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 -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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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을 읽으며 두 가지를 재 확인한 시간이었다.

첫째는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은 자신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 보다는 '하늘의 도움'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 인물이 행동할 때의 시기가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맞았기 때문에 제대로

          큰 뜻을 펼칠 수 있었음

을 다시 한 번 크게 느끼게 한 한 작품이었다.

 

'역발산 기개세''항우'가 힘이 없고, 항우의 군대가 유약하여 유방에게 중원의 패권을

넘겨 주었겠으며, 영국의 수상 '처칠'이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수상의 자리에 올라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나폴레옹'이 힘이 없고전략이

부재해 모스크바 전선에서 수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했겠는가?

나는 역사의 승자에 초점을 맞추어 '성공한 인간'들을 세밀히 분석해 보았다.

역시 대다수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하늘의 도움, 주위의 도움, 환경적 도움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너무 하늘, 하늘하고 하늘 의존적인 인물로 비춰질 수 있으나

'하늘은 곧 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인물은 바로 하늘이 내린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여러 인물이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라

생각되어 진다.

세손이 호랑이와도 같았던 할아버지 영조의 그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요인이 혜성같이 등장한 '홍국영'이라는 참모 때문에 가능했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비록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개인의 권력욕'에 의해 몰락은 했지만 그가 세손인 정조의 참모

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보여 주었던 활약상은 높이 평가 되어야 하고 절대자인 '보스

모셔야 하는 참모들에게 크게 귀감이 될 만한 사항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참모로서의 홍국영을 칭찬하는 이유를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화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다.

 

정조는 추상같은 할아버지 영조의 질책에 답하는 과정에서 '통감강목' 부분 중 할아버지

영조가 그토록 싫어하는 '출신 성분'(영조는 무수리 출신 모친에서 출생)에 관한 발언을

무심코 해 버린다.

안색이 변한 영조의 모습을 본 세손은 자신의 진술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는 영조에게

'문제가 되는 문구는 종이로 가려서 읽지 않는다'고 설명을 하지만 할아버지 영조는 이를

믿지 못하고 세손(정조)이 읽고 있는 책을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세손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있던 '홍국영'은 느닷없이 영조가 세손이 읽고 있던 책을 가져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이유를 혼자 고민하다 세손이 읽고 있던

대목에서 문제가 되는 대목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재치있게 해당 대목을 종이로 가린 채

영조에게 세손이 읽던 책을 보낸다.

책을 확인한 영조는 만족을 표하게 되며, 세손을 궁지에서 구출해 낸다.

나는 이 대목에서 보스를 모시는 참모라면 그것도 하루하루가 전쟁터와 같은 비즈니스

세계의 참모라면 적어도 이런 센스와 동물적 감각 그리고 보스를 지키려는 확실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쨌든 작품은 보스와 참모간의 유기적인 호흡과 함께 그들이 팀워크를 이뤄 관련되는

일을 추진하는 순간, 절체 절명의 위기의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사고의 기반을 갖고

결정을 내렸고 참모들이, 보스가 행동했는지를 보여 준 작품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도 중요하지만 왕을 떠 받치고 있는 [참모]의 역할이 왕 못 지 않게 중요

한 인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어떤 참모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리 훌륭한 참모도, 영특한 참모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직이 크게 흔들리고, 힘들어 할 때 보스를 대신해 보스를 중심으로

조직원을 뭉치게 했었고, 단합된 힘을 발휘하도록 했었던 인물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나만의 착각일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도 '조직의 고목(古木)'이 아닌 '거목(巨木)'으로 우리

조직원들의 기억과 추억 속에 자리 잡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도전(조선 왕조의 설계자)와 황희(조선조 최장수 재상)

  인수대비(연산군 할머니)의 경우는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 평을 제하였고, 강홍립

  (광해군의 밀명), 박자청(공사의 달인)은 후일 해당 인물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섭렵한

  다음 독서 평을 별도로 하고자 여기에서는 제외 시켰다.

 

[김유신] --- 비주류에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 인물

- 김유신은 왕이 아닌 킹 메이커였다. 그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12대 손으로 금관국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그리고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고 '삼국사기'

   전하고 있는데,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이 김유신의 할아버지로 망국 군주의 일가는

   신라의 실질적 지배 계급인 '성골'이 아닌 '진골'계급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은 갈문왕의 후손으로 성골로 김유신의 부친(김서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사이였다.

 

- 강력한 계급 사회였던 신라의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없음을 간파한 김유신 자신은

   스스로 신라사회의 주류로 성장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되는데, 방법이 혈통은 괜찮지만

   일정한 하자가 있는 왕족과 유대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택된 인물이 바로

   '김춘추'였다.

   김춘추는 왕족이었지만 조부 '진지왕'이 백성들에 의해 폐위된 임금으로 크게 주목을

   받을 수 없는 왕족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김유신의 전략은 치밀했다. 이미 유부남이었던 김춘추를 집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여동생(문희)과 통정을 하게 아들을 낳는데 바로 '문무왕'이다. 그러나 김춘추의 행위에

   실망한 김유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에서 일정 기간(629~642) 사라지게 된다.

 

- 김유신이 역사에 재 등장하는 계기는 백제 장군 윤충이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이 살고 있는 성을 함락하고 이들을 죽이면서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춘추는 기존 사고의 틀을 바꾸게 된다.

   적대국이었던 고구려 '보장왕'에게 백제를 침공 할 수 있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나

   김춘추는 오히려 인질로 잡힌다. 이런 김춘추를 구출하기 위해 김유신이 나서며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서는데, 여기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의기 투합하며 외교는 김춘추가

   내치는 김유신이 맡으며 확실한 팀워크를 이룬다.

   고구려 청병에 실패한 김춘추는 다시 왜국으로도 건너가 군사를 요청하지만 왜국 역시

   친 백제계 정권이어서 실패하지만 또 다시 당나라에 백제를 칠 수 있는 청병을 요청하여

   승락을 받는다

 

- 당시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 실패로 혼이 난 상태라 실제는 군사를 보내지 아니하고

   '고종' 때 군사를 보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후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 하자 문무왕이 당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나당 전쟁'이 시작된다.

     

- 김춘추가 국외로 청병을 위해 뛰어 다닐 때 김유신은 선덕여왕(13)에 의해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공적을 세우지만 신라 성골 집단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성골 집단은 연이은 여왕 등극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나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진압되면서 명실 상부한 신라의 주류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되지 않아 진덕 여왕이 죽으면서 후사를 '이천 알천'을 지명하나

   알찬이 이를 고사하여 왕권이 김춘추에게 넘어가게 된다

 

- 김춘추가 등극하나 권력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김춘추는 진골 카르텔 집단과 타협하면서

   권력을 강화를 꾀한다.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고 권력을 강화해 가던 중, 이찬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자연스레 삼으면서 비로소국왕 김춘추 - 상대등 김유신 체제

   가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춘추는 자신의 딸 죽음을 계기로 삼국통일의 생각을 굳혔다는

   점이고, 김유신은 가야 제국의 재건이 아닌 강력한 신라의 완성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둘의 꿈은 방향은 달리 했지만 결론은 동일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크게

   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한다.

 

[태조 왕건] --- 충성스런 부하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

 

- 놀랍게도 태조 왕건의 조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사료가 없었다고 한다.

   시조의 사료가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랑할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신라 헌강왕 때의 서라벌은 풍요와 향락이 극치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신라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고구려, 백제의 옛 유민들은 더욱 곤궁했다고 한다. 확장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에 걸맞은 통치이념과 사회 지배 체제를 수립해야 했지만 귀족들은

   사회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런 사회적 불만과 불안 요소가 견휜과 궁예라는 인물을 낳게 한 것이며 이들이 자립

   하고 힘을 기르면서 신라는 급속도로 해체되어 갔다.

 

-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은 주위의 심복 4인방(홍유, 신승겸, 배현경, 복지겸)에 의해 차기

   권력자(임금)로 추대 받아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 초기 내란이 끊이지 않아

   혼란한 정국이 지속되었으나 왕건을 추대한 네 명의 공신들로 인해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개국 공신들은 자신의 업적을 밑천으로 왕에게 더 큰 권력을 요구하는 게 통상

   적인 관례였으나 개국 공신 4인방은 그러지 않고 시종일관 낮은 자리나 험한 자리에서

   태조를 보위했다고 한다.

      

[소서노] --- 창조적 정권과 국가의 건국자

- 고구려 개국시조의 어머니가 '유화부인'이라면 백제 개국시조는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이다. 소서노는 북부여에서 졸본 지역으로 망명해 내려 온 주몽에게 기득권을

   포기하고 주몽을 중심으로 국가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 고구려는 소서노라는 토착세력의 물적 토대가 주몽이라는 이주 세력의 명분과

   능력에 힘을 실어주어 건국된 신흥 국가이다.

 

- 북부여에서 주몽의 아들이 찾아오자 혼란에 빠진다.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가 차기

   권력자가 될 것을 예상했으나 어느날 홀연히 찾아 온 '유리'라는 주몽의 아들이 대권을

   이어받게 되자, 권력 투쟁에 매달리지 않고 소서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피붙이

   장남 비류(미추홀)와 차남 온조(위례성)를 데리고 남쪽으로 이주 해 새로운 국가를 창업

   하게 된다

 

- 고구려 창업 공은 주몽에게, 백제 창업의 공은 아들 온조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이 두 나라는 '소서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건국되기 힘든 왕국들이었다.

 

[김 육] ---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참 정치인

- 김육은 '대동법'의 경세가로 불릴 정도로 대동법 시행에 정치 인생을 걸었던 인물로,

   본 제도 시행에 미온적이던 '효종'에 대한 섭섭함의 표시로 영의정을 그만 두겠다는

   상소를 3회에 걸쳐 올리나 효종이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김육은 이에 굴하지 않고 4번째 올리는 상소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동법의 시행 확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대동법 시행에 전력 투구하였던 인물이라고 한다.

 

- 대동법은 '공납'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 받자는 획기적인 방안으로 대동법 실시 관청의

   이름이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일 정도로 좋은 제도였으나

   전결 단위로 과세를 하면 농토가 많은 양반 사대부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기득권층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 대동법을 둘러싸고 서인이 '한당(漢黨)''산당(山黨)'으로 나뉘었는데, 한당은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하는 잠곡 김육이, 산당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는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 주도하고 있었다.

 

- 김육은 또 한편으로는 '화폐 사용'의 장점에 대해 강조했던 인물로 대동법을 둘러싸고

   수 십 년 째 논란만 계속되는 와중에 병이 깊어진 그는 효종 9(1658)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유차(遺箚, 신하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으로 견해를 표명하는 상소)에서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했을 정도로 대동법의 시행을 강력 건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될 수 있었으며 현종 11(1670) 발생한

   유례없는 '경신 대기근'을 벗어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게 역사의 평가다.

 

[천추태후] --- 전통을 지키려다 쿠테타를 맞은 인물

- 천추태후의 집안 배경을 보면 부친은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으로 성은 '황보'씨인데

   광종의맏아들이었던 제5대 경종과 국혼하여 '헌애왕후'가 된다.

   그녀의 동생 역시 경종과 혼인하여 '헌정황후'가 된다. 당시 결혼 풍습에 비춰 보았을 때

   자매 모두 한 남자의 아내이자 왕비가 되었는데 이는 '족내혼'의 결과로 그다지 이상한

   결혼은 아니라고 한다.

 

- 광종(천추태후 사촌 오빠)은 왕건이 남긴 호족융합정책이란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복수법'까지 만들며 왕건 시대에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지만

   경종은 이를 개혁정치의 일환이 아닌 아버지가 단순한 반대파 제거를 위한 아버지의  

   폭정으로 이해한 반면, 경종의 부인 헌애왕후는 남편과는 달리 피의 숙청이 아닌 태조

   왕건의 유지가 계속이어져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 헌애왕후와 경종이 결혼할 당시 이미 2명이 부인이 있었는데, 이런 틈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다른 왕비들보다 먼저 왕자를 생산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

   한 끝에 마침내 왕자를 제일 먼저 낳지만 경종이 뜻하지 않게 일찍 죽으며 후계자로 헌애

   왕후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아닌 헌애왕후의 오빠(성종)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종과 헌애왕후의 정치적 지향점이 달랐던 게 문제였다.

   그녀는 왕건의 유훈 실천을 고려 왕실의 나아갈 길이라 본 반면, 성종은 고구려 제국의

   부활이 아닌 중국의 '유교식 정치이념'을 받아들인 제후국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 성종이 들어서면서 중국식 유교 사상을 강요하며 여동생들에게 수절을 강요하는 가운데,

   헌애왕후의 일가인 김치양이 승려복장으로 나타나 망설임 없이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는

   이는 당시의 성 풍습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큰 흠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음에도

   성종은 이를 알고 크게 노하고 김치양을 귀양 보낸다.

 

- 성종 역시 후사없이 38세에 급사를 하게 되면서 후임으로 헌애왕후의 아들인 '목종'

   지명하고 자신의 어머니인 황보씨를 '왕태후'로 높이자 높은 신분을 갖게 된 헌애왕후는

   성종의 잘못된 정책을 되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추태후의 고려 전통부활정책은 성종

   과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유학자들의 실권을 의미하게 되면서 목종과 천추

   태후가 추진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기득권 층은 사사건건 반기를 들게 되고 급기야

   쿠테타를 모의하고 무인인 '강조'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킨 후 헌정왕후가 사통해 낳은

   대량원군을 옹립시키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퇴출시킨다.

 

- 강조에게 쿠데타를 종용한 세력들은 '강조'가 죽자 쿠데타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강조에게

   돌리고 자신들이 축출한 천추태후의 모든 정책은 은폐한 채 김치양과의 사통관계만

   강조해 음녀로 각인시켰던 것이다.

 

[홍국영] --- 참모의 과욕이 부른 참모의 말로

- 인조반정 이후 150년간 정권을 장악해 온 노론은 세손의 등극을 반대하지 않은 시파

   (홍봉한이 영수)와 적극적인 반대파인 벽파(홍인한 영수)로 나뉜다. 이런 와중에 목숨을

   걸고 세손을 옹위하고 나선 인물이 '홍국영'이다.

 

-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외척(풍산 홍씨, 경주 김씨)를 떼어 놓는 목표와 노론의 원수들인

   소론과 남인을 떼어 놓는 것이 목표였다.

   첫째 목표인 외척의 분리는 성공했으나 노론이 장악한 조정에서 우익 노릇을 하는

   '소론'남인'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정조 취임 이후 사도세자의 죽임을

   방관한 노론에 대해 우익 세력인 '소론''남인'이 자꾸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한

   정조는 상소를 올린 자들에게 과도한 형벌(사형)을 내린다.

 

- 격변의 와중에 홍국영은 노론의 영수가 되는 야욕을 불태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인 '송시열'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불가능함을 알고 국가 차원에서 송시열

   의 추승을 주도해 자신이 노론의 새로운 영수임을 부각하려 한다.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계획을 세워

   조카를 왕으로 만들려는 야욕에 불타지만 여동생이 일찍 죽으며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간다여동생의 죽음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궁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나아가 정조의 제1비인 효의왕후도 의심하는 행태를 보인다.

   홍국영이 이런 오만 방자함의 배경에는 송시열의 조카인 '송덕상'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

   인데 그는 바로 송시열의 조커였던 것이다. 송덕상은 정조의 나이 27, 효의왕후 25

   에 후사가 없자 임금에게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으라는 권유를 했던 인물이다.

 

- 정조는 원빈(홍국영의 누이) 장례 때 사도세자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이담에게 부여

   했던 장례식 때의 직책과 홍국영이 부르는 호칭을 듣고는 홍국영의 야심의 본질을 꿰뚫

   어 보고는 홍국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31세인 홍국영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홍국영의 잔당들이 남아서 홍국영의 복귀를 줄기차게 정조에게 끊임

   없는 요구를 하지만 정조는 홍국영의 잔당들을 처리하며 그의 복귀를 원천 봉쇄해

   버리게 되는데, 자신의 재기가 어려운 것을 간파한 그는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 해당 작품은 지난 2013년에 작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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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포인트 10 -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거대한 사건
심현정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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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10

 

세계사를 가볍게 읽거나 학창시절 공부했던 사람들은 각자가 세계사를 접하고, 읽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체득하게 되는 느낌에 따라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계사적

변곡점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이런 이유로 후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저것은 아마도 저래서 중요하다

는 등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 대개의 사람들은 단순히 그냥 읽고, 즐길 것이다. 일일이 역사적 사건에 의미 내지는

후세의 영향을 생각하고 작품을 읽는다면 머리가 터질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가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씌여진 작품을 읽을 적마다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질 무렵 어느 작품에서나 쉽게 접했고 선전했던 내용이 바로 이 작품

집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기원전 페르시아 제국그리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살라미스 해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도대체 누가, , 어떤 이유로 세계사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그런 전쟁을 일으켰는지

상당히 궁금증을 유발시켰는데, 이제 왜 그 전쟁이 중요하고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전쟁이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동양인이면서도 세계사적 10대 터닝 포인트에 동양과 관계된 하나의 사건

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화약의 발명, 인쇄술의 발명 그리고 칭기스칸의 대 정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은 너무 세계사를 서방의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그런

작품이었다고 생각하며,

작가께서 선정한 10대 터닝 포인트 중 세계1, 2차 대전과 잉카 및 마야 문명에 관한 사항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대해서는 본 독후감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해당 사실을 세세히 밝히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도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아직 더 밝혀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는 내가 궁금해 왔고, 잘 몰랐던 5가지 세계사적 터닝 포인트에 대한 약간 정리를

보았다. 해당 내용 중 일부는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충분히 배웠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

이 흘러 기억을 다 잃어 버려 기억을 되살리는 그런 시간도 되었지만 그것보다는 세계사적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는 그런 시간이었다.

아주 좋은 작품집이었다는 개인적인 생각과 함께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또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권유하는 진솔된 마음으로

본 작품집을 권하고 싶다. 가볍게.

나는 작가도 출판사와도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임을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

     

살라미스 해전

세계 4대 해전(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의 칼레 해전, 1592년의 한산도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 중 하나로, 지중해 도시국가 그리스와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으로 살라미스 섬의 좁은 해협에서 그리스의 연합함대 370여 척이 800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맞아 치룬 전투에 대한 이야기다.

 

[발 단]

기원전 5세기 경 서아시아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히며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

'다리우스 1'가 즉위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한다. 그는 지중해로까지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야욕에 불타지만 서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기반을

다지던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패권을 인정할 수 없었고 끝내 페르시아와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1차 원정''자연 재해', 2차 원정은 아테네인들이 헙심해 이를 막아

내 승리한다.(이 전쟁에서 '마라톤 평원의 신화'가 탄생하게 된다)

 

[전 개]

페르시아가 아테네에 패하자 '다리우스 1'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복수를 다짐하고

그리스 원정에 오르나 이들을 기다린 것은 스파르타(지상전)와 아테네(해상전) 연합군

이었다. 페르시아군의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 대항하는 그리스 연합군은 주변의 1,500

도시 국가였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여한 도시국가는 14개 밖에 안 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가 승리할 수 없었던 이유는 페르시아군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정복한 속국의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어 정신적인 면에 있어 단합되지 않는

문제를 나타내면서 스파르타를 제압하지 못한다.('300' 영화의 소재)

 

전쟁의 와중에 주목할 만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그는 아테네를

해양국가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를 유인해 패퇴 시킨다.

페르시아가 해상력을 보완해 살라미스 섬으로 진군해 오자 테미스토클레스에 의해

준비된 아테네 해군은 뜻하지 않은 호재를 만난다. 그것은 당시 아테네 해군은 창설된

3년 밖에 안 되어 함선을 급조했고, 좋은 선박용 목재를 사용하지 못해 배가 무거워

조정이 힘들었던 반면, 페르시아의 함선은 속력과 성능이 뛰어났으며 결정적으로 가벼

웠는데, 이 전쟁에서 예기치 않은 자연의 힘(북풍)으로 인해 거센 파도가 몰아치자 이를

역이용한 아테네 군은 배를 힘으로 몰아 부치는 작전을 전개해 페르시아 배에 근접해

뱃멀미로 고생하는 페르시아 군을 도륙했던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 이전에는 배들끼리 근접해 상대편 갑판에 뛰어들어 백병전으로 싸우는

전투가 일반적이었으나 이 해전에서 새로운 전술이 도입된 것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배의 선미에 장착된 '청동 충각'으로 적함의 현측을 파괴시키는 전술을

사용한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해전이다.

 

[전쟁의 결과]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동방의 서방에 대한 침입은 좌절'되면서 도시 국가 아테네는

그리스의 강국으로 부상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고, 페르시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과 철학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에게해 중심의 델로스 섬에서 해상동맹

(델로스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는 페르시아 침입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지배 하에 있는

국가들을 독립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가 동맹국들에게 많은 조공

과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면서 동맹국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하게 된다.

, 해전의 승리를 통해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냈던

아테네의 모습은 자국 내에서만 의미가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테네가 추구하던 자유

와 민주주의는 실패했다. 그로 인해 그리스 내부에 수많은 비평가가 등장한다.

헤로도투스, 소포클래스, 에우리피데스 등 학자들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오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했고 이는 '서양 정치철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의 변신]

한편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강압적인 행동에 반기를 든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아테네가

주축이 된 '델로스 동맹'에 대항하는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만드는데 급기야 두 동맹간에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헤로도투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그러나 예기치 않은 복병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의 와중에 발생한 '흑사병

창궐이었다. 이 전염병의 창궐로 전쟁은 답보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데 결국에는 페르시아

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가 전쟁에 이김으로써 30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리고 아테네는

정치보다는 문화의 중심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스파르타의 멸망]

승전국 스파르타도 역시 페르시아를 이긴 아테네와 동일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 지나친 주변국가에 대한 강압으로 동맹국들의 반발을 사 코린토스 전쟁이 일어나

스파르타는 승전국이되지만 적지 않은 타격을 입는데, 연이은 전쟁으로 스파르타의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연합군에 공격을 받아 '마케도니아'

속국이 되고, 페르시아 역시 살라미스 패전과 군소 반란에 지쳐 가다 기원전 330

 

마케도니아에 멸망당하고 만다.

 

[전쟁이 주는 의미]

- 세계사를 주도하던 동방의 대표격인 페르시아와 서양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싸움

   이었으나 페르시아의 패전으로 역사에서 동방이 완전히 물러나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지켜 낸 그리스 문명은 이후로 유럽 문화를 주도하며 오늘날

   서양 문명의 모태로 자리매김 한다.

-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의 우쭐거림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으로 확대

   되었고, 서구 역사가들을 통해 신화로 재탄생되면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방을 폄하

   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 해상 전력의 중요성은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전력 요소로 평가

   받고 있다.(볼리비아는 바다를 접하고 있지 않지만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

- 어떤 형태로든 자국의 인력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면 절대로 강력한 전력을 보여

   수가 없다.(이순신 장군, 트라팔가 해전, 이라크 전쟁 vs 로마군 등)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은 세계 3대 전쟁이었지만 대의적 명분 뒤에 탐욕이 감추어진 세계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가장 치욕스럽고도 이기적인 전쟁이었다.

 

[발 단]

1071년 이슬람 세력(셀주크 튀르크)이 동로마 제국을 침략해 3세기 이후 계속 성지 순례

형식으로 방문해 오던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방문을 금지하자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메카''메디나' 함께 자신들의 예언자인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제3의 성지에 해당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조치를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의 개시]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지자 교황(우르노바 2)'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독교 군가들을 대상으로 군대 파견을 읍소 하지만 정작 군대파견을 요청한

교황과 참가자인 영주, 농민 그리고 상인들의 입장과 속마음은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적

명분보다는 다른 데 더 높은 뜻이 있었다.

 

- 교황의 입장

   동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얻고 있는 '그리스 정교'까지 장악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제압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 영주들의 입장

   당시 유럽의 영주들은 '땅의 넓이 = 힘의 크기'라는 의식이 있어서 끊임없이 인근 영주들

   간의 분쟁이 그칠 날이 없을 정도로 혼란한 시기로, 교회 입장도 이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명분이 있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영주들은 동로마 제국을 평정할 경우

   전쟁 참여 보상으로 그에 상응하는 토지가 부수적으로 부여될 것으로 믿고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 상인들의 입장

     상인들은 이슬람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중해 무역을 되찾을 수 있다는 탐욕적인

     야욕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 전투요원인 서민과 환경적인 요인

   서민들 역시 전쟁에 나가 자신이 싸워 이긴 전리품를 챙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며,

   환경적으로는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연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같다는 의식 속에서 전쟁에 참여한다.

   , 전쟁에 참여하게 된 모든 계층은 형식적으로는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 걸고

   경제적 이익을 염두에 둔 전쟁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군중 십자군 전쟁(1096)]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096년 싸움에 능하지 않은 농민들과 농노들

그리고 일부 기사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은자 피에르'라는 과격분자에 의해 군대가 결성되

어 프랑스에서 출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 지방을 지나면서 폭도로 돌변하여 유대인을

살육한다.

그 이유는 흉년으로 삶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한 저질 민족이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인 인근 헝가리와 베오그라드에서도 잔인한 살육을 한다. 그러나 그들

은 정작 싸워야 할 이슬람군인 셀주크 튀르크 군을 '니케아'에서 만나 장렬히 전사하여

전멸하면서 '군중 십자군'은 아무 성과나 의미도 없이 끝나고 만다.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

1차 전쟁은 '그리스도 무덤''동방의 기독교'를 구한다는 가장 명분이 있는 전쟁이었으나

목적 달성 후 이성적인 자제력이나 신앙의 가르침 따위는 잊고 오로지 각자의 잇속을 챙기

기 위해 이슬람과 유대민족 3만 명을 살육한다.

 

[2차 십자군 전쟁(1147~1149)]

1차 전쟁으로 크게 당한 이슬람 제국은 셀주크 튀르크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하였으며

예루살렘 주변에서 기독교 국가들과 대치를 하던 중 이슬람 세력이 '에데사 백국'점령

하자 교황(에우제니오 3)가 원정 전쟁을 독려해 독일 '콘라드 3'와 프랑스 '루이 7'가 중심이 되어 출전 하나 전체적인 부조화로 인해 이슬람에 대패를 하고 2년도 못되어 귀환.

 

[3차 십자군 전쟁(1189-1192)]

1187년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맛딘(살라딘)'이 이끄는 군대가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교황(그레고리오 8)이 십자군 원정을 호소,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여러

십자군 원정 중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 많은 영웅담도 쏟아져 나온다.

 

영국(리처드 왕), 프랑스(필립 왕), 독일(프리드리히 1)이 연합으로 성지인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혼인 파기 사건으로 관계가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공조체제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 왕은 전투 준비 중 사망한다.

영국(리처드 왕)은 홀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고, 프랑스도 개별 진군을 벌이나 프랑스는

자신이 출전 앞서 세워 두었던 목표만 달성한 채 프랑스로 복귀하고 만다. 홀로 남은

리처드 왕은 고군분투 하다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살라딘'과 형식적인 협정만

맺고 철수를 하는데, 복귀 과정에서 리처드 왕은 난파를 당해 오스트리아에 볼모로

갇히게 되는데, 석방 조건으로 영국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받고 풀려나 5년 만에 귀환한다.

 

[4차 십자군 전쟁(1202~1204)]

이전의 십자군 전쟁과는 달리 목적지가 이슬람의 본거지인 '이집트'로 바뀐다.

4차 십자군 전쟁은 '플랑드르 백작''상파뉴 백작'이 주도했는데, 이탈리아의 부국

베네치아로부터 전쟁비용을 빌리고 수송과 배급도 베네치아에 맡기기로 하고 계약을 맺고

전투를 준비하지만 예상외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를 희망한 지원자가 적어 '전쟁 참여비'

받아 빚을 갚고 전쟁에 나가려던 그들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고, 참전 병사들은 빚 때문에

전투에 참전도, 고향으로도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된다.

이때 베네치아의 원수 '엔리코 단돌코'가 십자군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 헝가리 달라티아 지방의 '자라'는 기독교 지역으로 여기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경제적 야욕으로 인해 베네치아가 꼼수를 폈던 것이다. 교황청은 이를 문제 삼아 이후

4차 십자군 전체와 베네치아를 파문하게 된다.

 

한편 동로마 제국에서는 왕위를 놓고 큰 아버지(알렉시우스 3)와 조카(알렉시우스 4)

사이에 왕위 계승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조카가 십자군을 찾아가 자신이 왕위를 찾는데

도움을 주면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는 지원을 약속해 돈벌이에 눈이 먼 십자군은 콘스탄티

노플을 공략하여 왕위를 조카인 알렉시우스에게 승리를 안겨 주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십자군 자체가 동로마 제국을 접수해 별도의 제국을 세우고 지배한다.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자신들과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여 함락한 것과 군사를

모을 능력이 없음에도 자신들의 무능력을 덮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 욕망을 위해 아군마저

잔인하게 공격한 십자군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4차 십자군이 역대 십자군 중 가장

비난을 받고 있다.

   

[소년 십자군 전쟁(1212)]

4차 십자군과 5차 십자군 사이, 121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주도 되고 목동

'엔티엔'에 의해 '소년 십자군'이 발족한다. 성지 회복을 주장하며 프랑스의 소년 3만 명과

독일의 십대 2만 명으로 구성되어 출정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탐욕에 눈이 먼

어른들이었다. (소년 십자군을 태운 배는 아프리카 노예로 팔아 버린다.

 

[5차 십자군 전쟁(1218~1221)]

이집트를 전쟁 목적지로 출발하였으나 실패

     

[6차 십자군 전쟁(1228~1229)]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전쟁의 폐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피를 흘리지

않고 원정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이는 이집트 내란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 전략이 적중하여 예루살렘을 통치하지만 1239'맘루크 왕조'예루살렘을 정복하면

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7차 십자군 전쟁(1248~1249)]

1244년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공격, 기독교 세력 2천 여 명을 살해하는사건이 발생하

자 십자군을 이끌고 아프리카의 튀니지를 공격하지만 의외의 복병(오염된 물)으로 인해

원정에 실패한다. 이로써 200여 년간 이루어진 십자군 전쟁은 사실상의 막을 내리게 된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 이유]

1) 종교적 야욕보다 개인적인 욕망으로 인해 대외 명분이 약한 전쟁이었고

2) 다국적 군대로 획일적인 통솔이 불가능하였으며

3) 전투 장비의 중량화로 무거웠고 여름 날씨로 인해 효율적 전투 불가능했고

4)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필요한 장거리 전투였으며

5) 강력한 이슬람 세력의 결집

 

[십자군 전쟁의 파장]

십자군 전쟁을 부추긴 세력은 다름 아닌 교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전에는 가장

존경을 받았던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일반인들은 더 이상

교황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게 되었다.

특히 교황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사건이 연속해서 발생해 끝내는 종교개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반면 왕권은 강화된다.

, 전쟁에 나가 전사한 영주의 토지를 물려 받을 후손이 없게 된 토지는 왕이 이를 귀속시

키면서 왕권은 몰라보게 강화되는데 종국에는 왕의 말은 신의 말과 동격이라는 왕권신수

'까지 나오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왕이 신으로 군림할수록 지배를 받는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반발심과 증오심이

자랐으며 훗날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또한 시민들은 영주와 기사계층이 몰락하게 되자 그 울타리에서 삶을 영위하던 농노들의

일부는 그 자리에 남고, 일부는 자유를 찾아 도시로 나가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자 농노가 절대 부족하게 되자 장원제도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1천년을 굳건히 이어져 온'봉건 제도'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장원제도가 무너지고 영주들의 힘이 약화되자 도시에서는 상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서 동방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 전쟁 물자를 보내던 길을 무역로로 활용함해 동방과의 교역을 한 층 증대시키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십자군 전쟁

혜택을 톡톡히 봤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성장세가 두드러져서 전쟁이

끝난 후로는 동방무역을 독점하기도 했다. 아울러 국가에서는 '현물'로 받아 오던 세금을

'화폐'로 받기 시작했으며 또 먼 곳까지 물건대금을 송금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인 금융기법이 발달할 수 있었다. 상업의 발달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으로 연결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바탕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4차 십자군 전쟁에서 빼돌린 문화유산은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의 찬란한 문화 영향을 받아 중세의 어둠을

벗어 던지고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었으며 유럽의 문명이 세계 속으로 뻗어 나가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참고로 십자군 전쟁 이후로 예수의 얼굴에 수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자군 전쟁이 낳은 또 다른 후유증]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이 승리였지만 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먼저, 전쟁과정에서 십자군들이 무지막지한 약탈을 자행하였고 수많은 이슬람 및 유대인

들을 살육하였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 정교를 믿는

자유가 부여 되었으나 십자군 전쟁이후에는 이슬람의 '지하드(성전)'가 나오면서 그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결국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이 얻은 것은 '살구'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고 한다.

 

흑사병의 창궐

흑사병은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와 중동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토병이었다.

1334년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1343년 러시아 남부에서 벌어진 '카파성 전투’를

거치면서 크게 창궐하는데, 당시 그 성은 이탈리아의 점령지로 어느날 몽골군이 전쟁을

걸어와 싸우는 과정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를 이용해 성곽 안으로 날려

보내면서 크게 확산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럽 전 지역으로 흩어

지게 되면서 흑사병이 유럽지역에창궐하게 된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하자 유럽인들은 평소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던 고리대금업으로 성공한

유대인들을 흑사병 발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데 급기야는 1348년 유대인들을 피고로 해

종교재판까지 열린다. 유대인들의 희생이 적었던 이유는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에

따라 개인 위생에 철저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흑사병이 낳은 또 다른 문화는 '채찍질 고행'이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지금의 상황이 인간의 죄를 보다 못한 신이 분노한 때문'이라고 판단

하여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이를 막아 보고자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는데, 당시 고난의

채찍질 행렬에 대해 당시 로마 교회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이유는 자신들만의 고유 영역으로 보았던 '속죄 의식'을 채찍질 고행자들이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1349년 교황청에서 이를 비난하는 교서를 발표하면서 '채찍질 고행'

자취를 감추게 된다.

 

흑사병은 십자군 전쟁의 영향을 받아 근간이 흔들리던 농노제도의 붕괴를 가속화시킴과

동시에 자영농이 등장을 촉진하게 된다. 이런 현상들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제의

확립으로 이어졌으며 또한 반교회 움직임도 본격화되었다.

그 이유는 시체가 즐비하자 이를 치우고 거들어 주던 성직자들이 흑사병에 감염되어

많은 성직자들이 사망하자 가혹한 형벌이라 믿었던 흑사병 앞에서 수도자들과 성직자들

역시 무기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직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고, 부족한

성직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뽑다 보니 무자격인 사람들이 대거 종교계로 나가면서 교회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결국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참고로 이 시기에 등장하는 성화에는 슬픔에 찬 성모마리아가 자주 등장한다.

 

건축 양식의 변모가 아이러니컬 하게도 '흑사병'의 확산을 막는 역할을 한다.

, 벌목이 횡행하면서 병원체를 옮기던 들쥐들의 통로가 사라지면서 들쥐로 인해

옮겨지던 흑사병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300년에 걸쳐 100차례 이상 주기적으로

창궐하다가, 1700년대에 들어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결국 흑사병은 기존의 봉건 질서와

종교적 관념, 윤리 등을 뒤흔들고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터키의 대표 도시 '이스탄불'은 두 개의 얼굴이 공존한다. 하나는 기독교 색채를 띤

'비잔티움의 얼굴''이슬람의 얼굴'이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 정교회를 대표하는 건물

(성 소피아 성당)이 이슬람의대표적인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 기원전 7~8세기 경 메가라 왕국의 수도로 '메가라'로 불렸지만 그리스에 정복된 다음에

'비잔티움'으로 이름을 바꾼다. 330년 콘스탄티누스1세가 이 곳을 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한 '오스만 튀르크'가 점령하면서

이슬람식인 '이스탄불'로 개칭되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자 아들들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고 무능한 왕들은 이민족 장군들에게 통치를 맡겼다가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나 동로마 제국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성장해 나간다.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과

이슬람 세력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를 견제하는 세력은 교황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받았지만 성장하고 있었는데 흑사병이

겹치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락한 상태에서 셀주크 투르크를 이은 오스만 투르크(술탄,

매머드 2)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당한다.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술탄

슐레이만은 헝가리를 정복하고 기독교 연합 함대를 격파해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에 대패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17세기 말에 오스트리아에 헝가리를, 러시아에게 크림반도의 일부를 내 놓게 되는데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면서 과거 오스만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으로 유럽 각국의 무역 형태에 큰 변혁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대항해 시대의 개막으로 '지중해 무역''실크로드'의 쇠퇴를 촉진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 동안 지중해 무역을 장악해 왔던 '베네치아''제노바'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비잔티움 문화는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의 특성을 기반으로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시킨

매우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잘 보전해 문화의 저장고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특히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로 동로마 제국의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대거

유입되면서 인간 중심의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둔 비잔티움 문화까지도 함께 이루어지는

데 이는 르네상스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잔티움 문화는 동유럽

지역은 물론이고 이슬람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동로마 제국이 담당했던 그리스

정교의 수장 역할은 러시아에게로 넘어가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트라팔가 해전 

'호레이쇼 넬슨'12살에 해군에 입대하여 서인도 제도와 무역을 하는 상선 선원으로

일하며, 21세에는 프리깃 함의 최연소 함장이 된다. 숱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며

36세에는 프랑스와의 해전에서 포탄의 파편에 맞아 오른 눈을 잃는다.

1796년 준장으로 승진한 그는 프랑스 해안을 독자적으로 봉쇄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듬해

스페인 함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어 영국이 지중해를 탈환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그 해에 또 다른 전투에 참가해 오른팔을 잃는 부상을 당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1년 뒤 다시

지중해로 복귀해 나폴레옹과 맞붙는다.

 

당시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압하지 않으면 '동방 원정'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영국의 해상

길목인 이집트를 제압해 인도로 가는 영국의 무역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생각하지만

'넬슨'에 의해 좌절 당한다.(나일 해전)

나폴레옹은 이 패전으로 자신이 그 동안 쌓은 업적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막고자 서둘러

아프리카 원정에서 돌아와 1804년 황제에 등극한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활발히 일어나고 경제가 원활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무역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영국의 선진공업 기술을 무시하고, 오직 군사력만으로 내륙의 항구와 경제가 영국과 거래하는 것을

막는 '대륙 봉쇄령'을 강행하나 타격을 받은 나라는 영국이 아닌 영국에 무역 의존도가

컸던 나라들이었고 급기야 이들 국가의 경제를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영국을 봉쇄하려던 나폴레옹의 계획은 나폴레옹 자신을 고립시키고 스스로 몰락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고 만다.

 

1805년 스페인 남서쪽 카디즈와 지브롤터 해협 사이의 트라팔가르 곶에서 영국배 27척과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 33(프랑스 18, 스페인 1)과접전을 벌이나 수적으로 열세

였던 영국은 별다른 손실이 입지 않지만 및 스페인 연합 함대는 모두 22(5척 격침, 17

나포)의 손실을 입는다.

 

180547세의 나이에 '트라팔가 해전'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은 그는

"긴 말은마지막까지 국가를 위한 임무를 수행하게 해 주신 신께 감사한다.

 이제 나는 내 임무를 다했다

였다고 한다. 

   작품으로부터 얻은 지식들

 

   -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무찌르고 마라톤의 전설을 이룬 아테나의 장수는

     '밀티아데스 장군'이었다.

 

   -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함

     을 정당화하는 경향,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서양에 비해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타락했으

     며 열등하다는 식의 인식으로 숱한 문학작품과 그림 등에 표현되어 왔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인들을 괴물로 표현한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 노르웨이의 '라이프 에릭슨'이 서기 1,000년경 아메리카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 15세기경만 해도 지중해의 끝자락인 지브롤터 해협의 암벽에는 'No Ultra'

      더 이상 넘어가지 말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 지도제작자인 '발트 제뮐러'라는 사람이 1570년에 세계지도를 제작하면서 아메리고의

     이름을 신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도에 기입하면서 이때부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잉카 제국이 급작스럽게 멸망한 이유는 스페인들과 잦은 접촉을 하면서 스페인들

     몸에 묻어져 들어온 병원균 즉, 천연두에 의해 100~150년에 걸쳐 1억 명 정도의

     인구가 10%만 살아남게 되는 대 재앙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독일 외무장관이던 '아서 치어만'이 멕시코에 암호 편지를 보냈는데 연합국에서

      이를 입수, 분석해 본 결과 '만약 멕시코가 독일을 지원하면 1848년 당시 멕시코가

      미국에게 빼앗긴 땅을 돌려받게 해 주겠다'는 내용을 접하고 또 미국의 상선 3척이

      연속해 독일 공격으로 격침 당하자 191742일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 미국은 전쟁기간 동안 유럽에 식량과 무기를 팔아 돈을 벌었다.

     , 미국은 독일에 차관을 주어 산업을 재건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또 독일은

     이 차관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 배상금을 갖고 전쟁 기간 중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 부채비용을 지불하는 등

     전쟁으로 인해 배를 불린 것은 미국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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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법정 스님 전집 7
법정 지음 / 샘터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8  

  

겨울산이 적막한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겨울산에 새 소리가 없어서라는 '화두'

시작되는 이 에세이는, 각박하고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 번쯤은 되짚어

볼 만한 문구들로 채워진 작품이었다.

어느 때보다 '자기 성찰''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 시대를 밝혀 줄 명상집이었다고

작품을 평하고 싶다. 무엇을 느끼고 그 소감을 적기 보다는 책 속에서 법정스님께서 하신

말씀을그대로 옮겨 적어 보고자 한다.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 분의 음성을, 생각을, 마음을 직접 체험해 보라는 의미로...

- 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 고귀한 성인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책 속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한 낱 그 사람이

   남긴 찌거기에 불과하다.

-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독일의 철학자이며 심리학자 '페히너')

- 개체의 삶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 '사랑''이해'는 사람의 중심을 통해서 이루지고, '인간의 진실'은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속에서 꽃 피어난다.

- 소유를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정신활동을 자유롭게 한다

   소유에 눈을 팔면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 깨달음은 굳이 말을 하자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것이고, 꽃향기처럼 풍겨 오는 것

   그러니 깨닫기 위해서 정진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또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게 나누는 자비의 실현'이다.

- 수행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자기반성이 결여된 종교는 온전한 종교일 수 없다.

- 공부가 됐건 무엇이든 전적으로 하라. 어중간한 것은 사람을 퇴보시킨다.

   하다가 그만두지 말라. 안 한 것만 못하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기울여라. 그 때 자기 안에서 어떤 변혁이 일어난다.

   그 변혁의 과정에서 참된 자기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 흙에서 멀어질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

- '청빈(淸貧)'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고, '빈곤(貧困)'은 결핍에서 온 주어진 가난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덕이다.

- 향기 없는 꽃이 아름다운 꽃일 수 없듯이 향기 없는 삶 또한 온전한 삶일 수 없다.

-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쉬운데 '사랑'은 감화를 시킨다.

   '지식은 행동을 동반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 덕행의 실천보다 더 좋은 설교는 없다.

-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있고 없음은 서로를 낳아 주고, 쉽고 어려움은 서로를 이루어 주며, 길고 짧음은 상대를 

    들어 내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를 다하게 하며, 음과 소리는 서로 화답하고, 앞과 뒤는 

    서로를 뒤따른다'

-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 낸 문명이지만 거기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그 문명으로

   부터 배반을 당할 때가 반드시 온다. 문명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 분수 밖의 욕구인 탐욕은 목마른 허욕일 뿐 근원적으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 노동의 목적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자기 표현수단.

- 온전한 삶에는 반복이란 없다,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이다.

- 덕은 반드시 이웃을 거느리며 적게 가질수록 사랑할 수 있다.

-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려면 자기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멍들게 하는 분수

   밖의 소유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소유의 좁은 골방에 갇혀 드넓은 정신세계를 보지

   못한다.

-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되풀이되는 이 반복 속에서 보다 

   심화된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 존재의 바탕인 침묵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 조고각하(照顧脚下)란 자신의 현 존재를 살펴보라는 법문이다.

- 궁극적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이다. 기도의 마지막 단계는 침묵 속의 명상이다.

- 진정한 명예란 자기 자신다운 긍지와 자존심을 뜻한 말이다.

- 균형과 조화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활기요 지혜다. 인간끼리 모여 사는 사회에도

   자정 능력이 있다. 그것은 건전한 가치 의식과 도덕성일 것이다.

-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난다. 감정은 인간 안에 깃들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란다.

-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우리의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하다(간디)

-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부터 얼마만큼 있다.

- 영혼에는 나이가 붙지 않으므로 나이가 어리다고 지레짐작으로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 가족과 친지들에게서 듣는 칭찬과 격려의 말은 우리 삶을 이루는 데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다.

- 생활에 불편함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그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체력과 의식이 살아

   움직여 삶에 리듬을 가져온다.

- 불심(佛心)이란 큰 자비심이다. 대자(大慈)란 모든 중생(이웃)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고, 대비(大悲)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뜻이다.

- 유능한 제자는 스승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여러 속담이 있다.

   예로서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靑出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에서 이루어지지만 물보다 차다'라는 말은 다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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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기에 나는 기꺼이 세상을 떠난다
루이제 린저 지음, 김서정 옮김 / 예하 / 1998년 10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8

 

그녀(1911~2002)70-80년대 남북한을 오가며 그 실상을 알렸다는 사실과 그녀가 나치가 독일 

점령 당시 '종신형'으로 감옥에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그녀의 경험들이 아주 사소한 개인의 고통에도 민감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1911. 4. 30 독일 바이에른주 피츨링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뮌헨대학에서 

교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대학졸업 후 35년부터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였으나

1939년 학교로부터 '나치스'에 가입하라는 독촉을 받게 되자 교단을 떠났다.

같은 해 젊은 작곡가와 결혼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40년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파문 Die glaesernen Ringe"을 완성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로서 병상에 있던 

헤르만 헤세가 찬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44년 남편이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고 린저는 히틀러 정권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작품의

출판금지를 당하고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어 반나치스 활동으로 투옥되었으

194410,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전으로 1945년 석방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기형식인옥중기 Gefaengnistagesbuch46년에 발표했고 이후

린저의 작품에는 인류의 비극에 대한 묘사와 고발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유대인에게 가했던 동족의 만행을 고발한 반파시즘적인 중편 

"얀 로벨 Jan Lobel aus Warschau"(1948)에도잘 나타나 있다

1950년에 발표한 생의 한가운데 Mitte des Lebens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이 작품으로 

슈켈레(schickele) 문학상을 수상했다.

린저는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으며 한국 관련 저서도 많이 집필했다. 그 중 작곡가 

윤이상과의 대담록인 상처입은 용 Der verwundete Drache(1977)북한 방문 후 또 하나의 

조국등을 집필했다.

린저는 80세가 넘은 나이에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 위해 히말라야를 방문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20023월 바이에른주 운터하힝에 있는 한 양로원에서 9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이상은 그녀의 생애에 관한 짧은 정리였다.

 

작가가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주제라고 생각되는 단어는 '종교', '사랑' 그리고 '희망이었다고 생각한다. 본 작품이 작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주옥같다고는 하나 나의 개념으로는 그리 주옥

같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작가가 상당히 고뇌하면서 자신의 작품 중에서 '정수'라고 생각되는 작품들만 모아 놓았을 

터이지만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간단한 터치로 짚고 넘어 가도 될 쉽고도 편한 이야기를 난해한 해석으로 이끌고 있어 생각이 짧은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본 작품에 대한 서평을 달리 기록할 것이 없어 작가의 연혁과 함께 글을 옮긴이 분이 작품에 대한 서평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올려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소회를 대신 하고자 한다.

 

작가는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 

"내 모든 글 안에서 나의 인생과 함께 말하고 싶었던 것들의 정수"

라면서 뽑아 낸 글들은, 아름다웠고 반가웠다.

2차 대전 전후 그 암울했던 시기의 독일을 살아가면서 인간과 신에 대해 절망하고 희망하면서

삶과 종교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찾아간 그의 인생 여정, 그 가운데서도 그야말로 '정수'라고 할 

만한 부분들이 이 책 안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것이 반짝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사랑'이라는 빛을 스스로의 안에서 끌어내려고 애쓰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 모든 고통에 대한 위안, 모든 절망에 대한 희망은 아마도 

사랑, 결국은 사랑이다. 발 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오히려 흔해진 이 단어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저자는 지치지도 않은 채 역설하고, 그것은 자신의 그 모든 고난과 방황 가운데서 체험적

으로 나온 말이기 때문에 더 힘이 있고 감동적이다.

영혼의 위로가 무슨 소용 있느냐는 린저의 외침은, 사실은 영혼의 위로가 가장 필요하다는 말의 

반어적 표현이다. 이제 우리 세기의 정신적 증인으로서 재평가 받기 시작하는 이 노작가가 

고뇌했던 문제가 우리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그가 찾아낸 해답이 뭔가 새롭고 위대한 

철학이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 일상과 인식의 세계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그야말로 위로가 되었다.

다른 독자들도 나처럼 이 책 안에서 영혼의 위로와 휴식을 찾고,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 실천에 대한 도전을 받는 시간을 발견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느 서평에 올라 온 내용을 인용해 보았는데 읽어도 잘 모르겠다)

 

책에서 얻은 문구들

 

- 지고한 사랑의 순간에 있는 인간은 이미 ''가 아닌 것이다.

 

-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란, 그의 짐을 내 능력껏 지는 일이고, 나의 짐을 그의 힘에 맞게 지워

  주는 일이다.

 

- 인간을 사랑한다는 일은 그와 더불어 그에게 속한 현실을 사랑하는 일.

 

-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한다.

  결혼은 그런 질서의 한 부분이며 표현이다.

 

- 인간 사이의 관계만큼 상처받기 쉽고 허무한 것이 없다.

  비통한 실망을 경험하는 것만큼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없다.

 

- 죽음이라는 건 없다. 죽어 가는 것이 있을 뿐, 그것은 또 다른 상태로의 변화이다.

 

- 우리 인간은 동물들의 구원을 도울 때에야 비로소 구원받을 것이다.

 

- 사랑할 때 혹은 아이를 낳았을 때, 혹은 어떤 진실을 발견했을 때 인생은 멋지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저 아주 조금만 맛보기로 

  받을 뿐이고, 그런 뒤에는 곧 빼앗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사람이 지금 물을 길을 수 있다는 것, 지금 장작을 옮길 수 있다는 것,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

  현재 외에 다른 것은 없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가 들어 있다,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야 한다

  현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현재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만난다

  현재 안에서 우리는 함께 있고 현재 안에서 영원한 하모니가 되비친다.

 

- 우리가 ''이라 부르는 것이 없으면 ''도 존재하지 않고, 악마가 없으면 신()도 존재 하지 

  않는다.

 

- 어둠이 가장 캄캄할 때, 길을 잃었을 때 신은 우리 곁에 있다.


- 신은 인격이고, 에너지이고, 끝없는 움직임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이다.

 

- 사람은 '행복'할 때 '연민의 고통'을 준비해야 한다

  사람은 '고통'스러울 때 '위안과 행복'을 준비해야 한다.

 

- 문제는 신이 하거나 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인간이 하거나 하지 않은 일이다.

 

- 우리는 오직 그릇된 상상을 죽여야 한다.

  예수 스스로 자신을 통해서 '아버지'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우리는 인간이 창조의 맨 위쪽에 있다고 여기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그 때문에 불안해하며, 그 때문에 노력한다

  우리는 이제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해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를 발전시키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종교는 각자 나름대로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나신을 다른 구조와 

  분리시킨다. 종교란 이런 겁니다.

 

-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키에를 키고르)

 

- 인간은 이 세상에서 절망을 몰아 낼 수는 없지만, 희망 없음의 심연 속으로 가는 사람을 

  절망하지 않도록 도와 줄 수는 있습니다. 그 구원의 줄은 바로 '사랑'입니다.

 

- 어떤 것을 희망한다는 말은, 내가 소원과 기대와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 무신론자들이 믿는 걸 원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 이상의 존재가 있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게

  그들의 세계관이나 경험에 반하기 때문이다.

 

- 세상에 모순점은 없다. 극점만이 있을 뿐이다.

 

-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새로운 도덕이다.(테네시 윌리엄스)

 

- 종교는,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전체에 대한 사랑, 존재와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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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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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7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업적에 대해 자랑과 함께 길이

보전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도 알려지고, 물려주고 싶지 않은 역사에 대해서는 새색시

방귀뀌듯 조용히 입을 다문다.

렇게 잊혀지는 역사적 사실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또 학교 시험문제에

자주 나오는 사항으로만 인식하는 후손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채 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사실로만 인식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적 진실을 호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핏발을 세우고 목청을 높여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는 왜곡되고 변질된 채 머무르고 있는 우리의 역사적 진실은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왜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은 분명 우리의 역사이면서도 우리것화 하지 못한 우리의 치부를 문학적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모두가 읽으며 왜 우리는 우리의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려 하는지

또 쉬쉬하며 살아왔는지를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보자.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고 있고 또한 그 상흔이 아직도 해당 지역을 비롯한 우리주변

곳곳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음에도 우리들은 그러한 아픔에 침묵하고 있다.

또 그러한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존하는 우리들의 '순이삼촌'

있음에도 왜 우리들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는 우리의 기득권들은 침묵하는가!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비록 당시 우리들의 '순이 삼촌'들에게 만행이 행해지던 그날, 육체적인 많은 '순이삼촌

들은 죽었을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순이 삼촌'들은 구천을 떠돌며 죽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구천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순이 삼촌''제주4.3사태'를 역사적 배경으로 깔고 탄생된 작품으로 나는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잘 몰랐다.

내가 단순히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우리 문학작품에서 빛나는 작품' 속에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선정했으며 그냥 무의식적으로 책을 펼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 작품은 살아서 역사를 말하고 있었으며 우리의 숨겨진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책에서 ''가 묻어나고 있었으며 한숨이, 비명이, 울음이, 한탄의 소리가

울리고 있는 작품이었다.

낮에는 빨갱이의 첩자로, 밤에는 토벌군의 앞잡이었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이념의

한편에도 설 수 없었던 민초들이 자구책으로 자신의 뿌리인 마을을 등지고 자기 방어의

일환으로 산으로도, 마을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제주도 여기저기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

된 동굴 속에 숨어 들어가 생명을 연장시킨다. 그도 저도 못하던 사람들은 한 쪽 편에

섰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작품을 접하는 나는, 가슴이 아프기 이전에 어째서 이런 일이 우리들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느냐 하는 점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집에 나타난 또 다른 작품인 '소드방 놀이'(제주도

민속놀이의 일종)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궁휼했던 시대에 관리들의 착취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을 주제로 만들어진 작품인데,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관리나 양반의 잘못을 자신이 부리고 있는 하인들에게 주인을 대리해 벌을 상징적으로

받게 하는 소드방 놀이는 관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 관리를 대신해 벌을 받는 자신의

하수인을 상징적으로 벌을 준 다음 풀어줘 다른 지역에 가서 살기를 원했으나 저질

관리의 착취에 불만이 높았던 민심이 폭발하여 주민들이 하수인을 돌로 쳐 죽이고 만다

으로 결과가 나타나면서 작품이 끝나고 있는데, 이때 죽어가는 하수인의 처한 상태가

제주4.3사태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이 시대가 우리 자신의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왜곡되게 우리의

후세들에게 전달해 왔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편파적으로 기술하고 교육하고 있는지를

절감했다.

제주4.3사태의 피해자는 당시의 제주도민이 아니라 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긴 말이 필요없다. 읽고, 느끼고, 함께 공분하며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떠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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