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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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 아래와 같은 글 귀가 책을 덮은 지금 이 순간까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세상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 또 지식과 인생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엿보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

 

작품은 생명을 가진 존재 중 인간만이 가진 능력인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이 태어나

어느 시기부터, 어떤 방식으로, 어떤 종류의 매개물을 접해야 효율적인 책 읽기가 의미있고

효율적인 것이 될 것인가에 대한 작품으로 모두가 한 번쯤은 들었음직한 내용도 있었고, 저자와

저자의 지인들(?)을 통해 얻어진 연구 성과를 근거로 우리가 잘 알지 못 했거나 새로운 학설을

기반으로 여러 이야기하고 있는데, 작품을 읽는 내내 이런 류의 작품은 기성세대는 물론 결혼해

첫 아이를 마주하게 될 초보 부모들이 읽을 때 아주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작품을 마주할 때 초반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너무 뇌 과학적, 이론적 내용을 갖고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자칫 무료하거나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페이지를 차츰 넘기며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인 깨달음은 앞 쪽에서 가졌던 그런 우려를 말끔이 제거하기에 충분하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그런 차원을 넘어 좋은 작품이라는 넘어 추천해 주고 싶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이야기해 어떤 학문적 가치나 내용적으로 높은 평판을 받기에는 상당히 역부족이라는 생각

을 갖게하는 작품이었지만 그런대로 해당 분야에서만큼은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코로나로 힘든 이런 시기에 대다수의 많은 분들이 집에서 질낮은 유료 TV에 정신 팔려 희희낙락

대지 마시고 이런 작품을 많이 읽어 지혜로운 삶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우리는 한편

다른 측면으로는 어려운 중소 출판업계를 도와주는 데 한 축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에서

이런 글을 씁니다.

끝으로 나는 해당 출판사 및 번역자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 좋은 독자가 되는 지름길은 없다. 하지만 좋은 독자가 되도록 이끌어주고 유지해주는 삶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회에는 세 가지 삶이 있다. 하나는 지식과 생산의 ’,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 특유의 이해 속에서 나오는 즐기는 삶’, 마지막은 관조의 삶이다.(P 36,7)

- 뇌에 새로운 회로가 필요한 이유는 읽기가 자연적인 젓도, 타고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P 42)

- 뇌는 새로운 뉴런망에 인지적으로나 지각적으로 연결된 기술을 얻기 위해 기존 뉴런망을

  재활용하고 심지어 본래 목적을 재조정하기도 한다.(P 44)

- 능력의 발달을 전담하는 유전자는 없다.

  모든 것은 문화적 발명이며 여기에 뇌 피질의 변화가 뒤따랐을 뿐이다.(P 44)

- 읽기 회로의 청사진이 없다는 것은 해당 언어의 요건과 학습환경에 따라 읽기 회로도 상당히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P 45)

-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에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는

  저자의 지혜가 떠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느낀다.

  (P 69, 마르셀 프루스트)

- 뇌 회로의 형성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결코 저절로 이뤄지지도 않는다(P 72)

- 읽기의 유형에 따라 다중의 복잡한 과정들이 읽는 뇌 회로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

  된다.(P 75)

- 책을 열면 어떤 목소리가 말을 한다. 얼마간 낮선 혹은 반가운 세계가 나타나, 삶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에 관해 독자가 품고 있던 가정을 풍요롭게 해 준다.(P 77)

 

* 영어의 문장의 뜻인 sentence는 생각의 방법을 의미하는 라틴어 sententia에서

유래하였다(P 76)

 

- 타인의 관점과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깊이 읽기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혜택이다.

  (P 79)

- 우리는 읽기를 통해 의식이 바뀌는 차원을 거치면서 좌절과 절망이 무엇인지 혹은 무언의

  느낌에 도취되고 사로잡히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P 82)

- ‘마키아벨리는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대화를 하고싶다는 생각에 시대별로

  저자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갖춰 입곤 했다.(P 83)

- 책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은연 중에 품게 되는 공포와 선입견의 해독제로 작용하고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P 85)

- ‘공감은 타인을 동정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훨씬 더 중요하게는 타인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관계한다.(P 89)

- ‘마음 이론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지각, 분석,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핵심적인 능력을 가리킨다.(P 89)

- 읽는 뇌 안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공감 어린 이해를 통해 우리의 오만과 편견은

  해소될 수 있다.(P 93)

- 우리 내부의 배경 지식은 깊이 읽기를 안정화하는데 필수다.(P 96)

  또한 지식이 진화하려면 계속 배경 지식이 추가되어야 한다.(P 97)

- 새로운 정보를 파악한 후 추론과 비판적 분석을 곁들여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지식

  기반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P 96)

- 주의 깊이 읽어야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해내 지식에 더할 수 있다.(P 96)

- 개념 없이는 생각도 있을 수 없고, 유추 없이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 유추는 생각의 연료이자

  불이다.(P 99,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 유비적(類比的) 사고는 우리가 보는 것과 아는 것(배경 지식)사이에 멋진 다리를 놓아 주고,

  새로운 개념과 가설을 구성하게 한다. 이런 가설은 연역과 귀납같은 추론 능력을 응용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는가 하면, 우리가 관찰하고 추론한 것에 대한 우리 생각을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도와준다.(P 99)

- 과학적 사고의 방법들 중에 어떤 것이 가동되는지를 대체로 읽기의 숙달정도와 읽는 내용에

  달렸다.(P100)

- 읽기, 적어도 모든 깊이 읽기에는 유비적 사고와 추론이 필요하다.(P100)

- 우리가 아는 것이 적을수록 유추를 끌어낼 가능성이나 추론과 분석 능력을 키울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우리의 일반적인 지식을 확장하고 적응할 가능성도 낮아진다.(P101)

- 비판적 사유를 세심하게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다음 세대가 텍스트에서든 스크린에서든

  조작적이고 피상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도록 예방접종을 하는 최선의 방법(P104)

- 가장 깊은 형식의 비판적 분석이란 과거에 열심히 추구했던 사고와 느낌을 최선으로 통합하는

  것을 말한다.(P107)

-  ‘통찰이란 거대한 미지의 지식 저장고인 뇌를 흘깃 바라보는 것이다.

  피질이 자신의 비밀을 나눠주는 것이다.(P107, 조나레너)

- 깊이 읽기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인 인간 능력에 시간을 할애하려면 주의의 질을

  높여야 한다.(P116)

- 고독 속의 소통이 일어나려면 독자의 고요한 눈은 저자와의 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은 정적을 유지해야 한다.(P122)

- 우리의 읽기 회로는 다양한 과정의 합산물로서, 주로 끊임없이 가해지는(혹은 부재하는)

  환경적 요구에 의해 형성된다.(P130) 

- 문자를 다른 사람들은 기억의 도구라 반겼지만

  소크라테스는 망각을 위한 처방이라고 주장하였다.(P131)

- 언어의 미래는 작가들이 어렵게 얻은 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단어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과 함께, 독자들도 그에 맞춰 최선의 사고를 읽으려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것과 연결돼 있다.(P136)

- 다양성은 우리 종()의 발전은 물론, 우리가 사는 상호 연결된 지구상의 삶의 질, 나아가

  우리의 생존까지 증진합니다.(P137)

- ‘무료함이란 경험의 알을 부화하는 끔의 새.(P172, 발터 벤야민)

- 동일한 이야기를 인쇄물로 읽느냐, 스크린으로 읽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독해력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디지털 읽기를 선호하지만 자신이 읽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인쇄물이 더 나았다.(P180)

- ‘비유란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대단히 개념적인 연결이다.(P186)

- 영화 아폴로 13’이나 마션에서 주인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자신의 지식

  있었기 때문이다.(P187)

- 청소년들이 외부의 지식원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 지적 발달이 방해를 받는다.(P188)

- 인간이 언어를 학습하기 위한 결정적인 조건은 공동관심이다.(P199)

-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를 다중적인 표상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 표상들이 개념과 언어 발달의 소재가 된다.(P201)

- 두 살 이전에 아이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상호접촉, 그리고 책과 인쇄물과의 물리적인 접촉은

  구어와 문어, 내면화된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최선의 진입로이자 미래의 읽기 회로를 구축할

  벽돌이다.(P207)

- 어린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살아가는 동안 비숫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전략을 세우도록 도와준다.(P209)

- 전문가인 저자는 낮에는 아이 스스로 주도하는 놀이와 인간적인 접촉에 시간을 내어주고

  밤에는 주로 이야기를 읽어주거나 종이책을 보게 하라고 권한다.(P217)

- 아이에게 책이나 이야기를 전부 읽어 줄 필요가 없고, 아이마다 각자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과 속도로만 읽어주는 것이 좋으며, 유아에게는 몇 단어만 들어가 있는 그림책도 효과가

  좋다.(P224)

- 4학년 시기는 미래의 학습력을 좌우한다.(P231)

- 미국의 모든 주에 있는 교정국들이 3~4학년생의 읽기 능력 통계를 토대로 장래에 필요한

  교도소 침상 수를 예측한다.(P231)

- 양손잡이 읽기(두 가지 읽기 능력을 모두 갖춘)뇌를 개발하는 것이 좋다.(P255)

  이유는 이중언어 학습자는 단일언어 학습자보다 언어적 유연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 5세부터 10세까지의 아이들에게는 시간을 들이면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계속 불어 넣어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손을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주면 토끼보다는 달팽이에

  가까운 속도로 자신의 생각을 탐구하도록 이끌 수 있다.(P260)

- 아이가 스크린으로 읽기를 시작하자마자 반대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읽기는 속도가 아니라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P264)

- 우리가 반성적 능력을 점점 잃어가는 것은 끊임없이 효율성을 요구하는 환경에서 나오는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다.(P286)

-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법을 돌아보는 능력을 점점 잃어간다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사고하는지 냉정하게 살펴보는 능력 또한 잃게 될 것이다.(P296)

- 일부 사람들의 권력은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P297)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다양한 견해들의 표출이 아니다. 모든 시민이 지적 능력을 발휘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도록 교육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위협이다.(P298)

- 21세기에 우리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집단적 양심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깊이 읽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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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0 법칙 - 20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리처드 코치 지음, 공병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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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3

 

어느 과학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쥐 열 마리를 폐쇄된 공간에 가두고 먹이를 찾아 미로를 벗어나게 하는 실험이었는데,

열 마리 중 2마리는 아주 적극적이었고 4마리는 중간 정도의 열의를 보였고, 2마리는 앞에

열의를 보이는 쥐들을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자세를 보였는데 나머지 2마리는 미로를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완전히 개판을 치며 장난만 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어진 실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던 2마리 쥐를 빼내고 8마리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추진하자, 역시 또다른 2마리는 적극적으로 길을 찾아헤맸고, 4마리는 적극적으로 2마리를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역시 2마리는 개판을 치는 것이었다.

여기서 또 적극적인 2마리를 빼내자 역시 여섯 마리 중 2마리가 적극적으로 미로를 찾아 전진

했지만 역시 그 중 2마리는 또 개판을 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재미난 사실은 개판을 치는 단골 2마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본 작품을 읽으며 해당 다큐멘타리 실험이 생각났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다큐멘타리 내용과 본 작품 내용이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작품이

전해주고자 하는 내용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 작품 ‘8020’에서 이야기하는 법칙이란

노력, 투입량, 원인의 작은 부분이 대부분의 성과, 산출량, 결과를 이루어낸다는 법칙으로 투입량

20%가 산출량의 80%를 만들어 내고, 원인 가운데 20%로부터 결과의 80%도출되며,

전체 노력의 20%에서 전체 성과의 80%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이 법칙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 인간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핵심적인 소수하찮은 다수의 차이점을 깨닫고 이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또 이를 우리 기업

활동에 대입해 본다면, 80/20 법칙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생산성이 낮은 투입 자원을

생산성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성과는 단순 증가를 넘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성과의 80%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20%에 집중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며 위에서 언급한

실험 쥐들을 대상으로 작품의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면 모든 일은 20%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중요한 20%에 더 많은 힘을 쏟고 80%는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라

작품을 읽다보면 하나도 버릴 구석이 없는 금과옥조의 말로서 점철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나의

뇌리를 강하게 때리는 문구를 하나를 들어 본다면

누구나 위대한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 아니라 성취하기에 적합한 것을 찾아

내는 안목이다

이라는 문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구에서 버릴 단어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문구에 마음이 간 것은 8020의 법칙을 통해 안목을 기르자는 결론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 저자는 작품을 통해 소잡는 칼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소잡는 칼의 사용법에 대해 나름

설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품은 시종일관 8020 법칙 및 활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고 있어 짜중스런면도

있었으나 결론적으로 해당 법칙을 활용하여 개인, 기업, 사회에 적용해 큰 효과를 얻어보자는

내용이었으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8020이라는 법칙을 설명하면서 뜬금없는 몇가지 원칙이 제시되고 있는데 여기에 옮겨

보았다.

8020의 법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노력과 보상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라

둘째, 여유 시간에 대한 죄의식을 버려라

셋째, 타인이 지워준 의무에서 벗어나라

넷째, 관습이나 상식의 틀을 깬 시간활용법을 생각하라

다섯째, 80%의 성과를 내는 20%의 시간을 파악하라

여섯째, 핵심적인 20%애 사용하는 시간을 늘려라

일곱째, 가치가 낮은 활동을 중단하라

따라서 8020의 법칙은 명확하다. 자신이 타인보다도 놀랄만큼 뛰어나고 스스로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면 성공과 행복은 당연히 따라온다

 

또 이런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다. - 8020의 법칙과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나

작품에서는 심혈을 기우려 이야기하고 있다 - 성공을 위한 10가지 주요 지침

1) 아주 좁은 분야로 전문화해서 핵심 능력을 개발하라

2) 스스로 좋아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일인자가 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라

3) 지식이 곧 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4) 시장과 핵심 고객이 누구인지를 알아내 공략하라

5) 20% 노력으로 80% 성과ㅏ 나타나는 분야를 알아내라

6) 그 분야의 일인자에게 배워라

7) 전문 분야에서 자기 사업을 하라

8)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직원을 가능한 한 많이 고용하라

9) 핵심 역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아웃소싱하라

10) 자본의 지렛대 효과를 활용하라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있다. ‘8020의 법칙으로 바라본 행복한 삶을 위한 7가지 전략

1) 인생에 대한 통제력을 극대화하라

2)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라

3) 유연해져라

4) 당신의 파트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라

5) 소수의 행복한 친구를 만들어라

6) 소수의 직업적 혐조자를 만들어라

7)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로 바꾸어가라

세상일이 이런 법칙과 이론으로 파악되고 당초 의도하였던 자신의 목적이 달성된다면 이런

자료와 법칙을 누가 소홀이 다루고 업신여기겠는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인간사이기에 오늘도 이런 저런 작품을 읽으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될까해서 기웃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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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폴 고갱의 삶과 그림
폴 고갱 지음, 최경해 옮김 / 가람기획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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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1

 

작품을 읽다보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 그는 고갱일 뿐이다. 답답한 문명을 미워하는 미개인이며, 창조주를 시샘하여, 틈을 만들어

  작은 창조를 이루는 거인 같은 사람이며, 다른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장난감을 깨뜨리는

  어린애이며, 하늘을 대중과 같이 푸르게 보기보다는 붉게 보기를 좋아하며, 늘 부인하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P 47)

- 예술은 창조이므로 자연과 부합하며 이 창조는 사랑과 가치를 함께 한다.(P 56)

- 회화는 감각의 세계와 지성과의 모순을 해결하는 길을 준비하는 예술이다.(P 56)

- 사람이 죄업을 의식하고 마지의 저승을 무서워하며 해방을 바란다면, 고독이야말로 참으로

  바람직하며 망각이야말로 후련한 것이다.(P 81)

- 언제나 화가가 불행하게 생각하는 점은 자기 재능을 알 수 있는 상인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P169)

- 참된 외교관이란 지나치게 그 지성을 과신하지 않고, 발뺌하는 회답을 하고, 의상을 갖추고

  아주 멋있는 대접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P236)

  

나에게는 해당 작품이 내가 위에서 언급한 문구 외에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의미의 문자만 나열된

그런 작품집이었다.

이런 작품이 훌륭하다느니 불세출의 작품이라고 떠드는 사람들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작품 행간에 숨은 그 어떤 의미를 이야기하기 보다 폴 고갱의 굴곡진 삶을 반추해 보는

것이 더 나을듯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런 류의 작품 읽기는 정말로 책을 사랑하고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작품에서 다가 온 것은 작품의 제목 외에는 없었다!!!!!



고갱은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 실력은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고는 수준급 회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기성 화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직업화가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친구인 고흐처럼 꾸준히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델을 사서 그림을 그릴 형편이 못 되어서 습작에

자화상만큼 좋은 소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갱의 자화상은 다른 화가들의 자화상과는

분명 달랐다. 그는 다른 인물에 자신을 이입시켜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

그의 자화상에 등장한 인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있다.

또 악당으로 전락한 천사 루시퍼도 보인다.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자신의

작품인 노란 색의 그리스도기괴한 모습을 한 고갱이라는 작품을 함께 병치시켜 완성한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흔두 살의 고갱은 아직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 파리 근교를 전전하다

퐁타방이라는 시골 마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마을에 있는 트레말로 성당에 걸린 예수상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그 모습을 곧바로 캔버스에 옮겼다.

이 그림이 바로 노란 색의 그리스도이다.

고갱은 핍박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서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을 악마 루시퍼의 모습으로 묘사한 후광이 있는 자화상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과 소재만으로도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미술사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뒷 담화 중 고흐와 고갱 두 사람이 실은 동성애 관계였다는 얘기에

서부터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고흐 자신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두 사람에 얽힌 소문은

많다.

 

고갱과 고흐는 어느 날 자화상을 그려 서로에게 선물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고갱은 고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빛에

이것 밖에 못 그리나?'라는 조소가 섞여 있다고 고갱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독촉이 거세지자 결국 고갱은 고흐에게 보내기 위한 자화상을 한 점 그리는데,

그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화상이다.

고갱은 당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주인공 장발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던 차에 고갱은 장발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그린 레미제라블고흐에

게 선물했다.

고갱은 이 그림 오른쪽에 그 당시 가깝게 어울려 지내던 화가 베르나르(Emile Bernard, 1868~1941)의 초상을 함께 그려 넣었다. 자화상에 자신의 다른 작품을 배경으로 그리는 것은

평소 고갱이 자주 시도하던 방식으로 그림을 받아본 고흐는 뛸 듯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자화상도 한 점 그려 고갱에게 보냈다.

 

1897,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화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은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철학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그 당시 고갱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때 죄악의 도시라고 부르던 파리를 향해 자신의 예술을

인정해달라며 구걸하기도 했다. 이 일로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독초를 먹었다.

당시 그는 죽은 뒤 산짐승이 자신의 시체를 먹는다면 완벽한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갱은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살아생전에 그리 성공한 화가는 되지 못했다.

고갱을 미술로 이끈 것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었지만, 직업화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는

인상주의 사조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고갱은 "예술이란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는 다르며

작품에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인상주의와 결별을 선언

했다.

 

고갱은 1888년에 '종합주의'(synthétisme,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렬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했다역주)라는 세로운 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1889년 인상파전이 열리던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화가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기성 화단과 평론가 집단은 고갱의 예술적 재능에 큰 호감을 얻지 못했다.

컬렉터들도 고갱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갱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지만 나이만 먹고 있을 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파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파리에서의 생활을 접고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은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다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고흐가 아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작 활동에 전환점을 마련했듯이 고갱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른바 '원시미'가 돋보이는 새로운 그림들을 그렸다.

 

1893년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타히티에서 그린 새로운 그림들이 들려 있었다. 그는 파리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하루빨리 보여 주고 싶었다. 드가는 고갱의 그림들을 위해 전시를 주선해

주었고, 피사로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일부 미술관에서는 고갱의 그림을 전시

하는 것조차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즈음에 그린 또 한 점의 자화상은 당시 고갱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갱은 이 자화상 안에도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 자화상 안에

전시된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던 죽음이 지켜보고

있다라는 작품이다.

 

1895년 고갱은 또 다시 파리를 떠났다.

파리에서 그에게 남은 거라곤 냉소와 조롱뿐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역시 타히티였다.

1903년 심장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고갱은 그곳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고갱이 자화상에 남긴 그림의 제목처럼 그를 끝까지 지켜봐 준 것은 '죽음'이라는 그의 작품

뿐이었다.                                                                                        (daum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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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권유도 3

 

작품 서평에

좀머 씨의 삶은 무엇이고,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생을 죽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 살며 지내다가 결국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고 그는

 죽어 버렸다. 이승에 무수한 발자국만 찍고 다녔을 뿐, 사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애초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이 되돌아가게 될 죽음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자연의 회귀질서에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이다. 지독히도 순결하고,

 극단적으로 완고하게 전생에서부터 저승까지 이어지는 인생길을 끝까지 걸어서 가 버린 그가,

 살았지만 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가 나에게 던져 준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라였다

 

위의 서평이 작품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

십여년 전 본 작품을 읽었을 때 뭐 이런 작품을 갖고 사람들이 열광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웃고 말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시 그 작품을 골라 재 도전하면서 무슨 이유로 당시

독자들이 열광하였을까를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작품을 접하게 되었는데 요번에도 실패

하였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무리 작품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거꾸로 메쳐봐도 어떤 대목에서 작가께서 주장하고 있는

서평 내용과 같은 구석이 있었는지를 솔직히 동감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국내 작가가 위와 같은 작품 그러면 출판도 안 되었겠지만 을 어렵사리 출간해

독자에게 선 보였다고 하면 아마도 그의 문학적 생명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예저녁에 황천길

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백 번 천 번 양보를 해서 서평에 담긴 내용이 진실이라고 해도 주인공인 좀머 씨가 앓고 있는

병인 밀폐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도 살아 있을 동안 그가 꼭 자신이

되돌아가게 될 죽음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자연의 회귀질서에 철저히 복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알 수 있는지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작품을 옮긴 분하고 출판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너무 과대포장하여 아름답게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이 작품을 그냥 어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이야기 수준으로 이해하고 싶고 더 이상의

확대 해석은 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민족의 비극적 전쟁의 상흔이 엷어져가던 시대에 태어났고, 보리고개가 당연한 우리 삶의

한 과정인 시기에 성장을 했다.

한마디로 모두가 못 먹고, 못 입고 하던 시기에 자랐다는 이야기다.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 한 복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어귀는 넝마를 줍는 패거리들과 깡통을

배고픔을 잊으려 두들기던 거렁뱅이들 그리고 자칭 참전 용사라 외치며 동정을 강요하던 상이

군인들이 의수를 흔들며 스쳐지나던 그런 동네였다.

하지만 이런 부류에 전혀 끼지를 못하고 동네 후미진 곳으로 숨어다니던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좀머 씨 부류와 같은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언젠가 그분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동네 어른들 속에서 회자

되면서 평소에 그분들을 알고 계시던 동네 어른들이나 주변인들은 한결같이 애잔하게 이야기

하셨던 내용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슴에 묻고 한 많은 세상을 살다 갔네

는 정도로만 애통해 하는 것을 어린 나이에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작품 속 좀머 씨와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좀머 씨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고 또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보는데 그저 애처럽다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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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역사 - 역사학자, 조선을 읽고 대한민국을 말하다
이덕일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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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8

 

해당 작품을 읽고 어떤 느낌이나 소회를 적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의 역사에서 어떤 터닝포인트를 제공한 사건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특정 사건 하나만 갖고

이야기하기 상당히 버겁다고 이야기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느낌이나 주의, 주장을 피력하기에 나의 역사에 대한 안목과 일천한

역사 지식으로 인해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역사를 사랑하고 역사에서 뭔가를 배우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어느 시점에

조용히 들쳐보면 좋을 듯한 내용으로 축약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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