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지오그팩을 좋아한다. 사진이 맘에 든다. 몇 번을 읽고 따라해 보지만 안 된다. 하여튼 사진 몇장 투척!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행복하자 2016-11-1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만인생님 사진도 멋집니다^^

낭만인생 2016-11-16 10: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워낙 실력이 없어 그냥 오토에 놓고 찍습니다.

yureka01 2016-11-1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저 꾸준히 열심히 찾아서 다녀야 됩니다..사진은 가만있으면 절대 다가오지 않더라구요..ㅎㅎㅎㅎ^^

낭만인생 2016-11-16 10:44   좋아요 1 | URL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사진도 발품이네요..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yureka01 2016-11-1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사진이 사진 이 자체의 목표는 아닙니다.다만 사진으로 매게되어서,사진을 통해서 우리의 직시와 직관으로 우리 삶의 사유가 윤택해지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예술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예술 자체의 목표가 아니라 예술을 통한 삶의 완성이 목적이 되어야 겠지요.. 제가 뭐 잘났다고 가르치고 할 것도 없습니다. 함께 사진으로 우리의 삶의 아름다운 고민을 해보기로 하죠..^^..많이 담으시구요..~~~

낭만인생 2016-11-16 14:32   좋아요 1 | URL
사진을 찍으면서 제 스스로를 돌아 보고 참고 기다리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장소가 시간마다 다르게 찍히 더라구요... 신기하게요.
 

[독서일기] 마흔이 위험하다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릴 때는 카테고리 안에 넣고 제목에는 '독서일기'를 넣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넣고 싶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듯 제목에도, 내용 앞머리에도 동일한 제목을 넣었다. 제목으로 '마흔이 위험하다'로 잡았다. 논어에 의하면 마흔은 불혹(不惑)의 나이, 즉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흔들리지 않음의 다른 말은 확고함이 섰다는 뜻이다. 공자는 위정 편(爲政篇)에 '마흔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것이 마흔을 일컬어 불혹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마흔에 흔들리지 않을까? 아니다. 마흔은 흔들리는 나이다. 특히 현대화된 요즘에는 마흔을 중요한 삶의 포인트, 전환기로 본다. 왜일까? 사회학자들은 마흔이 되면 안정기에 접어든다고 한다. 안정기라면 불혹이라 부를만한데 왜 아닐까? 바로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경쟁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흔의 흔들림은 그동안 사유하지 못한 어설픈 삶의 성찰에 기인한다. 이십 대와 삼 심대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달려온다. 그러다 어느 정도 안정되는 사십 대가 시작되면, 갑자기 묻기 시작한다. 나는 누굴까? 왜 사는 거지? 십 대 때, 늦어도 이십 대에 끝내야 할 질문을 사십 대가 돼서야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십 대에 우울증이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마음의 감기와 같으며, 다시 삶을 정리하려는 영혼의 사춘기다.  

이번에 출간된 마크 라이스-옥슬리의 <마흔통>은 이러한 마흔의 고민을 담고 있다. 부러울 것 없던 가디언 기자였던 저자는 마흔이 되면서 갑자가 삶이 무기력해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니 그제야 생각하기 시작한다. 역자인 안병율은 이렇게 자신의 마흔을 회상한다. 

"그런데 딱 마흔이 되었을 때, 뭔가 이상한 조짐들이 나타났다. 중압감 ... 냉담한 독자들 ... 나는 이게 무슨 짓인가  ... "  

남의 일이 아니다. 마흔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야기다. 누구는 더 빨리, 누구는 좀 더 늦게 경험할 수는 있지만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겪어야 할 고민이다. "그것을 피하기에는 시대가 너무나 악하'기 때문이다.(382쪽)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심하게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는 그 과정을 통해 다시 삶을 재조명하며 살아났기 때문이다.  


알라딘 박스에 담겨 같이 온 또 한 권의 책은 유석경의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이다. 규장에서 출판된 이책은 왠지 거부감이 강하게 든다. 책 표지에 요란하게 이렇게 적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암에 걸렸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위의 문장은 46쪽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녀는 이야기를 진척 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되었다. 내 평생 소원은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는 찬양 가사대로 사는 것이었다. 평생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온전하게 산적이 없었다. 늘 죄를 짓거나 죄 된 생각을 했다. 너무나 절망적이었다."(56쪽)


알라딘 박스에 담겨 같이 온 또 한 권의 책은 유석경의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이다. 규장에서 출판된 이 책은 왠지 거부감이 강하게 든다. 책 표지에 요란하게 이렇게 적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암에 걸렸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위의 문장은 46쪽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녀는 이야기를 진척 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되었다. 내 평생 소원은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는 찬양 가사대로 사는 것이었다. 평생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온전하게 산적이 없었다. 늘 죄를 짓거나 죄 된 생각을 했다. 너무나 절망적이었다."(56쪽)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그녀는 더 나아가 '암에 걸렸다고 좀 거룩해지거나 착해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고백한다.(56쪽)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며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다. 나도 말기암 환자를 품에 안고 숨을 거두기까지 지켜보았다.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을 잡아도 통증이 잡히지 않을 만큼 말기암 환잔들의 고통은 치명적이다. 그 아픔이 사람을 착하게 거룩하게 만들까? 저자의 말대로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은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이는 타인의 아픔과 약점을 이해할 수 있다. 섣불리 완벽한 거룩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전체적 맥락을 놓치고, 신앙의 갈등을 겪는 이들로 하여금 희망이 아닌 낙심을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은 척할 필요는 없다. 논리의 모순이 느껴지는 책이라 그런지 불편하다. 아니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정죄당하는 느낌을 갖게 해서 그런지 썩 맘에 드는 책이 아니다. 아니면, 출판사에서 무리하게 저자의 일부분을 강조하여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신앙의 흔들림 속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흔들고 있다.  

또 하나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고 유석경 전도사님의 고백과 비슷한 고백도 했고, 때론 왜 이런 고난이 찾아 왔는가에대한 고민도 적지 않았다. 아내도 죽기 전 두 달 전까지 일기를 적었다. 그곳에 적혀진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능력은 가히 따라가지 못한 지경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죽음 자체라기 보다는 왜 죽어야하는가에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달라졌다. 한 달이 다르고, 두달째가 달랐다. 처음 암진단을 받았을 때 우리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즉,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의 변화가 찾아 올 수 있고, 삶의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정신력이나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때는 저자의 말대로 급격한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아내의 죽음 이후 읽어온 수많은 책들 속에서도 크지 다르지 않았다. 혹시 고 유석경 전도사님의 유족들이 나의 글을 읽으면 다소 실망하거나 화를 낼 수 있겠지만, 한 마디는 해주고 싶다.  

"나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를 표지에 싣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는 의심한다.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을까?  난 자꾸 그 말에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내가 천국에 가면 유석경 전도사님께 묻고 싶다.  

정말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냐구?  

차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난 그러한 확신이 정말 다른 말기암 환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자꾸 의심이 든다. 왜냐구? 내가 그 일을 겪어 왔는까? 나의 경험의 절대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내 주변에서 암에 걸려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었어요! 라고 말한 사람은 아직 발견하지도 못한 탓이기도하다.  

나는 말하고 싶다. 차라리 흔들려야 한다고. 자신이 가진 믿음도 흔들어 봐야 한다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고. 흔들려야 다시 설 수 있다. 흔들려야 확신할 수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나만의 생각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6-11-1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흔은 어설픈 삶이란 말씀에 공감하며,
몇 살 되면 어설프지 않을지 자문해 봅니다. ^

낭만인생 2016-11-15 22:02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철이 들지 않았는지 마흔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흔들립니다.

yureka01 2016-11-16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 글 당선작 추천!~

낭만인생 2016-11-16 23:12   좋아요 1 | URL
에구.. 아닙니다.

Conan 2016-11-1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흔이 되었을때의 무력감, 상실감, 혼돈을 기억합니다.~ 그렇다고 여러해가 지난 지금 그때랑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습니다.~

낭만인생 2016-11-18 10:10   좋아요 0 | URL
다들 마흔 정도에 정신적인 혼란의 시기가 찾아 오는가 봅니다. 저는 이제야 찾아 오네요.
 

어제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촛불행진일, 오늘은 전태일 분신일


46년 전 오늘, 청년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를 외치며 분신 자살했다. 법은 있으나 지켜지지 않았던 암담한 노동 현실을 직시하라는 의미에서 그는 근로기준법책을 불태웠다. 


어제 그리고 앞으로 또 일어날 촛불 행진은 아직도 전태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당하게 일해도 그 수입은 몇 사람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슬픈 현실 말이다. 또다른 한편으로 억대 연봉을 받으며 끊임없이 데모함으로 협력 없체 노동자들의 눈물을 깍아먹는 귀족 노동자들도 있다. 


전태일이 바라는 건 과한 욕망이 아니라 다만 살아갈 희망, 살아갈 수 있는 약간의 여건이었다. 그게 그 남자의 작은 욕심이었다. 생존이 불가능한 현실을 살아가는 건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것을 훔치기 때문이다. 기업이든 나라이든 극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사람의 것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난 오늘도 촛불행진을 응원한다. 그리고 같이 걷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고싶다 제인 오스틴 전집세트



알라딘 창을 띄우니 제인 오스틴 셋트가 보인다. 난 아직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아니 안 읽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워낙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작년부터 소설의 매력에 빠지면서 주섬주섬 읽고 있다. 그렇게 읽은 책들이 수십권이다. 그런데 내가 읽는 소설은 대부분 한국작가들의 소설이다. 한승원, 한강, 이청준, 김훈, 등등. 왜일까? 그이유는 한 가지. 바로 문장 때문이다. 한국 소설은 번역되지 않는다. 작가가 직접쓴 문장들이다 그러나 그러나 외국 소설은 번역되어야 한다. 직접 원어로 읽지 않을 거라면. 번역은 반역이라하지 않던가. 잘 번역하면 원작보다 더 탁월할 수도 있지만, 배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국 소설은 기피하게 된다. 




그런데 작년 가을부터 한 권씩 읽기 시작한 나츠메 소세키의 책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어쩌다 다 일본이네)을 읽어보니 의외로 괜찮았다. 2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읽어 나왔던 영미 고전들도 번역이 좋았다. 아마도 요즘 번연들은 잘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거부감이 줄었다. 그래서 인데 이번에 나오는 제인오스틴의 전집에 눈독이 가는 것이다. 영화로만 <오만과 편견>을 봤을 뿐이지만, 흐르는 사상이 인간의 폐부를 찌르는 통찰력이 느껴진다. 영화가 별로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나는 스토리로만 보지 않기 때문에 그닥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오늘은 그 날이다. 광화문에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얼마나 기대가 되고 흥분 되는지 벌써부터 행복해진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새로 써지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주 사 놓고 아직 한 장도 펼치지 못한 책이 몇 권 된다. 윤태영의 <대통령의 말하기>와 오엔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 두 권이다. 예전에 <대통령 글쓰기>란 이름으로 강원국이 책을 썼는데 이번에는 제목이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윤태형이 썼다. 그런데 유독 이 책에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현재의 대통령이 말하기와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 말하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설득과 소통의 법칙'라는 부제를 달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생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고 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누군가와 몇 분만 이야기해도 이야기 밑천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아니면 말은 많은데 쓸만한 말은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생각이 빈곤하고 지식을 주워 모으려는 노력이 없는 게으른 사람들이다. 


명연설의 절대 조건 3에서 이렇게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기본은 이해하기 쉬운 언어다.

2. 현장의 언어는 현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3. 서민적 언어에서 기발한 비유가 탄생한다.


내용은 다르지만 하나다. 그건 '서민' '현장'이란 단어로 집약된다. 그것은 쉬운 단어가 번역기가 필요한 현재의 대통령과는 너무나 다르다. 남의 써준 원고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어내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소통의 부재 시대에 배워야할 바로 그책, 그것은 노무현 이란 한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왜 이리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고 싶을까? 비가 오니 더 그렇네. 


윤태형의 <기록>은 3년 전에 읽은 책인데 그때보다 더욱 감흥이 일어나는 책이다. 난 오늘에야 기록의 저자와 <대통령 말하기>의 저자가 동일한 저자임을 알았다. 이렇게 바보 같다. 바보. 


<기록>에도 보면 대통령 말하기 부분이 나온다. 원고를 써오면 '이건 자네 글이지 내 글이 아닐세'라며 수정을 요구한 적도 있다. 고치고 또 고쳤던 노무현 전 대통령. 누군가의 손에 맡겨 놓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어대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일까? 약간의 오해도 있었고, 그 오해가 가져온 정겨움은 또다른 정겨움을 주었다. 또 이말도 했다. 


"책임은 대통령인 내가 지겠다."


맞는 말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한다. 못난 부모는 자식을 탓한다. 참으로 멋진 지도자다. 아직도 난 그가 그립다.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시간>은 말이 필요 없다. 그냥 사서 읽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