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자려다 한 해 마지막 날이라 하니 왠지 잠이 오지 않아 가볍게(?) 읽어치울 책을 한 권 빼들었다. 이 분의 놀라운 이력에 흥미를 느껴 산 책이다. 알라딘 평점도 나쁘지 않고. 그런데...


  석좌교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나 보다...

  별의별 이야기를 다 욱여넣으셨다.


  솔깃한 대목도 없지는 않은데 헛웃음이 나오는 뜬금포가 많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국내 대표적 대기업이 밀수를 하다가 탄로나고, 충분히 이익을 내고 있는 기업들이 독성 폐기물을 하천에 방류하다가 발각되는 등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비리들은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인용자 추가: 자, 여기서부터 심호흡)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등 저서를 통해서 인간의 이성을 비판했다. 이성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속성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성이 중요한 만큼, 자본주의 체제 속의 기업에게는 이익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가 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책 145쪽)


  도대체 칸트는 왜 구태여 끌어다 쓰신 건지;;; 게다가 저 두 권이 '인간의 이성을 비판한 책'이라고 요약하면 될 책인지;;; (하지만 아직 『판단력 비판』이 남았으므로 충격받기엔 이르다...)


  이런 문단도 있다.

  "자유경쟁 사회에서는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도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나타나면 패자(loser)가 되어 도태된다. 이는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부조리(不條理, L'absurde)의 하나이다. 실존주의 작가 카뮈(albert Camu)에 따르면, "부조리란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며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을 좌절시키는 세계의 비합리성(irrationalness)"을 말한다. 이런 비합리성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세계는 고뇌하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했으며,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지성인은 패배 속에서 승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지성인의 패배, 지성의 희생은 신(god)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라고 은유적으로 말했다."(책 157쪽)


  부조리하게 동원된 까뮈(Albert Camus), 하이데거, 키르케고르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하지만 칸트 선생님에 비하면 뭐...

  "(...) 칸트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상상력도 자기완성(self-completion) 능력은 없다. 인간이 상상해낸 것이 언제나 실현 가능하고 실제 환경에 부합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그 실현 가능성을 검증받기 위한 '탐색시행'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유로 상상력은 11장의 탐색시행으로 이어진다."(책 208쪽 10장 Intro의 후반부) 


  자, 이제 3대 비판서를 완성시킬 때가 되었다.

  "이런 상상력의 오류는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을 통하여 인간의 판단력을 비판했다. 인간의 상상력도 이런 비판을 받아야 한다. 상상력의 오류가 천동설(天動說)이나 지구 평면설(平面說)처럼 오류 그 자체에 그치면 다행이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류에 치명적인 폐해를 주는 일도 많다. 역사적인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책 232쪽)


  이어지는 '역사적 사례'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잘못된 상상력"이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는데, 히포크라테스의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2천여 년 동안 의료계에서 활용된 방혈요법 때문에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인후염에 걸렸다가 2.5리터 피를 뽑고 이틀만에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례'이다... 상상력으로 가닿기에는 역사적 연대가 너무 떨어져 있는 거 아닌지...


  그 밖에도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웹상에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로 입학하셨다가 1학년을 마치고 물리천문학과로 전과하셨다는 정보와 두 학과 다 학사를 졸업하셨다는 정보가 함께 있는데, 어쨌든 물리학을 전공하시고(전체 수석으로 졸업하셨다 한다ㅎㄷㄷ) 전기공학 박사이신 분답게, 자연과학, 공학 원리도 논거로 많이 활용된다. 이 분 책 중에 제목에 혹해 산, 『계량적 세계관과 사고체계』라는 책도 집에 있는데, 여튼 과학기술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을 만했다.

  다만, 이걸 당신의 경영학 이론에 갖다붙이시는 과정에서 때로는 무리수(교수님처럼 "irrational number"라고 부연해봄) 내지는 유사과학(pseudoscience)스럽게 되어버리는 것은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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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19-01-01 0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고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다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왠지 손이 안가더군요. 혹시 이분이 <니체는 나체다>를 쓴 저자의 스승이 아니실지 ㅋㅋㅋ 여튼 써주신 글을 보니 왠지 이분이 스승이실듯 ㅋ

묵향 2019-01-01 13:50   좋아요 0 | URL
Nykino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니체는 나체다』 리뷰 쓰신 것을 읽어보니, 딱 그 느낌이 맞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책 181쪽 이하에 실제로 ‘나력(裸力, naked strength)‘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도 일관됩니다.

˝(...) 나력의 개념은 인간이 창조한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수에즈 운하 개통을 경축하는 행사에 쓰기 위해 베르디에게 위촉하여 작곡된 오페라 <아이다>는 경축 행사가 끝난 뒤, 즉 옷을 벗은 지 100년이 넘었지만 오늘날까지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격전지 게티즈버그에 국립묘지를 헌정하는 연설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영원히 멸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 행사가 끝난 지 2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력을 유지하고 있다.˝(책 182쪽)

이렇게 떠오르는 대로 읊으시면 나력의 산물 아닌 작품이 없을 것 같은데... (경영학 책들이 대개 그런 면들이 좀 있지만) 10년마다 내신다는 대작으로서는 싱거운 책입니다. 역시 꼭 읽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초란공 2019-01-01 1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려한 이력을 상세히 밝히셨기에 조사하보면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분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부러운건 화려한 이력이기보다 지하 벙커보다 더 두꺼울것 같은 이 자신감/절대무한긍정의 태도라고 할까요. 대부분 무기력하고 우울한 저로서는 ㅋㅋ 내심 배우고 싶은 점입니다. ^^아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묵향 2019-01-01 23:42   좋아요 1 | URL
이전에는 책만 있으면 우울과 무기력을 언제라도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편이었는데, 세상살이가 늘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더라구요~ 윤 교수님도 짧지 않은 세월 중에 그런 시기가 분명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프로폴리스 2019-02-1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사회학 하시는 교수님들은 글쎄요..제가 아는 선에서는 대개가

묵향 2019-02-15 10:14   좋아요 0 | URL
윤석철 교수님은 경영학과 교수님이시지만, 물리학과를 졸업하시고 전기공학 박사시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