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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ㅣ Mr. Know 세계문학 26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로저 젤라즈니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아름다운 청년 같은 단편집
책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이 책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잘생긴 청년 같은 책이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은 신들도 질투할 만한 그런 청년 말이다. 그 청년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단단한 몸으로 대지를 뛰어다니다 막 돌아온 홍조 띤 얼굴 같은 글들이 바로 이 소설책의 단편들이다. 무언가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힘이 이 글들에는 담겨져 있다. 건강한 열기, 긴장감, 그리고 이상까지도.
그런 글은 늙은 사람이 써내기에는 어려운 법이다. 그것은 폭발하듯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한꺼번에 태워버릴 작정으로 덤벼드는 젊은이만이 써낼 수 있는 글이다. 나는 노장의 원숙한 글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젊은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이런 글들 쪽이 더 좋다. 게다가 로저 젤라즈니는 젊은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즉 너무 지나쳐서 오히려 모자라느니만 못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이 작가는 젊지만 또 충분히 이미 거장의 풍모 또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손 댈 곳이 없는 청년의 아름다운 몸처럼, 이 책의 소설들도 그들 스스로 이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로저 젤라즈니와 처음 만난 책 <신들의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도 나를 흠뻑 그의 감성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의 초기 소설은 한결같이 힘이 넘치고, 매력적이다. 그 매력의 첫번째 이유라면 그의 탁월한 문장력을 들 수 있겠다. 그는 그 어떤 작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아름답고 신비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문장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끝나서, 글을 빨리 읽어버리는 나 자신을 자책하게 만든다. 그가 사용하는 농담은 우아하다. 그가 그리는 장면 장면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대개 이런 찬사는 본격문학의 거장에게나 어울릴 법한데도, 작가는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가져간다. 그는 청년의 문학을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검은 결코 어린애가 쓰는 목검이 아니라 전문가가 오랜 세월 수련을 통해 얻어낸 진검인 것이다.
그러나 그 힘과 매력은 단순히 그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장면을 배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의 진정한 힘은 오히려 그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에게 있다. 그 인물들에게는 하나같이 숭고함이 깃들어있다. 그 숭고함은 말 그대로 그들의 높은 이상과 그 이상을 위해 정진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나온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처음에는 질주하는 듯한 그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가 나중에 가면 결벽증적일 정도로 윤리적인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주인공들의 그 성격에 매료된다.
살아가며 어깨를 웅크리고 겁쟁이를 자처하는 자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부터 그러하지 않은가. 하지만 적어도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에서 그런 주인공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스스로가 정한 원칙을 밀고 나가려고 한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괴롭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런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오만하게 느끼다가도 나중에는 그 숭고한 인생에 저도 모르게 감동하게 된다. 이제는 한계야, 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순간에도 주인공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결말로 내달린다. 그 가속력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인공의 위대함을 깨달으며 함께 이야기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단편들 모두 그런 인물들을 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편집들 중에서 중심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것들-예를 들자면 <12월의 열쇠>,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프로스트와 베타>등-에서 분명 그러한 오만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젊은 청년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은 결코 내게 멈출 시간을 주지 않고 이 책을 그 자리에서 사도록 만들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인물들을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은 멋모르는 청년의 느낌을 지닌 소설이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방종 대신 아름다움을, 유치함 대신 경건함을 불어넣은 것은 로저 젤라즈니의 문학에 대한 재능과 열정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를 보완하고 더욱 완벽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 비워둔 행간의 하얗고 넓은 바다에서 그가 노래한 위대하지만 오만하고 미천하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영혼들을 상상한다. 그의 소설은 분명히 SF의 범주를 넘어 모든 문학이 앉을 수 있는 가장 영광된 자리에 앉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의 문학은 이토록 나를 가슴 뛰게 만들고, 그리고 상상하게 만드니까. 그러한 독서체험이란 분명히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 이런 행복을 준 작가에게 존경의 장미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