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퍼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7
앨리스 워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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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1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한 제목과 작품을 선전하는 출판사의 기대에 찬 마케팅으로 작품을 나름 고민하며 선정해 접했다. 

아무래도 그간 많은 작품을 접하는 과정에서 여러 출판사들이 말도 안되는 작품을 갖고 허울 좋은 

이야기로 독자를 우롱하는 처사에 농락당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나는 웬만한 작품을 고를 때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의 지명도도 따지는 스타일이었는데 해당 출판사는 한 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어 기대에 차 해당 작품을 골랐으며, 아무리 졸작이라도 썩어도 준치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속에 작품을 열었는데.....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이야기를 여기선 적용하고 싶지 않다. 

내가 들인 돈과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다.(국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해외에서 주문해 샀다) 

이게 작품이면 파리도 날아다는 새요, 멸치도 천년 묵은 이무기다! 

출판사는 이야기 할 것이다. 

노예제도의 후유증이 낳은 비극, 흑인들의 숨겨진 삶, 기구한 흑인 자매의 눈물어린 이야기, 흑인

역사의 축소판.....등등으로 독자들에게 변명하려고 할 것이다.

흑백간의 갈등이 사회의 한 축을 이루었던 미국에서 해당 작품이 크게 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지극히 국부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를 침소봉대해 마케팅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른 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귀중한 돈과 시간을 허비한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한국적 환경에서의 독자들에게는 그리 득이 되는 작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절대 돈 주고 사보면 안 된다. 

굳이 읽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작품 후반부에 나와 있는 작품 해설만 잘 읽으면 작품을 다 읽은 

것보다 더 실익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작품을 고를 때 출판사는 물론이고 해당 작품이 나오기까지 노력했던 사람이 누구인지(편집자)도 검색의 대상으로 꼭 포함시켜 앞으로 작품 선정할 때 반드시 참조할 것이고 나를 믿고 내가 추천해 준 작품을 읽는 모든 이들과 관련 정보를 확대해 공유할 것이다.

그런 편집인 만든 것 절대 보지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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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한국학 - 이규태 코너 1
이규태 지음 / 기린원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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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천 권유도 6

이규태 님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나고 즐겁다. 

과거 내가 입사시험을 준비할 때 모 신문에 고정컬럼을 쓰고 계셨는데, 입사 시험을 위해 세상 보는 

안목을 기르고자 해당 신문 - 지금과는 달리 당시 국내 최고의 신문이었다 - 의 사설을 주요 학습

교재로 삼았었는데, 해당 사설은 읽지 않고 선생의 컬럼만 주구장창 읽었던 기억이 난다. 

끝내는 입사시험 토론 시간에 선생이 이야기하신 내용을 근간으로 나름의 논리를 전개해 해당 

회사 입사에 성공했으니 어찌 되었던 성공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 어찌 되었던 나는 해당 작품을 20여년만에 재 읽고 있다 -


- 옛 문헌을 찾아보면 특처(特妻)란 말이 나오는데 특별한 현처(賢妻)가 아니라 아내를 낮춰부르는 

   우처(愚妻)란 뜻이다.

- 칠칠삼득(七七三得)이란 상대방의 세 가지 잘못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일곱가지 나의 잘못을 미리 털어

  놓으라는 뜻이다.

-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어 그로써 야기되는 남들의 공감과 동정에 응석을 부리는 심리를 

  ‘개자추 콤플렉스라 한다

- 미국의 소학교의 지도 기본방침은 일찍부터 패배를 잘해내는 데 버릇들여 회복력이 왕성한 인간으로 

  육성하는 데 교육목적을 둔다.

- 눈물을 의미하는 한자 단어에는 여러 단어가 있는데 누(, 눈물루)는 눈 가장자리에 괴어만 두고 흘려서는 

  안 되는 눈물, ()는 일직선으로 흘러내리는 눈물, 갈려져 흐르되 얼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눈물을 

  ‘()’라고 했으며, 펑펑 흘리는 눈물을 ()라고 했고, 눈물과 콧물을 더불어 흘리는 눈물은 ()’

  했다

- 나폴레옹의 무덤을 가장 많이 찾는 사람은 영국사람이라고 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진짜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 불교의 성직자를 뜻하는 범어의 Samgha를 한문으로 옮길 때 음대로 승가(僧伽)라 했고, 의역으로는 

  ‘()’이라 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중이라 부르지 않고 복()을 일구는 밭이라는 뜻으로 복전(福田)이라

  불렀다고 한다.(계림유사)

- 대만이나 홍콩의 거리에 보면 양복점이나 양장점 간판에 王德忠이란 글자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자칫 

  유명 패션디자이너 이름으로 오인하기 쉬운데 이는 王德忠이란 사람 이름이 아니라 고급맞춤이란 프랑스말

  Haute Couture를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 우리나라 최초로 들어와 불을 밝혔던 전등은 자주 불이 꺼지자 임금님을 얕보는 건달이라 하여 건달불

  이라 불렀다.

- 유감(遺憾)은 원한을 남긴다는 뜻으로, 중국 고전이나 우리나라 고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일본 

  고전에 나오는 일본계 한문으로 보인다. 

  유감은 regret,  사죄까지 바라지 않으나 항의에 가까운 유감은 express concern 그리고 가장 약한 

  유감으로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든지 예의 주시한다든지 할 때는 not indifferent로 쓴다

- 카톨릭에서 말하는 복자(福者)는 특정 지역에 있어 특정 사항에 한해서 신자의 경모(敬慕)를 받는데 비해, 

  성인(聖人)은 교황이 전세계의 교회에 경모할 의무를 장엄하게 선언하고 그 분의 축일9祝日)이 정해지며 

  그분의 이름으로 영세명을 지을 수 있게 된다.

- 덕진풍(德津風)이란 텔리폰의 중구말 발음을 한문화한 것으로 보인다

- 일제강점 시기에 압록강 주변의 벌채권을 강탈한 앞잡이가 당시 블라디보스톡에서 무역상을 하고 있던 

   스위스계 러시아인 '줄리어스 브리너'였는데 그의 후손이 바로 대머리 배우인 '율 브리너'이다

- 정월 보름날 볏짚에다가 벼를 비롯, 그해 농사지을 곡종을 담아 기다란 장대에다 매달고 집 가까이에 

  높이 세워두는 풍슴을 볏가리대라 햐였다.

- 미국 독립 이전에 이미 고려의 인삼장수가 미국에 가 있었다고 한다.

- 집에 불행이 들어는 다섯 개의 통로가 있으는데 이 불행의 통로를 선조들은 오허(五虛)'라 했다. 

  오허를 막는 방법은 그 길목에 나무를 심는 일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택목론(宅木論)이라는 

  독특한 철학이 생겨났다. 

  동쪽에는 복숭아 혹은 버드나무를 오동나무는 북서쪽에 세그루, 대추나무는 외양간 곁에 심어야 했다.

- 어사(御使)의 별칭을 '해치'라 했다. 

- 용(龍)의 둘째 아들을 '치미'라 했다. 큰 기와 건물 용마루 양쪽에 세워두는 장식기와를 망새 또는 치미라 

  하는데 '치미'란 하늘을 나는 솔재의 꼬리란 뜻이다.

- 인도에서 신부의 지참금을 '다우리'라 한다.

- 일설에 의하면 황견이란 노랑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많이 사는 서울 북촌 황자통방에서 잘먹고 

  자란 개를 뜻한다고도 한다.

- 음력 5월 10일(태종우), 7월1일(광해우, 제주), 음력 6월 29일 남강우(진주, 진주성 함락), 음력 6월 보름

  (유두날)은 보통 비가 내린다

- '야다시'란 말은 갑자기 당하는 봉변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 유럽에서는 불길한 날을 '이집트 일'이라고 한다

- 정면만 그럴싸하게 꾸미고 뒤쪽은 형편없게 만든 집을 '라이온 건축'이라 한다.

 -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애완동물로 파리를 키웠고, 장례식까지 치뤄주었다고 한다

- 문화권에 따라 체벌부위가 다르다고 한다. 영미계는 엉덩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라틴 계통은 귀나 코, 

  아프리카 계통은 등짝,  힌두 계통은 이마, 일본은 손바닥, 한국은 종아리다.

- 아이젠하워가 군사령관 때나 대통령 때 어떠한 중요하고 긴 보고도 한 장에 요약하지 않으면 읽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아이크 리포트'라 한다.

- 대감 가마에 앞서 곤봉을 휘두르며 디스코 스텝으로 새를 쫒듯 사람들을 쫓\는 것을 벽제라고 했는데 

  나팔을 불며 앞서가는 근사를 벽제군사라 한다.

- 삼국시대 보편적인 인사법으로 읍(揖)이 있는데 가슴 높이까지 올리는 인사를 토읍(土揖), 입 높이까지 

  올리는 인사를 시읍(時揖) 눈 위까지 올리는 인사를 천읍(天揖)이라 했다. 

- 자기를 기준으로 20세 이상인 사람을 존자(尊者), 10세 위로 형님뻘은 장자(長子), 나이가 약간 많거나 적은

  사람을 적자(敵者), 10세 아래를 소자(小子), 20세 아래를 유자(幼者)라 했다

- 존자가 먼 길을 떠날 때 찾아가는 절을 사(辭),  먼 길을 돌아왔을 때 찾아가 뵙는 것을 견(見0, 경사가 

  있으면 찾아가 절하는 것을 하(賀), 호의를 베풀었을 때 찾아가 절하는 것을 사(謝)라 한다.

- 일본이 만든 일제 영어로 '커닝'이 있다.

  과거 시험을 볼 때 이웃의 답을 보다가 걸리면 눈동자를 굴린다는 뜻의 고반(顧盼), 옆 사람이 듣도록 

  웅얼거리는 것을 음아(吟哦)라는 낙관을 대호지(시험지)에 찍었다. 

- 올림피아 출전 선수의 어머니(카라타치라)가 남자들만 참가할 수 있는 경기에 몰래 들어가 아들이 경기

  모습을 보고싶어 해 트레이너 복장을 하고 들어갔다가 문제가 된 이후부터 올림픽 경기장에 나가는 

  트레이너는 나체로 출장해야 했다. 

- 아카시아는 희랍말로 가시를 뜻하는 '아카'에서 왔는데 이집트 원산과 가짜 아카시라로 불려지는 미국 

  동부 원산 두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가짜 아카시아'다

- 수박이 한국에 들어 온 것은 고려 충렬왕 때로 고려를 배반하고 원나라에 붙어 그 앞잡이가 되어 

  삼별초를 명망시켰던 '홍다구'가 원나라에서 개성에 최초로 옮겨 심었다고 한다.

- 우리나라 운동회는 1896년 서울 혜화동 인근에 있던 영어학교 학생들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 서울 영등포의 문래동은 원래 도림리(道林里)이고, 을지로 통의 옛 이름은 구리개였다. 구리개가 

  약방가가 된 것은 태종 때부터 국립병원에 해당하는 혜민서(惠民署)가 있었기 때문이다.

- 스리랑카를 우리 선조들은 석란(錫蘭) 또는 사자국(獅子國)으로 불렀고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조와(爪哇)라

  불렀다.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 나선(羅禪)으로 불렀고 아메리카는 '미리견(彌利堅)' 혹은 화기국(花旗國)

  이라 했으며  영어발음인 유나이티드 스테이트를 한문발음으로 옮겨 '육나사질국(育奈士迭國)이라 했다. 

  대통령은 영어식 발음인 프레지던트를 한문식으로 옮긴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으로 불렀다.

  범어(梵語)로 강하고 용감하다는 뜻인 '므란마 바마'가 버마란 나라 이름의 뿌리다.

- 북경원인(北京原人)의 학명은 시난트로푸스China가 원형이 되고 있다

  중국의 또 다른 별칭인 지나(支那)’의 어원은 시황제(始皇帝)가 통일했던 ()’에서 비롯된 호칭으로 

  고대 인도말로 된 불경을 한역(漢譯)할 때 지나(支那), 진나(振那), 지나(脂那) 등이 역수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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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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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베트남의 특정 지역에서 고립아닌 고립 생활을 하고 있다. 

오후 8시면 적막강산의 거리를 바라보면서 일종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베트남의 어느 한 지방도시의 밤거리를 바라보면서 딱히 할 거리가 있지를 않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게 독서가 아닌가 생각해 책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여기서 접한 작품이

1) 설국 (가오바타 야스나리) ---지극히 일본적인 작품...개콘의 '유장프'애서 송영길이 이야기했듯이 '그래서?'

                                         라는 느낌이 확드는 작품

2) 세계사를 바꾼 49가지 실수 (빌 포셋) --- 왜 안 좋은지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시간 낭비 우려가 큼

3) 공터에서 (김 X) --- 성석제 스타일의 작품으로 저자의 명성에 약간 벗어난 듯한 느낌

4) 이기적 유전자 (리커드 도킨스) ---아는 이야기를 너무 어렵게 풀고 있고 

5) 그리스 로마의 인간경영학 (토마스 J 피게이라 外) --- 제목과 내용이 별개

6) 평전 제갈공명 (안 XX) ---작품 제목과 내용이 완전 다름

7) 1987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 강추 

등 이었는데, 

상기 작품은 내가 지난 1월 이곳에 업무차 들어오면서 과거 집에서 읽어본 작품으로 다시 읽기(이기적 

유전자와 세계....는 제외)를 희망해 갖고 온 책들이었는데, 솔직히 '이상문학상 작품'과 '본 작품'을 제외하고는

과거 읽을 당시는 몰랐으나 너무나 졸작들이었다는 생각이 크게 든 시간이었다.

(올바른 독서 풍토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상기 2, 5, 6번과 같은 작품은 멀리하는 게 좋을 듯) 

어찌 되었던 작품 개개에 대한 평을 새로이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고 그럴 시간에 다른 행위를 

하는 것이 해당 작품과 작가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 평가를 자제하고 내가 고른 '처절한 정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작품 '처절한 정원'은 길지 않은 내용으로 누구나 한 번쯤 어디서 접해 보았음직한 내용으로 그 이야기 구조와 내용이 눈에 익은듯한 내용으로 책장의 마지막을 덮고 나면 그 감동이 이상하게 오래 지속되거나 문듯문듯 삶의 한 귀탱이에서 나를 또 다른 생각 속에 밀어 넣고는 하는 마력이 있는 그런 작품이다.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작품을 읽으며 '칼레의 시민'이라는 작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해당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알고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여기에 내용을 정리해 보면)


1347년,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다른 해안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덕분에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군에게 대항

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껄끄럽게 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결국 그 말을 

취소하게 된다.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다른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된다. 

오퀴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살다보면 칼레의 시민이 되어야만 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처절한 정원' 속의 전기공이 되어야 하는 

순간도 있을 수 있다. 그 순간이 되었을 때 아무 꺼리낌 없이 나설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얼마 전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가 있었다. 

선거 때만 되면 후보자 모두 칼레의 시민 대표처럼 행동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뽑아놓고 나면 칼레의 

대표는커녕 칼레의 노점상만도 못한 대표가 한 둘이 아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칼레의 시민을 대표로 뽑아 놓았는데 그 자리가 국민의 상전 노릇이나 하는 자리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대표가 많다는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칼레의 대표자처럼 행동해 주기를 또 처절한 정원 속 전기공처럼 

행동해 주길기를 바라면서 지금까지 속아 왔지만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기를 기대해 보면서 우리 손으로 

뽑은 그들이 진정으로 잘 해 주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세월이 흘러 이 작품을 모티브로 '처절한 여의도'라는 작품이 안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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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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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코로나 바이러스로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들어가지도 한 채 울적한 마음에 과거에 읽었던

여러권을 다시 읽어보며 마음을 다 잡고 있다.

지난 2010년 해당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다시 접하다 보니 한마디로 말해 그 소감이 마치

과거에는 뒷동산에 올라 세상을 보는 듯했으나 지금은 약간은 높이가 있는 산에 올라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라는 글로 작품을 읽은 소회를 대신하고자 한다.

과거에 읽을 때는 종교적 마음 가짐도 그다지 틀이 잡혀 있지를 않아 뭐가 뭔지, 의미도, 느낌도

없이 오로지 읽는데만 몰입했었지 않은가 생각된다.

아래의 글은 당시 내가 썼던 독후감으로서 그대로 옮기며 부분적인 수정을 가해 보았다.

해당 작품을 그냥 회심한 어느 인문학자의 종교관에 대한 이야기로 치부하지 말고 딸을 잃은

어느 아버지의 애끓는 심정의 고백론 정도로 이해했으면 한다.

작품을 읽으며 나의 기독교 입문 계기를 뒤돌아보게 만든 작품이다.

내가 기독교에 귀의 너무 거창하겠지만 그래도 귀의는 귀의다 - 입문하게 된 동기를 굳이

들라면 아마도 나의 '아내'와 시인이신 '윤동주 선생'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이유인 '아내'와 관련되어서는 거의 모태 신앙 수준의 종교 생활을 해 오던 나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결혼 초 대개 종교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지닌 남녀가 만나 화합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 입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런 과정을 역시 겪었다.

 

WIFE의 소망은 나와 손잡고 교회에 다니는 게 최고의 소망이었으나 나는 절을 다니시는

어머님과 내가 평소에 막연히 가지고 있던 반 기독교적인 정서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었다

한 여인과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아내라는 여인이 뭔지, 간곡한 아내의 부탁으로 또 아내의

()를 살려주기 위해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고자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출석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윤동주 시인때문이라고 이유를 든 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나름 심오한

가치관에 의한 것이다.

세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길고도 긴 이야기로 개인적인 질문을 해 오면 답을 하고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 교회나 개신교 지도자 분들이 나의 주장을 들으시면 분노하실 수 있겠으나 나는 종교인

- 개신교 - 으로서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상의

소유자다

그것 보다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평소 삶 속에

예수적 삶의 요소를 녹여서 실천하고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지 교회에 다니고 안 다니며

믿는 것이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뭐 저래’, ‘목사가 뭐 저래’, ‘전도사가 어째 저래교회에

다니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또 사랑을 외치면서도 교회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듣고, 보며 살고 있는가

따라서 교회에 다니고, 안 다니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예수적 삶을 평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예수적 삶을 추구하다

보면 우선은 주변과의 소통도 원활해지면서 나아가서는 저절로 절대자와의 소통의 문도

열린다는 게 나의 평소 생각이다

교회에 다니며 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을 보아 왔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기 전에 자신의 요구 사항을 빨리 해결해 달라는 이야기(기도)먼저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데 이것은 큰 문제라고 본다.

우리의 절대자인 하나님이 무슨 큰 채무를 진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것을 이루게 해 달라는

등 끊임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데 이런 기도의 행태는 진정한 교인이라면 시급히 고쳐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딸을 낫게만 해 주면’, ‘손자의 병이 낫게만 해 준다면나머지 여생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인질 협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가를 바라는 식의

기원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보고 있지만 나 역시고 인간인지라 간혹 그런 기도의

유혹에 빠져 종종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는 한다. 늘 반성하고 있다.

 

내가 언젠가 어떤 글에서도 언급했던 사건이지만,

사원시절 회사에서 무주택 사원들에게 분양해 주는 사원 아파트만을 바라보고 임신으로 만삭이

된 아내와 희망에 찬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입주자 명단 발표 며칠 전 회사 규정이 갑자기

바뀌어 당연 입주자로 생각하고 있던 내가 등외로 밀려난 적이 있었다. 입주자 발표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속상함과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대낮부터 술을 먹고 드러누워 사글세 방 귀퉁이에서 신세

한탄하다 잠이 들었는데 어스름한 저녁에 인근 교회의 청년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예수 탄생을

찬미하는 찬송가를 부르고 다녔는데, 우리 집 차례가 되어 이들이 찬송가를 조용히 불렀다.

기쁨과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이다.  

그 찬송가를 듣자마자 잠이 확 달아나 문을 활짝 열고 청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 집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다니며 기도를 했건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냐고,

  시끄러우니 다른 데 가서 찬송가를 부르라

 

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쫒아버린 적이 있었다참 골때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지금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그런 행동이었다.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위와 같은 사건을 비롯해 여러 소소한 사건이 내게 겹치고 또 겹쳐서 일어나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 중에

 

"우리가 하나님이 안 준 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받은 것을 한 번 세어 보세요

 아마 주님께서 안 주신 것보다 여러분께 주신 것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더 이상 주님께 무엇을 구원하는 보챔을 하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이야기해 예전보다는 덜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 나는 자신 있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하나님이 주신

  게 많은지, 안 주신 게 많은지를 세어 보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

단연코 이야기하는 데 주신 게 더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 나는 내가 먼저 간구하는 내용의 기도는 가급적 자제를 하고 있다.

나도 사람인지라 왜 복을 받고 싶지 않겠으며 왜 금전적, 육체적인 쾌적함을 싫어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절대자의 가르침 속에서 평소 생활을 잘하면 그게 바로 ''이고  '행복'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을 주실 분은 '아직 너의 차례가 아니다' 혹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데, 복을 달라고 나를 비롯한 대개의 인간들은 열심히 간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그 기도 시간에 다른 내용을 기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교회에 다니며 아직까지도 신앙심이 신실하지를 못해 나는 신실한 신자의 증표처럼 여겨지는

'방언'이나 '영적 체험'도 뚜렷이 경험해 보지를 못해 신앙심의 깊이를 갖고 이야기할 소재가 별로

없다. 기도 시간이나 구역 모임이라는 데 나가서 다른 신도들이 기도를 하는 것을 보거나 들어

보면 거의 신이 강림한 수준으로 기도들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기도 시간이 길어야 대략 5분을

넘기지 못하는 나의 기도빨은 언제나 초라해 진다.

그러다 보니 구역 모임에 나가는 것 자체가 항시 곤욕이요 난처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의 기도빨이 발휘 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누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믿어 달라고 생떼를 부리지 않겠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할 따름이지만 증명할 수 없기에 나 혼자 생각만 한다.

아마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였을 것이다.

 

사고가 난 후 긴 시간 동안 생존자 소식이 없어 전 국민이 애를 태우던 어느 날 밤으로 기억

되는데, 나는 조용히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신실한 신앙심이 그리 크지 않은 나였기에 웬만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를 않는데 갑자기

'삼풍 백화점' 희생자와 매몰된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폭포수처럼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도를 불같이 한 적이 있었다

- 나도 당시에 왜 그랬는지를 지금도 알 수가 없다 - 우리 가족이나 친척 중에 삼풍 백화점

사건과 관계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나의 그런 불같은 기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날 생존자가 처음으로 한 명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것 말고도 여러 건의 기도빨 사례가 있는데, 누가 증거를 대라고 하면 증거할 수

없으니 답답하지만 뭐 그리 억울하지도 않다. 이런 저런 체험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분명히

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저런 이유와 또 사례를 통한 신의 존재를 믿게 되면서 교회의 둘도 없는 신자

- 그러나 열성 신도는 아니다. 교회나 일부 신도가 잘못하는 모습이나 판단을 할 경우 핏대를

세우며 지적을 하기 때문이다 -가 되었으며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주일과 십일조를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우선은 집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이렇게 되었다.

유태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울리지 마라. 하나님께서 아내의 눈물방울 숫자를 세고 계신다"

 

나는 세상에서 이 말이 제일 무섭다. 그래서 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저자께서 언급하신 말씀 중 가슴에 와 닿는 문구를 살펴 보면

 

[종교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속에 얽매인 끈에서 벗어나 영혼을 해방

시키려는 욕망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차피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정말 튼튼하고 영원한

끈에 끌려다니고 싶다.]

 

비유가 꼭 적절하다고 보여지지는 않으나 성직자의 비리나 부패를 무신론자들이 공격할 때마다

내가 답을 잘 찾지 못함에 단서를 주신 문구는 

 

[부패한 교회, 성직자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사람이

 죽었으니 병이 나도 병원 가지말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나도 열심히 다니지만 오늘날 교회는 정말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가장 큰 문제는 나부터도 그런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목적에 맞게 쓰려고 하는 불경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 한 명이 본인이다.]

 

정말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읽으며 나는 저자께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주제넘은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최근 개신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고,

'헤르만 헤세'라는 석학도 교회의 '이기주의적 성향'에 대한 자기반성을 요구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의 첨탑이 높아질수록 인간들의 죄상은 더욱 더 흉폭해지고 교회의 크기가 대형화되면

될수록 몰지각한 인간들은 더 늘어나고 있는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지도자로서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종교와 종교인으로서의 방향에 대한 말씀을 끊임없이

던져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개신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하고 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는 환경적으로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쓴소리하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 착안하시어 살아 있는 종교, 하나님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 개신교가 될 수 있게

이끌어 주시기바라며 작품에서 언급하셨던 내용 중

 

"부패한 교회, 성직자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사람이

 죽었으니 앞으로 병이 나도 병원가지 말라는 말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교회를

 부정하며 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까지 모두 안고 갈 수 있도록 기독인이라면 모두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수님의 고견을 말씀해 주실 것을 진정으로 건의를 드려

 봅니다.

 

교수님의 작품을 통해 수 년 째 교회를 다니고는 있으나 항시 초심자와도 같은 어수룩한 마음

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와같은 미약한 영성의 소유자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느끼게 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 내가 꽤 오래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잘 썼다는 느낌이 확 든다. 안 그렇습니까?

 

지성인으로서의 말의 향연

- ‘기도는 고공비행을 위한 비상(飛翔)입니다.(P 27)

 

- 죽음보다 강한 것이 창조의 욕망이다.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창조력이다.(P 33)

 

- 메멘토(memento)는 라틴어로 '기억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이고 모리(mori)는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메멘토 모리'라는 부르짖음은 '죽음을 생각하라'로 이는 무신론자들이 외칠

  때 하는 말이다.(P 35)

 

-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라는 것을 알았다.(P 37)

 

- 절망의 언어가 적자라면, 희망의 언어는 흑자.(P 50)

 

- 나는 종교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세속에 얽매인 끈에서 벗어나 영혼을 해방

  시키려는 욕망인 것만은 분명하다.(P 57)

 

- 상상력이란 사물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해부하고 쪼개는 행위이다. 존재의 그 딱딱한 껍질

  안에 잠재해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끄집어 내는 것.(P 61)

 

- 어차피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정말 튼튼하고 영원한 끈에 끌려 다니자.(P 62)

 

- '사랑'은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지만 ''은 조용히 지열처럼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바닥에서

  타오릅니다.(P 73)

 

- 비만은 건강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다.(P 75)

 

- 주기도문의 끝에는 원래 아멘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 기도가 거짓이 아닌 진실

  그대로라는 것을 다짐하고 확신하는 말로 후에 신도들이 그렇게 붙인 것(P 83)

 

- 낙타가 인간처럼 눈물을 흘립니까? 네 흘립니다. 프랑스에는 낙타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아주 이기주의자를 가리키는 욕이라고 합니다.(P 91)

 

-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 리더가 누군가를 이끌어 가려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영혼을 일깨워서 눈물이 솟아나게

  해야 합니다. 눈물이 흘러야 영혼에 무지개가 생깁니(P 94)

 

- 문화(文化)라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준말로서 지도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무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글()의 힘으로 상대방을 다스리는 방법이 곧 문화란 말의

  원 뜻이었습니다.(P 96)

 

- 예술가가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물귀신처럼 남을 자기 대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끌어

  들이는 힘은 있지만 그 곳에서 나와 구제의 높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은 없다.(P 99)

 

- 진정한 리더십은 앞에서도 아니고 뒤에서도 아니다. 그 한복판에서 양을 이끌어가는 양치기가

  진정한 리더이다.(P103)

  

-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라도 우연은 믿을 것이다.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많은

  의미와 행동들 그 우연이 필연이 될 때 하나님과 만난다.(P133)

 

- 글을 쓰는 사람은 생각을 쓰는 사람이다. 생각이 바뀌면 글도 바뀌고 글이 바뀌면 내 생각의

  세계도 업그레이드된다.(P136)

 

- 삶이란 여러 개의 재료가 혼합된 만두 같은 것이어서 통째로 씹어야 맛을 안다.(P142)

 

- 세례 자체가 영적 세계에서의 승리의 삶을 약속하지는 않는다.(P150)

 

- 기적은 목적이 아니다. 이 지상의 진짜 기적은 단 하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다.(P151)

 

-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한다.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한다.(P151,2)

 

-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들다.(P153)

 

-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이다.(P153)

 

- 가족의 사랑과 공경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하는 마지막 고개의 시험을 과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인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 바로 가족주의적 시각에서 본 

  예수님의 행적들이다.(P173)

 

- 혈육의 낡은 가정관을 사랑과 믿음,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확장하고 승화한 것이 예수님의

  가정관이었고 기독교의 가족관이다.(P176)

 

- 땅에서 사는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하늘의 아버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P181)

 

- 빛은 하나인데도 분광작용에 의해서 제가끔 달리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도 문화에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P188)

  

- 회교문화권에서는 돼지고기만이 아니라 개도 금기의 대상이라고 한다.

  이는 마호메트가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개가 짖어 잡힌 적이 있어 악마의 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음치를 놀릴 때 "개처럼 노래한다"라는 속담이 있다.(P189)

 

-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과 같은 핏줄로 북쪽의 왕국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시리라

  인의 공격으로 기원전 721년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그곳

  으로 이주해온 아시리아 이민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불렀다.(P192)

 

-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말보다, 이적을 보이는 것보다도 이 땅에서 최종적으로 보여준

  강력한 소통의 의지요 그 방식이었다.(P198)

 

- 모순과 대립을 결합하여 융합하고 조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이다.(P200)

 

- 죄에 대한 징벌과 사랑에 의한 구원이 모순하는 행위가 하나가 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P205)

 

- 오늘날의 지도자는 십지가와 같이 모순을 융합할 수 있는 톨레랑스(관용)’을 가져야 한다.

  토끼의 피를 혈관에 주사하는 것과 먹는 것의 차이점을 아는가. 즉 죽고,사느냐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먹으면 아무렇지도 않고 나의 피로 변한다.

  죄를 용서하고 나와 다른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관용에서 나오고 그 관용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P206)

 

- 모든 새들이 사람을 피해 먼 곳에 둥지를 틀비만 제비는 인간과 가까운 곳에 둥지를 만드는데

  그 이유는? 잡아먹힐 각오를 하고 제일 가까운 위치에 집을 짓는 제비를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겠는가? 하늘나라의 하나님 집에 굳건한 믿음을 갖고 집을 지어 놓으며 해로운 것들이

  범할 수 없다.(P213)

 

-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P212)

 

- 부패한 교회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죽었으니 앞으로

  병이 나도 병원 가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P216)

 

-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질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P223)

 

-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다.(P225)

 

- 아버지 없는 사회의 비극은 남성의 소외나 주도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인류 모두의 위기를 의미한다.(P229)

  아버지가 아버지 구실을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죄를 짓는 것(P230)

 

- 인간은 구하려고만 하는데 그 분은 계속 버리셨다.(P232)

 

- 맹목의 믿은 보다는 죄인의 회개가 더 중요하다.(P237)

 

- 인간이 풀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은 늘 침묵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풀어야 한다. ,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P240)

 

-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이 맞춰지지 않으면 하나님

  믿지 않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불평을 한다.(P251)

 

- 진정한 회개는 슬퍼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인생을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하나님에게로 것.(P256)

 

- 상황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약속의 말씀, 그 비전들을 가지고 내가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말씀 안에서 살 때 다른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P281) 

-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P297, 로맹 롤랑)

 

- 성서의 말씀을 조각내면 하나도 믿을 게 없지만 전체로 읽고 느끼면 초월적인 영성이 다가온다.

  (P298)   

- 물이든 음식이든 저 밖에 있지만 그걸 먹고 마시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게 임파테이션이다.. 그건 나를 이해하라, 내 메시지를 이해하라 라는 뜻으로 무슨 메시지나

  언어, 음악, 그림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그 신격이 나한테로 들어오고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뜻이다.(P299)

 

-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5차 방정식이다. 그건 영성으로 해야

  한다. 바로 성경이다. 생명의 떡인 성경이다.(P303)

 

- 자신이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열어주지 않는다.(P305)

 

 

[틀린 부분 찾기]

 

1) 91쪽 아래서 4번째 줄 이주 이기주의자” ---> “아주 이기주의자

2) 26613번째 줄 " ......집회를 시작하는 한 번 와 보십시오"

                  -----> "집회를 시작하는 데 한 번 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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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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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 아래와 같은 글 귀가 책을 덮은 지금 이 순간까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세상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 또 지식과 인생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엿보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

 

작품은 생명을 가진 존재 중 인간만이 가진 능력인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이 태어나

어느 시기부터, 어떤 방식으로, 어떤 종류의 매개물을 접해야 효율적인 책 읽기가 의미있고

효율적인 것이 될 것인가에 대한 작품으로 모두가 한 번쯤은 들었음직한 내용도 있었고, 저자와

저자의 지인들(?)을 통해 얻어진 연구 성과를 근거로 우리가 잘 알지 못 했거나 새로운 학설을

기반으로 여러 이야기하고 있는데, 작품을 읽는 내내 이런 류의 작품은 기성세대는 물론 결혼해

첫 아이를 마주하게 될 초보 부모들이 읽을 때 아주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작품을 마주할 때 초반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너무 뇌 과학적, 이론적 내용을 갖고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자칫 무료하거나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페이지를 차츰 넘기며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인 깨달음은 앞 쪽에서 가졌던 그런 우려를 말끔이 제거하기에 충분하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그런 차원을 넘어 좋은 작품이라는 넘어 추천해 주고 싶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이야기해 어떤 학문적 가치나 내용적으로 높은 평판을 받기에는 상당히 역부족이라는 생각

을 갖게하는 작품이었지만 그런대로 해당 분야에서만큼은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코로나로 힘든 이런 시기에 대다수의 많은 분들이 집에서 질낮은 유료 TV에 정신 팔려 희희낙락

대지 마시고 이런 작품을 많이 읽어 지혜로운 삶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우리는 한편

다른 측면으로는 어려운 중소 출판업계를 도와주는 데 한 축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에서

이런 글을 씁니다.

끝으로 나는 해당 출판사 및 번역자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 좋은 독자가 되는 지름길은 없다. 하지만 좋은 독자가 되도록 이끌어주고 유지해주는 삶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회에는 세 가지 삶이 있다. 하나는 지식과 생산의 ’,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 특유의 이해 속에서 나오는 즐기는 삶’, 마지막은 관조의 삶이다.(P 36,7)

- 뇌에 새로운 회로가 필요한 이유는 읽기가 자연적인 젓도, 타고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P 42)

- 뇌는 새로운 뉴런망에 인지적으로나 지각적으로 연결된 기술을 얻기 위해 기존 뉴런망을

  재활용하고 심지어 본래 목적을 재조정하기도 한다.(P 44)

- 능력의 발달을 전담하는 유전자는 없다.

  모든 것은 문화적 발명이며 여기에 뇌 피질의 변화가 뒤따랐을 뿐이다.(P 44)

- 읽기 회로의 청사진이 없다는 것은 해당 언어의 요건과 학습환경에 따라 읽기 회로도 상당히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P 45)

-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에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는

  저자의 지혜가 떠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느낀다.

  (P 69, 마르셀 프루스트)

- 뇌 회로의 형성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결코 저절로 이뤄지지도 않는다(P 72)

- 읽기의 유형에 따라 다중의 복잡한 과정들이 읽는 뇌 회로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

  된다.(P 75)

- 책을 열면 어떤 목소리가 말을 한다. 얼마간 낮선 혹은 반가운 세계가 나타나, 삶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에 관해 독자가 품고 있던 가정을 풍요롭게 해 준다.(P 77)

 

* 영어의 문장의 뜻인 sentence는 생각의 방법을 의미하는 라틴어 sententia에서

유래하였다(P 76)

 

- 타인의 관점과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깊이 읽기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혜택이다.

  (P 79)

- 우리는 읽기를 통해 의식이 바뀌는 차원을 거치면서 좌절과 절망이 무엇인지 혹은 무언의

  느낌에 도취되고 사로잡히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P 82)

- ‘마키아벨리는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대화를 하고싶다는 생각에 시대별로

  저자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갖춰 입곤 했다.(P 83)

- 책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은연 중에 품게 되는 공포와 선입견의 해독제로 작용하고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P 85)

- ‘공감은 타인을 동정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훨씬 더 중요하게는 타인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관계한다.(P 89)

- ‘마음 이론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지각, 분석,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핵심적인 능력을 가리킨다.(P 89)

- 읽는 뇌 안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공감 어린 이해를 통해 우리의 오만과 편견은

  해소될 수 있다.(P 93)

- 우리 내부의 배경 지식은 깊이 읽기를 안정화하는데 필수다.(P 96)

  또한 지식이 진화하려면 계속 배경 지식이 추가되어야 한다.(P 97)

- 새로운 정보를 파악한 후 추론과 비판적 분석을 곁들여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지식

  기반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P 96)

- 주의 깊이 읽어야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해내 지식에 더할 수 있다.(P 96)

- 개념 없이는 생각도 있을 수 없고, 유추 없이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 유추는 생각의 연료이자

  불이다.(P 99,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 유비적(類比的) 사고는 우리가 보는 것과 아는 것(배경 지식)사이에 멋진 다리를 놓아 주고,

  새로운 개념과 가설을 구성하게 한다. 이런 가설은 연역과 귀납같은 추론 능력을 응용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는가 하면, 우리가 관찰하고 추론한 것에 대한 우리 생각을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도와준다.(P 99)

- 과학적 사고의 방법들 중에 어떤 것이 가동되는지를 대체로 읽기의 숙달정도와 읽는 내용에

  달렸다.(P100)

- 읽기, 적어도 모든 깊이 읽기에는 유비적 사고와 추론이 필요하다.(P100)

- 우리가 아는 것이 적을수록 유추를 끌어낼 가능성이나 추론과 분석 능력을 키울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우리의 일반적인 지식을 확장하고 적응할 가능성도 낮아진다.(P101)

- 비판적 사유를 세심하게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다음 세대가 텍스트에서든 스크린에서든

  조작적이고 피상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도록 예방접종을 하는 최선의 방법(P104)

- 가장 깊은 형식의 비판적 분석이란 과거에 열심히 추구했던 사고와 느낌을 최선으로 통합하는

  것을 말한다.(P107)

-  ‘통찰이란 거대한 미지의 지식 저장고인 뇌를 흘깃 바라보는 것이다.

  피질이 자신의 비밀을 나눠주는 것이다.(P107, 조나레너)

- 깊이 읽기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인 인간 능력에 시간을 할애하려면 주의의 질을

  높여야 한다.(P116)

- 고독 속의 소통이 일어나려면 독자의 고요한 눈은 저자와의 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은 정적을 유지해야 한다.(P122)

- 우리의 읽기 회로는 다양한 과정의 합산물로서, 주로 끊임없이 가해지는(혹은 부재하는)

  환경적 요구에 의해 형성된다.(P130) 

- 문자를 다른 사람들은 기억의 도구라 반겼지만

  소크라테스는 망각을 위한 처방이라고 주장하였다.(P131)

- 언어의 미래는 작가들이 어렵게 얻은 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단어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과 함께, 독자들도 그에 맞춰 최선의 사고를 읽으려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것과 연결돼 있다.(P136)

- 다양성은 우리 종()의 발전은 물론, 우리가 사는 상호 연결된 지구상의 삶의 질, 나아가

  우리의 생존까지 증진합니다.(P137)

- ‘무료함이란 경험의 알을 부화하는 끔의 새.(P172, 발터 벤야민)

- 동일한 이야기를 인쇄물로 읽느냐, 스크린으로 읽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독해력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디지털 읽기를 선호하지만 자신이 읽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인쇄물이 더 나았다.(P180)

- ‘비유란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대단히 개념적인 연결이다.(P186)

- 영화 아폴로 13’이나 마션에서 주인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자신의 지식

  있었기 때문이다.(P187)

- 청소년들이 외부의 지식원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 지적 발달이 방해를 받는다.(P188)

- 인간이 언어를 학습하기 위한 결정적인 조건은 공동관심이다.(P199)

-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를 다중적인 표상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 표상들이 개념과 언어 발달의 소재가 된다.(P201)

- 두 살 이전에 아이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상호접촉, 그리고 책과 인쇄물과의 물리적인 접촉은

  구어와 문어, 내면화된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최선의 진입로이자 미래의 읽기 회로를 구축할

  벽돌이다.(P207)

- 어린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살아가는 동안 비숫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전략을 세우도록 도와준다.(P209)

- 전문가인 저자는 낮에는 아이 스스로 주도하는 놀이와 인간적인 접촉에 시간을 내어주고

  밤에는 주로 이야기를 읽어주거나 종이책을 보게 하라고 권한다.(P217)

- 아이에게 책이나 이야기를 전부 읽어 줄 필요가 없고, 아이마다 각자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과 속도로만 읽어주는 것이 좋으며, 유아에게는 몇 단어만 들어가 있는 그림책도 효과가

  좋다.(P224)

- 4학년 시기는 미래의 학습력을 좌우한다.(P231)

- 미국의 모든 주에 있는 교정국들이 3~4학년생의 읽기 능력 통계를 토대로 장래에 필요한

  교도소 침상 수를 예측한다.(P231)

- 양손잡이 읽기(두 가지 읽기 능력을 모두 갖춘)뇌를 개발하는 것이 좋다.(P255)

  이유는 이중언어 학습자는 단일언어 학습자보다 언어적 유연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 5세부터 10세까지의 아이들에게는 시간을 들이면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계속 불어 넣어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손을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주면 토끼보다는 달팽이에

  가까운 속도로 자신의 생각을 탐구하도록 이끌 수 있다.(P260)

- 아이가 스크린으로 읽기를 시작하자마자 반대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읽기는 속도가 아니라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P264)

- 우리가 반성적 능력을 점점 잃어가는 것은 끊임없이 효율성을 요구하는 환경에서 나오는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다.(P286)

-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법을 돌아보는 능력을 점점 잃어간다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사고하는지 냉정하게 살펴보는 능력 또한 잃게 될 것이다.(P296)

- 일부 사람들의 권력은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P297)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다양한 견해들의 표출이 아니다. 모든 시민이 지적 능력을 발휘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도록 교육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위협이다.(P298)

- 21세기에 우리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집단적 양심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깊이 읽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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