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믿을 것인가 -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가 전하는 올바른 신앙의 길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9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종교적 갈등과 생활 자세에 대한 의구심 및

해묵었던 나만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의혹을 확실히 제거해 준 작품이었다

 

교회를 다니며 아니 하나님을 믿으며 교회와 교인들이 벌이는 각종 말도 안 되는 행동

말투를 듣고, 보면서 나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러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크게 들었고, 진정 그들은 신도들을

하나님 곁으로 모이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그냥 단순한 헌금 기계로 보는

것인지 정말 힘들었던 시기가 많았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앙생활 속에 마주하게 되는 나만의 대표적 의구심 10가지가 있었다.

  1) 십일조는 꼭 해야 하며 보는 사람도 없는데 조금 적게 내면 안 되는가?

  2) 교회오는 것도 내가 백 번 양보한 것인데 왜 자꾸 교회에서의 봉사를 강요하나?

  3) ‘방언을 못하면 진실한 교인이 아닌가?

  4) 예배는 반드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해야만 하는가?

  5)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정녕 천국에 못 가는가?

  6) 바쁘거나 휴가를 갔을 때 다른 교회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되나?

  7) 주일, 수요, 금요 철야 예배 등 모든 예배에 참여해야 진정한 교인인가?

  8)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 용서해 준다는 데 꼭 지금부터 교회에 다닐 필요가 있는가?

  9) 교회 종사자들도 헌금 횡령, 사기 등으로 개판인데 거기서 뭘 배울게 있겠는가?

10)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려움 속에 있는 신도들을 그냥 방치하겠는가?

등과 같이 교회에 처음나오는 사람이나 비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완전히 해소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며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명답을 이야기해도 웃기시네라는

답변만이 나올 뿐 절대적으로 명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어쨌든 나는 작품을 통해 각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일반인들 즉, 비기독교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뚱맞게 알지도 만나 보지도 못 한 분에게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 역시 결혼과 동시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모태 신앙에 가까운 와이프와

헌금 문제로 상당한 다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십일조의 이야기가 나를 흔들어 놓았는데

가장 크게 나의 심중을 흔들어 놓은 대목은 바로 구약 신명기 2612말씀이었다.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라는 대목이었다.

이 구절 중에서 가장 크게 와서 닿은 단어는 고아과부였다.

나는 여기서 십일조 헌금이 정말로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로 대변되는 고아

과부를 위해 사용하시겠다는 내용을 읽고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며 십일조와는 상관없이 평소에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약간의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살거나 잘 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정말로 어려운 이웃들이 너무도 많다. 간혹 기도를 드리기 위해

묵상을 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들려오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웃들이 너무도 많았고,

고등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의 실상을 보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당장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랑도 인내도 아닌 빵이다라는 생각 속에 조그맣게 실행을 했었던

것이며 그것이 십일조 헌금으로 변모된 것이다.

 

내가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십일조를 잘 냈는데 교회 목사나 장로들이 이 돈을 떼어 먹거나 횡령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또 그런 일이 쉽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각종 매스컴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사람들이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지는

않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지 목사나

장로를 보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내가 낸 헌금을 떼 먹거나 횡령을 했다면 그들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주님 앞에 나가 심판을 받을 때 그 모든 것이 감안되어 그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앞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는데 뭐가 무서워

헌금을 회피하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헌금이 제대로 쓰여 지고 있는지만 감시하면 되는

것이지 미주알고주알 따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를 믿고, 목회자를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마냥 은혜와 축복으로만 물질 우선주의에 빠져 살고 있는 인간에게

뭔가를 보여 주어여 하는데 다시 말해 물질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하나님을 믿을 터인데

당장 배고픔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에게 마냥 축복만 이야기해 본들 그런 이야기가

통용이 되겠으며, 배고픈 인간들이 쉽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는가?

그러다 보니 인간들에게 당장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헌금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지상의 통용 화폐인 은혜와 축복이 아닌 물질적인 축복을 조금

내리시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럼 반드시 십일조를 10%를 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0%라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율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개인적인 능력 범위를 수치적

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성경에 성의껏내라고 하면 이를 듣는 이들에게 수량적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가 성의가 있는 것인지 굉장한 혼란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획득한 물질을 열 개냈는데 다른 사람은 비슷한 물질 열 한 개

내는 사람보다 성의가 없어 보일 것이요, 어떤 이는 열 두 개를 내서 열 한 개를 내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을 감안해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기준점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물질 헌납의 시간이 되면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런 십일조를 그럼 어떤 방식으로 내야 할까?

식구가 다섯 명인 사람이 몇날 며칠을 굶다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 그날 양식으로 감자

다섯 알을 구했다고 치자, 감자 한 알로 허기를 채우기도 벅찬데 그 중에 한 알을 교회

십일조로 내라고 한다면 그 사람 눈알은 돌아갈 것이다.

천상의 주님도,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내가 당장 배가 고픈데 무슨 헌금이요 십일조인가

말이다. 다섯 알을 다 충분히 나누어 먹고 힘을 내서 다음날 열심히 일을 해서 감자

열 알을 구해와 두 알을 헌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괜히 배고픈데 감자 한 알 헌금했다가 다음날 힘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임금으로

감자 네 알만 받으면 어찌 되겠는가?

따라서 십일조의 의미는 교인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지 반드시 10%를 지키는 것을 절대율로 가져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매번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나의 경우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싶다.

?

나는 그래도 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내가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굉장한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나를 이렇게 살게 해 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무엇인가?

부모님, 형제, 친구, 친척...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일수도 있지만 오답일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한다. 아주 정확히 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때는 십일조 하는 날을 기다리고도 있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놈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내가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내게 직장이나 직업 등을 통해 나와 나의 가족의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를 창출할 수 있는 뭔가에 종사하고 있다는 뜻이요, 살아 있다는

증거요,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이를 짜증내면서 하는가.

혹자는 이야기할 것이다. 반드시 교회에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교회가 싫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의심된다면 사회에 그만큼 기부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니 십일조는 꼭 하시기 바랍니다.

 

방언에 관한 것도 그렇다.

솔직히 기도를 하는 도중에 옆에서 신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면

무섭다. 그냥 무섭다. 그 방언이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이야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신뢰성이 전혀 없다.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이 전부

비슷하거나 유사해야 하는데 전혀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볼 때는 기도하는

이들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하면서 방언 즉,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어 진다.

교회를 20여년 다닌 나도 아직 그 방언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방언을 믿을 수

없고 방언이 안 된다고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교육부가 제시한 의무 교육을 다 했다고 모두가 영어를 외국인처럼 이야기할 수 없듯이

어떤 사람은 방언에 능통할 것이요 어떤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아 봉사와 섬김을 잘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전도를 잘하듯이 개인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능통한 방언만이

신실한 신자라는 등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교회와 신자 그리고 종교 생활에 관련된 하고픈 말과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엄청 많지만 여기서 줄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종교생활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밝은 영향을 주려는

한 요소로 작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개인

스스로가 진실한 교인이라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행동을 잘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종교관과 생활 철학을 가지고 오늘도 교회에 간다.

내가 교회와 지역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실행에 옮기고 있다.

예로서 회사에서는 신문을 많이 보고 폐지로 엄청난 양의 폐휴지가 나온다.

나는 주말마다 이를 모아 교회에서 불우이웃돕기용 폐지 수거함에 내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십일조 헌금에 버금가는 기쁨을 느끼고는 하는데 이런 것 하나하나가 모일

때 나만의 종교관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내가 언급한 종교생활을 하면서 마주하게 된 의구심 10가지에

대한 해결책이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구매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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