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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일과 영성 -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역사 사이의 줄 잇기
팀 켈러 지음,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13년 11월
평점 :
추천 권유도 6
기독교에 입문했을 당시 주변인들은 모두 내게
“너도 교회 다니냐?”, “네가 기독교인이야?”,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뭐 그러냐?”
등등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 대개의 경우는 친한 사이에 오가는 농담조의 질문이기는
하였으나 솔직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 그런 물음에 내가 일일이 대꾸하는 것 자체가
짜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평소 나의 행동이 어떠했기에 나를 두고 이런 소리들을 할까?
하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위와 같은 세인들의 질문 배경에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 행했던
나의 사려 깊지 못한 ‘그 어떤 언행’으로 인해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나의 종교적 신념이 강화되고 주님의 말씀 속에서 살게 되면서 이전보다는 더욱
매사를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이런 행동 변화의 배경에는 인생의 연륜이 쌓였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종교인답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그 옛날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예수님을 생각 없이 떠드는 세인들의 입에 값없이 르내리게 하여 불쾌한 ‘의문의 1패’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나도 원죄의 그늘 밑에서 쉽게 허물어지는 연약한 인간이다 보니 직장 및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불의에 속절없이 농락당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내가 행한 불의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나의 ‘종교’와
내가 ‘종교인’이라는 것을 편의대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저급한 마스터베이션급 삶에 만족하며
살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켜켜이 묵은 먼지처럼 나의 몸과 마음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현실적 저급한 쾌락이 나의 종교적 신념을 지배하고 있음을 자각하였고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나의 생활은 물론 회사 업무처리는 물론 대인관계에까지도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음을
세월이 흐른 뒤에 나는 알게 되었다.
거의 모태 신앙에 가까운 –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 - 와이프
권유로 입문한 신앙 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점점 수영장에 빠진 사람과 같이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교회를 찾고자 마음을 굳힌 그 날의 목사님 설교 내용도 유사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수영장이라는 곳에 가게 되면 얕은 물에서는 다시 말해 발목까지 물(신앙심)이 닿았을
때는 물장구치는 어린 아이처럼 한없이 자유스럽지만 수영장물(신앙적 관점)이 점차 허리와
가슴까지 차오르게 되면 도저히 본인의 의지대로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 된다 할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잠수를 탈 지경이 되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가 과거와 같지 않게 되었음을 느끼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무리 물(신앙심) 속에서 나의 행동을 자유스럽게 가져간다 해도 내가
몸 담고 있는 물(신앙적 관점)을 역류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자신의 업무나 직장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지를 성경
구절 속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다.
어느새 나는 ‘구원 받았음에 감사하는 삶’ 속에서 살고자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잘못된 종교관이 빚어내 국내와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보면서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들어 몹시도 안타까웠고 작금 한국 사회의
종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회 세습’의 추태아닌 추태를 보면서 그 안타까움은 내가 한 때
믿었고, 의지했었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다가왔고 그들에게 자신의 일과 교회
그리고 교회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 속에 ‘영성(靈性)’이 존재하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왜 그리도 세상적인 일에....주님이 살아오신다면 뭐라 이야기하실지가 참으로 궁금하다.
어찌되었던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나는 작품에서 나의 종교관을 재 정비하는 교훈적 문구를
찾았기에 여기에 옮겨서 모두와 그 깊은 뜻을 나누고자 한다.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P 45)
-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는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P 47)
-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P 47)
- 자유는 구속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올바른, 다시 말해서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부합되는 한계
속에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P 48)
-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일한느 존재로 지으셨으며 지금도 분명히 그 설계에 따라 살라고
부르시고 이끄신다. 짐스러운 명령이 아니라 자유로 이끄시는 초대다.(P 49)
- 일을 정기적으로 몀춘 뒤 예배하고,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즐기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체득할 수 없다.(P 51)
- 일은 의미 있는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요소이다. 신체적으로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상과 일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일손을 놓고 쉬어야 한다.
(P 52)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 신들이 일을 시키려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다.(P 56)
그리스 철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신을 고독하고 자급적이며 세상사에 개입하거나 인간들이
벌이는 북새통에 발을 담그지 않는 ‘완벽한 정신’쯤으로 이해했다.(P 57)
- 올바른 삶이란 희망과 두려움을 모두 벗어 버린 인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실상과 화해하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가르쳤다(에픽테토스, P 57)
- 창세기에 나오는 문구를 해석해 보면, 식물과 짐승들은 그저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따름인데, 유독 인간은 명확하게 일을 부여받았다. 즉, 정복하고 지배하며 세상을
다스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P 59)
-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일종의 부섭정(vice-regent)으로서 나머지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P 60)
- 성경은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게 귀족적이고 배타적으로 사용되던 개념을 민주화(P 61)
-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친구로 보았다. 육신에 갇힌 생명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지적한다.(P 63)
- 물질과 영혼이 영원토록 통합된 상태로 함께 사는 꿈을 제시하는 종교는 오로지 기독교 뿐이다.
(P 64)
-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개척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P 65)
[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
- 인간은 일하도록 설계되었고 일을 통해 존엄하게 되며, 일은 창의성, 특히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이기도 하다.(P 68)
-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건 청지기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P 69)
-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면, 주님의 사역 패턴을 따라 일해야 한다.(P 72)
- 창세기 2:19~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주님은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셨다.
(P 75)
- 하나님은 일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시며 뒤를 따르라도 신실하게 부르신다.(P 77)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 신약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그리스어 칼레오(kaleo)인데 이는
보통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묘사할 때 사용
되는 말이며, 교회를 가르키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의미한다.(P 80)
-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혁신 통찰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 된다.(P 83)
- 중세 교회는 교회를 위해 교회 안에서 행하는 직무이어야만 하나님을 위한 일의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 오로지 수도사와 신부, 또는 수녀가 되지 않고는 부름을 받아 주님을 섬길 수
없었다.(P 84)
-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들의 소원을 무엇이든 다 들어주길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책임질 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일을 시킨다.(P 87)
- 혁명적인 노동관은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고상한 의미, 다시 말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목적을 부여한다.(P 91)
-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하기에 좋은 방법은 없다,(P 94)
- 완벽하게 해 내기만 한다면, 감자 껍질 벗기는 일로도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아무리 일해도 열매가 없다]
- 수치심이란 존재의 중심에서 자신을 향해 갖는 불편한 감정(P10)
- 아무리 땀 흘려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다.(P110)
- 열매가 맺히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P114)
- 가시덤불이 생겨도 소망은 있다.(P117)
- 저마다 일에 대해 품고 있는 간절하고 원대한 염원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미래에 온전히
실현되리라는 메시지를 저만의 방식으로 들려준다.(P118)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
- ‘전도서’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악인이 디지모 말라고 경고하면서 중도를
걸으라고 권면한다.(P122)
- 전도서의 작가는 철학자를 앞세워 읽는 이들을 몰아세워 가며 하나님의 초월적인 독특성과
필요성을 납득시키려 노력한다.(P123)
- 전도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의지하는 자세야
말로 흔들림 없고 목적이 분명한 인생의 전제조건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P123)
- 전도서는 3가지 인생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P124)
첫째, 지식과 지혜를 통해 인생의 참뜻을 헤아려 보려는 탐색
둘째, 즐거움을 기반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시도
셋째, 열심히 일해서 뚜렷한 성과를 올리려는 노력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다]
-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P 144)
- 바벨탑은 자신을 넘어 창조주 안에 토대를 두지 않는 한, 집단적인 노력으로 무얼 만들든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P144)
-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출세의 수단으로 보는 대신 뭇 사람들을 섬기는 데 쓸 수도 있다.
예전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또는 신앙에 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던 걸 뉘우치고 입을 열어 무얼 믿으며 따르는지 알리기로 작정 할 수도
있다. 하나같이 크리스천이라면 받드시 가져야 할 선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이다.(P156)
-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먼저 누리신 은총을 덧입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중재자시다.(P158)
- 성경에 ‘에스더 왕후’로 불리우는 것은 모두 14차례이다.
그 가운데 13번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고백 이후에 등장한다. 주인공이 되려고 발버둥
칠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분을 섬길 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P159)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
- 거짓말하는 죄의 밑바닥에는 우상숭배라는 더 교묘하고 근원적인 악이 깔려 있다.(P167)
- 개인적인 우상들은 노동을 비롯한 인간의 행동을 광범위하게 자극하고 빚어낸다.
우상은 죄와 문제가 싹트는 온상이 된다.(P168)
- 인종의 우상이 지배한다는 건 수많은 일거리들이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과 사상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P173)
-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관심사와 욕구보다 더 큰 동기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삶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역할도 크게 바꿔 놓았다.(P176)
- 그리스도를 좇는 이들은 인간의 행복을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까닭에 현대 문화의
집합적인 우상들이 빚어내는 강력한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기 일쑤다.(P186)
- 복음은 신실하게 일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왜 그럴까?(P187)
1) 복음은 일과 관련해서 맥락이 전혀 다른 대안을 내 놓는다
2)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
3) 인간의 마음과 관련한 지혜로운 조언뿐만 아니라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온갖
건강한 지침들을 통해 대단히 새롭고도 민감한 윤리 기준을 선사한다
4) 복음은 일을 하는 동기를 백팔십도 바꿔 놓을 뿐 아니라 상황이 좋든 나쁜든 늘 함께하는
신선하고 강인한 힘으로 심령을 가득 채워준다.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하다]
- 스토리에는 삶이 어떻게 흘러가야 마땅한지에 대한 해설과 어쩌다가 균형을 잃게 되었는지에
관한 설명, 그리고 어떻게 다시 삶을 바로잡을 것인지 기술하는 해법이 제시되어야 한다.(P195)
- 복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삶의 의미가 있으며 그 작동 원리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P199)
-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어 그 관계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구원과 은혜를 통해 옛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P200)
- 기독교 신앙은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죄(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P201)
- 오직 신뢰할 만하고 한결같은 독립성의 보증인만이 이윤을 올릴 수 있다.
목적이 없는 이윤은 재앙을 짓는 레시피다.(P207)
-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착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이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이 아니라 복음적인 세계관에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P209)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다]
- 일은 섭리를 이뤄 가시는 창조주의 주요한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 세상을 유지해 가는
주님의 방식이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거룩한 창조 사역의 현장이다.(P228)
- 일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섭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보는 성경의 노동관은
대단히 중요하다.(P230)
-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문화를 두루 연구해야 한다.
(P237)
- ‘이원론’은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장벽을 설명하는 데 쓰는 말로 죄와 일반 은총,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얄팍한 이해가 낳은 일차적인 폐해다.
이런 태도는 일반 은총의 장엄한 그림과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은밀한 영향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P243)
-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올바른 신앙이 이끌어갈 정점에 섰다고 볼만큼 선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서 그릇된 신념이 끌어갈 가장 낮은 바닥에 이르렀을 만큼 약한게 아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의 일을 하든지 양쪽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그 문화와 표현들을
비판적으로 즐길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쪽짜리 진리를 알아보고 우상을 배격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정의와 지혜, 진리와 아름다움의 흔적들을 분별하고
만끽하는 비결을 익힐 힘이 생긴다.(P245)
[일을 하는 동기가 바뀌다]
-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 동체에 피해를 주는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다.(253)
- 골로새서 3: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가운데서 이미
누리셨던 사랑과 기쁨, 존경과 영광을 나누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다.(P255)
- 인권 의식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다는 기독교 신앙을 토양으로 성장했다.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해 인권을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라(P260)
- 어떻게 해야 자신과 다른 이들의 마음에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정답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이 보내 주시는 성령님을 통해서’다.(P262)
- 일꾼, 직원의 마음가짐
1) 온 마음을 다해 일해야 한다
2)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3)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 상대가 인격체라는 인식을 토대로 관심을 기울이며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삶 전체에 투자해야 한다.(P269)
- 크리스천은 편협한 종파주의자처럼 비쳐지면 안 된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똑같이 존중하고 대우해야 한다.(P273)
[새로운 능력으로 일하다
- 안식일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에 제정되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거룩한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면 누구든 노예 신세다.(P292)
-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참뜻은 예수님을 찬양하며, 따라가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쉼을 누리는 이들을 가르킨다.(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