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학적 사유로부터 '개별화 원칙'이라는 표현을 가져와 이를 존재들의 복수적 공존과 연속을 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적 현상세계를 지시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지는 시공간적 질서 외부에 존재하는 물자체로 이해된다. 의지는 또한 충족 이성 원칙(특정한 시공간에존재하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원칙이자 그 존재가 종속되어 있는 인과의 법칙)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아무런 토대도 갖지 않는 근원적 하나로 이해된다(그러나 이때 하나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 혹은 개념이라는 의미에서의 하나가 아니다). 태어나고 죽는 개인들은 오직 맹목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의지의 현상으로서만 존재한다. 

- HOW TO READ 니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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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가 보기에 초기 그리스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디오니소스 신의 고통이었다. 그는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이전까지 디오니소스가 계속해서 비극의 영웅으로 등장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프로메테우스나 오이디푸스는 모두 본래의 영웅인 디오니소스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대 위에서 디오니소스가 드러나는 양상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실수를 범하고 고통받으며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개인으로 제시되는데 그의 이런 시련은 꿈과 현상 세계의 해석자인 아폴론의 영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개인들은 사실 개별화의 고통을 겪는 영웅, 디오니소스일 뿐이다. 디오니소스는 어린 소년으로서 거인족 타이탄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는 시련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개별화라는 무시무시한 상황에 의해서도 또다시 갈기갈기 찢기는 존재이다. 그는 개별화로부터 고통받는다. 니체는 개별화야말로 모든 고통의 근원이자 본래적 원인이며 따라서 거부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관점에서 본 세계는 한없이 심오하고 비관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근본적으로 융합되어 있는 하나의 상태이며 개별성은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 악의 원인일 뿐이다. 예술은 개별화의 저주를 풀고 원초적인 융합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희망을 제시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개인화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소외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삶의 고통에 노출된다. (개별화 = 소외)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예수 그리스도 같은 인물로 재현하면서 <비극의 탄생> 전체를 통해 구원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비극의 탄생>에서 제시하는 신정설(神正設)은 기독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세계의 미학적 정당화는 세계의 원초적 토대에 대한 것이지 인간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존재의 공포와 부조리를 잘 알고 또 느끼고 있었고 이런 인식으로부터 나온 강력한 필요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라는 두 신을 창조해냈다. 

 

- 키스 안셀 피어슨, 「HOW TO READ 니체」,24-25쪽 

세계는 대립되는 힘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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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야민의 '정신산만(Distraction)'이라는 개념은 동시대 영화이론가였던 크라카우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정신 산만의 숭배」(1926)에서 예술의 수용 방식과 연관해 이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여기에서 크라카우어는 1920년대 중반 새롭게 등장한 베를린의 대형 영화관을 기존의 변두리 극장과 비교해 "영화궁전"이라고 칭한다. 호텔 로비와도 같이 화려한 외관을 지닌 새로운 대형 영화관이야말로 '정신 산만의 궁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궁전'의 내부 디자인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의 성격이 관람자의 주의를 주변적인 것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심연으로 침잠하지 못하게 만든다.  - 「정신 산만의 숭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신 산만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현실의 해부가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중요성'을 지닐 수 있음을 간파한다. 왜냐하면 눈부신 감각 인상들의 파편적인 연속 속에서 관객은 실제의 파편화된 현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영화는 자본주의의 현실 경험이 지닌 추상성과 파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매체다. 다시 말해 영화가 주는 혼잡함의 퍼레이드 속에서, 사회의 부조화에 대한 순간적인 감각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피상성 속에서, 관객은 스스로와 조우한다. 그 자신의 현실이 찬란한 감각 인상들의 파편화된 연속 속에서 폭로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관람자들에게 숨겨진 채 남아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공격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 「정신 산만의 숭배」 

 

  그러나 실상 대부분의 예술에서는 잡다함과 파편성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예술적 조화와 통일성을 꾸며내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크라카우어는 파편성의 진리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야말로 정화가 지닐 수 있는 잠재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연극의 낡은 관습에 영화의 혁명적 잠재성이 종속됨으로써, 은폐된 현실의 파편들을 드러내고 일상적 존재의 예기치 않은 거처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의 능력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부조화와 단편성을 숨기는 대신에,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정신 산만'을 요청했다. 

  요컨대 정신 산만이란 "통제되지 않은 우리 세계의 무질서를 반영"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현실의 의미 없는 표면을 기록하는 영화는 그 표면의 모습이 단지 '임시적'이며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언제나 '다른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역사적 기억을 벗어난 순간들의 새로운 배열"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카우어는 영화를 "메두사의 머리를 비출수 있는 아테나 여신의 방패"에 비유한다. 

 

  오직 영화만이 분명한 의미에서 자연에 거울을 비출 수 있으며, 만약 실제 삶에서 직접 마주 대한다면 우리를 돌로 굳어버리게 만들 그러한 사건들도 영화를 통해 반영할 수 있다. 영사막이 아테나 여신의 방패인 것이다. - 「영화 이론(Theory of Film: The Redemption of Physical Reality)」 

 

  물론 크라카우어도 영화가 주는 정신 산만이 대중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끼칠 가능성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정신 산만은 그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정신 산만에 중독된 동질적인 대도시 대중"을 생산한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는 감각의 자극이 너무나 신속하게 교체되어버리므로, 그 자극들 사이에서 대중이 관조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이란 이면이 없는 표면 위의 움직임, 즉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리는 움직임의 연속일 뿐이며, 영상을 바라보는 주관의 의식은 일종의 유아적 과대망상 상태로 퇴행하여 꿈과 현실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가 정신 산만한 지각 방식에 호소함으로써 관객을 무의식적으로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하고 그럼으로써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목적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했다. 어두운 극장의 환경이 적절한 판단과 정신 활동을 위해 필요한 환경적 자료들을 자동적으로 빼앗아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영화의 옹호자와 비판자가 모두 영화라는 매체를 일종의 마약에 비유했던 것이다. 

- 신혜경,『벤야민&아도르노 :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p.g. 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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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에서 시작해야하는 때가 온 건가.

지금, 여기, 이 곳에서 삶과 배움이 시작되어야 하고 일치되어야 한다. 

이 말은 언제나 진리다. '지금, 여기, 이곳'이 계속해서 변화할 뿐. 

나는 이 말을 다시 읊조린다. 아직 습관이 되지 못한 생각. 또 잊고 있었다. 

  이런저런 책을 읽고 공부를 하려다가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음을 깨닫고 주저앉으니, 그제서야 드는 생각이다. '아, 맞아.. 그랬었지.' 자기만의 방조차 없는 이 곳에서, 말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지면에라도 말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시대성은 일상성에서 비롯한다는데, 그게 될지. 이 따위 의구심, 갖기 전에 먼저 정신력을 회복시켜야 한다. 에너지를 충전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정신력이란 것도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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