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01 파이드로스 / 메논, 플라톤, 천병희 옮김, 숲, 2013
1. 책 읽은 것을 한동안 기록, 정리하지 못하여 올해 몇 권째를 읽었는지 추적하던 것을 놓쳐 버렸다.
요즘은 생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할 일은 많은데, 무엇 하나 마음을 일으켜 시작하고 끝까지 완수해 내는 것이 무척 힘들다. 만사 흥이 나지도 않고 지구력이 많이 떨어졌다. 한마디로 지쳤다.
오랜만에 혼자 보내는 주말이기도 하고, 9월도 되어 플라톤으로 산산이 부서진 쓸쓸한 마음을 달래 본다.
2. 천병희 선생님의 역서를 2015년경부터 한동안 사 모았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선물처럼 남기신 플라톤 전집의 편제를 이제야 들여다 보았다.
아무튼 전에 사둔 책이 있었으므로, 2013년에 나온 구판으로 보았다.
구판에는 전집 2권과 달리 『파이드로스』와 『메논』만 실려 있다.
2002년 여름에 대화편을 처음 읽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고 다시 읽으니 느낌이 또 다르다.
10년 전에는 천병희 선생님의 말랑말랑한 문체가 최선이라고 여겼는데, 딴에는 넓은 의미의 연구 활동에 몸 담고 난 뒤에 보니 아쉬움이 없지 않다.
『파이드로스』와 『메논』은
『프로타고라스』, 『파이돈』, 『국가』, 『향연』 등과 더불어 플라톤의 '중기' 작품으로 분류된다.
천병희 선생님의 소개에 따르면, 『파이드로스』가 '초기' 작품으로 간주된 적도 있는데, 이제는 『국가』보다는 나중에, '후기' 작품에 속하는 『필레보스』보다는 먼저 집필된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이라고 한다.
'초기' 작품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이온』 등이 있고, '후기' 작품에는 『필레보스』 외에도 『소피스트』, 『티마이오스』, 『법률』 같은 것들이 있다.
3. 천병희 선생님의 다른 대화편 번역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바로 곁에 앉은(실제로는 아마도 누워 있었을) "전기가오리" 소크라테스 아저씨가 진짜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당신 말로는 '진짜로 모른다'고 거듭 강조하시지만) 알 수 없는 말투로 조곤조곤 말을 건네고 있다. 읽고 나면 '테스 형'과 무척 친해진 느낌이 든다. 바로 이어서 다른 대화편을 좀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장서 상당 부분이 창고에 들어가 버려서 다시 만날 때까지 한동안은 소피스트들과 어울려야 할 것 같다. 그럼 테스 형(플라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친구여,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자네가 소피스트들에게 빠져 있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가? 소피스트들이 하는 말이 자네에게 무슨 특별한 것을 주기라도 했는가? 자네는 말하는 기술만으로도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마음을 붙들려고 8월부터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는데, 오늘 고해성사 후 미사에 참례하면서 도킨스의 책들만 잔뜩 빼놓고 종교서 대부분을 창고에 넣어버린 것을 후회했다.
4. 참고로, "전기가오리"는 『메논』 80a (구판 162쪽)에 나오는 표현이다.
메논: (...)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지금 나를 마술로 호려 말 그대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시는 것 같아요. 농담을 좀 해도 된다면, 선생님께서는 내가 보기에 외모나 그 밖의 다른 면에서 영락없이 바다에 사는 저 넓적한 전기가오리예요. 전기가오리는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누구든 마비시키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그런 짓을 한 것 같으니까요. 나는 정말로 혼과 입이 마비되어 선생님에게 도무지 대답을 할 수가 없어요.
'정전기'를 발견한 탈레스도 있었지만, '전기'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피뢰침 개발의 기초가 된 1752년 벤저민 프랭클린의 연(鳶, kite) 실험 등으로 정립되었으므로, 플라톤 시절에는 '전기가오리'라는 생물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먼저 영어 번역부터 찾아 보았다. "농담을 좀 해도 된다면" 이하 부분만 인용한다.
Benjamin Jowett (1871 ?)
"And if I may venture to make a jest upon you, you seem to me both in your appearance and in your power over others to be very like the flat torpedo fish, who torpifies those who come near him and touch him, as you have now torpified me, I think. For my soul and my tongue are really torpid, and I do not know how to answer you;"
http://polazzo.com/Plato%20-%20Meno.pdf
G.M.A. Grube (1997 ?)
"Indeed, if a joke is in order, you seem, in appearance and in every other way, to be like the broad torpedo fish, for it too makes anyone who comes close and touches it feel numb, and you now seem to have had that kind of effect on me, for both my mind and my tongue are numb, and I have no answer to give you."
https://commons.princeton.edu/eng574-s23/wp-content/uploads/sites/348/2023/02/Plato-Meno.pdf
J. Holbo & B. Waring (2002)
"In fact, if you don’t mind me turning the whole business into a bit of a joke, on the inside you’re like one of those stingrays that paralyzes everything it touches; you look a bit like one, too – broad and flat. Anyway, now you’ve done it to me; both my mind and my tongue are completely numb. I’ve got no answer to give you."
https://123philosophy.wordpress.com/wp-content/uploads/2018/09/meno.pdf
Cathal Woods (2011-2012)
"You seem to me, if it is possible to joke a little, to be, in appearance and in every way, exactly like the broad electric ray of the sea, for it too numbs anyone who approaches and comes in contact with it, and now you seem to have put me in something like the same state."
https://marom.net.technion.ac.il/files/2018/09/Meno.pdf
과거에는 torpedo fish라고 옮겼는데, Cathal Woods의 최근 번역은 (천병희 선생님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을 써서 electric ray로 옮기고 있다. torpedo는 "어뢰"를 뜻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Καὶ γὰρ δὴ εἴπερ δεῖ καὶ σκώψαντά σε εἰπεῖν, δοκεῖς μοι καὶ τῇ ὄψει καὶ ἄλλῳ παντὶ τρόπῳ ὅμοιος εἶναι τῇ πλατείᾳ νάρκῃ τῇ θαλαττίᾳ. καὶ γὰρ αὕτη τοὺς πλησιάζοντας καὶ ἁπτομένους ναρκᾶν ποιεῖ, καὶ σύ μοι δοκεῖς νυνὶ τοιοῦτόν τι πεποιηκέναι, ναρκᾶν με· καὶ γὰρ τὴν ψυχὴν καὶ τὸ στόμα νενάρκην καὶ οὐκ ἔχω ὅτι ἀποκρίνομαι σοι."
앞의 "넓적한"(flat, broad, πλατείᾳ) 부분은 차치하고,
"전기가오리"(torpedo fish, stringray, electric ray)로 옮겨진 단어는 "νάρκῃ"이고, 이는 [나르키(nárkē)]로 읽는다. "마비", "무감각"을 뜻하는 말로, 현대 영어에서 "narcotic"의 어원이 된 말이다. 뒤에도 "ναρκᾶν" [narkân] (마비시키다), "νενάρκην" [nenárkēn] (마비된) 등 관련된 표현이 쓰였다. 이 점을 살려 torpedo fish, torpify (마비시키다), torpid (마비된 // 무기력한, 활력 없는, 열의 없는)로 번역한 Benjamin Jowett의 번역이 원문에 충실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나저나...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상대방의 면전에서 외모가 "넓적한 전기가오리"를 닮았다고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라도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는 다 어디 갔는가!!
5. 무리수나 √2라는 개념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메논』 82b 이하에서 '정사각형의 면적이 두 배가 되려면 한 변은 몇 배여야 하는가'를 도출하는 노예 소년과의 대화도 무척 흥미로웠다.
6. 또 하나 이전에 찾아보았던 것을 서재에도 갈무리해 둔다.
대화편을 보면, "개" 등에게 걸고 맹세한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예컨대, 『파이드로스』에는 "개에 걸고 맹세하건대"(228b 구판 20쪽)라는 표현이 있고, 『국가』 제9권 592a에도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파이드로스』 236e (구판 38쪽)에서 파이드로스는 "그런데 누구의 이름으로, 어떤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여기 이 플라타너스 나무에 걸고 맹세할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제우스에(게) 맹세코"(『파이드로스』 229c 구판 22쪽, 261a 구판 89쪽, 『메논』 95b 구판 200쪽), "우정의 신인 제우스에게 걸고"(『파이드로스』 234e 구판 33쪽), "헤라에 맹세코"(『파이드로스』 230b 구판 24쪽)와 같이 평범하게(?) 신에게 걸고 맹세한다는 표현도 있다.
이에 관하여 천병희 선생님은 역주 13 (구판 21쪽)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이셨다.
천병희 역주: "당시 그리스인들은 대개 제우스에 걸고 맹세했지만, 맹세할 때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피하려고 플라타너스나 양배추 따위의 식물이라든가 거위, 개, 양 따위의 동물에 걸고 맹세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찾아 보았더니, 천병희 선생님의 위와 같은 설명은 불충분한 것이다.
먼저 Judith Fletcher, Performing Oaths in Classical Greek Dram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희극 작가들"은 웃기려고 위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The comic poets evidently got a laugh by having characters swear by unusual deities or objects. Someone in Eupolis’ Baptai swears by an almond tree (fr. 79 K–A), someone else by cabbages (fr. 84.2 K–A)."
https://assets.cambridge.org/.../9780521762731_excerpt.htm
그런데 Alan H. Sommerstein and Isabelle C. Torrance, Oaths and Swearing in Ancient Greece (De Gruyter, 2014)를 보니, 특히 대화편에서 위와 같은 표현은 천병희 선생님 주석처럼 그리 간단하게 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위 책 111~131쪽에 위와 같은 맹세가 맥락에 따라 맹세의 신성함을 더하는 경우와 더는 경우가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130~131쪽에 결론이 요약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swearing without swearing"이라는 해석이 흥미롭다.
"Socrates’ oath by the dog is deemed light-hearted by some, sacred by others.",
"Socrates’ oath by the dog and the oaths by cabbages. The very fact that there are groups of these oaths demonstrates that they are not context-specific. Oaths by cabbages do not seem to be serious, and it is telling that they appear in comedy or invective. Socrates’ oath by the dog, on the other hand, seems to be a formula of 'swearing without swearing' so to speak, giving the semblance of the force and emphasis conveyed by the oath but without running the risk of divine punishment for falsehood."
https://www.degruyter.com/.../doi/10.1515/9783110227369/html
우리의 학문 저변이 얕아, 어디선가 누군가는 깊이 연구한 이러한 문제들을 대개의 경우 그저 '지식 소매상'들이 전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아쉽다. 그래도 인터넷 덕분에 관심과 의지를 내면 앉은 자리에서 어느 정도는 답을 찾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7. 어제 잘 읽은 『HOW TO READ 데리다』를 비롯하여 정리할 책이 몇 권 더 있지만, 시간을 많이 쓴 터라 오늘 자 '책으로의 도피'는 일단 이 정도로 줄인다. 아래 책은 품절되었지만 옮긴이(변성찬)의 말처럼 아주 훌륭한 개론서이다.
"독자에 따라 데리다로부터의 '출구'는 저자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데리다로의 '입구'로 이끌어주는 세심하고 균형 있는 안내서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