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포인트 10 -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거대한 사건
심현정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10

 

세계사를 가볍게 읽거나 학창시절 공부했던 사람들은 각자가 세계사를 접하고, 읽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체득하게 되는 느낌에 따라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계사적

변곡점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이런 이유로 후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저것은 아마도 저래서 중요하다

는 등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 대개의 사람들은 단순히 그냥 읽고, 즐길 것이다. 일일이 역사적 사건에 의미 내지는

후세의 영향을 생각하고 작품을 읽는다면 머리가 터질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가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씌여진 작품을 읽을 적마다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질 무렵 어느 작품에서나 쉽게 접했고 선전했던 내용이 바로 이 작품

집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기원전 페르시아 제국그리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살라미스 해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도대체 누가, , 어떤 이유로 세계사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그런 전쟁을 일으켰는지

상당히 궁금증을 유발시켰는데, 이제 왜 그 전쟁이 중요하고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전쟁이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동양인이면서도 세계사적 10대 터닝 포인트에 동양과 관계된 하나의 사건

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화약의 발명, 인쇄술의 발명 그리고 칭기스칸의 대 정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은 너무 세계사를 서방의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그런

작품이었다고 생각하며,

작가께서 선정한 10대 터닝 포인트 중 세계1, 2차 대전과 잉카 및 마야 문명에 관한 사항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대해서는 본 독후감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해당 사실을 세세히 밝히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도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아직 더 밝혀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는 내가 궁금해 왔고, 잘 몰랐던 5가지 세계사적 터닝 포인트에 대한 약간 정리를

보았다. 해당 내용 중 일부는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충분히 배웠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

이 흘러 기억을 다 잃어 버려 기억을 되살리는 그런 시간도 되었지만 그것보다는 세계사적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는 그런 시간이었다.

아주 좋은 작품집이었다는 개인적인 생각과 함께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또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권유하는 진솔된 마음으로

본 작품집을 권하고 싶다. 가볍게.

나는 작가도 출판사와도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임을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

     

살라미스 해전

세계 4대 해전(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의 칼레 해전, 1592년의 한산도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 중 하나로, 지중해 도시국가 그리스와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으로 살라미스 섬의 좁은 해협에서 그리스의 연합함대 370여 척이 800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맞아 치룬 전투에 대한 이야기다.

 

[발 단]

기원전 5세기 경 서아시아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히며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

'다리우스 1'가 즉위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한다. 그는 지중해로까지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야욕에 불타지만 서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기반을

다지던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패권을 인정할 수 없었고 끝내 페르시아와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1차 원정''자연 재해', 2차 원정은 아테네인들이 헙심해 이를 막아

내 승리한다.(이 전쟁에서 '마라톤 평원의 신화'가 탄생하게 된다)

 

[전 개]

페르시아가 아테네에 패하자 '다리우스 1'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복수를 다짐하고

그리스 원정에 오르나 이들을 기다린 것은 스파르타(지상전)와 아테네(해상전) 연합군

이었다. 페르시아군의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 대항하는 그리스 연합군은 주변의 1,500

도시 국가였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여한 도시국가는 14개 밖에 안 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가 승리할 수 없었던 이유는 페르시아군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정복한 속국의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어 정신적인 면에 있어 단합되지 않는

문제를 나타내면서 스파르타를 제압하지 못한다.('300' 영화의 소재)

 

전쟁의 와중에 주목할 만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그는 아테네를

해양국가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를 유인해 패퇴 시킨다.

페르시아가 해상력을 보완해 살라미스 섬으로 진군해 오자 테미스토클레스에 의해

준비된 아테네 해군은 뜻하지 않은 호재를 만난다. 그것은 당시 아테네 해군은 창설된

3년 밖에 안 되어 함선을 급조했고, 좋은 선박용 목재를 사용하지 못해 배가 무거워

조정이 힘들었던 반면, 페르시아의 함선은 속력과 성능이 뛰어났으며 결정적으로 가벼

웠는데, 이 전쟁에서 예기치 않은 자연의 힘(북풍)으로 인해 거센 파도가 몰아치자 이를

역이용한 아테네 군은 배를 힘으로 몰아 부치는 작전을 전개해 페르시아 배에 근접해

뱃멀미로 고생하는 페르시아 군을 도륙했던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 이전에는 배들끼리 근접해 상대편 갑판에 뛰어들어 백병전으로 싸우는

전투가 일반적이었으나 이 해전에서 새로운 전술이 도입된 것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배의 선미에 장착된 '청동 충각'으로 적함의 현측을 파괴시키는 전술을

사용한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해전이다.

 

[전쟁의 결과]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동방의 서방에 대한 침입은 좌절'되면서 도시 국가 아테네는

그리스의 강국으로 부상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고, 페르시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과 철학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에게해 중심의 델로스 섬에서 해상동맹

(델로스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는 페르시아 침입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지배 하에 있는

국가들을 독립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가 동맹국들에게 많은 조공

과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면서 동맹국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하게 된다.

, 해전의 승리를 통해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냈던

아테네의 모습은 자국 내에서만 의미가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테네가 추구하던 자유

와 민주주의는 실패했다. 그로 인해 그리스 내부에 수많은 비평가가 등장한다.

헤로도투스, 소포클래스, 에우리피데스 등 학자들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오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했고 이는 '서양 정치철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의 변신]

한편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강압적인 행동에 반기를 든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아테네가

주축이 된 '델로스 동맹'에 대항하는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만드는데 급기야 두 동맹간에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헤로도투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그러나 예기치 않은 복병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의 와중에 발생한 '흑사병

창궐이었다. 이 전염병의 창궐로 전쟁은 답보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데 결국에는 페르시아

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가 전쟁에 이김으로써 30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리고 아테네는

정치보다는 문화의 중심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스파르타의 멸망]

승전국 스파르타도 역시 페르시아를 이긴 아테네와 동일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 지나친 주변국가에 대한 강압으로 동맹국들의 반발을 사 코린토스 전쟁이 일어나

스파르타는 승전국이되지만 적지 않은 타격을 입는데, 연이은 전쟁으로 스파르타의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연합군에 공격을 받아 '마케도니아'

속국이 되고, 페르시아 역시 살라미스 패전과 군소 반란에 지쳐 가다 기원전 330

 

마케도니아에 멸망당하고 만다.

 

[전쟁이 주는 의미]

- 세계사를 주도하던 동방의 대표격인 페르시아와 서양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싸움

   이었으나 페르시아의 패전으로 역사에서 동방이 완전히 물러나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지켜 낸 그리스 문명은 이후로 유럽 문화를 주도하며 오늘날

   서양 문명의 모태로 자리매김 한다.

-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의 우쭐거림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으로 확대

   되었고, 서구 역사가들을 통해 신화로 재탄생되면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방을 폄하

   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 해상 전력의 중요성은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전력 요소로 평가

   받고 있다.(볼리비아는 바다를 접하고 있지 않지만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

- 어떤 형태로든 자국의 인력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면 절대로 강력한 전력을 보여

   수가 없다.(이순신 장군, 트라팔가 해전, 이라크 전쟁 vs 로마군 등)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은 세계 3대 전쟁이었지만 대의적 명분 뒤에 탐욕이 감추어진 세계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가장 치욕스럽고도 이기적인 전쟁이었다.

 

[발 단]

1071년 이슬람 세력(셀주크 튀르크)이 동로마 제국을 침략해 3세기 이후 계속 성지 순례

형식으로 방문해 오던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방문을 금지하자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메카''메디나' 함께 자신들의 예언자인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제3의 성지에 해당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조치를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의 개시]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지자 교황(우르노바 2)'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독교 군가들을 대상으로 군대 파견을 읍소 하지만 정작 군대파견을 요청한

교황과 참가자인 영주, 농민 그리고 상인들의 입장과 속마음은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적

명분보다는 다른 데 더 높은 뜻이 있었다.

 

- 교황의 입장

   동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얻고 있는 '그리스 정교'까지 장악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제압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 영주들의 입장

   당시 유럽의 영주들은 '땅의 넓이 = 힘의 크기'라는 의식이 있어서 끊임없이 인근 영주들

   간의 분쟁이 그칠 날이 없을 정도로 혼란한 시기로, 교회 입장도 이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명분이 있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영주들은 동로마 제국을 평정할 경우

   전쟁 참여 보상으로 그에 상응하는 토지가 부수적으로 부여될 것으로 믿고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 상인들의 입장

     상인들은 이슬람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중해 무역을 되찾을 수 있다는 탐욕적인

     야욕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 전투요원인 서민과 환경적인 요인

   서민들 역시 전쟁에 나가 자신이 싸워 이긴 전리품를 챙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며,

   환경적으로는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연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같다는 의식 속에서 전쟁에 참여한다.

   , 전쟁에 참여하게 된 모든 계층은 형식적으로는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 걸고

   경제적 이익을 염두에 둔 전쟁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군중 십자군 전쟁(1096)]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096년 싸움에 능하지 않은 농민들과 농노들

그리고 일부 기사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은자 피에르'라는 과격분자에 의해 군대가 결성되

어 프랑스에서 출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 지방을 지나면서 폭도로 돌변하여 유대인을

살육한다.

그 이유는 흉년으로 삶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한 저질 민족이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인 인근 헝가리와 베오그라드에서도 잔인한 살육을 한다. 그러나 그들

은 정작 싸워야 할 이슬람군인 셀주크 튀르크 군을 '니케아'에서 만나 장렬히 전사하여

전멸하면서 '군중 십자군'은 아무 성과나 의미도 없이 끝나고 만다.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

1차 전쟁은 '그리스도 무덤''동방의 기독교'를 구한다는 가장 명분이 있는 전쟁이었으나

목적 달성 후 이성적인 자제력이나 신앙의 가르침 따위는 잊고 오로지 각자의 잇속을 챙기

기 위해 이슬람과 유대민족 3만 명을 살육한다.

 

[2차 십자군 전쟁(1147~1149)]

1차 전쟁으로 크게 당한 이슬람 제국은 셀주크 튀르크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하였으며

예루살렘 주변에서 기독교 국가들과 대치를 하던 중 이슬람 세력이 '에데사 백국'점령

하자 교황(에우제니오 3)가 원정 전쟁을 독려해 독일 '콘라드 3'와 프랑스 '루이 7'가 중심이 되어 출전 하나 전체적인 부조화로 인해 이슬람에 대패를 하고 2년도 못되어 귀환.

 

[3차 십자군 전쟁(1189-1192)]

1187년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맛딘(살라딘)'이 이끄는 군대가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교황(그레고리오 8)이 십자군 원정을 호소,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여러

십자군 원정 중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 많은 영웅담도 쏟아져 나온다.

 

영국(리처드 왕), 프랑스(필립 왕), 독일(프리드리히 1)이 연합으로 성지인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혼인 파기 사건으로 관계가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공조체제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 왕은 전투 준비 중 사망한다.

영국(리처드 왕)은 홀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고, 프랑스도 개별 진군을 벌이나 프랑스는

자신이 출전 앞서 세워 두었던 목표만 달성한 채 프랑스로 복귀하고 만다. 홀로 남은

리처드 왕은 고군분투 하다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살라딘'과 형식적인 협정만

맺고 철수를 하는데, 복귀 과정에서 리처드 왕은 난파를 당해 오스트리아에 볼모로

갇히게 되는데, 석방 조건으로 영국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받고 풀려나 5년 만에 귀환한다.

 

[4차 십자군 전쟁(1202~1204)]

이전의 십자군 전쟁과는 달리 목적지가 이슬람의 본거지인 '이집트'로 바뀐다.

4차 십자군 전쟁은 '플랑드르 백작''상파뉴 백작'이 주도했는데, 이탈리아의 부국

베네치아로부터 전쟁비용을 빌리고 수송과 배급도 베네치아에 맡기기로 하고 계약을 맺고

전투를 준비하지만 예상외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를 희망한 지원자가 적어 '전쟁 참여비'

받아 빚을 갚고 전쟁에 나가려던 그들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고, 참전 병사들은 빚 때문에

전투에 참전도, 고향으로도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된다.

이때 베네치아의 원수 '엔리코 단돌코'가 십자군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 헝가리 달라티아 지방의 '자라'는 기독교 지역으로 여기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경제적 야욕으로 인해 베네치아가 꼼수를 폈던 것이다. 교황청은 이를 문제 삼아 이후

4차 십자군 전체와 베네치아를 파문하게 된다.

 

한편 동로마 제국에서는 왕위를 놓고 큰 아버지(알렉시우스 3)와 조카(알렉시우스 4)

사이에 왕위 계승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조카가 십자군을 찾아가 자신이 왕위를 찾는데

도움을 주면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는 지원을 약속해 돈벌이에 눈이 먼 십자군은 콘스탄티

노플을 공략하여 왕위를 조카인 알렉시우스에게 승리를 안겨 주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십자군 자체가 동로마 제국을 접수해 별도의 제국을 세우고 지배한다.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자신들과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여 함락한 것과 군사를

모을 능력이 없음에도 자신들의 무능력을 덮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 욕망을 위해 아군마저

잔인하게 공격한 십자군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4차 십자군이 역대 십자군 중 가장

비난을 받고 있다.

   

[소년 십자군 전쟁(1212)]

4차 십자군과 5차 십자군 사이, 121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주도 되고 목동

'엔티엔'에 의해 '소년 십자군'이 발족한다. 성지 회복을 주장하며 프랑스의 소년 3만 명과

독일의 십대 2만 명으로 구성되어 출정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탐욕에 눈이 먼

어른들이었다. (소년 십자군을 태운 배는 아프리카 노예로 팔아 버린다.

 

[5차 십자군 전쟁(1218~1221)]

이집트를 전쟁 목적지로 출발하였으나 실패

     

[6차 십자군 전쟁(1228~1229)]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전쟁의 폐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피를 흘리지

않고 원정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이는 이집트 내란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 전략이 적중하여 예루살렘을 통치하지만 1239'맘루크 왕조'예루살렘을 정복하면

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7차 십자군 전쟁(1248~1249)]

1244년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공격, 기독교 세력 2천 여 명을 살해하는사건이 발생하

자 십자군을 이끌고 아프리카의 튀니지를 공격하지만 의외의 복병(오염된 물)으로 인해

원정에 실패한다. 이로써 200여 년간 이루어진 십자군 전쟁은 사실상의 막을 내리게 된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 이유]

1) 종교적 야욕보다 개인적인 욕망으로 인해 대외 명분이 약한 전쟁이었고

2) 다국적 군대로 획일적인 통솔이 불가능하였으며

3) 전투 장비의 중량화로 무거웠고 여름 날씨로 인해 효율적 전투 불가능했고

4)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필요한 장거리 전투였으며

5) 강력한 이슬람 세력의 결집

 

[십자군 전쟁의 파장]

십자군 전쟁을 부추긴 세력은 다름 아닌 교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전에는 가장

존경을 받았던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일반인들은 더 이상

교황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게 되었다.

특히 교황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사건이 연속해서 발생해 끝내는 종교개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반면 왕권은 강화된다.

, 전쟁에 나가 전사한 영주의 토지를 물려 받을 후손이 없게 된 토지는 왕이 이를 귀속시

키면서 왕권은 몰라보게 강화되는데 종국에는 왕의 말은 신의 말과 동격이라는 왕권신수

'까지 나오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왕이 신으로 군림할수록 지배를 받는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반발심과 증오심이

자랐으며 훗날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또한 시민들은 영주와 기사계층이 몰락하게 되자 그 울타리에서 삶을 영위하던 농노들의

일부는 그 자리에 남고, 일부는 자유를 찾아 도시로 나가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자 농노가 절대 부족하게 되자 장원제도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1천년을 굳건히 이어져 온'봉건 제도'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장원제도가 무너지고 영주들의 힘이 약화되자 도시에서는 상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서 동방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 전쟁 물자를 보내던 길을 무역로로 활용함해 동방과의 교역을 한 층 증대시키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십자군 전쟁

혜택을 톡톡히 봤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성장세가 두드러져서 전쟁이

끝난 후로는 동방무역을 독점하기도 했다. 아울러 국가에서는 '현물'로 받아 오던 세금을

'화폐'로 받기 시작했으며 또 먼 곳까지 물건대금을 송금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인 금융기법이 발달할 수 있었다. 상업의 발달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으로 연결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바탕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4차 십자군 전쟁에서 빼돌린 문화유산은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의 찬란한 문화 영향을 받아 중세의 어둠을

벗어 던지고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었으며 유럽의 문명이 세계 속으로 뻗어 나가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참고로 십자군 전쟁 이후로 예수의 얼굴에 수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자군 전쟁이 낳은 또 다른 후유증]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이 승리였지만 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먼저, 전쟁과정에서 십자군들이 무지막지한 약탈을 자행하였고 수많은 이슬람 및 유대인

들을 살육하였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 정교를 믿는

자유가 부여 되었으나 십자군 전쟁이후에는 이슬람의 '지하드(성전)'가 나오면서 그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결국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이 얻은 것은 '살구'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고 한다.

 

흑사병의 창궐

흑사병은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와 중동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토병이었다.

1334년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1343년 러시아 남부에서 벌어진 '카파성 전투’를

거치면서 크게 창궐하는데, 당시 그 성은 이탈리아의 점령지로 어느날 몽골군이 전쟁을

걸어와 싸우는 과정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를 이용해 성곽 안으로 날려

보내면서 크게 확산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럽 전 지역으로 흩어

지게 되면서 흑사병이 유럽지역에창궐하게 된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하자 유럽인들은 평소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던 고리대금업으로 성공한

유대인들을 흑사병 발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데 급기야는 1348년 유대인들을 피고로 해

종교재판까지 열린다. 유대인들의 희생이 적었던 이유는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에

따라 개인 위생에 철저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흑사병이 낳은 또 다른 문화는 '채찍질 고행'이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지금의 상황이 인간의 죄를 보다 못한 신이 분노한 때문'이라고 판단

하여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이를 막아 보고자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는데, 당시 고난의

채찍질 행렬에 대해 당시 로마 교회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이유는 자신들만의 고유 영역으로 보았던 '속죄 의식'을 채찍질 고행자들이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1349년 교황청에서 이를 비난하는 교서를 발표하면서 '채찍질 고행'

자취를 감추게 된다.

 

흑사병은 십자군 전쟁의 영향을 받아 근간이 흔들리던 농노제도의 붕괴를 가속화시킴과

동시에 자영농이 등장을 촉진하게 된다. 이런 현상들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제의

확립으로 이어졌으며 또한 반교회 움직임도 본격화되었다.

그 이유는 시체가 즐비하자 이를 치우고 거들어 주던 성직자들이 흑사병에 감염되어

많은 성직자들이 사망하자 가혹한 형벌이라 믿었던 흑사병 앞에서 수도자들과 성직자들

역시 무기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직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고, 부족한

성직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뽑다 보니 무자격인 사람들이 대거 종교계로 나가면서 교회는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결국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참고로 이 시기에 등장하는 성화에는 슬픔에 찬 성모마리아가 자주 등장한다.

 

건축 양식의 변모가 아이러니컬 하게도 '흑사병'의 확산을 막는 역할을 한다.

, 벌목이 횡행하면서 병원체를 옮기던 들쥐들의 통로가 사라지면서 들쥐로 인해

옮겨지던 흑사병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300년에 걸쳐 100차례 이상 주기적으로

창궐하다가, 1700년대에 들어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결국 흑사병은 기존의 봉건 질서와

종교적 관념, 윤리 등을 뒤흔들고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터키의 대표 도시 '이스탄불'은 두 개의 얼굴이 공존한다. 하나는 기독교 색채를 띤

'비잔티움의 얼굴''이슬람의 얼굴'이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 정교회를 대표하는 건물

(성 소피아 성당)이 이슬람의대표적인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 기원전 7~8세기 경 메가라 왕국의 수도로 '메가라'로 불렸지만 그리스에 정복된 다음에

'비잔티움'으로 이름을 바꾼다. 330년 콘스탄티누스1세가 이 곳을 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한 '오스만 튀르크'가 점령하면서

이슬람식인 '이스탄불'로 개칭되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자 아들들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고 무능한 왕들은 이민족 장군들에게 통치를 맡겼다가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나 동로마 제국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성장해 나간다.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과

이슬람 세력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를 견제하는 세력은 교황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받았지만 성장하고 있었는데 흑사병이

겹치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락한 상태에서 셀주크 투르크를 이은 오스만 투르크(술탄,

매머드 2)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당한다.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술탄

슐레이만은 헝가리를 정복하고 기독교 연합 함대를 격파해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에 대패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17세기 말에 오스트리아에 헝가리를, 러시아에게 크림반도의 일부를 내 놓게 되는데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면서 과거 오스만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으로 유럽 각국의 무역 형태에 큰 변혁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대항해 시대의 개막으로 '지중해 무역''실크로드'의 쇠퇴를 촉진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 동안 지중해 무역을 장악해 왔던 '베네치아''제노바'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비잔티움 문화는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의 특성을 기반으로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시킨

매우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잘 보전해 문화의 저장고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특히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로 동로마 제국의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대거

유입되면서 인간 중심의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둔 비잔티움 문화까지도 함께 이루어지는

데 이는 르네상스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잔티움 문화는 동유럽

지역은 물론이고 이슬람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동로마 제국이 담당했던 그리스

정교의 수장 역할은 러시아에게로 넘어가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트라팔가 해전 

'호레이쇼 넬슨'12살에 해군에 입대하여 서인도 제도와 무역을 하는 상선 선원으로

일하며, 21세에는 프리깃 함의 최연소 함장이 된다. 숱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며

36세에는 프랑스와의 해전에서 포탄의 파편에 맞아 오른 눈을 잃는다.

1796년 준장으로 승진한 그는 프랑스 해안을 독자적으로 봉쇄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듬해

스페인 함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어 영국이 지중해를 탈환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그 해에 또 다른 전투에 참가해 오른팔을 잃는 부상을 당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1년 뒤 다시

지중해로 복귀해 나폴레옹과 맞붙는다.

 

당시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압하지 않으면 '동방 원정'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영국의 해상

길목인 이집트를 제압해 인도로 가는 영국의 무역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생각하지만

'넬슨'에 의해 좌절 당한다.(나일 해전)

나폴레옹은 이 패전으로 자신이 그 동안 쌓은 업적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막고자 서둘러

아프리카 원정에서 돌아와 1804년 황제에 등극한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활발히 일어나고 경제가 원활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무역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영국의 선진공업 기술을 무시하고, 오직 군사력만으로 내륙의 항구와 경제가 영국과 거래하는 것을

막는 '대륙 봉쇄령'을 강행하나 타격을 받은 나라는 영국이 아닌 영국에 무역 의존도가

컸던 나라들이었고 급기야 이들 국가의 경제를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영국을 봉쇄하려던 나폴레옹의 계획은 나폴레옹 자신을 고립시키고 스스로 몰락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고 만다.

 

1805년 스페인 남서쪽 카디즈와 지브롤터 해협 사이의 트라팔가르 곶에서 영국배 27척과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 33(프랑스 18, 스페인 1)과접전을 벌이나 수적으로 열세

였던 영국은 별다른 손실이 입지 않지만 및 스페인 연합 함대는 모두 22(5척 격침, 17

나포)의 손실을 입는다.

 

180547세의 나이에 '트라팔가 해전'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은 그는

"긴 말은마지막까지 국가를 위한 임무를 수행하게 해 주신 신께 감사한다.

 이제 나는 내 임무를 다했다

였다고 한다. 

   작품으로부터 얻은 지식들

 

   -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무찌르고 마라톤의 전설을 이룬 아테나의 장수는

     '밀티아데스 장군'이었다.

 

   -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함

     을 정당화하는 경향,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서양에 비해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타락했으

     며 열등하다는 식의 인식으로 숱한 문학작품과 그림 등에 표현되어 왔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인들을 괴물로 표현한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 노르웨이의 '라이프 에릭슨'이 서기 1,000년경 아메리카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 15세기경만 해도 지중해의 끝자락인 지브롤터 해협의 암벽에는 'No Ultra'

      더 이상 넘어가지 말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 지도제작자인 '발트 제뮐러'라는 사람이 1570년에 세계지도를 제작하면서 아메리고의

     이름을 신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도에 기입하면서 이때부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잉카 제국이 급작스럽게 멸망한 이유는 스페인들과 잦은 접촉을 하면서 스페인들

     몸에 묻어져 들어온 병원균 즉, 천연두에 의해 100~150년에 걸쳐 1억 명 정도의

     인구가 10%만 살아남게 되는 대 재앙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독일 외무장관이던 '아서 치어만'이 멕시코에 암호 편지를 보냈는데 연합국에서

      이를 입수, 분석해 본 결과 '만약 멕시코가 독일을 지원하면 1848년 당시 멕시코가

      미국에게 빼앗긴 땅을 돌려받게 해 주겠다'는 내용을 접하고 또 미국의 상선 3척이

      연속해 독일 공격으로 격침 당하자 191742일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 미국은 전쟁기간 동안 유럽에 식량과 무기를 팔아 돈을 벌었다.

     , 미국은 독일에 차관을 주어 산업을 재건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또 독일은

     이 차관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이 배상금을 갖고 전쟁 기간 중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 부채비용을 지불하는 등

     전쟁으로 인해 배를 불린 것은 미국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