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여 일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야 리뷰를 쓴다.


  이만큼 잘 정리한 책도 드물 것 같아 별점 다섯을 주려다 아무래도 번역과 책 만듦새에 대한 불만을 표시해야 할 것 같아 하나를 깎는다(전자책으로 읽는 동안 오타신고를 많이 했는데 반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 '정론지' 중 하나인 워싱턴포스트에서 서울특파원, 도쿄지국장을 지내고 베이징지국장으로 있는 애나 파이필드는, 수차례 북한 현지 취재와 많은 사람들에 대한 '과감한' 인터뷰를 통하여(취재원들의 안전을 위해 쓰지 못한 내용이 꽤 있다고 보인다), 북한에 관하여 '불량국가'라는 인상 밖에는 별다른 지식이 없을 영어권 독자들을 위한 꽤 친절하고 공정한 르포르타주를 직조해냈다. 오토 웜비어의 죽음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으로 김정은을 알게 된 미국인들이, 조금 더 '진지한' 맥락을 갖고 북한을 볼 수 있게 해줄 안내서 같다.


* 워싱턴포트의 2009년 기사 Andrew Higgins, "Who Will Succeed Kim Jong Il?," Washington Post, July 16, 2009를 볼 수 있는 링크 https://www.other-news.info/2009/07/who-will-succeed-kim-jong-il/

* Anna Fifield, "North Korea’s prisons are as bad as Nazi camps, says judge who survived Auschwitz," Washington Post, December 11, 2017 https://www.washingtonpost.com/world/asia_pacific/north-koreas-prisons-are-as-bad-as-nazi-camps-says-judge-who-survived-auschwitz/2017/12/11/7e79beea-ddc4-11e7-b2e9-8c636f076c76_story.html (토머스 버겐탈 재판관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쪽으로도 관여하신 줄은 몰랐다.)



[밖에서 보면 트럼프에 대한 극성 지지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미국은 정말 지역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바이러스 확산 전까지만 하여도 트럼프 재선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는 분위기였다). DC 근처는, 모르고 마주쳐도 알고 보면 미국이나 자기 나라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많아 정치적 대화를 상당히 자제하는 분위기임에도(동네에서 마주쳐 별 생각 없이 이야기하다 명함을 받고 보면 위키피디아에도 나오는 '가나 소장파 국회의원'인 식이다), 은근한 속내를 보면 트럼프 비판이 '상식' 내지는 적어도 '힙'한 것처럼 되어 일상의 유머와 대화에서도 그런 것이 배어 나오는 경우를 이따금 겪었다(탄핵 정국에서는 좀 달랐지만,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그러나 '적색주'를 가보면 공화당 지지가 '상식'이자 '애국'이고, 트럼프에 대한 열성 지지자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래 지도의 진한 빨간색 주 중 한 곳에서 길게 우버를 탈 일이 있었는데,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게 된 기사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한국 사람들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북한과 미국, 또 남한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은지를 묻고는, 내가 "적어도 북한이라는 특이한 나라에 대해서는 트럼프의 '탑다운' 방식이 먹힐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자신의 트럼프 사랑을 열렬히 커밍아웃한 경우도 있었다(대통령 본인과 그 지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조만간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이라고 제법 진지하게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트럼프 지지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미국인들 가운데는 김정은에 대해서도 묘한 호감을 갖는 경우가 꽤 있다.]

  기자로서, 바꾸어 말해 어떤 면에서는 '외부자'임에도(우리 입장에서는 더욱),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을 우선 잘 연결하고 비어있는 부분을 파헤침으로써 이만한 책을 짜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파이필드 지국장님의 끈질긴 '탐사' 덕분에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다시 보고 깨닫게 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으실 것이다. 김정은의 생애를 썩 구체적으로 따라가볼 수 있다. 풍부한 독자층과 재정적 뒷받침 덕분이겠지만 영미권 저널리즘의 전통이 부러웠다.



(Wikipedia, 2004, 2008, 2012, 2016년 대선 투표 결과. 진한 빨강은 네 번 모두 공화당이 승리한 주들, 연한 붉은색은 세 번, 보라색은 2:2, 연한 파란색은 1:3으로 민주당 우세 주, 진한 파랑은 네 번 모두 민주당이 승리한 주들 https://en.wikipedia.org/wiki/Red_states_and_blue_states


  원제는 "The Great Successor"로, "마지막 계승자"라기보다는 "위대한 계승자" 정도로 옮겼어야 할 제목이다. 사실 이 책은 미국의 DC 인근 반즈앤노블 서점 매대에 너무나 눈에 띄게 나와있어 처음 알게 되었는데(그래서, '어라? 이런 책이 나왔네! 번역은 되어 있나?' 하고 찾아보았던 책이다), 표지 그림과 디자인에서 보는 것처럼 김정은이 실제로 'Great'하다는 의미로 쓴 제목은 아니다(책 결론을 보면 그렇다고 완전히 풍자적 의미로 쓴 것만도 아니다). 그런데 이기동 전 논설위원께서는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려는 현실적 판단에서인지, 개인적 희망을 담아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목을 "마지막 계승자"로 옮기셨다.


[역자께서는 『기본을 지키는 미디어 글쓰기』라는 책을 쓰셨고, 아래와 같이 꽤 많은 책을 옮기셨다. 이기동 님과 출판사 프리뷰의 관계는 정명진 님과 출판사 부글북스의 관계와 유사하지 않나 싶다. 어빙 피셔, 정명진 역, 『화폐 착각』(부글북스, 2016)에 관하여 쓴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1763468 참조. 두 분 모두 기자 출신이신데, 엄밀하게 옮긴 완성도 높은 책을 내는 편보다는 책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는 정도의 번역서를 빨리빨리 내는 데 목표를 두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인상도 든다(기자 특유의 센스가 돋보이는 역어들이 간혹 눈에 띄기는 한다).




여러 책들에 대한 여러 글에서 유사한 불만을 표시하였지만, 『마지막 계승자』도 주석에 대한 관심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으셨다. 예컨대, 4장의 여섯 번째 각주 "Thae Yong-ho, Password from the Third-Floor Se-cretariat (Seoul, Giparang, 2018), 280."에서 Se-cretariat 같은 곳의 하이픈을 전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셨는데 이는 그나마 '사소한 무성의'이다(원서에서 역서 종이책으로, 또 역서 전자책으로 출간되면서 이 부분이 어떤 식으로 고려되었는지, 검토되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더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저 정도면 번역서를 읽는 한국 독자들을 위하여 "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기파랑, 2018)" 정도로 표기하는 작은 노력을 기울여주실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번역서를 신속히 출간하려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출처에 대한 무시와 소홀'은 우리 언론의 고질병처럼도 느껴진다. 기사의 온라인 비중은 점차 높아지고 있고, 외국의 유수 언론사들 가운데 인용한 내용에 링크를 달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우리 언론의 기사들 중에는 거꾸로 링크를 단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기사가 주요 포털을 통해 소비되고 있는 것이나, '개인정보'에 대한 막연한 신성화가 이렇게 경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같은 관행은 기사에 대한 검증을 어렵게 하여 신뢰를 크게 떨어뜨린다. 우리는 진영을 떠나 믿고 읽을 만한 언론을 가질 수 있을까?]


  파이필드 지국장께서는 남북한 문헌을 꽤 많이 인용하셨다. 다음과 같은 책들도 함께 볼 수 있겠다.




  책이 다룬 북한 해커들에 관한 기사 모음.


* Timothy W. Martin, "How North Korea’s Hackers Became Dangerously Good," Wall Street Journal, April 19, 2018 https://www.wsj.com/articles/how-north-koreas-hackers-became-dangerously-good-1524150416

* Patrick Winn, "How North Korean hackers became the world’s greatest bank robbers," Global Post Investigations, May 16, 2018 https://gpinvestigations.pri.org/how-north-korean-hackers-became-the-worlds-greatest-bank-robbers-492a323732a6

* Ju0min Park, James Pearson, "In North Korea, hackers are a handpicked, pampered elite," Reuters, December 5, 2014 https://www.reuters.com/article/us-sony-cybersecurity-northkorea/in-north-korea-hackers-are-a-handpicked-pampered-elite-idUSKCN0JJ08B20141205

* Sam Kim, "Inside North Korea's Hacker Army," Bloomberg Business week, February 7, 2018 https://www.bloomberg.com/news/features/2018-02-07/inside-kim-jong-un-s-hacker-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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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 2023-01-0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한 서평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소중하게 새길 대목이 많아 되풀이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