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폴 고갱의 삶과 그림
폴 고갱 지음, 최경해 옮김 / 가람기획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1
작품을 읽다보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 그는 고갱일 뿐이다. 답답한 문명을 미워하는 미개인이며, 창조주를 시샘하여, 틈을 만들어
작은 창조를 이루는 거인 같은 사람이며, 다른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장난감을 깨뜨리는
어린애이며, 하늘을 대중과 같이 푸르게 보기보다는 붉게 보기를 좋아하며, 늘 부인하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P 47)
- 예술은 창조이므로 자연과 부합하며 이 창조는 사랑과 가치를 함께 한다.(P 56)
- 회화는 감각의 세계와 지성과의 모순을 해결하는 길을 준비하는 예술이다.(P 56)
- 사람이 죄업을 의식하고 마지의 저승을 무서워하며 해방을 바란다면, 고독이야말로 참으로
바람직하며 망각이야말로 후련한 것이다.(P 81)
- 언제나 화가가 불행하게 생각하는 점은 자기 재능을 알 수 있는 상인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P169)
- 참된 외교관이란 지나치게 그 지성을 과신하지 않고, 발뺌하는 회답을 하고, 의상을 갖추고
아주 멋있는 대접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P236)
나에게는 해당 작품이 내가 위에서 언급한 문구 외에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의미의 문자만 나열된
그런 작품집이었다.
이런 작품이 훌륭하다느니 불세출의 작품이라고 떠드는 사람들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작품 행간에 숨은 그 어떤 의미를 이야기하기 보다 ‘폴 고갱’의 굴곡진 삶을 반추해 보는
것이 더 나을듯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런 류의 작품 읽기는 정말로 책을 사랑하고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작품에서 다가 온 것은 작품의 제목 외에는 없었다!!!!!
고갱은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 실력은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고는 수준급 회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기성 화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직업화가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친구인 ‘고흐’처럼 꾸준히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델을 사서 그림을 그릴 형편이 못 되어서 습작에
자화상만큼 좋은 소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갱의 자화상은 다른 화가들의 자화상과는
분명 달랐다. 그는 다른 인물에 자신을 이입시켜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
그의 자화상에 등장한 인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있다.
또 악당으로 전락한 천사 루시퍼도 보인다.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은 자신의
작품인 〈노란 색의 그리스도〉와 〈기괴한 모습을 한 고갱〉이라는 작품을 함께 병치시켜 완성한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흔두 살의 고갱은 아직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 파리 근교를 전전하다
‘퐁타방’이라는 시골 마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마을에 있는 트레말로 성당에 걸린 예수상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그 모습을 곧바로 캔버스에 옮겼다.
이 그림이 바로 〈노란 색의 그리스도〉이다.
고갱은 핍박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서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을 악마 루시퍼의 모습으로 묘사한 〈후광이 있는 자화상〉은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과 소재만으로도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미술사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뒷 담화 중 고흐와 고갱 두 사람이 실은 동성애 관계였다는 얘기에
서부터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고흐 자신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두 사람에 얽힌 소문은
많다.
고갱과 고흐는 어느 날 자화상을 그려 서로에게 선물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고갱은 고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빛에
‘이것 밖에 못 그리나?'라는 조소가 섞여 있다고 고갱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독촉이 거세지자 결국 고갱은 고흐에게 보내기 위한 자화상을 한 점 그리는데,
그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화상이다.
고갱은 당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주인공 장발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던 차에 고갱은 장발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그린 〈레미제라블〉을 고흐에
게 선물했다.
고갱은 이 그림 오른쪽에 그 당시 가깝게 어울려 지내던 화가 베르나르(Emile Bernard, 1868~1941)의 초상을 함께 그려 넣었다. 자화상에 자신의 다른 작품을 배경으로 그리는 것은
평소 고갱이 자주 시도하던 방식으로 그림을 받아본 고흐는 뛸 듯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자화상도 한 점 그려 고갱에게 보냈다.
1897년,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화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은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철학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그 당시 고갱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때 죄악의 도시라고 부르던 파리를 향해 자신의 예술을
인정해달라며 구걸하기도 했다. 이 일로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독초를 먹었다.
당시 그는 죽은 뒤 산짐승이 자신의 시체를 먹는다면 완벽한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갱은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살아생전에 그리 성공한 화가는 되지 못했다.
고갱을 미술로 이끈 것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었지만, 직업화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는
인상주의 사조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고갱은 "예술이란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는 다르며
작품에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인상주의와 결별을 선언
했다.
고갱은 1888년에 '종합주의'(synthétisme,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렬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했다–역주)라는 세로운 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1889년 인상파전이 열리던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화가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기성 화단과 평론가 집단은 고갱의 예술적 재능에 큰 호감을 얻지 못했다.
컬렉터들도 고갱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갱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지만 나이만 먹고 있을 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파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파리에서의 생활을 접고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은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다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고흐가 아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작 활동에 전환점을 마련했듯이 고갱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른바 '원시미'가 돋보이는 새로운 그림들을 그렸다.
1893년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타히티에서 그린 새로운 그림들이 들려 있었다. 그는 파리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하루빨리 보여 주고 싶었다. 드가는 고갱의 그림들을 위해 전시를 주선해
주었고, 피사로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일부 미술관에서는 고갱의 그림을 전시
하는 것조차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즈음에 그린 또 한 점의 자화상은 당시 고갱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갱은 이 자화상 안에도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 자화상 안에
전시된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던 〈죽음이 지켜보고
있다〉라는 작품이다.
1895년 고갱은 또 다시 파리를 떠났다.
파리에서 그에게 남은 거라곤 냉소와 조롱뿐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역시 타히티였다.
1903년 심장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고갱은 그곳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고갱이 자화상에 남긴 그림의 제목처럼 그를 끝까지 지켜봐 준 것은 '죽음'이라는 그의 작품
뿐이었다. (daum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