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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현대 예술의 웅변적 파수꾼. 아마 쿤데라 본인으로서는 이러한 칭호를 좋아하지 않을 듯 싶지만(무엇보다도 '웅변적'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경멸하며,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다는 표현에서 조롱하듯 웃을 테지만) 이것이 내가 쿤데라를 이해하고 있는 수준이다. 다만 힘이 있고 단단하면서도 그만큼 오해하기 쉬운 웅변의 우악스럽고 선동적인 이미지가 담백하게 제거된, 우아하고 유머러스하며 웃다가도 등 뒤에서 칼침을 놓을 수 있는 날카로운 웅변가이자 파수꾼이라고 덧붙일 필요가 있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일종의 쿤데라 예술론이라고 볼 수 있는 에세이로, 『소설의 기술』, 『만남』, 『커튼』등과 궤를 같이 한다. 우아하고(동어반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쾌하며, 박식한데다가 유머러스까지한,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심미안을 갖고 있는 쿤데라의 글이기 때문에 읽는 재미는 말 할 것도 없다. 둔하고, 모호하며, 지식이 얕은데다가 딱딱하기까지한,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심미안 대신 얇은 귀를 갖고 있는 나로서는 괜한 리뷰 글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유이다. 자칫 형편 없는 리뷰를 읽고 쿤데라를 오해하면 어쩔 것인가! 딱딱하고 어렵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렇고 그런 명성 있는 작가라는 불명예로.


쿤데라가 다루는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범위가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에게)생소하겠지만 그의 주장은 일관되다. 예술을 예술로 이해하라는 것. 그래서 스트라빈스키를 정치적 반동주의자로 몰아 세운 아도르노를 안타까워하고, 야나체크를 민족주의라는 새장에 가둔 체코의 음악가들을 씹어 대고, 카프카를 성자의 반열에 올리지 못해 안달이 난 브로트를 심미안이 결여된 무지렁이 취급 하기를 쉼 없이 되풀이 한다. 이들에게 예술은 견딜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든가, 형이상학적으로 추앙되기 위한 도구이든가, 아니면 당대의 공인된 예술적 형식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적인 복제품이든가, 그것들 중 하나에는 꼭 포함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이들이 견뎌낼 수 없는 것, 무의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자신이 이해하고 친숙한 범주로 끌어들여 해석하고 해부할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결코 만만한 주제가 아닐 뿐더러 통용되기 용이한 주장도 아니다. 당장 쿤데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작가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쿤데라가 자신의 반대편에 기를 쓰고 세워 놓은 작가는 조지 오웰이고 『1984』를 위시한 그의 소설들(쿤데라 자신에겐 정치적 팸플릿에 지나지 않는)인 것이다. 집단적 엑스터시에 지나지 않는 록은 쿤데라에게 라디오 스타의 살인마가 아니라 예술의 살인마가 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예술을 견뎌낼 수 있습니까?


물음에 대한 대답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사고의 확장이라는 허울과 쿤데라의 기지와 확고한 예술적 태도와 예술(가)들을 향한 애정, 그리고 조롱과 애도 섞인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즐거움을 느끼길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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