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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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꽤 감명을 받았던지 영화까지도 어렵게 보고 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를 이렇게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결한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만난 이후 나는 언제나 간결한 문장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차이는 있다. 챈들러가 시적인 언어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무덤덤하다. 그리고 그 무덤덤함이 잔인함을 낳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챈들러라면 죽음의 장면에서 행간 사이에 감정을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카시는 그러지 않았다. 행간은 말 그대로 행간. 텅 비어있다. 나는 그 비어있는 틈에 당혹해하며 ‘혹시 다음 문장에는.......’이란 희망을 가지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그의 문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다만 악마 같은 시거가 활보할 뿐. 그것이 잔인함을 낳았다. 그리고 그 텅 빈 행간은 우리를 일깨워준다. 이러한 시선이 낯선 것이 아님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잔인함을. 책에서는 고작 수십 명이 죽는다. 그리고 그것을 잔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천, 수만 명이 죽는 삼국지를 보면서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호쾌하다 생각하면 모를까. 매카시는 교묘하게 우리의 그 ‘텅 빈 시선’을 문체로 끌어들었다. 당혹스럽고 무서운 글이다. 사람이 많이 죽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 죽는 것에 사실은 전혀 슬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누군가가 죽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다.

시거는 악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또한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는 미치광이지만 미치광이가 아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그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시거의 논리에 휩쓸려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에는 시거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우리 스스로 ‘나는 벨 같은 인물이야.’ 혹은 ‘나는 모스 같은 사람이야.’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의 낡은 얼굴에는 벨이나 모스 같은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시거라는 존재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다. 악이라는 것이 가장 무서울 때는, 우리가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이다. 멋대로 저것은 타인이다, 특별한 사람이다, 나와는 다른 존재이다, 라고 정해버린다면 그때부터 악은 두렵지만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만 지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의 악을 투시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를 지워버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거를 두려워한다.

소설은 빠르게 읽힌다. 전반부에 작가의 문체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이다. 종종 내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오히려 문제가 발생할 정도다. 이해도 안 됐으면서 페이지를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이 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나는 내 두려움을 인정하기로 했다. 다시는, 이라는 말은 벨이 자주 쓰는 단어 중 하나다. 다시는 여기서 도망치지 않으리라. 모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돈 가방을 들고 도망쳤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리라. 그 두려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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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스파이 - 성공한 선배들의 대학생활 노하우를 훔쳐라
박광세.조형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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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개발서가 워낙 인기다 보니 보통의 직장인들을 위한 자기개발서가 아닌 조금 다른 특정 독자들을 위한 자기개발서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 책 <드림스파이>도 마찬가지로 직장인이 아닌 대학생을 겨냥해 만들어진 책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꿈을 이루는 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책이다.

 나 역시 고민 많은 대학생활을 벌써 3년째 해오고 있는지라 이 책의 그러한 취지에 금방 눈이 갔다. 사실 대학생에게는 시중에 나와 있는 자기개발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같은 20대라고 해도 직장인과 대학생은 천지차이다. 직장인의 자기개발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 반면 대학생은 그 직업이라는 것을 가지기 위한 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개발이다. 때문에 나도 여러 자기개발서를 읽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망하고야 말았다. 늘 책을 덮으면서 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 잘 알겠는데, 난 당장 직장을 잡는 게 문제라니까! 직장에서 잘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나 <드림스파이>는 그런 ‘강 건너 불구경’하는 독서체험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모든 대학생들에게 필요한 책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학생들의 이미지에 맞추어 나온 책이다. 그리고 책에 실려 있는 실전에 써먹을 만한 여러 기술들도 대학생들에게 와 닿는 예시로 꾸며져 있다.

 다만 책을 읽은 후에 불만을 느꼈다면 일단 과연 이 책이 실제 대학생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 책은 그러니까 2단계에서 읽을 책이다. 자신의 목표를 정한 후에 그 목표를 위해 움직일 때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고 인맥을 쌓고 계획을 세우느냐에 대한 책이다. 물론 책의 전반부에 그런 큰 목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너무 피상적이다. 성공한 선배들, 혹은 앞서 분투하고 있는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는 좋다. 하지만 너무 범위가 좁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내용을 충실하게 했다가는 책 한 권이 아니라 60권 한 질 세트가 나와야 할 테니, 너무나 정형적인 모범 사례 제시는 이해한다. 그러나 분명히 독자들 중 아직 1단계, 즉 목표설정조차 되지 않은 대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에게 이 책은 전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

 두 번째 불만이라면 재미가 별로 없다는 거다. 책도 빈티지하게 예쁘게 꾸며뒀고 저자도 젊은 사람이라 꼭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막상 열어서 읽어보면 전혀 재미있지가 않다. 물론 책, 그것도 이런 자기개발서를 재미로 읽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미있으려고 노력을 한 것 같은데 재미가 없다는 거다. 덕분에 오히려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만 어수선하게 되어버렸다. 차라리 깔끔하게 만드는 편이 읽기에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단점이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괜찮은 책으로 기억하고 싶다. 일단 사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자기개발이 필요하고 또 원하는 대학생들에게 자기개발의 개략적인 그림이라도 그려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이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자기개발의 방법들은 꽤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더 자세한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자기개발서를 읽어야 하겠지만 입문서로서는 훌륭하다. 대학 생활을 어떻게 보낼 것이고, 어떻게 남은 인생을 설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들 생각이 다르겠지만 보통의 회사원이나 사업가로 성장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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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Mr. Know 세계문학 26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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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젤라즈니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아름다운 청년 같은 단편집


 책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이 책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잘생긴 청년 같은 책이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은 신들도 질투할 만한 그런 청년 말이다. 그 청년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단단한 몸으로 대지를 뛰어다니다 막 돌아온 홍조 띤 얼굴 같은 글들이 바로 이 소설책의 단편들이다. 무언가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힘이 이 글들에는 담겨져 있다. 건강한 열기, 긴장감, 그리고 이상까지도.

 그런 글은 늙은 사람이 써내기에는 어려운 법이다. 그것은 폭발하듯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한꺼번에 태워버릴 작정으로 덤벼드는 젊은이만이 써낼 수 있는 글이다. 나는 노장의 원숙한 글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젊은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이런 글들 쪽이 더 좋다. 게다가 로저 젤라즈니는 젊은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즉 너무 지나쳐서 오히려 모자라느니만 못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이 작가는 젊지만 또 충분히 이미 거장의 풍모 또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손 댈 곳이 없는 청년의 아름다운 몸처럼, 이 책의 소설들도 그들 스스로 이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로저 젤라즈니와 처음 만난 책 <신들의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도 나를 흠뻑 그의 감성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의 초기 소설은 한결같이 힘이 넘치고, 매력적이다. 그 매력의 첫번째 이유라면 그의 탁월한 문장력을 들 수 있겠다. 그는 그 어떤 작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아름답고 신비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문장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끝나서, 글을 빨리 읽어버리는 나 자신을 자책하게 만든다. 그가 사용하는 농담은 우아하다. 그가 그리는 장면 장면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대개 이런 찬사는 본격문학의 거장에게나 어울릴 법한데도, 작가는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가져간다. 그는 청년의 문학을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검은 결코 어린애가 쓰는 목검이 아니라 전문가가 오랜 세월 수련을 통해 얻어낸 진검인 것이다.

 그러나 그 힘과 매력은 단순히 그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장면을 배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의 진정한 힘은 오히려 그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에게 있다. 그 인물들에게는 하나같이 숭고함이 깃들어있다. 그 숭고함은 말 그대로 그들의 높은 이상과 그 이상을 위해 정진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나온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처음에는 질주하는 듯한 그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가 나중에 가면 결벽증적일 정도로 윤리적인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주인공들의 그 성격에 매료된다.

 살아가며 어깨를 웅크리고 겁쟁이를 자처하는 자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부터 그러하지 않은가. 하지만 적어도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에서 그런 주인공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스스로가 정한 원칙을 밀고 나가려고 한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괴롭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런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오만하게 느끼다가도 나중에는 그 숭고한 인생에 저도 모르게 감동하게 된다. 이제는 한계야, 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순간에도 주인공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결말로 내달린다. 그 가속력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인공의 위대함을 깨달으며 함께 이야기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단편들 모두 그런 인물들을 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편집들 중에서 중심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것들-예를 들자면 <12월의 열쇠>,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프로스트와 베타>등-에서 분명 그러한 오만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젊은 청년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은 결코 내게 멈출 시간을 주지 않고 이 책을 그 자리에서 사도록 만들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인물들을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은 멋모르는 청년의 느낌을 지닌 소설이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방종 대신 아름다움을, 유치함 대신 경건함을 불어넣은 것은 로저 젤라즈니의 문학에 대한 재능과 열정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를 보완하고 더욱 완벽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 비워둔 행간의 하얗고 넓은 바다에서 그가 노래한 위대하지만 오만하고 미천하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영혼들을 상상한다. 그의 소설은 분명히 SF의 범주를 넘어 모든 문학이 앉을 수 있는 가장 영광된 자리에 앉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의 문학은 이토록 나를 가슴 뛰게 만들고, 그리고 상상하게 만드니까. 그러한 독서체험이란 분명히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 이런 행복을 준 작가에게 존경의 장미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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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둔의 기억 1 - 제1부 저항군, 제1권 수색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고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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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라는 장르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때로 사람들의 편견이 야속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판타지는 싸구려 장르라든지, 마법만 터트리면 다 판타지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심지어 이와 같은 인식은 판타지를 쓰는 사람들에게까지 스며들어, 내가 보기에는 전혀 쓸데가 없는 마법의 주문 따위를 고심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주문의 정교함이 세계관의 정교함을 완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 본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판타지(환상 소설)의 본질이 뭔데? 이 자리를 빌어서 대답하자면, 그건 기적이다. 하지만 명심하고 명심할 것은, 기적이라는 것은 사람이 불과 비바람을 부르거나 물 위를 걷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건 그냥 특수효과일 뿐이다. 판타지의, 문학의 기적이란 인간의 기적이다. 인간의 기적이라는 것은 성장과 사랑이다. 아무 것도 모르던 꼬마가 사랑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안다. 그 순간순간 세계가 그와 함께 변화하고 넓어진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의 기적은 간달프가 마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프로도라는 작고 겁 많은 존재가 세계를 위해 반지 원정대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글쎄. 사람들에 따라 생각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기적이 판타지에 있기 때문에 내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읽어도 진심으로 감동받을 수 있는 거라고. 결국은 판타지도 문학의 한 범주일 뿐이고, 문학의 진실함 없이는 아무런 감동도 줄 수가 없다고.

 그런 나의 기준에서 <이둔의 기억>은 훌륭한 판타지 소설, 아니 그냥 소설로서도 훌륭한 소설이었다. 만약 잭과 빅토리아가 아무런 성장 없이 자신의 정체를 깨달았다면, 독자가 이렇게 깊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을까? 키르타슈와의 삼각관계가 이토록 절절하게 다가왔을까? 그 모든 소설적인 장치가 진실하게 다가올 수 있던 까닭은 이 소설이 종족이나 전설의 무기와는 관계없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잃은 잭의 방황과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빅토리아, 겨우 그 조직을 유지하던 ‘저항군’의 해체와 재조직까지. 그 모든 것들은 이 곳이 판타지의 세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의 인물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이 좌절하는 것은 거대한 마법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 가려 우리 자신이 더 자신의 인간적인 힘에 대해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인물들이 다 변화하고 자라나지만, 특히 소년 소녀들의 성장은 눈부시다. 고집만 부리던 잭이 책임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약하기만 하던 빅토리아가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내고, 차갑던 키르타슈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적인 면을 끄집어낸다. 사랑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하던가. 이 모든 성장이 그들의 사랑과 연관이 있다. 연애와 성장은 그 뿌리가 같은 이복형제쯤 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부분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의 환상적인 은유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로 은유의 형식을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곤 한다. 그것이 판타지의 힘이고, 나는 그 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이 소설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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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공책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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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그 책을 던지면서 고개를 이불에 파묻었다. 무언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삼월 시리즈를 읽으면서 온다 리쿠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생각했다. 물론 <네버랜드>나 <굽어치는 강가에서>는 삼월 시리즈와는 다른, 따뜻한 느낌이 분명 있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따뜻해지다니! 이 작가는 대체 어떻게 글을 쓰는 것이란 말인가! 개인적으로 글을 써본 경험상, 갑자기 이렇게 문체나 글의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도 보통 쉬운 일은 아니다. 보통 작가는 자신에게 낯이 익은 이야기를 자주 쓰는 기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법 아닌가. 하지만 온다 리쿠는 그런 점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녀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멋지게 풀어낸다. 그러니까 그녀는 역시 멋진 이야기꾼이다.

자. 그럼 이번에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삼월 시리즈에서는 악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이번에는 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환한, 태양과도 같은 선함이다. 아직은 모두가 뉴 센츄리에 들떠있던 20세기 초. 어느 마을에 살았던 아름답고 선한, 그래서 너무나 일찍 떠나가 버린 도코노 일족의 아가씨의 이야기. 아름다운 주인공을 선택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어둠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주인공은 삼월 시리즈의 여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르다. 아름답고 선하고 강한, 그러나 또 덧없이 스러져가는 주인공의 삶은 애잔하면서도 딷따뜻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물론 온다 리쿠의 장점이 놀라운 만큼 약점 역시 여전하다. 그녀는 여전히 이야기꾼일 뿐 무언가 묵직한 감동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두고두고 다시 읽고 싶다는 느낌도 없다. 읽을 때에는 정신없이 빠져들지만, 그 뿐. 그러나 만약 또 다른 책이 나온다면 역시나 읽어보고 싶어지는 작가. 이런 매력을 가진 작가는 흔치 않은데, 작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기보다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이건 온다 리쿠의 글이야, 라고.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볼까. 문득 지금 우리도 뉴 센츄리로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 공책>의 주인공들이 설렘과 두려움으로 그 시대를 맞이했던 것처럼 우리도 희망과 불만이 교차하는 시기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다. 일본은 맹목으로 인하여 이웃과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굳이 이 소설의 주제가 그런 쪽이라고 우기고 싶진 않지만, 나는 마지막 ‘나’의 쓸쓸한 물음에 미쓰히코를 대신해 온 몸으로 힘껏 대답해주고 싶어진다. 그래도 우리는 어제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일 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괜찮을거야,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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