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없는 페미니즘 - 메갈리아부터 워마드까지
김익명 외 지음 / 이프북스(IFBOOKS)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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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메갈리아는 최악의 남성보다 더 최악인 여성이 됨으로써 세상의 불평등함을 보여주려는 전략으로 일관되게 행동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일베와 같은 집단이라고 판단했다.

54-55
1980~90년대의 언어와 21세기 온라인의 언어는 다르다. 우리는 21세기 온라인 남성들과 싸우며 그들과 같은 수위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성들의 언어는 보지 않은 채 우리의 언어만 보며 혐오세력이라 비난한다. 나는 우리세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68
여성 혐오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을 향해 어떻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만 하겠는가! 앞뒤 내용이 어떻든 간에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을 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매번 나를 폭발시켰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양비론을 주장하는 건 기울어짐을 찬성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128
애초에 남성들의 여혐 단어가 20년이나 온라인 공간을 지배할 동안 혐오표현의 규제는 한 번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혐오 발화를 미러링하기 시작한 시점에서야 혐오적 표현에 대한 규제가 논의되고 있다. 그것이 미러링 전략의 의미이고 성과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메갈리아 운동의 핵심은 바로 남성들의 언어를 빼앗아 되갚아주는 것이었다. 온건한 글을 쓰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널리 퍼지고 힘을 받는 것도 이러한 운동의 영향이라는 것 역시 부정하기 힘들다. 메갈리아가 생기고 나자 각종 뉴스에서는 ‘여혐, 남혐 모두 문제’라는 식의 기사가 올라왔다. 여성 혐오 단어들이 온라인을 지배하는 동안 한 번도 된장녀나 김치녀라는 단어가 문제라는 보도가 없었는데, 여성들이 혐오 발화를 미러링하는 순간부터 혐오가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이다.

160-161
보지를 달고 태어난 사람에게 억압을 가하는 것이 가부장제이다. 이 여성들의 축적된 경험을 지우면 가부장제가 가해온 억압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여성이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피해경험을 발화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과연 페미니스트인가? 끝내 이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는 여성들이 감수하고 있는 공포와 불안을 입막음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인가? 기본적으로 여성들은 여성들만의 공간에 들어온 생물학적 남성을 경계한다. 이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일반화된 태도다. 특히 해당 여성들이 남성에 의한 성폭력 경험이 있다면 이들이 남성들에게 갖는 불안과 공포를 존중해야 한다.

161
여자대학 학생은 스스로 어떤 성별로 정체화하고 있는가와 무관하게 여자라서 남성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수 있다. 자신의 성별 권력을 이용해 여자대학 학생에게 폭력을 가할 외부인 남성은 상대가 보지를 달고 태어난 여자이자 여성이라는 하위 계급이기 때문에 공격한다. 그만큼 이 사회에서 여성은 여자라는 성별로 식별되는 순간 남성에게 폭력을 당할 수 있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175
혐오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텍스트를 이용한 미러링은 그야말로 온건한 운동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미러링은 데이트폭력과 성폭력, 강간, 남편 폭력, 직장 내 성차별 등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여남의 관계를 뒤집어 남성들에게 이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미러링은 그저 텍스트 차원에서 실존하지 않는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미러링은 혐오를 재생산한다고 비난하지만, 그 혐오는 변화를 위한 필연적 부산물이다.

183
운동은 그저 ‘좋은 일’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이다. 공적인 목적을 위해 물건을 팔고 얼마간 기부를 한다거나, 취미로 좋은 일을 한다거나, 나도 좋고 너도 좋은 일을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오로지 본인이 생각하는 옳음과 정의에 그 삶을 투신하는, 남들이 다 틀리다 말해도 스스로의 기준을 세워 나아가는 숭고한 힘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겹겹이 쌓고 또 쌓아 만들어가는 어떤 길이었다. 그렇기에 운동은 운동으로 남아야 가장 강력하다. 잠시 타협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아니다. 운동에 있어 어떤 전문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신념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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