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밤, 책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 한 라디오방송에 주파수를 맞춘다.
이번주도 어김없이 금요일 밤 10시, 구십오쩜구(95.9).
지지직. 소리 알러지가 있는 나지만 이건 듣기 좋은 라디오잡음. 지직.
음악퀴즈와 광고들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내가 기다리던 그 코너가 시작된다.
꿈꾸는 책방.
두근. 오늘은 어떤 책을, 어떤 시를 듣게 될까.
그런데 이번 주 첫 이야기는 하워드 진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그가 죽었다고 했다.
87세의 나이로 27일 바로 며칠 전,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워드 진은 미국의 진보적 성향의 역사학자로, 보스턴대의 명예교수이자 동시에 정치학자, 사회비평가, 희곡 작가이기도 했으며, 전쟁을 반대하고 인권운동을 했던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이다.)
하워드 진? 공허하게 다가오는 내가 모르던 이의 죽음.
그의 책 한번 읽어본 적도 없고,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두 진행자의 대화를 듣는 동안 그 공허감은 메워지고, 곧 특별한 기분이 뒤섞인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직접 하워드 진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 진행자에게
그의 죽음은 각별한 것이었고, 울음이 날 수 밖에 없었다고.
아니, 단지 인터뷰를 했던 '안면'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존엄한 순간'을,
고요하고 따뜻했던 노학자 '하워드 진'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에 갑작스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큰 울음이 터졌버렸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마지막 낭독 또한 하워드 진에 대한, 그녀가 직접 쓴 에세이.
그녀는 하워드 진에게 마지막으로 이것을 물었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대답은 "Um... Kindness."
'평화'도 아닌,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친절함, 카인드니스.
그게 다였다.
어제 한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말도 놓고 장난도 치며 친하게 지냈지만 대학졸업후, 조금은 소원해진 관계. 친구가 식당에서 선배를 봤다고 문자가 왔길래, 평소에 문자를 잘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지만 그냥, 정말 그냥, 반가운 마음에 "지금 *에서 밥먹고 있지? 다 보고있어." 장난을 좀 쳤다.
몇번의 문자가 간단히 오가고, 몇시간이 지나 일행과 헤어진 듯 다시 문자가 왔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
먼저 연락해줘서 고맙다고. 감기 걸리지 말고 따스한 겨울 나라고. 선배랍시고 밥 한끼 제대로 못 먹인 것 같다고, 한번 보자고.
차가운 기계, 그 텍스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시험을 준비한단 핑계로 거의 1년을 보지 못한 친구에게 고민 끝에 '보자'고 했더니
전화가 왔다. 그리고 마지막엔 또 고맙다는 말...
그랬다. 평소에도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무언가에 열중하면 다른 것은 마음에 잘 넣지 못하는 그런 몹쓸 버릇을 가진 덕택에, 난 주로 연락을 하기보단 연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락을 받는 그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계속된 거절을 밥먹듯 하던, unkind하게 관계로부터 숨어버리던..
지나간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상황이라는 변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손들을 놓아버렸는지.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여전히 나는 망설이다 허공에 마음을 쓰고, 입술을 떼지 못하고, 손을 잘 내밀지 못하지만
하워드 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필요한 건 kindness.
그건 바로 마음을 표현하는 친절함 이 아닐까.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더없이 부족한 그것, Kindness.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마음을 내민다는 것.
혼잡한 버스 속에서 벨에 손이 닿지 않을 때 대신 눌러주는 것,
학생이 들고있는 무거운 책을 받아 내 무릎 위에 잠시 올려놓는 것,
아무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미소로 마음을 전하는 친절.
무언 중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먼저 말을 건네는 것.
때로는 이병률 시인이 받았던 문자처럼
"면아, 네 잘못을 용서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까지도.
그렇게 한명 한명 숨겨놓은 따뜻한 마음들을 풀어놓는다면,
이렇게 추운 겨울날에도 세상은 한결 따뜻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감기 걸리지 않고 따스하게" 겨울을, 세상을 날 수 있을 것이니까.
우린 충분히 kind 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건 하워드 진이 평범한 우리들을 위해 남긴 가장 분명하고도 가장 쉬운 가르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