, 민족 문화의 소멸은 곧 민족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영어로 된 문학과 영어로 된 유머 등 모든 것이 영어로 이루어지고 영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면 겉모습은 동양인일지라도 우리의 내면의 모습은 원래의 우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정체성을 상실한 그 누군가가 되어있을 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어는 자연스럽게 다른 언어와 맞부딪히면서 서로 영향을 받고 새로운 단어를 생성하기도 하며, 또 변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원래의 언어가 다른 언어로 귀속되거나, 다른 언어로 변질되지 않을 때에만 유효하다. 이미 귀속되고 변질되었다면 그건 이미 '다른 언어'이기 때문이다.  외래어는 수용가능하지만, 그것이 '외래어'이고 '수요'가능할 때에만 그렇다. 외래어가 외래어로 불리고, 그것이 수용되는 것일 때에만.

  이 책은 매우 짧으면서도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한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동시에 모든 걸 압축하면서도 한학성이라는 학자 자신의 목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뒤에 ' 더 읽어야 할 자료들'에는 이 논쟁과 관련하여 관심있는 이들이 더 읽어야 할 문헌들이 간단한 소개글과 함께 실려있어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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