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밥헬퍼 > 장석남의 詩-살구를 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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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왼쪽 가슴아래께로 온 통증, 창비시선 204, 창작과 비평사, 2001
살구를 따고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초 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 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올라간 가지 사이사이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져본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한결 높다란 저녁을 맞네
더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 들어본다네
살구를 따서 쥐고는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다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지나간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 되 따서는
들여다보았고 기록해두는 수 밖에는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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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 여섯에 나는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2주간에 걸친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는 제 때에 돌아오지 못할 상황까지 경험하면서 인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도는 컴컴하고 낯설었다. 그러나 이것이 인도가 쉽게 생각하는 낮은 땅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고유한 색깔이 흑빛이었고, 투박했다는 것이었다 .
그런데 나는 그 때의 내 경험을 글로 남겨두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그 기억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기록해 두지 못한 그 날의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다. 그 검고, 텁텁한 땅의 냄새와 거리, 사람들이 말이다.
캘커타 대학 앞에는 포장마차 서점이 즐비하다. 대학가 담장을 끼고 이 작은 포장마차 서점은 저마다 역사를 팔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은 20대의 젋은 학생들이다. 거기서 들은 인도의 역사를 깨알같은 그림글씨로 적어놓은 단행본을 우리가 떡복이 먹듯이 죽치고 앉아 훓어먹고 있었다. 그들은 책을 여유있게 살 수는 없었지만 책을 마음 풀고 읽을 수 있는 자리는 넉넉했다. 요즘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나는 그 때 내 나이 서른 여섯에 그 나이 스물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내 삶의 무게를 재어볼 기회를 가진 셈이었다.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여기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