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직간
이이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9

 

조직과 군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공직을 맡지마라

 

작품은 율곡 이이가 어린 제왕(선조 임금)에게 군주로서의 기본자세에 대해 제언하고 있는

두 개의 작품 즉, <동호문답(東湖問答)><만언봉사(萬言封事)>의 내용에 대해 풀이한

내용이다.

알고 있는 바와같이 동호문답은 중국과 조선의 역대 임금과 신하, 그들이 겪은 정치적

성공과 실패의 예를 살펴보고, 당대 정치 제도의 폐단과 개선방향을 논하는 내용이며

만언봉사는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나자 선조가 제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린 데 대해

율곡이 올린 상소로 동호문답에 비해 제도의 폐단이 상세히 언급되면서 대안도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특징이 있다.(소새글 작품에서 일부 발췌)

따라서 본 작품 중 특정 부분을 발췌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논하거나 율곡 선생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그 깊이를 논하는 것은 역사학자나 사학자들이 할 몫이고 평범한 범부인 내가

할 소임은 읽고 느낀 점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수준에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는 것이 바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동호문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사전

  지식이 있지 않고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

아무튼 상기 두 문건은 율곡의 정치 개혁론이 요약적으로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로 조선

후기의 경세 사상가들은 이를 자신들의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한다.

 

작품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는 작품 서두에 본 작품을 통해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상황과 비교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 정치 개혁에 시기를 탓하지 마라

   2) 정치가들은 무사안일에 젖어 나라를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고 있다

   3) 정치가들이 몸을 사리며 눈치만 보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려 않고 있다

   4) 인재를 힘들게 뽑아 놓고도 전폭적으로 신뢰를 하지 않고 있다

   5) 관료집단의 무능력과 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6) 최소한의 생계가 해결된 다음, 도덕적인 시민과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7) 좋은 정치란 부모가 자신을 돌보듯이 하는 정치다

   8) 통치 지도자의 엄정함은 공정함에서 나온다

   9)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이 좋은 정치의 시작이다

  10) 교사의 처우개선과 교사직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루어져야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다

  11) 지도자는 측근은 경계하고 올곧은 관료를 가까이 해야 한다

  12) 간신을 경계하라

  13) 공직을 파고 사는 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14) 정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제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15) 정치인은 언제나 비방을 받는다. 옳은 일이라면 소신을 가지고 비방에 흔들리자 마라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구구절절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작품 전체를 집필하면서 저자 나름대로의 소회를 적은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자 한다.

분명하게 드는 생각은 오늘날과 같이 정치, 경제적으로 혼돈과 혼란의 깊이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작금, 우리에게 사회의 변신과 개혁을 위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율곡 선생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변화를 외칠 수 있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의 위정자들은 한심한 계파 싸움과 당리당략의 울타리

안에서 영역 싸움만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생각할만큼 직언을 할 용기가 없다면 그 자리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비난받지 않는다면 많을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

 을 만족시킬 수 는 없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백악관 비서실장과 두 번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럼즈펠드

이야기인데, 이 시대 이 땅에서 이런 용기를 갖고 우리의 지도자를 보필하고 있는 인물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 독서의 시간이었다.

 

[동호문답(東湖問答)]

- 군주의 명철함은 바른 견해를 가졌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지 총명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아니다.

- 큰일을 할 임금은 존경하고 신임하는 신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지위에 걸맞는 임금과 재상이 있으면 그런 때가 곧 이상적인 통치가 실현될 수 있는

   시대이다.

-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그렇지 않음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 간사한 신하를 변별해내는 방법에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보다 좋은 것이 없고

   어진 신하를 알아보는 방법에는 공정한 마음(公心)’을 갖는 것보다 좋은 수가 없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과 공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모두 욕망을 적게 하는 것(寡慾)’

   에서 시작한다.

- 형벌은 후손에게 미치지 않게 하고 포상은 후세에 미치도록 하라

-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에 궁함이 있으면 성왕의 법제라도 고쳐야 한다

 

[만언봉사(萬言封事)]

- 사람이 성실함이 없으면 어떤 일도 안 된다(자사, 子思)

- 지극한 성실로 임하는데도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맹자, 孟子)

-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덕을 높은 가치로 여기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높은

   가치로 여긴다(소옹, 邵雍)

- 임금의 자기수양 중 성학을 열심히 배워 성의와 정심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낸다것은

   큰 뜻을 세웠다고 해도 반드시 배움으로 그것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안과 밖이 서로 의존하고 도와서 품은 큰 뜻에 실제가

   위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학문하는 방법은 성인의 가르침 속에 주어져 있는 데 요약

   하면 크게 세 가지로 궁리(窮理,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것)‘, ’거경(居敬, 경건함에 머무

   는 것)‘, ’역행(力行, 도덕 원칙을 힘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궁리는 반드시 독서를 통해 밝게 이해하고 옛 역사를 조사해 검증하는 것이며

   거경 은 마음을 다잡을 때는 반드시 경계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역행 은 끊임없이 힘쓰며 밤낮으로 게으르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 정치 지도자는 엄정해질 필요가 있는데, 그 엄정함은 외적인 모습보다는 공정함, 명료한

   상황 판단에서 나온다.

- 임금(지도자)은 엄한 것인지 아닌지를 걱정하지 말고 공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걱정

   하여야 합니다. 공정하면 사리가 분명하게 되고, 사리가 분명하게 이해되면 엄함이

   그 속에 있다.

- 조선시대에도 최고 통치자의 비자금과 그것을 관리하는 관원이 있었는데, 비자금은

   내수사(內需司)’라는 국가기관에서 관리했다

    내수사는 하나의 관아이지만 관리인이 조정 신료가 아닌 환관으로 구성되었고,

    내수사에 관한 공무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환관이 임금에게 직계하는 형태로 운영

    되었다. 내수사 노비는 왕실이 소유한 농장을 경작하거나 공물을 납부하는 일을 했는데

    그들은 상전이 왕실이라는 점에서 일반 공노비나 사노비보다 실제적으로 높은 지위와

    권한을 누렸다. 특히 내수 혁파론의 주된 내용은 내수사의 고리대 운영에 관한

    것이었다.

    '환관'의 주요 업무는 궁궐의 음식을 감독하거나 주방, , , 왕실의 농토, 내수사를

    관리하거나 창고나 문을 지키고 왕명을 출납하는 일 등이었는데 그 중 왕명의 출납을

    맡은 환관을 승전색(承傳色)이라 하였다. 환관은 님금의 비자금을 관리해줄 뿐만

    아니라 정치에 개입할 정도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혁파의 대상이 되지만 내수사와 환관이 갖는 공통점이 임금의 사적인 영역인 관계로

    개혁의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율곡은 가장 공적이어야 할 임금이 사적인 재물,

    사적인 하인을 갖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작품을 덮으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식적 사항을 사주하거나 행동을 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지적하고,

질타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디 한 두 개이겠는가,

앞을 봐도 답답한 마음이요 뒤를 보아도 깜깜한 그런 절벽인 상황인데 말이다.

그런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우리 회사와 조직을 위해

율곡 선생께서 피를 쏟는 심정으로 올린 내용을 근간으로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췌해 이를 응용하여 회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부 전개를 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내가 근무했던 중소기업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20여명 있는데 그들

은 한결같이 나를 향해 외치는 말은 항상 고맙습니’, ‘감사합니다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마음으로 다가갔고, 그들을 자국인과 동일

하게 대우해 주었을 뿐이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그들의 부모나 형제같이 행동하고

그들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해 주었을 뿐이다.

그랬더니 품질의 안정화는 물론 생산성과 직원들간의 단합이 그 어느 때보다 돈돈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계약이 만료되어 한국을 떠나게 된 외국인 근로자가 나를 찾아와 그들 전통 방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었다.

그 직원이 떠나며 한국인 특히 나에 대한 인간적인 정과 함께 한국 사람이 참 좋다는 것을

확인하고 떠난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왔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 땅의 위정자들이여 제발 정신차리고 국민의 심정을 헤아리는 그런 정치를 하소서!!!

그것도 싫으면 나 정도만이라도 해 보시라!!!!!!

그럼 최소한 욕은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요???

 

작품을 읽으며 올바른 신하참 신하의 길에 대해 여러 문헌과 자료를 찾아 작품과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내용 두 가지를 첨부해 본다.

중국 전한시대에 유향(劉向)’이라는 학자가 바른 신하와 나쁜 신하를 각각 여섯 가지로

구분한 육정육사(六正六邪)라는 지침이 있는데,

  

[바른 신하]

   - 앞일을 헤아려 군주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유도하는 성신(聖臣)

   - 좋은 계획을 진언하고 옳은 길로 가도록 보필하는 양신(良臣)

   - 어진 사람을 적극 추천하는 충신(忠臣)

   - 일을 잘 처리해 군주를 편안하게 하는 지신(智臣)

   - 원칙을 존중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정신(貞臣)

   -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하는 직신(直臣)

 

[나쁜 신하]

   - 녹을 탐하고 지위에 안주하는 구신(具伸)

   - 아첨을 일삼는 유신(諛臣)

   - 겉과 속이 달라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간신(奸臣)

   - 남을 참소해 분열을 일으키는 참신(讒臣)

   - 개인적 이익만 추구하는 적신(賊臣)

   - 군주의 혜안을 가려 나라를 망치는 망국신(亡國臣)

 

순자(荀子)신하의 길을 다섯 가지로 나누었는데,

   1) : 명령을 따르고 군주를 이롭게 한다. 현군 아래 현신이 있는 경우로 올바른

                지시를 올바르게 잘 따르니 매사 순조롭다.

   ​2) : 명령을 거스르며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무조건적 충성이 아니다.

   ​​3) : 명령을 따르는데 군주를 이롭게 하지 못하며 군주의 잘못을 눈 감는 것.

   ​4) : 명령을 거슬러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한다.

   5) 국적國賊 : 군주의 명예나 치욕, 나라의 흥망에 관심없고 구차하게 영합해 녹봉이나

                       받는다.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

 

- 동호(東湖)란 조선의 유망한 젊은 문신들이 왕으로부터 사가독서를 받아서 책을

   읽으며 학문을 정진하던 곳 

- 겸선(兼善) 모든 사람을 선하게 함

- () 벼슬의 유무와 상관없이 도학에 종사하는 사람

- 자수(自守) 행동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킨다

- 우활(迂闊) 뜻이 지극히 높지만 현실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일 정도로 숨기는 것이 없고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교제를 말함

- 늠양(廩養) 관리에게 봉급을 주는 양속

- 하재(下齋) 성균관에 있던 학생 기숙사로 서재(西齋)라고도 함

- 나직법(羅織法) 없는 죄를 만들어 내어 무고한 자를 처벌하는 법

- ‘재이란 하늘이 내린 재앙이나 괴의한 일로써 천재지변과는 다르다.

   피전감선(避殿減膳)이란 임금이 재이를 당했을 때 근심하는 뜻으로 궁궐을 떠나

   더 누추한 곳에 거처하고 임금님의 밥상의 가지수를 줄이는 것

- 조등(刁蹬) 간계를 써서 공납 물품의 시세를 크게 올리는 것

- 채수(債帥)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사서 장군이 된 사람

- 척간(擲姦) 부정이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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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 - 오천 년 역사 속에서 얻은 선현들의 가르침
리슈에청 지음, 이지은 옮김 / 미래북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7

 

작품을 읽으며 일과가 끝나면 자신의 방에 들어가 아무도 안 만나고 오로지 인터넷과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소통하신다는 그 분께서 이런 책을 더 많이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분을 입만 열면 욕하고 폄하하며 비아냥거리는 인물들, 자신들은 뭐가 그리도 엄청 

잘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국민 대다수가 볼 때는 그 밥에 그 나물인 듯한데 요새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그 분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꼴과 말투를 보면 마치 조선시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넘어졌던 송시열과 그 일파들이 살아 돌아온듯한 느낌을 크게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엎지러진 일에 대해 모든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국가의 책임감 있는 리더로서의 기본

수습 방안 제시는 뒷전이고 오로지 권력자를 그냥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데에만 전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수습 방안 같은 것에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집권욕에 불타 

불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 작태만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늘같이 떠받들었던 리더가 극단의 행동으로 치달을 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해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던 문제적 인물과 그 똘마니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왕권의 정통성 문제가 걸린 체이부정복제 문제로 조선시대의 한 때를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던 송시열과 

그 일파가 생각났고, 계엄령 운운하며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을 여과 없이 그대로 떠드는 인물과 

그런 인물을 옆에서 부추기는 하수인들을 보면 이 역시국정 농단으로 한 시대를 장식했던

문정왕후윤원형일파가 생각났으며, 말의 화려한 성찬으로 국민과 사회를 헷갈리게 하는 

전과자 아저씨를 보고 있노라면 추후에 부관참시까지 당한 한명회라는 인물이 생각나는 그런 

시간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저들은 왜 그리도 모를까?

 

본 작품을 통해 그런 위정자들 모두가 정화되고 생각의 깊이를 높여서 우리 국민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그런 리더들이 되었으면 한다.

이와는 별도로 이참에 뭔가 해보려는 곁가지 잠룡으로 위장한 지렁이 무리들은 제발 자신들의 

본분을 좀 더 잘 알았으면 한다. 서울 시민이 뽑아 줄 때 여기저기 표나오는 장소에 가서 인기 

영합적 발언하라고 뽑아 준 게 아님에도 살수차 물이 어떻고, 식수 단수를 어찌한다고 똥폼 

잡으라고 뽑아 준 것이 아님에도 또 외국에 나라일 상의하러 출장가서 우리 리더의 문제를 

고자질한다고 해서 본인들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데 왜 그리도 저급한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요즘 벌어지고 있는 여러 위정자들의 행태를 보면 누구든 죄 없는 자들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절실히 생각나는 오늘이다.

이런 저런 모습을 접하면서 나는 정신 차려 이 친구야....’라는 어느 노랫말 가사가 생각

나는 그런 나날들이다.


[작품을 통해 본 되새김이 필요한 문구들]


-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아량은 성공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

- 신뢰는 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입에 올리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키면 된다

- 솔직함이 곧 자신의 모든 생각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다는 뜻은 아니다.

  솔직할수록 'TPO(시간, 장소, 상황)‘을 따져야 한다

- 공손함은 개인이 지닌 인격적 소양이자, 상대의 존중을 부르는 주문.

- 다름 아닌 자신에게 전력을 다하고 충실하라. 자기를 내버려두고 남의 일에 정신팔려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다.(공자)

- 오만하지 않아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고, 교만하지 않아야 위엄을 세울 수

  있다.(제갈량)

- 인애로운 사람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예의 바른 사람은 사람을 존중한다.(맹자)

- 구하라, 그리하면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구하기만 한다면 얻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중국 격언)

- 남의 선한 것을 보면 나의 선을 찾고, 남의 악한 것을 보면 나의 악을 찾아라 그와 같이 하면 

  바야흐로 유익이 있다.(性理書)

- 작은 것을 보면 큰 것을 알 수 있고, 처음을 알면 끝을 알 수 있다.(한비)

- 리더는 상대의 진정한 동기를 간파하는 동시에 세속적인 관점을 배제한 채 사람을 대하라.

- 누군가 지금 나를 깍듯이 대한다고 해서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오직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만 지혜가 밝아지는 법이며 지혜가 밝은 사람만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법이다. 이 둘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중국 격언)

-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관용임.

- 진정한 의미의 안목은, 나와 정반대에 있는 경쟁자에ㅔ게서 장점을 찾아낼 수 있는 힘

- 능력이 뛰어난 자가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잘 버티는 자가 승리함.

- 영원히 행복으로 가득한 인생이 없듯, 평생 불행으로 점철된 삶도 없다.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

- Q 정신은 자신이 직면한 위기와 불안, 실패를 알고도 그것을 이겨내려 하지 않고 자기 위안에   빠져 그 속에서 위안과 만조글 얻은 채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심리다.

- 아는 것보다 힘써야 할 것은, 당연히 무엇에 힘써야 할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급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물에는 먼저와 나중,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구별이 있고 아는 것보다는 

  행하는 것이 먼저다.(맹자)

-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사회를 미워할 바에야 자신의 재능을 입증할 수 있도록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 성공한 삶의 노하우는 자신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큰 성공을 거둔 인물들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발휘한 인물들이며 이러한 강점을 이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 성공하려면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닥치는 대로 버리고 비운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비우기에도 목적을 지녀야 하고 채우는 

  것 역시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우유부단하고 망설이는 사람이다

  성격은 운명을 결정한다.

- 예로부터 자신을 낮추는 마음가짐은 군자, 나아가 성공한 사람이 갖춰야 할 도덕적 소양 중 

  하나였다.

- 다투자 않는 마음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원칙, 소신을 가지고 

  ‘만족함을 아는 범위안에서 실제 여건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업무관계를 조율하는 것이다.

- 나무는 나뭇가지가 벗겨지는 걸 두려워하고, 사람은 사기가 높아지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

- 자기가 나서고 싶으면 먼저 남을 내세워 주고 자기가 발전하고 싶으면 남을 먼저 발전시켜 

  준다. 이것이 인자(仁者)의 태도이다.

- 느리게 성장한다고 걱정하지 말고, 오직 멈춰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중국 속담)

- 남에게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은 포백(布帛, 베와 비단)보다도 따뜻하고, 남을 상처 입히는 말은 

  포격(砲擊, 창으로 찌르는 것)보다도 깊다.(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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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한몽관계사
김운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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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천권유도  9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몽고의 침입에 대해 배울 때 고려와 고려인들은 무수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적개심으로 불타올랐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우리의 삼별초들은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충성스러운

애국 집단인줄만 알고 살아왔기에 대학시절 독일 모 팝 그룹이 불렀던 칭기스칸이라는

팝송이 우리 주변에 마구 흘러나올 때 우리의 역사가 한 때 칭기즈칸에 의해 얼마나 능욕

당했는데 이런 노래를 즐겨 듣느냐고 한탄하면서

이런 노래는 반드시 금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외쳤었다.

세월이 더 많이 흘러 다문화 가족이 생기며 몽골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괜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서 우리를 괴롭힌 후손들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바라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내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더 많은 연구와 자료조사가 밑바탕이 된

작품을 읽어 보아야 알겠지만 몽골인과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크게 들게    한 작품이었다.

반면에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우리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혼란스런 순간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작품에서 저자께서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몽골을 오랑캐로 치부하려는 심리가 있으며

 이런 현상은 이성계정도전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이들의 책임이 크다]

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역시 관련 역사서를 많이 섭렵해 보지 않고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인 것은 사실이나 여러 역사적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저자의 그

주장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추론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이번 기회를 통해 지속해서 여러 역사적 사료에 나타난 고려와 몽골간의 특수한

관계성을 심도 있게 엿볼 생각이다.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라 할지라도 진정성을 지닌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더 이런 생각을 갖게 해 준 인물은 바다 건너 툭하면

도발적 발언으로 우리의 속을 뒤집어 놓는 아베 존마니 색히때문이다.

 

[몽골 설화 할흐곰솔에 나타난 고려]

설화에 보면 고리(코리) 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몽골 전문가들

코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쪽으로 가서 고구려 칸이 되었다라고 한다.

, ‘까오리 또는 코리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되어 한반도에는 부여, 고구려가 몽골은

대초원에서 몽골족이 나왔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코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가서 부여,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몽골과의 첫 만남과 위상]

고려군과 몽골군의 첫 만남은 121812월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격퇴하기 위해 연합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몽골과 고려 사이에는 깊은 우정이 싹트게 된다.

, 이 만남에서 이루어진 형제의 맹약은 고려측의 김취려와 조충() 장군이 몽골 측에서

는 카치온(동생) 장군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려에 남다른 사랑을 보인 대표적인 원나라의

인물은 황제인 세조 쿠빌라이칸이며 고려사를 보면 고려는 몽골 전체 종친 서열 4위에서

7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세조 쿠빌라이칸이 죽은 후 장례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허용되었다고 할 정도로 높은 위상을 지닌 국가였다

원나라는 점령국의 종교와 문화를 보호해 주고 철저히 능력에 따라 등용하는 사해평등

주의에 입각한 나라였는데 같은 점령국이었지만 남송인들에게 매우 각박했던 반면,

고려와는 형제 관계를 맺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몽고(원나라)에 바쳐진 공녀가 무수히 많다]

- ‘고려사절요에 근거한 결과, ‘공녀는 충렬왕 때 몰려 있고 고려 원종13년부터 공민왕

3년까지 총 82년간 원나라에 공녀로 받쳐진 여인들의 수는 공식적으로는 713명이라 한다.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1274년부터 1276년까지 3년간 송출된 공녀의 수가 전체의 91%

이고 이후 80여 년간은 매년 1~2명씩만 공녀로 차출되었다고 한다.

- 공녀는 원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명나라 시대에도 총 12회에 걸쳐 공녀를 요구해

146명이 공출되었는데 중종대에 이르러 조선은 명나라에 공녀 공출 금지를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결혼동맹]

몽고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그들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유독 고려만은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 외에 원나라가 전쟁을 치르고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으로

삼은 경우는 없었다.

특히 원나라의 코앞에 위치하면서 수십 년의 긴 세월 동안 항복도 아니고 항전도 아닌

상태로 있었던 나라도 없었고, 원나라의 강력한 협박에도 고려의 대응은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웠다고 한다.

몽골과의 결혼동맹에 매달린 쪽은 고려측이었다. 그 이유는 고려가 국가의 독립성도

강화하고 다루가치(점령군 관리)’를 귀찮아했고, 무신정권의 잔재로부터 왕권을 강화

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도 줄여야 했기 때문에 고려 원종(1219~1274)이 처음 추진하였

으며 원의 세조는 이를 적극 장려했다고 한다.

결혼동맹이 활발한 당시 원나라 여성 20만 명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이주했다고 한다.

 

[충선왕 세계 제국의 2인자]

원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충선왕(1273~1325, 몽고 이름 이지리부카)이다.

그는 부왕인 충렬왕과 원 세조의 딸인 쿠툴룩켈레쉬(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대장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버지의 양위로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사냥과 유흥에 빠진 아버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하며, 1298년 즉위한 후

과감한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시도하다 기득권 세력에 의해 철퇴를 맞는데, 원 세조의

손녀인 왕비 부타시리와의 관계가 소원하여 즉위 7개월만에 폐위당한다.

원나라로 끌려 들어간 충선왕은 이 기간 동안 훗날 원나라의 왕이 되는 무종’, ‘인종

등과 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성종의 후임자로 왕권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충선왕이 무종의 편을 들면서 태자태부’(왕의 스승)개부의동삼사에 오르게 되는데,

개부의동삼사는 황제 다음가는 위치로 원나라 권력의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충렬왕 서거 후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나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지내고 명령을 내려

고려를 통치한다.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칭기즈칸은 만주와 요동 지역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끼던 차에 거란 반군을 소탕한 뒤

고려에 형제의 맹약을 맺자는 제의를 해 온다.

(당시 사항은 고려사’ ‘열전에 상세히 나옴)

 

1차 침공

- 몽골이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무시함은 물론 몽골의 사신(저고여)가 피살되고

   칭기스칸도 죽는 등 정국이 혼란한 상태에서 몽골 정권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장군

  ‘살리타는 자신들의 목표는 고려가 아닌 동진국임을 밝히면서 고려로부터 항복만을

   원하였으나 고려의 무신 정권(최이)은 이를 무시하고 살리타의 사신을 구금하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침공해 평주성 일대의 주민과 가축을 모조리 도륙(1231~32)

 

2차 침공

- 몽골이 고려에 72명의 다루가치를 주둔시키고 철수하자 이들의 존재를 귀찮아한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며 다루가치들을 살해한다.

   이에 격분한 살리타가 재침공하자 무신정권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몽골군의 철수를 요청하지만 이를 거부하다 사령관인 살리타가 고려 장수(조윤후)

   의해 전투에서 전사하자 몽골군이 철수(1232)

 

3차 침공

- 몽골군이 침공하면 친 몽골파를 이용해 애걸복걸과 눈물로서 호소를 하여 위기를 돌파

  하는 작전을 구사하지만 몽골군이 철수를 하면 친몽골파를 숙청 및 제거하는 등

   믿지 못할 행동으로 일관되게 행동하자 고려에 우호적인 몽골 조정에 큰 반감을

   일으킨다. 친 몽골파의 숙청에 격노한 오고타이칸이 고려 정벌을 명령하자 고려

   국왕이 몽골 황제를 알현한다는 조건으로 몽골군의 철수를 유도하지만 고려는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1235)

 

4차 침공

- 몽골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음은 물론 공물까지 받치지 않자 오고카이칸의 장자면서

   후임 국왕인 퀴위크가 다시 침공한다. 고려는 사신을 보내 무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전도 불사한다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지만 퀴위크가 사망하면서 소강상태에 빠진다.  

   최이가 죽고 최항이 권력이 잡자 원나라는 고려에 국왕의 천조를 요청하고 수도를

   육지로 천도할 것을 종용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1247~1249)

 

5차 침공

- 12516월 헌종이 즉위하면서 고려가 원나라 황제와의 약속(국왕의 천조 및 육지

   환도)을 지키지 않은 점에 군사적 압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고 고려 정벌에

   나선다. 하지만 고려는 원나라 사신에 대한 환대와 거짓말, 애걸복걸, 한편으로는 몽골

   병사를 죽이는 등의 이중 행태로 원나라의 불신을 받는데, 고려 조정의 알 수 없는 치기

   치기 어린 행태들이 계속 원나라에 보고되는데 이런 무신정권(최항)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인 관례조차 무시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배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1253)

   그 결과, 무신정권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왕정의 복고를 갈망하여 몽골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크게 싹트게 된다.

      

6차 침공

- 1254년 고려가 원나라에 파견한 사신을 감금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고려 고종은

   원나라 사신을 환대하기 위해 직접 육지로 나왔으나, 무신정권의 실력자(최항)가 직접

   육지로 나오지 않자 실질적인 항복으로 볼 수 없서, 최항 정권을 믿을 수 없다면서

   1255지랄타이정동 원수로 삼아 재침공하는 데 당시 포로가 208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고려의 피해가 컸다.(1253~1254)

 

7차 침공

- 1255년 고려가 고종의 입조와 출륙을 맹세하자, 지랄타이는 우선 압록강 쪽으로 군대를

   물리치면서 관망하지만 고려가 역시 원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또 다시 고려를

   침공해 12개월 이상을 고려를 유린한다.(1255)

   몽골군이 재침공하자 백성들도 항전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최항 정권의 무모한 대응을

   비판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고려의 백성들이 몽골군을 환영하는 사태로까지 번진다.

 

8차 침공

- 몽골군이 철수하자 다시 무신정권(최항)은 모든 약속을 파기를 결의한다.

   1257년 정월, 고려는 원나라가 해마다 우리를 침범하니 공물을 바쳐도 소용없다

   구실로 몽골로 보내는 공물을 중단한다. 이즈음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이어받는다. 고려가 약속을 어기자 몽골군은 재침공을 하여 개경까지 진입한다.

   1258년 대사성 류경, 별장 김인준, 박희실 등이 주축이 되어 정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최의를 살해하면서 고려의 대몽항쟁은 끝이 난다.

 

남은 무신정권의 잔존 세력들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진도, 제주도 등지와 무인도를

전전하다가 3년 만에 진압된다.

최씨의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화려한 집을 지어놓고 안락한 생활을 했다고 하며 거대한

격구장을 지어 놀이에 열중하는 등 근검절약이나 솔선수범이라는 것은 없었고 백성들

에게는 대몽골 항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었으나 이는 무신정권의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와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이 배운 삼별초의 항쟁1970년 대 군사 정권이 만들어 낸 신화에 불과하다.

 

[솔롱고스와 칭기즈칸]

-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시조모(국모)는 알랑고아로 그녀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코릴라르타이메르켄, 코리족)의 딸로 알려져 있다.

   또 주몽이 코리족에서 일부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해 나라를 세운 뒤 코리의

   나라 중 하나임을 나타내기 위해 국명을 고(, 으뜸) 구려(코리 또는 꾸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알랑고아의 12대 손이 칭기즈칸이다.

 

- 코릴라르타이메르켄을 한국어로 풀이하면 고주몽으로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다.

 

- 몽골인은 한국을 솔롱고스또는 고을리’‘ 등으로 부른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솔롱고스라는 단어 옆에 한자로 고려(高麗)’라 표기하고 있다.

   13세기 이전에 몽골에서는 솔롱기스라는 널리 퍼져 있었는데 당시 몽골인이 신라의

   존재를 알았고 신라라는 이름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솔롱고스로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어원으로 본 몽골과 고려]

- 한국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아리랑의 경우 이 말의 뿌리에는 정설이 없다.

   만주어와 관련해 산()의 만주어는 아린(阿隣)’ 또는 아리라이므로 이 말과 연관성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말은 퉁그스어, 터키어와도 일치한다.

   만주인이 자신의 본관을 말할 때 모(), ()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리라

   고향 또는 본관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면 아리랑은 고향 즉,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이칼 주변의 민족들이 아리랑이나 쓰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성계의 조상들]

-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100년간 몽, 원제국 옷치긴 분봉왕 휘하에

   속한 엄연한 몽골인이었다.

 

-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는 삼척에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 옷치긴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작위를 받는데, 다루가치는 몽골족이 아니고는 좀처럼 수여받지

   못하는 고위 관직이다.

 

- 또한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와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은 함경도 또는 현재의 옌지

   지역으로 당시에는 고려 땅이 아니라 몽골의 영토였다.

 

-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원나라로부터 아버지 이행리의 천호 관직의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으며, 이자춘을 낳고 의주에서 화주(함흥 인근)

   옮겼다.

 

- 이 모든 사항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새 왕조의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해 조선의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기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작품을 읽었음에도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아직도 재검토 할 여지가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본 독후감은 2015년에 작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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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류시화 지음 / 푸른숲 / 2000년 6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6

 

2천 년 말 우리 사회가 한창 류시화 앓이를 할 즈음 나도 본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최근 나의 서가에 꽂혀서 방을 드나들던 자기를 다시 읽어 주기를 고대하면서 항시 나를

응시하고 있던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접하게 되었다.

 

당시 작품을 읽고 나는 몇 가지의 주제를 갖고 독후감을 기록했었다.

첫째 삶은 늘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뿐이지.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이 아무리 급박하게 돌아가더라도 간혹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의 방향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 보고

둘째는 종교란 우리가 [여행자]라는 사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것으로 명상을 잃어버린 종교는 맹신에 빠짐을 명심하고

       명상은 종교를 통해 생겨난 것으로 명상 없이 종교를 접한다는 것은 근본을 잊어버리

       는 행위이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남의 기준에 맞도록 끝없이 요구받기 때문에 마음

       의 병에 시달리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는 불쌍한 존재임을 항시 잊지

       것이며

넷째는 나비의 애벌레 우화의 순간을 재촉한다고 다른 것에 비해 빨리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비의 생명을 단축하는 해위인 것처럼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으로

       항시 참을성을 갖고 인내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는 조급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기억되며

마지막으로는 사랑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랑에는 묘한 속성이 있고 그것은 마치 불사조가

자신을 불로 태워서 죽어 버리고 그 재에서 다시 소생하듯이 사랑은 죽음을 거칠수록 더욱

큰 사랑으로 연결되니 사랑의 시작은 물론 사랑의 죽음 또한 두려워 말라고 독후감을 정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르겠다.

이런 글로써 나름 정리한 당시의 느낌과 지금 내가 작품을 읽고 느낀 점이 시간이 흐른

현 시점에도 동일하게 다가오고 있다면 좋겠는데, 오늘 작품을 읽으며 그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 해석해 보니 처음에도 느꼈을 터인데 당시는 그렇게 가슴에 와서 닿지 않는

내용이 지금은 거슬리고 있다.

아마도 내가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해 생긴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저자의 젊은 날의 방황 방식에 관한 사항이다.

저자가 작품과도 같은 소산물을 만들어 낸 배경이 된 젊은 날의 방황이 나는 한 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있는 자의 치기 어린 넋두리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내가 상상적으로만 생각했던 젊은 날의 그런 삶을

저자가 쉽게(?) 경험한 것에 대한 부러움 속에 그럼 나는 헛살았을까?’하는 생각이 선뜻

들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회개를 하지 않고 죽어가던 어떤 예술가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라고 일갈하는 대목에서 내 삶에 대한 변명과 함께 조그마한 위로를 느껴본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는 개인적인 삶의 사유를 통한 자신감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나만의 방식과 나만의 적극적인 생활 자세로 삶을 열심히 그리고 그 분의 표현대로

불꽃'같이 살면서 자신감을 찾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측면을 놓고 볼 때 저자의 주장인 진정한 삶이란 불꽃처럼 사는 삶이다라는 그 분의

주장에 완전 동의하는 바이다.

없었고 부족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했고, 공부를 잘 못했기에 공부 잘하는 나의

친구들이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 했으며, 수중에 학습을 원만히 진행할

수 있는 금액이 부족했기에 나라에서 주는 장학금 완전 공짜 장학금이 아니라 조건부

장학금으로 나는 졸업 후 전부 상환하였다 - 에 기웃거렸으며 그도 저도 안 될 때에는

오로지 현실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공부도 못하는 게 행실까지 개판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서였다.

결국 내가 살아 왔던 불꽃같은 삶이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나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가지치기와도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이며 나는 인내를 해 왔고 오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고리타분 할 수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 나의 과거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이야기했을 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크게 잘 못 살아 온 나의 삶이라는 생각은 든다.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날 오늘을, 작품을 읽는 순간을 뒤돌아 보았을 때 누군가 내게

삶이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고, 배우게 하였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생활 속에서 불꽃처럼

사는 자세를 가르쳐 주었고, 배웠다고 이야기할까 생각합니다.

그 불꽃은 내 속에서 아직도 활활 타 오르고 있으며 내가 목숨을 다 하는 그 날까지

점점 더 세차게 타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읽고, 느끼고,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자

 

- 명상이란 결국 내가 사라져서 자연과 존재와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기도 역시

   어떤 의미에선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가 사라져서 신이 내 안에 들어오는 일이다.

 

-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보인다. (성철 스님)

 

- 신은 내가 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 마지막 날을 맞은 것처럼 오늘을 맞이하자. (크리슈나무르타)

 

- 위대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은 없다. 다만 위대한 일과 하찮은 일이 있을 뿐. 위대한 사람

   은 하찮은 일까지도 위대한 일로 만든다. 그가 하는 모든 하찮은 행동, 모든 하찮은 몸짓

   에서 위대함이 흘러 나온다.(오쇼 라즈니쉬,[장자.도를 말하다]에서)

 

- 부처도 가장 큰 고통을 애별린(愛別隣)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이다.

 

- 누가 우리의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예술인가, 혁명인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러나 사랑은 침묵이다. 우리는 모두 남 모르게 죽어간다. (알베를 까뮈)

 

- 운명의 펜은 절대로 철자법이 틀리지 않는다. (13세기 회교 신비가)

 

- 불교에서는 우주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욕계]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말한다

   [색계]란 각자의 꿈에 나타나는 빛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말한다

   [무색계]란 모든 사람의 이념 속에 있는 절대 정신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

 

- 사람들은 스스로 나누어 놓고서는 그 분별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단죄한다.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삶 역시도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삶은 곧 죽음으로 가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 우리를 삶에서 지쳐 쓰러지게 하는 것은 고독이나 가난이 아니라 남 모르게 간직한

   비밀이다.

 

-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종교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소멸될 수 밖에 없는 육체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게 하는 것이다.

 

- 영혼이 먼저 있고, 종교는 그 영혼의 비밀을 알기 위한 창문이다. 무엇보다 진정한

   종교란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 지난 행복했던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듯 이제 비가 며칠째

   내린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뜨거웠던 태양을 기억하지 못한다.

   저 비의 구름 위로 올라가면 태양이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곳에는 다시 우리가 들어갈 또 다른 세계가 있음에도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는다. 그리고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은 천국으로 향하는 바로 그것이다.

                                                                                          (갈매기의 꿈, 리차드 바크)

  

- 짐승들은 밖의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것 때문에 두려워

   하는 것

 

-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방황이고, 하나는 여행이다. 내면의 방황이 끝날

   때 삶의 진정한 여행이 시작된다.

 

* 본 독후감은 2014년에 작성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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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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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을 읽으며 두 가지를 재 확인한 시간이었다.

첫째는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은 자신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 보다는 '하늘의 도움'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 인물이 행동할 때의 시기가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맞았기 때문에 제대로

          큰 뜻을 펼칠 수 있었음

을 다시 한 번 크게 느끼게 한 한 작품이었다.

 

'역발산 기개세''항우'가 힘이 없고, 항우의 군대가 유약하여 유방에게 중원의 패권을

넘겨 주었겠으며, 영국의 수상 '처칠'이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수상의 자리에 올라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나폴레옹'이 힘이 없고전략이

부재해 모스크바 전선에서 수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했겠는가?

나는 역사의 승자에 초점을 맞추어 '성공한 인간'들을 세밀히 분석해 보았다.

역시 대다수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하늘의 도움, 주위의 도움, 환경적 도움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너무 하늘, 하늘하고 하늘 의존적인 인물로 비춰질 수 있으나

'하늘은 곧 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인물은 바로 하늘이 내린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여러 인물이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라

생각되어 진다.

세손이 호랑이와도 같았던 할아버지 영조의 그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요인이 혜성같이 등장한 '홍국영'이라는 참모 때문에 가능했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비록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개인의 권력욕'에 의해 몰락은 했지만 그가 세손인 정조의 참모

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보여 주었던 활약상은 높이 평가 되어야 하고 절대자인 '보스

모셔야 하는 참모들에게 크게 귀감이 될 만한 사항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참모로서의 홍국영을 칭찬하는 이유를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화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다.

 

정조는 추상같은 할아버지 영조의 질책에 답하는 과정에서 '통감강목' 부분 중 할아버지

영조가 그토록 싫어하는 '출신 성분'(영조는 무수리 출신 모친에서 출생)에 관한 발언을

무심코 해 버린다.

안색이 변한 영조의 모습을 본 세손은 자신의 진술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는 영조에게

'문제가 되는 문구는 종이로 가려서 읽지 않는다'고 설명을 하지만 할아버지 영조는 이를

믿지 못하고 세손(정조)이 읽고 있는 책을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세손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있던 '홍국영'은 느닷없이 영조가 세손이 읽고 있던 책을 가져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이유를 혼자 고민하다 세손이 읽고 있던

대목에서 문제가 되는 대목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재치있게 해당 대목을 종이로 가린 채

영조에게 세손이 읽던 책을 보낸다.

책을 확인한 영조는 만족을 표하게 되며, 세손을 궁지에서 구출해 낸다.

나는 이 대목에서 보스를 모시는 참모라면 그것도 하루하루가 전쟁터와 같은 비즈니스

세계의 참모라면 적어도 이런 센스와 동물적 감각 그리고 보스를 지키려는 확실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쨌든 작품은 보스와 참모간의 유기적인 호흡과 함께 그들이 팀워크를 이뤄 관련되는

일을 추진하는 순간, 절체 절명의 위기의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사고의 기반을 갖고

결정을 내렸고 참모들이, 보스가 행동했는지를 보여 준 작품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도 중요하지만 왕을 떠 받치고 있는 [참모]의 역할이 왕 못 지 않게 중요

한 인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어떤 참모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리 훌륭한 참모도, 영특한 참모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직이 크게 흔들리고, 힘들어 할 때 보스를 대신해 보스를 중심으로

조직원을 뭉치게 했었고, 단합된 힘을 발휘하도록 했었던 인물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나만의 착각일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도 '조직의 고목(古木)'이 아닌 '거목(巨木)'으로 우리

조직원들의 기억과 추억 속에 자리 잡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도전(조선 왕조의 설계자)와 황희(조선조 최장수 재상)

  인수대비(연산군 할머니)의 경우는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 평을 제하였고, 강홍립

  (광해군의 밀명), 박자청(공사의 달인)은 후일 해당 인물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섭렵한

  다음 독서 평을 별도로 하고자 여기에서는 제외 시켰다.

 

[김유신] --- 비주류에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 인물

- 김유신은 왕이 아닌 킹 메이커였다. 그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12대 손으로 금관국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그리고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고 '삼국사기'

   전하고 있는데,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이 김유신의 할아버지로 망국 군주의 일가는

   신라의 실질적 지배 계급인 '성골'이 아닌 '진골'계급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은 갈문왕의 후손으로 성골로 김유신의 부친(김서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사이였다.

 

- 강력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의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없음을 간파한 김유신 자신은

   스스로 신라사회의 주류로 성장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되는데, 방법이 혈통은 괜찮지만

   일정한 하자가 있는 왕족과 유대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택된 인물이 바로

   '김춘추'였다.

   김춘추는 왕족이었지만 조부 '진지왕'이 백성들에 의해 폐위된 임금으로 크게 주목을

   받을 수 없는 왕족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김유신의 전략은 치밀했다. 이미 유부남이었던 김춘추를 집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여동생(문희)과 통정을 하게 아들을 낳는데 바로 '문무왕'이다. 그러나 김춘추의 행위에

   실망한 김유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에서 일정 기간(629~642) 사라지게 된다.

 

- 김유신이 역사에 재 등장하는 계기는 백제 장군 윤충이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이 살고 있는 성을 함락하고 이들을 죽이면서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춘추는 기존 사고의 틀을 바꾸게 된다.

   적대국이었던 고구려 '보장왕'에게 백제를 침공 할 수 있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나

   김춘추는 오히려 인질로 잡힌다. 이런 김춘추를 구출하기 위해 김유신이 나서며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서는데, 여기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의기 투합하며 외교는 김춘추가

   내치는 김유신이 맡으며 확실한 팀워크를 이룬다.

   고구려 청병에 실패한 김춘추는 다시 왜국으로도 건너가 군사를 요청하지만 왜국 역시

   친 백제계 정권이어서 실패하지만 또 다시 당나라에 백제를 칠 수 있는 청병을 요청하여

   승락을 받는다

 

- 당시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 실패로 혼이 난 상태라 실제는 군사를 보내지 아니하고

   '고종' 때 군사를 보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후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 하자 문무왕이 당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나당 전쟁'이 시작된다.

     

- 김춘추가 국외로 청병을 위해 뛰어 다닐 때 김유신은 선덕여왕(13)에 의해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공적을 세우지만 신라 성골 집단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성골 집단은 연이은 여왕 등극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나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진압되면서 명실 상부한 신라의 주류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되지 않아 진덕 여왕이 죽으면서 후사를 '이천 알천'을 지명하나

   알찬이 이를 고사하여 왕권이 김춘추에게 넘어가게 된다

 

- 김춘추가 등극하나 권력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김춘추는 진골 카르텔 집단과 타협하면서

   권력을 강화를 꾀한다.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고 권력을 강화해 가던 중, 이찬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자연스레 삼으면서 비로소국왕 김춘추 - 상대등 김유신 체제

   가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춘추는 자신의 딸 죽음을 계기로 삼국통일의 생각을 굳혔다는

   점이고, 김유신은 가야 제국의 재건이 아닌 강력한 신라의 완성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둘의 꿈은 방향은 달리 했지만 결론은 동일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크게

   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한다.

 

[태조 왕건] --- 충성스런 부하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

 

- 놀랍게도 태조 왕건의 조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사료가 없었다고 한다.

   시조의 사료가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랑할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신라 헌강왕 때의 서라벌은 풍요와 향락이 극치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신라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고구려, 백제의 옛 유민들은 더욱 곤궁했다고 한다. 확장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에 걸맞은 통치이념과 사회 지배 체제를 수립해야 했지만 귀족들은

   사회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런 사회적 불만과 불안 요소가 견휜과 궁예라는 인물을 낳게 한 것이며 이들이 자립

   하고 힘을 기르면서 신라는 급속도로 해체되어 갔다.

 

-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은 주위의 심복 4인방(홍유, 신승겸, 배현경, 복지겸)에 의해 차기

   권력자(임금)로 추대 받아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 초기 내란이 끊이지 않아

   혼란한 정국이 지속되었으나 왕건을 추대한 네 명의 공신들로 인해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개국 공신들은 자신의 업적을 밑천으로 왕에게 더 큰 권력을 요구하는 게 통상

   적인 관례였으나 개국 공신 4인방은 그러지 않고 시종일관 낮은 자리나 험한 자리에서

   태조를 보위했다고 한다.

      

[소서노] --- 창조적 정권과 국가의 건국자

- 고구려 개국시조의 어머니가 '유화부인'이라면 백제 개국시조는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이다. 소서노는 북부여에서 졸본 지역으로 망명해 내려 온 주몽에게 기득권을

   포기하고 주몽을 중심으로 국가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 고구려는 소서노라는 토착세력의 물적 토대가 주몽이라는 이주 세력의 명분과

   능력에 힘을 실어주어 건국된 신흥 국가이다.

 

- 북부여에서 주몽의 아들이 찾아오자 혼란에 빠진다.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가 차기

   권력자가 될 것을 예상했으나 어느날 홀연히 찾아 온 '유리'라는 주몽의 아들이 대권을

   이어받게 되자, 권력 투쟁에 매달리지 않고 소서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피붙이

   장남 비류(미추홀)와 차남 온조(위례성)를 데리고 남쪽으로 이주 해 새로운 국가를 창업

   하게 된다

 

- 고구려 창업 공은 주몽에게, 백제 창업의 공은 아들 온조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이 두 나라는 '소서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건국되기 힘든 왕국들이었다.

 

[김 육] ---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참 정치인

- 김육은 '대동법'의 경세가로 불릴 정도로 대동법 시행에 정치 인생을 걸었던 인물로,

   본 제도 시행에 미온적이던 '효종'에 대한 섭섭함의 표시로 영의정을 그만 두겠다는

   상소를 3회에 걸쳐 올리나 효종이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김육은 이에 굴하지 않고 4번째 올리는 상소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동법의 시행 확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대동법 시행에 전력 투구하였던 인물이라고 한다.

 

- 대동법은 '공납'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 받자는 획기적인 방안으로 대동법 실시 관청의

   이름이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일 정도로 좋은 제도였으나

   전결 단위로 과세를 하면 농토가 많은 양반 사대부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기득권층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 대동법을 둘러싸고 서인이 '한당(漢黨)''산당(山黨)'으로 나뉘었는데, 한당은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하는 잠곡 김육이, 산당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는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 주도하고 있었다.

 

- 김육은 또 한편으로는 '화폐 사용'의 장점에 대해 강조했던 인물로 대동법을 둘러싸고

   수 십 년 째 논란만 계속되는 와중에 병이 깊어진 그는 효종 9(1658)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유차(遺箚, 신하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으로 견해를 표명하는 상소)에서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했을 정도로 대동법의 시행을 강력 건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될 수 있었으며 현종 11(1670) 발생한

   유례없는 '경신 대기근'을 벗어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게 역사의 평가다.

 

[천추태후] --- 전통을 지키려다 쿠테타를 맞은 인물

- 천추태후의 집안 배경을 보면 부친은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으로 성은 '황보'씨인데

   광종의맏아들이었던 제5대 경종과 국혼하여 '헌애왕후'가 된다.

   그녀의 동생 역시 경종과 혼인하여 '헌정황후'가 된다. 당시 결혼 풍습에 비춰 보았을 때

   자매 모두 한 남자의 아내이자 왕비가 되었는데 이는 '족내혼'의 결과로 그다지 이상한

   결혼은 아니라고 한다.

 

- 광종(천추태후 사촌 오빠)은 왕건이 남긴 호족융합정책이란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복수법'까지 만들며 왕건 시대에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지만

   경종은 이를 개혁정치의 일환이 아닌 아버지가 단순한 반대파 제거를 위한 아버지의  

   폭정으로 이해한 반면, 경종의 부인 헌애왕후는 남편과는 달리 피의 숙청이 아닌 태조

   왕건의 유지가 계속이어져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 헌애왕후와 경종이 결혼할 당시 이미 2명이 부인이 있었는데, 이런 틈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다른 왕비들보다 먼저 왕자를 생산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

   한 끝에 마침내 왕자를 제일 먼저 낳지만 경종이 뜻하지 않게 일찍 죽으며 후계자로 헌애

   왕후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아닌 헌애왕후의 오빠(성종)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종과 헌애왕후의 정치적 지향점이 달랐던 게 문제였다.

   그녀는 왕건의 유훈 실천을 고려 왕실의 나아갈 길이라 본 반면, 성종은 고구려 제국의

   부활이 아닌 중국의 '유교식 정치이념'을 받아들인 제후국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 성종이 들어서면서 중국식 유교 사상을 강요하며 여동생들에게 수절을 강요하는 가운데,

   헌애왕후의 일가인 김치양이 승려복장으로 나타나 망설임 없이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는

   이는 당시의 성 풍습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큰 흠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음에도

   성종은 이를 알고 크게 노하고 김치양을 귀양 보낸다.

 

- 성종 역시 후사없이 38세에 급사를 하게 되면서 후임으로 헌애왕후의 아들인 '목종'

   지명하고 자신의 어머니인 황보씨를 '왕태후'로 높이자 높은 신분을 갖게 된 헌애왕후는

   성종의 잘못된 정책을 되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추태후의 고려 전통부활정책은 성종

   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유학자들의 실권을 의미하게 되면서 목종과 천추

   태후가 추진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기득권 층은 사사건건 반기를 들게 되고 급기야

   쿠테타를 모의하고 무인인 '강조'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킨 후 헌정왕후가 사통해 낳은

   대량원군을 옹립시키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퇴출시킨다.

 

- 강조에게 쿠데타를 종용한 세력들은 '강조'가 죽자 쿠데타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강조에게

   돌리고 자신들이 축출한 천추태후의 모든 정책은 은폐한 채 김치양과의 사통관계만

   강조해 음녀로 각인시켰던 것이다.

 

[홍국영] --- 참모의 과욕이 부른 참모의 말로

- 인조반정 이후 150년간 정권을 장악해 온 노론은 세손의 등극을 반대하지 않은 시파

   (홍봉한이 영수)와 적극적인 반대파인 벽파(홍인한 영수)로 나뉜다. 이런 와중에 목숨을

   걸고 세손을 옹위하고 나선 인물이 '홍국영'이다.

 

-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외척(풍산 홍씨, 경주 김씨)를 떼어 놓는 목표와 노론의 원수들인

   소론과 남인을 떼어 놓는 것이 목표였다.

   첫째 목표인 외척의 분리는 성공했으나 노론이 장악한 조정에서 우익 노릇을 하는

   '소론'남인'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정조 취임 이후 사도세자의 죽임을

   방관한 노론에 대해 우익 세력인 '소론''남인'이 자꾸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한

   정조는 상소를 올린 자들에게 과도한 형벌(사형)을 내린다.

 

- 격변의 와중에 홍국영은 노론의 영수가 되는 야욕을 불태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인 '송시열'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불가능함을 알고 국가 차원에서 송시열

   의 추승을 주도해 자신이 노론의 새로운 영수임을 부각하려 한다.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계획을 세워

   조카를 왕으로 만들려는 야욕에 불타지만 여동생이 일찍 죽으며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간다여동생의 죽음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궁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나아가 정조의 제1비인 효의왕후도 의심하는 행태를 보인다.

   홍국영이 이런 오만 방자함의 배경에는 송시열의 조카인 '송덕상'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

   인데 그는 바로 송시열의 조커였던 것이다. 송덕상은 정조의 나이 27, 효의왕후 25

   에 후사가 없자 임금에게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라는 권유를 했던 인물이다.

 

- 정조는 원빈(홍국영의 누이) 장례 때 사도세자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이담에게 부여

   했던 장례식 때의 직책과 홍국영이 부르는 호칭을 듣고는 홍국영의 야심의 본질을 꿰뚫

   어 보고는 홍국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31세인 홍국영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홍국영의 잔당들이 남아서 홍국영의 복귀를 줄기차게 정조에게 끊임

   없는 요구를 하지만 정조는 홍국영의 잔당들을 처리하며 그의 복귀를 원천 봉쇄해

   버리게 되는데, 자신의 재기가 어려운 것을 간파한 그는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 해당 작품은 지난 2013년에 작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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