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실재론자는 ‘정신없이 무대를 보는 관객‘과 비슷하다. 그 의식은 무대 위에 전개되는 드라마에 몰입되어 있어, 어떠한 연출적 기교의 효과로 그와 같이 ‘보이게 되어 있는지‘는 우선 의식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관객은 자진해서 ‘몰입하는 것‘을 바라기조차 하고 있다.
한편 회의론자는 ‘시시해진 관객‘과 비슷하다. 그는 무대 위에 있는 것이 골판지에 그린 배경이며, 배우들이 무대를 내려오면 그냥 보통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드라마에 몰입하지 못한다.
현상학자는 ‘연출가‘이다. 연출가는 ‘김빠진‘ 눈길로 배우의 연기나 조명이나 음향이나 무대장치를 체크한다. 그것이 꾸민 것이며, 가상일 뿐임을 그는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무대를 분석적으로 보는 일에 역으로 너무 ‘몰입‘해버리면, 관객이 무대 위에서 ‘정말로 보는 것‘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무대 위에는 비판적 눈길이 미처 보지 못하고, 마음을 빼앗긴 관객만이 환시幻視하는 극적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연출가에게는 깨어 있음과 동시에 몰입해 있음이 필요해진다. 현상학자의 일은 이것과 유사하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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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그것이 다신론多神論이든 일신론一神論이든, 신은 최고의 가치, 가장 바람직한 선善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특별한 의미는 한 사람에게 가장 바람직한 선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신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의 성격 구조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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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욕망은 융합을 지향하지만, 결코 육체적 욕망이나 고통스러운 긴장의 해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의 불안에 의해,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에 의해, 허영심에 의해, 상처를 내고 심지어 파괴하려고 하는 소망에 의해 자극된다. 성적욕망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그것에 의해 쉽게 자극되며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에 지나지않게 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 P85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 내 행위 속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 P87

자기애
사랑의 개념을 여러 가지 대상에 적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이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기애는 이기심과 같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서양사상에서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 칼뱅은 자기애를 ‘페스트‘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적 용어로 자기애를 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의 가치 판단은 칼뱅의 가치 판단과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도취, 곧 리비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아도취는 인간의 발달에서 매우 초기 단계이고, 후에 이 자아도취적 단계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 이 사람은 미치게 된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나타남이라고 보고 리비도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사랑),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자기애)고 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랑과 자기애는 한쪽이 많을수록 다른 쪽이 줄어든다는 의미에서 상호 배타적이다.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인 것은 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곧 심리학적 관찰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는 명제를 뒷받침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과 같은 현상인가, 또는 오히려 그 반대인가? 더 나아가 현대인의 이기심은 정말로 모든 지적·감정적·감각적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인가? ‘그‘는 그의 사회적·경제적 역할의 부속품이 되지 않았는가? 그의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한가, 또는 이기심은 자기애의 결여로 생기는가?
이기심과 자기애의 심리학적 측면을 검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하는 견해에 나타나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을 제외하는 이론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모순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 P89

이기심의 본질에 대한 이 이론은 신경증의 한 증상인 신경증적 ‘비이기주의‘—이것은 흔히 이 증상만이 아니라 이 증상과 관련된 다른 증상, 곧 억압, 피로, 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애정 관계에서의 실패 등으로 시달리고 있는 적잖은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 신경증 증상이다—에 대한 정신분석적 경험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비이기주의는 ‘증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흔히 이러한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구원적인 성격이며 특색이다.
‘비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한 데 대해 당황스러워한다. 분석적 연구에 따르면, 그의 비이기주의는 그의 다른 증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실은 가장 중요한 증상일 때가 흔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그는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 있다. 그의 비이기주의가 다른 증상과 함께 증상으로 해석되어서 그의 비이기주의와 다른 고통의 근원인 생산성의 결여가 고쳐질 때에만 이 사람은 치유될 수 있다.
비이기주의의 본질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특히 명백히 나타나고, 우리 문화에서는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비이기심을 통해 자녀들이 사랑받는 것이 무엇이며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의 비이기심의 영향은 그녀의 기대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행복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불안해하고, 긴장해 있고, 어머니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살려고 애를 쓴다. 보통,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적의에 영향을 받는데, 이러한 적의를 명백히 인식한다기보다는 막연히 느낄 뿐이며 마침내 그들도 이러한 적의에 감염된다. 결국 ‘비이기적‘인 어머니가 미치는 영향은 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과 별로다르지 않다. 사실상 비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이 더욱 나쁜 경우가 많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비이기주의 때문에 어머니를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압박을 받는다. 아이들은 덕德이라는 가면 아래서 삶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만일 순수한 자기애를 가진 어머니의 영향을 연구할 기회를 갖는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 기쁨, 행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전도력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 P94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 P96

젊은이의 사랑하는 능력이 일반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본보기로 보여준 사랑에 의해 각인된다 하더라도 부모만이 사랑하는 능력의 발전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독립·자율에 대한 추구와 자신의 고유한 사랑의 경험이 출생부터 줄곧 모든 정신적 발달에 영향을 끼친다. 어른이 되면서 이러한 추구는 다른 사랑의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파트너를 찾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럴 때 부모의 사랑이 장해가 되고 자기발달을 방해하는 작용을 하면 할수록, 새롭고 대안적인 사랑을 경험하고자 하는 탐색 끝에 얻은 새로운 관계에서마저 익히 알고 있는 부모와의 관계 패턴이 쉽게 재현되고 만다.
흔히 우리는 수많은 애정관계에서 실패를 겪고 나서야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말로 작고 의존하게 만드는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파트너에게서 다시 찾지 않을 마음이 생긴다. 모성애와 부성애로부터의 이러한 뒤늦은 해방 과정은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운 포기 및 상실의 경험과 연계되어 있다. 부모와의 애착을 포기하는 데 뒤따르는 실망과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결국 스스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지속되는가가 결정적이다. 프롬이 다른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문제를 사랑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한 자는 실망을 견디고 퇴보를 무릅쓰고 끈기를 보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P202

어린이에 대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는 어린아이 자신의 욕구와 일치한다. 갓난아이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다. 여섯 살 이후 어린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권위와 지도가 필요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기능을 갖고 있고, 아버지는 이 어린아이가 태어난 특별한 사회가 던져주는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어린아이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상적인 경우에 어머니의 사랑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무력감을 조장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지나친 걱정을 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아이에게 전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로 인도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이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해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super-ego 개념과는 달라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편입시킴으로써 내면에 그들의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어머니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숙한 사람은 어머니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이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데도 이러한 두 양심을 모두 가지고 사랑한다. 그가 오로지 아버지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그는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가 오로지 어머니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그는 판단력을 잃기 쉽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발달을 방해하기 쉽다. - P70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특색은 배타성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의 능력을 발달시켜왔다면, 나는 내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인간적 유대와 인간적 일치를 경험한다. 형제애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능,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인간적 핵심의 동일성과 비교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러한 동일성을 경험하려면 주변에서 핵심으로 침투할 필요가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주로 표면적으로 지각한다면 나는 주로 차이점을 지각하게 되고, 이 차이점은 우리를 분리한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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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보다 먼저 당신을 축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나날을 신경써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순한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EL, p.108.)

내가 ‘당신‘과 만날 때에, 나는 이미 ‘인식‘에 앞서 ‘축복‘을 행하고 있다.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피부색이나 눈빛이나 복장을 인식하고,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속성을 가진 자인지를 특정하고, 인사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인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인식에 앞서서, 인식을 초월해서, 나는 ‘당신‘에게 축복을 보낸다. 이때 축복을 보내는 자인 나는, 말하자면 ‘무로부터의 창조‘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장 그 자체를 열고 있다.
여기에 ‘당신‘을 향해 말거는 한 사람의 인간이 있다. ‘당신‘에게 축복을 보내고, ‘당신‘과의 대화를 진심으로 바라는 한 사람의 인간이 있다. 그것을 전하는 것에 ‘인사‘의 본질은 존재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창조하는‘ 이 메시지를 레비나스는 ‘메시지로서의 메시지‘라고 부른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회로가 만들어진 다음에 거기를 통해서 오고가는, ‘의미작용‘으로서의 메시지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커뮤니케이션, 기호를 증여하는 기호‘(AQE, p.153)인 것이다. ‘말하기‘는 ‘윤리적‘이다. 이 명제는 이러한 문맥에서 도출된다.
‘인사‘를 보내는 것은 ‘파롤이란 선물‘이 ‘당신‘에게 보내지지 않고, 보내져도 묵살된다는 ‘리스크‘를 미리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자신의 취약한 옆구리를 우선 ‘당신‘에게 드러낸다. ‘당신‘은 나를 상처입힐 수 있다. 나는 ‘당신‘에 의해 상처받을 수 있다고 알리면서, ‘인사‘는 보내진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말하기‘에 의해 창시되는 ‘타자와의 만남‘을 내가 ‘타자‘를 찾아낸다는 능동적 모드가 아니라, 내가 ‘타자에게 폭로된다‘고 하는 수동적 모드로 기술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윤리‘라 부르는 것은 이 ‘폭로의 모드‘를 선택하는 결단을 말한다. 아니 ‘선택한다‘고 하는 식의 말은 이미 적절하지 않다. ‘윤리‘에 선행해 타동사적인 능동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가 결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결단이 내려진 다음에, 그러한 행위를 기동시킨 ‘시점始點‘이 사후적으로 확정되고, 그것을 사람들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 단락의 표현도 수정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내‘가 ‘타자에게 폭로된다‘고 하기보다, ‘타자에게 폭로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나‘와 ‘타자‘는 동시적으로 생기하는 것이며, ‘나‘에 앞서 ‘타자‘가 있는 것도, ‘타자‘에 앞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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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과의 의견 일치는 ‘자신의’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곧 핸드백이나 스웨터에 새겨놓은 머리글자, 은행 출납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가입하는 것 등은 개인적 차이의 표현이 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경우에 ‘이것은 다르다’는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는 애처로운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이와 같이 강화되는 것은 가장 발달한 산업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등의 개념 및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평등은 종교적 맥락에서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식이며,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 똑같은 신성한 천품을 갖고 있고, 우리 모두 일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평등은 개인 간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며, 우리 모두 일체임이 사실이더라도 우리는 각기 독특한 실재이고 각기 하나의 조화로운 우주라는 것도 사실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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