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스승에게 바칠 수 있는 이 이상의 헌사가 있을까.

  "이 책은 내가 모르는 내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하는 우에노 치즈코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글쓴이 같은 제자를 둔 우에노 치즈코가 부럽기도 하고, 선생님 생각도 난다.

  "아름답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교환되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상품으로서의 인기가 곧 권력인, '고갸루コギャル'로 대표되는 특수한 세계", 연예계에 속해 있던 글쓴이가, "논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보란 듯이 끊임없이 이기는 여성", 우에노 치즈코를 찾아가 깨지고 싸우며 배우는 과정은 일부러 각색하기도 힘든 드라마다. 『취미는 독서』의 저자, 사이토 미나코는 "Bildungsroman"(성장소설, 교양소설)이라고 표현하였다. 적절한 명명이라 여긴다.

  당연히 충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급자 코스와 초보자 코스의 차이가 극명한, "스키장"과도 같은 한국사회의 페미니즘 담론 지형에서, 이와 같은 독특한 화소(話素)를 가진 책이 줄 수 있는 울림이 분명 있다고 생각된다(어떤 코스를 타던 사람이든 나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페미니즘 논쟁사에 관한 배경지식을 갖추어 읽으면 행간을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알라딘 책소개에서도 다뤘는데, 뒤쪽 책날개에 억울하고 분한 말을 듣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싸움을 하는 열 가지 방법'이 잘 간추려져 있다(인용하면서 살을 좀 더 붙였다).


1. '(자신이 소중한 게) 왜 나쁘냐'는 식으로 되받아치자.

2. 반론하거나 변명하기보다 상대방이 아무런 자각 없이 안이하게 쓰는 말이나 표현에 대해 '모르겠다'면서 질문하자.

 - (인용자 주: 돌이켜 보면, 이 기술을 체화하여 적절히 구사하는 이들이 있었다)

3. 상대의 무지를 드러내려면 '○○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자.

4. 질문을 되묻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모순을 드러내고 자멸하게 만들어 완벽하게 이길 수 있다.

5. 전문 분야를 넘어서는 폭넓은 지식을 갖추자.

6. 눈앞의 틀을 의심하고 틀을 깨는 발상을 하자.

7. 말에 민감해지자. 개미구멍 하나가 큰 제방을 무너뜨린다.

8. 공격할 때는 철저하게! 미처 생각할 틈을 주지 말자.

9. 흥분은 방해가 될 뿐!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하자.

10. 고정관념과 싸워 이기고 설득력을 갖추려면 이론이 필요하다. 공부하자.



  일본에서는 2000년에 초판이 나온 뒤 2004년 문고본이 나오기도 전에 2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실은 책 출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제목들로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2000년 12월에 구판이 나왔다가 2001년 9월에 개정되어 절판된 뒤 2016년 9월 새로 발간되면서 이만큼 주목을 받은 것이다. 결국 글쓴이의 책 중 국내에 소개된 것은 한 권인 셈이다.


 



  우에노 치즈코의 저술 목록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시절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내셔널리즘과 젠더』가 필독서처럼 읽혔고, 뒤에 나온 『경계에서 말한다』도 신문 책소개란에 넓은 지면을 차지하여 다뤄지는 등 꽤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학교 서점에 앉아 읽은 기억이 있다). 최근 들어 더 많은 책들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일본어 서적은 뭐, 워낙 많은데 책에 여러 번 인용된 『발정 장치』만 언급하고 나머지는 생략한다(우에노 치즈코는 "남자는 미워하기만 해도 발기하는 생물"이라고 썼다).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에는 여러 학술서가 인용되어 있는데, 참고문헌을 정리한다(책에 인용된 것보다 범위를 조금 넓혔다). 일본어 서적이 알라딘에서는 거의 검색되지 않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묵향 2018-11-05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8 올해의 칼럼이라 할 수 있을 김영민 교수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가 실은 이 책의 싸움하는 법 중 세 번째 기술에 해당한다는 사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9211922005
 


  믿을 만한 출판사가 펴낸 책이고, 1997년 초판에 이어 2009년 개정판까지 낸 책이라 하여 기대를 가졌건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품하게 멋을 낸 문장들이 결국 알맹이 없는 현학의 무한반복처럼 느껴진다.

  풀어쓰지 아니한 생소한 불교 어휘의 숲을 헤쳐 원효의 정수精髓를 가려내자니 피로감이 들 뿐이다. 지은이는 도대체 어떤 이들을 독자로 상정했던 것일까.

  깨달음과 나눔을 생의 두 기둥 삼아 한마음, 큰마음, 넉넉한 마음, 따뜻한 마음, 그리고 중생의 마음으로 매진했던 원효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여러 해설서, 교양서는 두고, 87종 180여 권에 이르는(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위 책 264쪽 각주 88번과 273쪽 이하 원효 저술 목록 참조) 방대한 원효 저술 중 출간되어 있는 것들을 우선 정리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이 율곡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논쟁으로 재현되고, 그것이 인물성 동이논쟁-'호락湖洛논쟁'으로 이어져 실학과 양명학으로 뻗어나간 것에서 보듯, 율곡은 한국유학사의 씨줄과 날줄이 얽히고 엮이는 고갱이이다.

  율곡 사상의 대표 개념 중 하나인 '이기지묘理氣之妙'는 불교와 도가, 양명학과 화담의 기학氣學까지 폭넓게 포용한 율곡 사상의 개방성을 잘 보여준다. 성리학계의 아담 스미스 내지 아마르티아 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플라톤을 낳고, 그 관념주의, 이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적 종합이 새 시대의 철학을 예비한 것처럼, 4대 사화로 인한 혼란과 가치전도는 윤리지상의 주리론적 풍토를 불렀고, 그에 대한 반성이 율곡의 이기조화론, 경세적 실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율곡으로부터 반계磻溪와 성호星湖, 북학파,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가 뻗어 나왔다.


  지은이는 성균관대학교와 충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동준, 유승국, 배종호 선생님을 사사하며, 율곡 철학의 숲과 나무를 섭렵한 분이시다. 1981년 성균관대학교에서 "율곡사상에 관한 연구: 상소문을 중심으로"라는 석사논문을 http://www.riss.kr/link?id=T7833333, 1987년 충남대학교에서 "율곡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이기지묘를 중심으로"라는 박사논문을 쓰셨다 http://www.riss.kr/link?id=T7294525. 이들 논문을 합한 책이 1987년에 나온 『율곡철학연구』이다. 그리고 1998년에 새로이 『율곡사상의 체계적 이해』 두 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셨는데, 1권은 성리학 편, 2권은 경제사상 편이다. 율곡학을 끌어안고 오래 고민하신 분이시라, 대중서인 위 e시대의 절대사상 편도 문장이 충실하다. 율곡학회 회장을 역임하셨다.




  이미 여러 분들의 시도가 있었겠지만, 율곡을 기점 삼아 앞으로는 15세기 김종직에 멀리 여말 정몽주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뒤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까지 가닿는 계보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고픈 생각도 든다. 그래도 한국유학에서 퇴계와 율곡, 다산의 경우는 상황이 좋은 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금 전에 『클래식에 말 걸기』에 대한 아쉬움을 썼는데, 위 책은 젠체하지 않으면서도 짤막한 분량에 다채로운 내용을 빽빽하게 담고 있다. 청소년 도서라고 얕볼 책이 아니다.

  재기발랄한 삽화가 흥미를 더한다.

  역시 책은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써야 하는지, 2000년 1월에 1쇄를 낸 후, 2007년 6월에 23쇄를 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몇 쇄까지 찍고 절판되었는지 모르겠다.


  비슷한 느낌의 어른용(?) 책으로 신동헌의 책들이 있다. 믿고 볼 수 있는 작가다. 이 분은 그림을 직접 그리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악 좀 즐긴다는 이들의 이 집 저 집에 꽂혀 있길래, 헌책방에서 사두었다가 읽어 보았다.

  지적 차이와 그로 인한 구조적 차별의 극복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지식인화를 통하여야 한다고 믿기에, 클래식도 공부하고, 반복 훈련-연습하여야만 친해질 수 있다는 글쓴이의 머리말이 반가웠고,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시중에 넘쳐나는 여느 클래식 입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에피소드 나열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요즘은 포노(Phono) 출판사 등에서 아래과 같이 주옥같은 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국내 서적을 보면 여전히 '요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지?'하며 흔하고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야사野史 경쟁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이론을 전공하셨다는데, 글쓴이만의 음악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통찰 같은 건 발견하기 어려웠고, 제시된 내용 중에는 모르는 이가 읽으면 오해할 만한 서술도 있었다.

  글빨의 문제였는지, 이강숙, 민은기 같은 분들의 (아마도 귀하디 귀한) 지인 찬스 추천사에도 불구하고, 회사나 문화센터 교양강좌에서 다룰 정도의 내용에 그쳤다. 다만, 장과 장 사이 오진국 화백이라는 분의 그림만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밖에 위와 같은 책을 내셨는데, 『클래식 음악계의 낮과 밤』이라는 제목이 당장 솔깃하나, 한 분의 혹평이 마음에 걸린다. 글쓴이의 다른 책을 읽어 본 입장에서 어떤 느낌인지 짚이는 바가 없지 않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응원하고픈 출판사, 포노(PHONO)의 포트폴리오를 점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