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유정옥 지음 / 소중한사람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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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내가 주님의 자녀로 거듭난다고 주위에 이야기했을 때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던

기억이 나며 그 현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를 아는 다수가 주님의 어린 양으로 거듭나고 있는 나를 어찌보고 생각하던지 그것은 나를

바라보는 개개인의 문제고 나는 작품을 통해 나만의 기독교적 삶을 지향할 뿐이다.

 

최근 나는 2014년 실업자 생활을 하던 어느날부터 시작한 성경 필사를 완성하였다.

컴퓨터 시대를 살다보니 모든 문서를 자판으로만 작성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던 나였기에 성경을

손으로 직접 쓰려고 하니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손목과 손가락의 세밀한 근육, 나중에는

손바닥까지 아파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한 두 번 든 것이 아니었지만 내 생애 최초로 내

스스로 정한 신성한 목표였기에 이를 달성해야겠다는 - 솔직히 이제껏 살아오면서 뭐하나

제대로 완성한 적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 책임의식이 나를 끝까지 이끌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성경을 필사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더 이뻐해 주실 것이라는, 남들이 알아 줄 것이라는 그런

생각보다는 나도 이제 누군가 종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뭔가 하나 정도의 이야기

를 할 수 있는 소재를 만들었다는 안도감이랄까 그런게 생겼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성경을 필사하면서 나를 끊임없이 격려하고 같이 힘들어 해 준 와이프한테 고마울 따름이다.

그녀는 작품의 제목처럼 내가 울고 싶어 할 때 같이 울어 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단순히 내가

필기의 고통을 호소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 측면에서 내가 울고 싶을 때 함께 울어주고

달래 주는 인물이었다.

내가 읽으며 감동했던 눈에 들어오는 문구를 정리해 보면

- 기다리고 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걷는 길이 가장 멀리 갈 수 있다.

- 우리는 하나님께 이미 이 돈을 받았으니 당신은 하나님께 갚으세요.

-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내가 준 것에 대해 갚을 길이 없는 자에게 주어야 한다.

- 내가 앞만 보고 달려갈 때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지 말고 너의 눈길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나 주변을 둘러보라고 나의 분주한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는 우리 인생의 길이 언제나 달려야만 전진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그 자리에 멈추어서는

  것이 곧 전진하는 것임을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

- 금이나 은을 위하여 살지 말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라

- 그 사람이 너의 두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지?

- 어머니는 죽었어도 기도는 죽지 않고 남아서 반드시 응답된다.

- 나는 너희들과 너희들의 후손들을 위해 돌을 던질 뿐이다. 내 눈앞에는 여전히 바닷물이어도

  언젠가는 너희들이 밟을 땅이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용서하니까 그게 바로 용서지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뭐가 용서인가?

- 사람이 잘 되려면 해롭게 하려고 온 사람까지 오히려 돕는 자가 되고 사람이 안 되려면

  도우려고 온 사람까지 오히려 해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 돈도 부서지고 건강도 부서지고 자존심도 부서져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곁에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고 네 곁에 금은보와와 천하가 다 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다 없는 것이다.

 

주님을 영접한 이후 내게 펼쳐지는 감사은혜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일단의 무지

몽매한 사람들, 주님을 가슴에 두고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이러한 간증을 요망한 자기

최면이요 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일상에서 항상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어쨌든 말로만 이런저런 은혜와 감사에 대해 이야기를 주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기 전에 몸으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해 본다.

주님은 이런 나의 행동을 아시기 때문에 오늘도 나를 보고 웃고 계심을 나는 믿고 있고

또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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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예수를 만나다
최원호 지음 / 노아의방주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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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분석을 통해 열등감 해소의 방법을 알아본다.

  

   [시몬 베드로]

- 시몬이란 듣는 자, 복종을 뜻한다

- 베드로는 돌, 바위를 뜻한다

- 열두 제자 중 가장 적극적인 베드로는 일상 생활에서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의 우월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다.

- 시몬 베드로처럼 공격적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온유함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자기 속에 감춰진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이중적인 우월적인 행동인 것이다.

-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만심이 강하다(아하드 하암)

 

   [안드레]

- ‘안드레는 남자답다라는 뜻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사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안드레의 공적이다.

- 안드레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정직하게 말했기 때문으로 나는 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주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안드레의 믿음 같은 것이 열등감을 극복할 최고의 방법이다.

- 열등감은 자신의 내부에서 저절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서 생겨난다.

- 자기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기가 부담스러워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면 결코 열등감을 극복할 수

  없다.

- 누구를 만날 때마다 다른 좋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은 목적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가차없이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는다.

- 충직하고 열성적인 사람은 리더의 목표나 방향이 자신의 것과 일치할 때는 함께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돌아설 수 있다. 누구보다 성질이 급한 제자 야고보는 예수가 죽자 

  완벽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예수와의 인연을 끊어버림으로써 예수를 배신하지만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굴복하고 이를 계기로 오직

  진실과 충성스런 마음을 갖추고서 예수의 제자로 거듭났으며 열두 사도들 가운데 가장

  명예스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요한]

- ‘요한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 요한에 의해 기록된 복음서 요한복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는 주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기에 , 요한같은 자신을 나타내는 표현보다는 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인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리고 싶었던 것이다.

- 요한의 어머니는 십자가까지 따라간 여인들 중 하나였다.

- 자존심이 강한 듯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조금의 부정적인 표현이나 평가에도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 사람이 자존심이 무척 높은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자존감이 높은 게 아니라 낮기 때문에 상대방을 자신의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수단과 방법으로

  간주하고 무시하거나 헐뜯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러는 만큼 자존감이 유지된다는 일종의

  가짜 자기만족을 하는 것이다.

 

   [빌립]

- 빌립은 어릴적 친구였던 베드로와는 성격이나 기질 자체가 달랐다.

  빌립은 신중하게 결정하는 심사숙고형이었다.

- 강박적인 사람은 함께 있는 다른 이들도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이들의 마음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생긴 것이다.

- 믿음이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폴 틸리히)

- 희망은 등불처럼 자신을 태워 절망을 뒤집는 아름다운 마음의 상태로 희망을 가진 개인은

  환상 없이는 버틸 수가 없다.

-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도록 해준다. 내가 부족함을 느낄 때가 곧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절망적인 세상에서 나를 구원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훗날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 우물쭈물하던 다른 사도들의 충성심을 집결시킬 용기에 불을 당긴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도마였다.

- 자신을 괴롭히고 멸망시키는 열등감을 극복하려면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털어놓아야 한다.

- 내가 남을 판단하는 자체가 열등감의 기제가 동작하고 있음에 대한 예고이다.

- 돈은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무기이다. 돈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보다 돈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우리 사회이며 현실이다.

- 얄팍한 세상의 지식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풀려고 발버둥치기보다는 궁핍을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그분의 손에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는 것만이 돈의 억압과 불행을 끊을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삶을 그 분의 손에 맡기면 그 분은 우리를 결코 고아와같이 내버려두거나 궁핍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기독교적인 믿음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자기가 처한 상황만족

  하는 것이다.

- 열등감에 찌든 사람은 스스로를 잘 괴롭히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괴롭히는데도 전문가다

- 자랑하지 말라,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자랑하지 마고 오직 예수 그로만 자랑하라.

- 고민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샤를 보들레르)

- 열등감은 성공의 디딤돌이며 동시에 실패의 걸림돌이다.

- 명예에 대한 욕망은 열등감과 무력감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시작된다.

- 인성의 참된 의미는 사람다움을 지금 내게 깃들게 하는 것으로 인성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데에서 나오는 해방이다.

-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해결하지 못한 자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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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통곡하며 이찬수 저서 시리즈
이찬수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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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작품은 사무엘 상의 말씀에 기반하여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들이 지녀할 마음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태도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계획하셨고,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는 마음의 자세로 생각하며 언제나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이야기로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을 해 보면

장벽은 가로막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를 증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라는 굳건한 믿음의 자세가 수반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경 속의 한나라는 여인은 아이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절박하게 나아갔다. 그리고 절망적인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과 심정을 나누는

도구로 승화시키고 있으며 기도를 자신의 상한 마음을 받아주시고 이해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토해내는 것이라 정의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크리스천의 모든 애씀의 출발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모든 불통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혀버린 것에 그 원인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증거가 아래에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7)

 

마음이 괴롭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고 통곡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독인들이 취해야 할 아주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끝내 한나는 아이를 점지받는데, 우리들은 한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 응답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로 말미암아 기뻐할 줄 아는 성숙한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분명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 나가는 과정과 주님의 말씀 속에 생활하는 과정 속에는 한나의

남편 엘가나의 또다른 부인 브닌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낙심하고 있는 한나를 무지하게

괴롭히듯 내게 상처 주는 사람들이 먼 곳에 아닌 바로 내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그 어떤 시련이 와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로서 간구할 때 반드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 분께서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사람은 누구나 다 예외없이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 그 두 마리는 편견과 선입견이다.

 

-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는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 같은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능력을 경험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 시간이 갈수록 아름다운 인생이 되려면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인생을 회복해야 한다

   둘째, 말씀에 영향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 비록 보잘것없고 하찮은 우리일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고 얻은 양자, 하나님의 자녀다

 

-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인가?

   첫째,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려고 애쓰는 태도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애쓰는 태도

   셋째, 말씀에 순종하여 애쓰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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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윤관희 외 옮김 / 두란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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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9

 

일부 학자들은 복음서가 실제 일어난 사건보다 훨씬 뒤에 쓰여져서 전설 따위가 발전하고

마침내는 원래 쓰여진 내용도 왜곡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단지 지혜로운 선생이었던 예수의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화적 인물로 변화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반박의 논리를 작품에서 찾아 보면

 

A. 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성의 표준시기는 마가복음은 70년대, 마태와 누가는

    80년대, 요한복음은 90년대에 쓰여진 기록인데 그 시기는 예수의 일생을 지켜본 많은

    목격자들이 살아있던 시기와 비슷하다.

    반면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는 B.C.323년 그가 죽은지 400년 이상 후에 기록된 것이며

    B.C. 6세기에 살았던 부처의 경전은 A.D.1세기에, A.D570~632년까지 살았던 모하메드의

    말(言)인 코란이 기록된 것은 767년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독교 부활 신앙이 생겨난 시기를 아직까지 정확히 기록할 수는 없지만

    부활 사건 이후 2년 이내의 기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B. 복음서들의 기록 방식을 보면 진지하고도 책임 있는 태도, 정확한 세부 사실, 그리고 세심한

    주의와 정확성이 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미사여구와 노골적인 신화적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만약 사람들이 바울의 글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확인해 볼 수 있던 때에

    쓰여졌는데 목격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어서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었을 것이다.

 

C. 복음서의 상당수가 유사하거나 차이점이 보이는 것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많이 기억했다가 나중에 원래의 가르침과 행적의 중요한 부분만 항상 보존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생겼을 가능성이 많다.

    역설적이나 만약 복음서가 단어마다 똑같았다면 저자들끼지 공모해서 이야기를 사전에

    조정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D. 예수를 추종하거나 기록하면서 받았을 불이익을 기록자들은 아무런 보상없이 기꺼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이 받았을 것은 비난과 추방 그리고 순교 이외에는 얻을 이익이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었다면 입을 다물고 예수를 부인하거나 그를 경시하고

    심지어 그를 만난 사실조차도 잊어 버렸을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180도 달라져서 기독교 신앙의 변호자가 된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택하셨다는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말합니다.

E. 가장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한 사람을 경배하는 종교가 확산된 현상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또 왜 1세기 유대인 중에 예수님만이 수백만의 추종자들을 갖고 있고 여전히 경배를 받고

    있을까?

     

작품을 읽으며 가슴에 와 닿았던 몇가지 문구

  1) ‘인자라는 용어는 하늘의 보좌에 앉아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전 우주적인 권세와

     지배권을 부여받은 분이다.

     즉, ‘인자는 단순한 인간의 칭호가 아니라 위대함과 고사함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2)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마태복음은 요셉

      혈통 중심으로,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을 중심으로 작성되면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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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을 것인가 -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가 전하는 올바른 신앙의 길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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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9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종교적 갈등과 생활 자세에 대한 의구심 및

해묵었던 나만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의혹을 확실히 제거해 준 작품이었다

 

교회를 다니며 아니 하나님을 믿으며 교회와 교인들이 벌이는 각종 말도 안 되는 행동

말투를 듣고, 보면서 나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러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크게 들었고, 진정 그들은 신도들을

하나님 곁으로 모이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그냥 단순한 헌금 기계로 보는

것인지 정말 힘들었던 시기가 많았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앙생활 속에 마주하게 되는 나만의 대표적 의구심 10가지가 있었다.

  1) 십일조는 꼭 해야 하며 보는 사람도 없는데 조금 적게 내면 안 되는가?

  2) 교회오는 것도 내가 백 번 양보한 것인데 왜 자꾸 교회에서의 봉사를 강요하나?

  3) ‘방언을 못하면 진실한 교인이 아닌가?

  4) 예배는 반드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해야만 하는가?

  5)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정녕 천국에 못 가는가?

  6) 바쁘거나 휴가를 갔을 때 다른 교회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되나?

  7) 주일, 수요, 금요 철야 예배 등 모든 예배에 참여해야 진정한 교인인가?

  8)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 용서해 준다는 데 꼭 지금부터 교회에 다닐 필요가 있는가?

  9) 교회 종사자들도 헌금 횡령, 사기 등으로 개판인데 거기서 뭘 배울게 있겠는가?

10)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려움 속에 있는 신도들을 그냥 방치하겠는가?

등과 같이 교회에 처음나오는 사람이나 비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완전히 해소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며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명답을 이야기해도 웃기시네라는

답변만이 나올 뿐 절대적으로 명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어쨌든 나는 작품을 통해 각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일반인들 즉, 비기독교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뚱맞게 알지도 만나 보지도 못 한 분에게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 역시 결혼과 동시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모태 신앙에 가까운 와이프와

헌금 문제로 상당한 다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십일조의 이야기가 나를 흔들어 놓았는데

가장 크게 나의 심중을 흔들어 놓은 대목은 바로 구약 신명기 2612말씀이었다.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라는 대목이었다.

이 구절 중에서 가장 크게 와서 닿은 단어는 고아과부였다.

나는 여기서 십일조 헌금이 정말로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로 대변되는 고아

과부를 위해 사용하시겠다는 내용을 읽고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며 십일조와는 상관없이 평소에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약간의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살거나 잘 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정말로 어려운 이웃들이 너무도 많다. 간혹 기도를 드리기 위해

묵상을 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들려오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웃들이 너무도 많았고,

고등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의 실상을 보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당장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랑도 인내도 아닌 빵이다라는 생각 속에 조그맣게 실행을 했었던

것이며 그것이 십일조 헌금으로 변모된 것이다.

 

내가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십일조를 잘 냈는데 교회 목사나 장로들이 이 돈을 떼어 먹거나 횡령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또 그런 일이 쉽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각종 매스컴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사람들이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지는

않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지 목사나

장로를 보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내가 낸 헌금을 떼 먹거나 횡령을 했다면 그들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주님 앞에 나가 심판을 받을 때 그 모든 것이 감안되어 그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앞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는데 뭐가 무서워

헌금을 회피하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헌금이 제대로 쓰여 지고 있는지만 감시하면 되는

것이지 미주알고주알 따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를 믿고, 목회자를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마냥 은혜와 축복으로만 물질 우선주의에 빠져 살고 있는 인간에게

뭔가를 보여 주어여 하는데 다시 말해 물질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하나님을 믿을 터인데

당장 배고픔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에게 마냥 축복만 이야기해 본들 그런 이야기가

통용이 되겠으며, 배고픈 인간들이 쉽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는가?

그러다 보니 인간들에게 당장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헌금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지상의 통용 화폐인 은혜와 축복이 아닌 물질적인 축복을 조금

내리시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럼 반드시 십일조를 10%를 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0%라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율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개인적인 능력 범위를 수치적

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성경에 성의껏내라고 하면 이를 듣는 이들에게 수량적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가 성의가 있는 것인지 굉장한 혼란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획득한 물질을 열 개냈는데 다른 사람은 비슷한 물질 열 한 개

내는 사람보다 성의가 없어 보일 것이요, 어떤 이는 열 두 개를 내서 열 한 개를 내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을 감안해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기준점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물질 헌납의 시간이 되면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런 십일조를 그럼 어떤 방식으로 내야 할까?

식구가 다섯 명인 사람이 몇날 며칠을 굶다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 그날 양식으로 감자

다섯 알을 구했다고 치자, 감자 한 알로 허기를 채우기도 벅찬데 그 중에 한 알을 교회

십일조로 내라고 한다면 그 사람 눈알은 돌아갈 것이다.

천상의 주님도,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내가 당장 배가 고픈데 무슨 헌금이요 십일조인가

말이다. 다섯 알을 다 충분히 나누어 먹고 힘을 내서 다음날 열심히 일을 해서 감자

열 알을 구해와 두 알을 헌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괜히 배고픈데 감자 한 알 헌금했다가 다음날 힘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임금으로

감자 네 알만 받으면 어찌 되겠는가?

따라서 십일조의 의미는 교인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지 반드시 10%를 지키는 것을 절대율로 가져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매번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나의 경우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싶다.

?

나는 그래도 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내가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굉장한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나를 이렇게 살게 해 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무엇인가?

부모님, 형제, 친구, 친척...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일수도 있지만 오답일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한다. 아주 정확히 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때는 십일조 하는 날을 기다리고도 있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놈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내가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내게 직장이나 직업 등을 통해 나와 나의 가족의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를 창출할 수 있는 뭔가에 종사하고 있다는 뜻이요, 살아 있다는

증거요,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이를 짜증내면서 하는가.

혹자는 이야기할 것이다. 반드시 교회에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교회가 싫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의심된다면 사회에 그만큼 기부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니 십일조는 꼭 하시기 바랍니다.

 

방언에 관한 것도 그렇다.

솔직히 기도를 하는 도중에 옆에서 신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면

무섭다. 그냥 무섭다. 그 방언이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이야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신뢰성이 전혀 없다.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이 전부

비슷하거나 유사해야 하는데 전혀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볼 때는 기도하는

이들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하면서 방언 즉,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어 진다.

교회를 20여년 다닌 나도 아직 그 방언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방언을 믿을 수

없고 방언이 안 된다고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교육부가 제시한 의무 교육을 다 했다고 모두가 영어를 외국인처럼 이야기할 수 없듯이

어떤 사람은 방언에 능통할 것이요 어떤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아 봉사와 섬김을 잘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전도를 잘하듯이 개인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능통한 방언만이

신실한 신자라는 등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교회와 신자 그리고 종교 생활에 관련된 하고픈 말과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엄청 많지만 여기서 줄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종교생활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밝은 영향을 주려는

한 요소로 작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개인

스스로가 진실한 교인이라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행동을 잘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종교관과 생활 철학을 가지고 오늘도 교회에 간다.

내가 교회와 지역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실행에 옮기고 있다.

예로서 회사에서는 신문을 많이 보고 폐지로 엄청난 양의 폐휴지가 나온다.

나는 주말마다 이를 모아 교회에서 불우이웃돕기용 폐지 수거함에 내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십일조 헌금에 버금가는 기쁨을 느끼고는 하는데 이런 것 하나하나가 모일

때 나만의 종교관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내가 언급한 종교생활을 하면서 마주하게 된 의구심 10가지에

대한 해결책이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구매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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