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안일로 지내는 사람들
우리가 지금 든 몇 개의 예는 너무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비평가가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ㅡ어려운 생활 상태에서 쉬운 생활 상태로 옮겨진 사람들은 물론 한꺼번에 잔뜩 먹는 굶주린 인간처럼 ‘망쳐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훨씬 용이한 조건에 혜택을 입어온 사람들은 이 이점을 잘 이용하는 일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구별한 두 경우 중 후자 즉, 용이한 환경 속에만 있었으며, 우리가 아는 한 아직 그 밖의 환경에 몸을 내맡긴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상이한 환경으로 옮아간다는 교란 요소가 배제되어 우리는 용이한 환경 조건이 나타낸 효과를 순수한 상태로 연구할 수 있다. 다음에 예시한 사례는 약 50년 전에 서양 관찰자의 눈에 비친 니아살핸드(말라위)에서의 용이한 조건의 효과에 대한 실견기이다.

"이 끝없는 삼림 속에 마치 숲 속의 새둥지처럼 서로 두려워하고, 또 공통의 적인 노예 상인을 두려워하는 작은 토인촌이 여러 군데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는 옷도 없고, 문명도 없고, 학문도 없고, 종교도 없는 원시인, 그리고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걱정이 없는 만족된 자연아가 천진난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외모로 보기에는 참으로 행복스러워 보이고 거의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는다. ······아프리카 인은 종종 게으르다고 비난당하나 그것은 말의 오용이다. 그는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처럼 풍요한 자연 속에 있으면서 더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나태는 그의 납작한 코처럼 그 자신의 한 부분으로, 거북의 느린 동작이 비난 대상이 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비난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빅토리아조 시대의, 남서풍보다도 북동풍을 좋아하는ㅡ영국에선 남서풍이 부는 계절이 가장 좋은 계절, 북동풍이 부는 때는 그 반대ㅡ노력과 역행 생활의 전형이었떤 찰스 킹즐리(영국의 성직자,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는 하루 종일 비파적을 불고 놀고 싶었으므로 ‘근면‘한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위대하고 유명한 「나라의 역사」라는 소설을 썼다. 그러나 이 태평한 자들은 고릴라로 퇴화하는 벌을 받았다.
로토스를 먹으며 안락하게 지내는 인종에 대해 그리스의 시인과 근대 서유럽의 도덕가가 나타내는 태도에 차이가 분명 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호메로스의 경우에는, 로토스를 먹는 인종과 그들이 살고 있떤 로토스국이 가장 놀라운 유혹적 매력을 지닌 것이며, 문명화해가는 그리스 인의 앞길에 놓인 악마의 함성이었다. 이에 반해 킹슬리는 만사자유인을 모멸과 비난의 눈으로 바라보고, 일체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치 근대 영국인다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안락한 생활을 찾아 이동하는 이들 유민을, 물론 서유럽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이익을 위해 영국에 병합하여, 그들에게 바지를 입히고 성서를 주는 일이 절대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시인도, 부인도 아닌 이해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창세기> 처음 몇 장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로토스국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뒤 비로소 그들의 자손들이 농경과 도금술과 악기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 P121

130 시리아 사회의 전설에 보면 이스라엘 인의 신 야훼가 인간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엄중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왕을 시험한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께서 밤의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 솔로몬이 대답했다. "······지혜를 종에게 내려주소서" 솔로몬의 청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이 일을 구하되 자신을 위한 장수를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을 위해 부를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의 적의 생명도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을 위해 불를 구하지 않고, 또 자신의 적의 생명도 구하지 않고, 오직 송사를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나는 너의 말대로 지혜롭고 현명한 마음을 주노라······ 너와 같은 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도 주겠노라.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열왕기 상> 3:11~13)
이 솔로몬 왕의 선택에 대한 전설은 ‘선민‘의 역사를 비유한 이야기이다. 정신적 이해력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 인의 군사적 용감함과 페니키아 인의 해양적 용감함을 능가했다. 그들은 이교도들 구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먼저 신의 나라를 구했다. 그러자 구하지 않은 모든 것도 그들에게 저절로 주어졌다. (<마태> 6:31~33, <누가> 12:29~31). 적의 생명에 대해 말하면, 필리스티아 인은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갔다. 부에 대해 말하면, 유대인은 티로스와 카르타고의 유산을 이어받았고, 페니키아 인이 미처 알지 못했던 대륙에서 페니키아 인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규모 상거래를 하게 되었다. 장수에 대해 말하자면, 페니키아 인이나 필리스티아 인이 모습을 감춘 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도 아직 그들을 몰아낸 유대인은 그때와 똑같이 여전히 특수한 민족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고대의 시리아에 있어서 그들의 이웃사람은 세상의 도가니 속에 끌려들어가, 새로운 모습과 이름을 새긴 화폐로 다시 주조되었으나, 이스라엘은 이교도들을 거의 다 굴복시킨 이 연금술ㅡ세계 국가와 세계 교회와 민족의 이동이라는 도가니 속에서 ‘역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ㅡ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 P130

158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손실이 도나우 합스부르크 왕국의 이익이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나우 왕국의 영웅시대도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세력이 붕괴됨으로써 동남 유럽에 다른 세력이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공지가 마련되었으나, 그와 동시에 도나우 왕국에 그때까지 자극을 주고 있던 압박에서 해방시켰다. 도나우 왕국은 왕국이 성립되도록 끊임없는 도적으로 자극을 준 세력의 뒤를 따라 쇠퇴하여 결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 - P158

159-60 끝으로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의 중간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와 투르크의 대조적인 태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1914~18년의 대전 후 그들은 함께 공화국으로서 새로 탄생했으며, 한때 서로를 적으로 여겨왔던 제국의 모습을 탈피했다. 그러나 유사한 점은 그것만으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인은 패전 5개국 국민 중에서 가장 심한 고통을 입었으며 가장 순종적이었다. 그들은 새 질서를 극도의 단념과 극도의 회한으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투르크 인은 패전 5개국 중 유일하게 휴전 뒤 1년도 되기 전에 재차 무기를 들고 승전국과 싸움을 일으켜, 승전국이 그들에게 강요하려던 강화 조약의 근본적 개정을 요구하고 그 목적을 이룬 유일한 국민이었다. 그와 동시에 투르크 인은 그 젊음을 되찾고 그 운명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이미 퇴폐한 오스만 왕조 밑에서 망쳐진 채 버림받은 제국의 어느 한 지방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왕조로부터 버림을 받자 그들은 다시 한번 국경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 술탄의 오스만처럼 실력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그들의 조국을 확장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1919~22년의 그리스·투르크 전쟁의 결전장이 되었던 인 에뉘(아나톨리아 고원의 서북단에 있는 거리)는 600년 전에 셀주크족의 마지막 왕이 오스만 왕조의 첫 왕에게 할당해준 본래의 세습 영토, 바로 그 ‘술탄의 새로운 시작의 땅 안‘에 있다. 수레바퀴는 완전히 일회전 한 셈이다. 첫 막이 올려질 때 나타났던 그 수레가 무대 뒤켠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 P159

165-6 살아 있는 유기체의 어떤 특정한 기관 또는 기능이 사용 불가능하게 되어 같은 종류에 속하는 다른 유기체에 비해 불리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이 도전에 대하여 다른 기관 또는 기능을 특별히 많이 사용하게 되므로, 결국 제2의 활동 분야에서 그 능력이 동료를 능가하게 되어 제1의 활동 분야상의 핸디캡을 메워주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장님은 눈이 보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보통으로 가지고 있는 촉각보다도 그 촉각을 예민하게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과 거의 비슷한 현상이 사회 전체에서 발견된다. 우연에 의해서이건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이건, 어쨌든 사회적으로 제재를 받고 있는 집단 또는 계급은 어떤 종류의 활동 분야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여지거나 그 분야에서 완전히 축출당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는 그런 도전에 대하여, 그 활동력을 다른 분야에 집중시킴으로써 다른 것을 능가하는 식으로 웅전하는 수가 많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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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됐다. - P386

390 모래를 한 줌 움켜쥐면 그 속에서 약 1만 개의 모래알들을 헤아릴 수 있다니,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의 개수보다 더 많은 수의 알갱이들이 내 손에 들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볼 수 있는 별은 실재하는 별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맑은 날 밤하늘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은 가장 가까운 것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주에는 별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많다. 지구상의 해변이란 해변 모두에 깔려 있는 모래알들보다 우주에 있는 별들이 훨씬 더 많다. - P390

394-5 오리온자리는 황도 12궁에 속하지 않는 별자리이다. 오리온자리는 사냥꾼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네 개의 밝은 별과, 별자리 전체를 사선을 그리며 둘로 나누는 사냥꾼의 벨트 같은 세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이다.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듯한 약간 흐릿한 세 계의 별이 실은, 천문학적 전통에 따르면, 오리온의 칼이다. 하지만 세 별들 중에서 가운데에 있는 것은 별이 아니라 오리온성운이라 불리는, 별들이 태어나고 있는 거대한 가스 구름이다. 오리온자리에 있는 많은 별들은 표면 온도가 높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매우 젊고 무거운 별이다. 이들은 빠르게 진화하여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폭발 현상을 일으키면서 자신들의 생을 마감할 것이다. 이렇게 무거운 별들이 태어나고 죽는 주기는 몇 천만 년 정도이다. 만일 컴퓨터에서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진행시킨다면, 많은 수의 별들이 태어나고 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마치 밤의 반딧불과 같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P394

396 금년이 1980년이고 특수 상대성 이론이 태어난 해가 1905년이니, 지금 막 우리에게 도착한 광자가 안드로메다자리 베타별을 떠났을 때쯤, 지구에서는 스위스 특허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당시로는 지극히 획기적인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있었을 것이다. - P396

405 빛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주장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된다. 예를 들면, ‘생각의 속도‘ 같은 것인데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 뇌의 신경 전달 신호는 당나귀가 수레를 끄는 것과 같은 느린 속도로 뉴런 사이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상대성 이론을 궁리해 낼 정도로 영리하기는 하지만 그리 빠르게 사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 컴퓨터의 전기 회로 속에서는 전기 신호가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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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여기서 인간은 위대한 혁명의 일보 직전에 있으며 마침내 얼마 안 있어 가축을 소유하고 곡식을 경작함으로써 식량 공급을 스스로 관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혁명은 북쪽의 빙하가 녹고, 그 결과 유럽을 뒤덮고 있던 북극성 고기압이 후퇴하고 대서양 저기압의 진로가 남지중해 연관으로부터 현재의 중부 유럽을 통과하는 진로로 바뀜으로써 생긴 위기와 관련이 있따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확실히 지난날의 초원 지대의 주민들에게도 그 창의성을 극도로 발휘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유럽의 빙하 지대가 작아짐에 따라 대서양 온대성 저기압대가 또다시 북쪽으로 퍼졌기 때문에 서서히 진행되는 건조화에 직면하여 그때까지 수렵 생활을 해 오던 주민들에게는 3개의 길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익숙하던 기후대를 따라 먹이가 되는 짐승과 함께 북쪽 또는 남쪽으로 이동하든지, 아니면 살던 땅에 머물러 건조에도 살아남는 새나 짐승을 잡으며 그럭저럭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가든지, 아니면ㅡ역시 고국을 떠나지 않고ㅡ동물을 사육하고 농사를 지음으로써 변덕스러운 환경에 의존하는 상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야 했다."

결국 거주지도 생활 양식도 바꾸지 않은 사람들은 건조화의 도전에 응하지 않은 셈이어서 그 때문에 절멸이라는 벌을 받았다. 생활 양식을 변경하여 수렵자로부터 양치기로 전업함으로써 거주지를 옮기지 않은 사람들은 아프라시아 대초원 지대의 유목민이 되었다. 이들의 업적과 운명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논한다.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고 거주지를 변경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 중에 북쪽으로 이동하는 저기압대를 따라감으로써 건조를 피한 집단들은 뜻밖에도 북쪽의 계절적 차가운 공기라는 새로운 도전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도전에 굴복하지 않는 자 사이에 새로운 창조적 응전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남쪽의 몬순(계절풍) 지대로 후퇴함으로써 건조를 피한 집단들은 열대의 변화 없는 기후가 발산하는 최면적 영향을 받아 게으르게 잠자는 일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다섯 번째, 즉 마지막으로 건조화의 도전에 응하여 거주지와 생활 양식 양쪽을 다 바꾼 집단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보기 드문 이중의 반응이야말로 소멸해 가는 아프라시아 초원지대에 자리한 몇 개의 원시 사회로부터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의 동적인 활동이었던 것이다.
이들 창조적인 사회 집단의 생활 양식에 일어난 변화는 식물 채취자나 수렵자의 생활로부터 경작자의 생활로 완전히 전환한 일이었다. 변화가 일어났던 거주지는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내버리고 온 초원과 이주해 온 새로운 자연 환경과의 성격의 차이를 재어 본다면 매우 큰 것이었다.
나일 강 하류 유역을 내려다보고 있던 초원이 리비아 사막으로 변화했고,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두 강의 하류 유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초원이 룹알할리 사막(아라비아 동남부의 사막)과 루트 사막(이란 고원 중앙부의 사막)으로 변화했을 때, 이들 영웅적인 개척자들은 용감성인지 자포자기인지 아니면 이 지역에도 수분이 줄어드는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측때문인지 모르지만 일찍이 아무도 발을 들여 놓지 않은 골짜기 밑바닥의 늪지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동적인 행동은, 버려진 그곳을 이집트 땅과 시나이 땅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다른 길을 택한 그들의 이웃들이 볼 때 그들의 모험은 뻔히 알면서도 사지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아프라시아 대초원 지대로 변화하기 시작한 지역이 아직도 지상 낙원이었던 그 옛날,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의 정글 늪지대는 사람이 가까이 가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얼핏 보아 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의 황무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모험은 개척자들이 품었던 어떤 낙관적 기대보다도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변덕스러운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던 정글 늪지대는 모습을 갖추었고 정연하게 배치된 수로와 제방과 논밭으로 나타났다. 개간된 황무지는 이집트와 시나이의 국토가 되었고, 이집트와 수메르 사회가 그 위대한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 P100

103-4 나일 강 유역, 한 지방의 옛날 모습과 다른 지방의 오늘날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데 착안하여 잠시 가정을 해보자. 나일 강 유역의 현재 적도 강우권 밖에 있는 지방의 주민들에게 건조화라는 도전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삼각주와 나일강 하류 유역은 본디의 자연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을까. 그래도 이집트 문명이 결국엔 출현했을까? 이 지역의 주민이 현재 실루크족과 딩카족이 바르알 자발 강변에 웅크리고 있듯이 야성인 채로 지금까지 나일 강 하류 유역 주변에 웅크리고 있었을까?
또 한 가지, 이번에는 과거가 아니고 미래에 관한 가정적 문제를 생각해 본다. 우주의 시간적 척도는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생명·인류의 시간 척도로 재어본다 해도 6000년이라는 세월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 어제에 해당하는 빙하기의 끝 무렵에, 나일 강 하류 유역의 주민 앞에 나타난 도적과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 내일 6000년 아니 그 보다 몇천 년이 더 지난 뒤에 나일 강 상류 유역의 현재 ‘살아 있는 박물관 부족‘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그들이 그 도적에 대하여도 역시 창조적 결과가 생기는 동적인 행위로 응전할 능력이 없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이 실루크족과 딩카족 앞에 나타나는 가정의 도전이 이집트 문명의 창시자 앞에 나타난 도전과 같은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고 조건을 붙일 필요는 없다. 그 도전이 자연 환경에서 일어난 것, 즉 기후의 변화가 아니고 다른 문명의 침입에 의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현재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서유럽 문명의 침입ㅡ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모든 문명과 모든 원시 사회에 대하여 신화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간적 요인이다ㅡ에 의해 아프리카의 원시인에게 나타나고 있는 도전이 아닐까?
이 도전은 극히 최근에 시작된 것이어서, 도전을 받고 있는 나일 상류 지대의 어느 사회인가가 결국 행하고야 말 응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선조가 하나의 도전에 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자손도 그들의 차례가 왔을 때 다른 도전에 응할 수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P103

109-10 원시 사회의 어둠 상태에서 출현하여 ‘어버이‘ 문명을 갖지 않는 문명을 잠시 접어두고, 그 뒤에 출현한 선행 문명과 다양한 형태, 또는 다양한 정도로 관계를 갖는 문명에 눈을 돌려보면, 이들 ‘자식‘ 문명은 자연환경의 도전이 또한 어느 정도 자극을 주었겠지만 중요하고 본질적인 도전은 ‘어버이‘ 사회와의 관계로부터 생긴 인간 환경의 도전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도전은 ‘어버이‘ 사회와의 관계 자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분화로부터 시작되어 분리에서 정점을 이룬다. 분화는 선행 문명이 일찍이 그 성장기에 있어서 하층의 사람들이나 외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복종시키는 창조력을 잃기 시작하자 그 내부에서 일어난다. 이 창조력은 문화가 성장기에 있을 때는 하층 사람이나 국경 밖의 사람들에게 자발적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창조력을 잃은 병에 걸린 문명은 체력 감퇴라는 휴우증으로 이미 민중을 지도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차차 폭압의 도수를 높여 지배하는 소수 지배자와 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자기 영혼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영혼을 잃지 않으려고 결의하는 프롤레타리아(내적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열된다. - P109

115 그런데 실론에 인도 문명을 전파한 사람들은 원래 계절풍이 몰아치는 고지의 메마르고 황폐한 자연상태에 있던 평지에 물과 생명과 부를 강제로 부여한다는 기발한 행위를 이행헀다.
"골짜기의 물이 모아져 산기슭의 거대한 저수지ㅡ개중에는 크기가 16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다ㅡ로 모아졌다. 거기서부터 수로가 연장되어 구릉지대에서 좀 떨어진 더 큰 저수지까지 이르고, 거기서 또 더 먼 다른 저수지로 갈려 나가고 있다. 대저수지와 대수로의 아래쪽에는 수백 개나 되는 소저수지가 있어 그 하나하나가 마을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저수지 모두가 결국은 비가 많은 산악지대로부터 공급을 받고 있던 것이다. 고대 실론 인은 이렇게 하여 서서히 현재에는 인적이 드문 평야 지대의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정복했었다."

본디 불모지였던 이 평지를 인간이 만든 문명을 위해 유지하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야 했는가를 나타내는 것은 오늘날 실론 섬의 경관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현저한 특색이다. 그 하나로서 예전에는 관개 사업이 잘 이루어지고 다수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던 지역이 원시 그대로의 불모지로 되돌아가버린 사실이며, 또 하나는 현대의 차·커피·고무 재배자들이 불모지를 피해 비 오는 이 섬의 절반에 이르는 다른 부분에 집중해 있다는 사실이다. - P115

119-20 카푸아의 배신
지금까지 우리는 실제로 문명의 발생 또는 기타 눈부신 인간 업적의 무대가 된 몇 개 환경들의 특성을 고찰하고, 그 환경이 인간에게 제공한 조건은 결코 다루기 쉬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음을 발견했으므로 이번에는 보충적인 연구를 하기로 하자. 즉 쉬운 조건을 제공한 다른 몇 개의 환경들을 보고, 이들 환경이 인간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초래했나 하는 것을 조사해 보자. 이 연구를 시도함에 있어,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활한 뒤에 용이한 환경으로 인도되는 경우이다. 둘째는 익숙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으며, 우리가 아는 한 그 인간 이전의 선조가 인간이 된 이래 한번도 어려운 환경에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다시 말해 용이한 환경이 문명화 과정에 있는 인간에게 끼친 영향과 원시인에 끼친 영향을 구별해 보자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대조되는 곳이 카푸아(이탈리아 남부 캄파냐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카푸아 평원은 로마 평원이 사람에게 꽤 까다로웠던 만큼 인간에 대해 인정이 많았다. 그리고 로마 인은 그 살기 어려운 고국 땅을 벗어나 차례차례 이웃 나라를 정복한 데 비해, 카푸아 인은 그들의 향토에 주저앉은 채 이웃 나라에 차례차례 정복당하고 있었다. 최후의 정복자인 삼니움 인(이탈리아 중부에 있었던 고대의 나라 삼니움의 주민)으로부터 카푸아가 해방된 것은 카푸아 자신이 간청한 로마의 간섭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그 뒤 로마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쟁의 가장 중대한 순간, 즉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 로마 군이 한니발 군에게 패한 곳) 다음 날에 카푸아는 한니발에게 성문을 열어 줌으로 해서 로마의 은혜에 배반했다. 로마도 한니발도 카푸아의 거취가 대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결과이며, 또 전쟁 그 자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점에선 일치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카푸아에 입성하여 그곳을 동계 영지로 정했다. 그러자 참으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한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낸 한니발 군은 완전히 사기가 해이해져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그전처럼 승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템바레스의 진언
12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에 이 점과 관련된 참으로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르템바레스라는 사람이 친구와 함께 키로스(키로스 2세, 재위 기원전 559~30, 페르시아의 아카이메네스 조의 왕)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했다.
"이제야말로 제우스신께서 아스티아게스(메디아 왕 키로스의 옛왕에 해당됨. 키로스는 옛 왕을 체포하고, 메디아 왕국을 멸망시킴)를 왕좌에서 쫓아내고 그 영토를 페르시아 국민과 폐하 한 분께 주셨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좁다란 바위투성이의 국토에서 떠나 더 좋은 토지로 이주하면 안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가까운 곳에도, 또 조금 먼 곳에도, 알맞은 토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좋은 곳을 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그렇게 하면 현재 이상으로 세계에 우리 국위를 빛낼 수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우리 제국 국민이 당연히 취해야 할 방책이며, 더구나 우리 제국이 많은 국민을 지배하고 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일체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이 진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키로스 왕은 청원자들에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의 피정복자들과 자리를 바꿀 각오를 하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유순한 땅은 반드시 유순한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덧붙였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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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9 목성 주변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매우 위험한 고에너지의 하전 입자들이 두껍게 둘러싸고 있다.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을 가까이에서 관측하고 토성과 그 너머로까지 항해하려면 우주선이 우선 목성의 이 위험한 복사 벨트의 외곽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고에너지의 하전 입자들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측 장비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전자 장비들을 완전히 태워 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에너지 하전 입자는 보이저 호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이다. 그리고 또 넉 달 전에, 보이저 1호가 목성 주위에 고체 입자들로 이루어진 고리 구조를 발견해 알렸는데, 보이저 2호는 이 고리 구조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만약 보이저 2호가 목성 고리에 있는 돌멩이에라도 부딪쳐 우주선이 심하게 흔들린다면 안테나의 방향을 지구에 고정시킬 수 없게 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자칫하면 소중한 탐사 자료를 영원히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 결과로 자칫하면 소중한 탐사 자료를 영원히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성 통과 직전에 지상 통제실의 연구팀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상에 자리한 인간과 우주에 떠 있는 로봇이 서로의 지능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그동안 몇 차례 발생했던 비상사태를 모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 P278

279-81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에 우주의 바다에 진수되었다. 보이저 2호는 화성 궤도를 커다란 호를 그리면서 통과하고 소행성대를 지난 후 목성권에 접근했다. 그리고 목성과 목성의 열네 개 남짓한 위성들을 한 줄로 꿰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보이저 2호가 목성 곁을 지날 때 목성은 보이저를 가속시켜서 토성을 근거리에서 통과할 수 있는 길목으로 보이저를 슬쩍 밀어 넣었다. 토성 중력의 도움으로 보이저는 다시 천왕성을 향해 힘차게 달리게 된다. 천왕성을 지나 해왕성을 뒤로하면 보이저는 태양계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는 별들 사이의 광막한 바다를 영원히 떠돌아다녀야 할 새로운 운명이 보이저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탐험과 발견이야말로 인류사를 특징지은 인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이었으며, 인류사를 장식한 일련의 탐험 중에서 보이저 계획이야말로 가장 최근의 사건이다. 15, 16세기에는 스페인에서 아조레스 제도까지 항해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지금은 이 시간에 지구와 달 사이에 놓인 우주의 해협을 훌쩍 건너뛸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이른바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하는 데 몇 개월씩이나 필요했다. 오늘날에는 이 시간이면 태양계의 내해를 가로질러 화성이나 금성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다. 그렇다면 화성과 금성이야말로 현대판 신대륙으로서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외로운 섬인 셈이다. 17, 18세기에는 네덜란드에서 중국까지 가는 데 1년 내지 2년의 세월이 필요했지만, 오늘날 보이저는 이 시간에 지구에서 목성까지 갈 수 있다. 과거의 여행 비용이 오늘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좀 더 비쌌다고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총생산 대비 1퍼센트에도 채 못 미치는 미미한 수준임에는 변함이 없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현대 우주선들의 행성 탐사는 행성들의 유인 탐사를 알리는 선구자이며 선두주자이다. 인류의 탐사는 늘 이렇게 진척돼 왔다.
인류는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중요한 전환기를 맞으면서 지구의 모든 곳을 탐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래서 유럽의 대여섯 국가들에서 대규모 함대를 세계 곳곳으로 용감하게 파견하기 시작했다. 물론 함대마다 그 모험의 동기는 다양했다. 분수에 넘치는 야망, 재화에 대한 탐욕, 국가적 자존심과 국가 간의 경쟁심, 종교의 맹목적 광신, 죄수의 대량 사면, 과학적 탐구심의 발동, 모험에 대한 심한 갈증,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고용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등에서 우리는 탐험대를 유럽 밖으로 내밀었던 압력의 요인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항해가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구를 하나로 묶고 지역주의의 문제를 일부 해소하여 인류를 하나의 종으로 통합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도 행성 지구와 인류 자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 P279

284-6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네덜란드의 전통에서 라이덴 대학교는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고문의 위협을 받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라고 강요받던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에게 교수직을 제의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네덜란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갈릴레오는 네덜란드 사람이 설계한 스파이글라스를 개조하여 그의 첫 번째 천체 망원경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망원경을 통해 태양의 흑점, 금성의 위상 변화, 달의 운석공 그리고 목성 주위의 네 위성 등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성들은 "갈릴레오의 위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천문학적 주장과 관련된 종교적 갈등을 1615년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몇 년 전에 소인은 천체 관측을 통하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은 매우 색다른 것이었고 또 거기서 유도되는 결론이 학계의 공식 입장과 모순되었기 때문에 소인은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로부터 (그중에는 성직자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감내하기 어려운 비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제가 자연과학의 지식 체계를 뒤집으려는 모종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마치 제 손으로 그러한 것들을 하늘에 올려다 놓은 양, 많은 이들이 저를 극렬하게 매도했습니다. 새로운 발견이 과학의 연구, 성과, 성장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갈릴레오는 (그리고 케플러도) 지동설을 지지하며 이를 주창했다. 그러나 그런 용기를 그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교리를 따르는 데 있어 비교적 덜 광신적인 지역의 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1643년 4월에 데카르트가 쓴 편지를 보자. 당시에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당신도 최근에 갈릴레오가 종교 재판을 받았고, 지구의 움직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단으로 단죄되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입장을 차제에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논문에서 제가 밝혀 설명한 모든 것들은 지구의 움직임에 관한 가설을 포함하여 너무도 상호 의존적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하나가 틀렸음을 알면, 나머지 것들도 모두 그 논리가 어긋남을 어렵지 않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저의 소견이 명확하고 확실한 준거에 의거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만, 교회의 권위에 맞서서 이를 고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저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아니하며, "편히 살려면 남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라는 제 좌우명대로 지금껏 조용히 지내 왔습니다. 원컨대 앞으로도 조용히 살기를 바랍니다. - P284

359 데모크리토스는 어떻게 보자면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자, 아이들, 성性과 담을 쌓고 살았다.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을 그러한 것들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정을 소중하게 여겼고, 즐거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으며, 열정의 정체와 기원에 관한 철학적 고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런가 하면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아테네까지 갔지만 부끄러운 나머지 자기 소개도 하지 못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물질계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경외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독재 아래의 부유한 삶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가난한 삶을 택하겠노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던 종교들을 모두 악이라고 판단했으며, 불멸의 영혼이나 불멸의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원자와 빈 공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 P359

375 종교와 정치 분야는 그렇지 못하지만 과학 분야에서는 이오니아의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 뿌리를 둔 바람직한 면면을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가 미신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인류 전체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몇몇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아직도 모호한 태도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고대 사회가 안고 있었던 내재적 모순의 상당 부분을 아직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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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 문명을 통틀어, 어느 경우에서도 3세대 이상 연속하는 세대가 없었다는 사실은 이런 관점에서 시간적 척도로 측정할 때 우리의 문명이 아직도 매우 젊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현재까지 절대 연령은 자매인 원시 사회의 연령에 비해 매우 젊다. 원시 사회는 인류 그 자체와 같은 나이이며 따라서 평균적인 어림을 잡아보면 대충 30만 년 동안 존속해 온 셈이 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문명‘ 사회에서 인간의 역사인 이상 문명 속의 어떤 것이라도 ‘역사의 새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만약에 역사라는 말이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온 기간을 뜻한다면 문명이 존재해 온 기간은 인간의 역사에 비해 인류 생애의 겨우 2퍼센트, 인류 생존 기간의 50분의 1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목적에서 볼 때 두뇌 구조의 유사성과 인간 정신의 유사성 때문에 그 기간 동안 큰 차이 없이 그런대로 지금의 우리와 서로 동시대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우리의 비판자들은 아마 이번에는 또 시간적인 격차를 논거로 내세우는 것을 그만두고 가치의 차이라는 점을 이유로 하여 문명의 비교 가능성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문명이라고 주장해 온 것의 대부분은 거의가 무가치한 것으로, 사실은 ‘미개‘하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과 ‘진짜‘ 문명(물론 우리 서유럽 문명과 같은)의 경험을 비교한다는 따위는 지적 에너지의 낭비임에 틀림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 점에 관하여 독자는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우리가 독자에게 요구하려고 하는 지적 노력으로부터 대체 무엇이 나오는가 하는 것을 볼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해 주기 바란다. 지금 여기서 가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우리의 21개 사회를 모두 원시 사회를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한 것이지만, 이상적인 표준을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아직도 그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서는 오십보 백보여서 도저히 그 속의 하나가 다른 것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비판자ㅡ비록 여기까지 함께 따라오긴 했지만 여기서 작별하고 싶다ㅡ는 문명의 역사란 역사적 사실의 연속에 지나지 않으며 그 역사적 사실은 어느 것이건 모두 본질적으로 독자적인 것인데 어떻게 역사에 시공간적 반복이 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답은 이렇다. 당신 말대로 모든 역사적 사실은 개인 하나하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점에서는 독자적이며, 따라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관점을 달리 해보면 그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그것이 소속되는 부류의 구성원이며, 따라서 그 부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시공간적으로 같은 종류의 다른 구성원과 비교될 수가 있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느 생명체도 2개가 엄밀하게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리학·생물학·식물학·동물학·민족학 등의 과학이 무효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한층 더 다양하여 종잡기 어렵지만 우리는 심리학의 존재와 그 활동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오늘날까지 심리학이 성취한 업적의 가치에 대하여 아무리 의견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또한 인류학의 이름으로 불리는 원시 사회의 비교 연구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문명‘이라는 사회의 종류에 대하여, 인류학이 현재 원시 사회라고 하는 종류에 관하여 행하고 있는 것과 대체적으로 같은 분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한층 더 명백해질 것이다. - P66

67-8 우리의 사고 대상 중에서도 특히 인간 생활의 여러 현상을 바라보고, 드러내 보이는 방법에 세 가지의 상이한 방법이 있다. 첫째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확인된 사실의 비교 연구에 의해 일반적인 ‘법칙‘을 명백히 하는 일, 셋째로는 창작의 형태로 사실을 예술적으로 재생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바로는 사실의 확인과 기록은 역사의 기법이며, 이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 보는 일은 문명 사회의 모든 현상이다. 일반적 법칙의 해명과 정식화는 과학의 기법이며, 인간 생활의 연구에서 과학은 인류학이며, 과학적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는 현상은 원시 사회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리고 최후로 창작은 극과 소설의 기법으로 이 기법의 관할에 들어가는 현상은 인간 대 인간의 개인적 관계이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견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속에 수록되어 있다(예를 들면 「시학」 속에서, 시인과 역사가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 P67

74 문명과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언젠가 이 단서가 중요하다는 것이 판명된다) 사이의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는 미메시스(모방)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미메시스는 모든 사회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사회라는 종류 전체의 특징이다. 그 작용은 원시 사회나 문명 사회를 막론하고 영화 팬이 스타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사회 활동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사회에 있어서 미메시스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에서 미메시스는 연장자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연장자의 배후에 서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살아 있는 연장자의 위엄을 강하게 하는, 말하자면 죽은 조상들에게로 향한다. 이와 같이 미메시스가 과거를 향해 뒤돌아서 있는 사회에서는 습관이 사회를 지배해서 사회는 정적 상태에 머문다. 이것과는 반대로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의 미메시스는 개척자이므로 자연히 추종자들이 모여드는 창조적 인물에게로 향해진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월터 배저트(영국의 경제학자·문예비평가, 1826~77)가 「물리학과 정치학」에서 말한 ‘관습의 껍질‘은 벗겨지고 사회는 변화와 성장의 길을 따라 다이나믹하게 움직인다. - P74

76-7 우리는 우리의 탐구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원시사회와 문명 사이의 변함없이 오래된 근본적 차이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단원의 궁극적 목적인 문명 발생의 성질에 관하여 다소의 실마리는 얻었다. 원시 사회가 문명 사회로 전환하게 된 원인을 찾던 무리는 그 변화가 정적인 상태로부터 동적인 활동으로의 이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와 똑같은 설명이, 이전에 존재하던 문명의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창조력을 상실한 지배적 소수자로부터 떠나감으로써 새로운 문명이 출현하는 경우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배적 소수자는 공통적으로 정지해 있다. 성장기 문명의 창조적 소수자가 타락하거나 또는 퇴화하여 해체기 문명의 지배적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동적인 활동으로부터 정적인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적인 상태에 대한 동적인 반동으로서 프롤레타리아는 새로운 환경을 향해 이동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적 소수자로부터 떠남으로써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는 것은, 원시 사회에서 고대 사회로 문명이 탄생하는 전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정적인 상태로부터 이를테면 기초체제에 대한 혁명처럼 동적인 활동으로 옮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문명의 발생은ㅡ친족 관계가 없는 것, 있는 것을 통틀어ㅡ스마츠 장군이 말한 ‘인류는 또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
이렇게 운동ㅡ휴지ㅡ운동이라는 식으로 정과 동이 교대로 나타나는 리듬은 여러 시대의 많은 관찰자들에 의해 우주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함축성이 풍부한 비유적 표현에 뛰어난 중국 사회의 현인들은 이를 음과 양ㅡ음은 정에 해당하고 양은 동에 해당한다ㅡ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음을 나타내는 한자의 속뜻은 검은 소나기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듯하고, 한편 양을 나타내는 한자의 핵심은 구름이 깔려 있지 않아 태양이 팔방으로 광선을 발산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듯싶다.
한자의 표현으로는 음을 항상 먼저 말하는데, 우리가 지금 취급하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인간이 30만 년 이전에 원시적 인간성의 ‘암반‘에 도달한 뒤 문명이라는 양의 활동을 개시하기까지 전체의 98퍼센트에 해당하는 기간을 그 암반 위에서 휴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76

95-7 부분은 위험한 것이어서 비록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니라도 부분적으로 빠져드는 위험과 변화는 아무래도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적으로 표현한다면, 신이 이미 창조해낸 것 중의 하나가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 그것 때문에 신 자신이 세계를 다시 창조해야 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악마의 간섭은 특정한 쟁점을 놓고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ㅡ어느 쪽 결과도 가능성은 있다ㅡ신이 간절히 바라고 있던 음으로부터 양으로의 이행을 이룩한 셈이 된다.
극의 주역을 맡은 인간의 성격을 또 어떤가 하면,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예수이건 또는 욥이건 또는 파우스트, 아니면 아담과 이브이건 반드시 모두 고민하는 것이 기본 원칙으로 되어 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즉, 인류상의 단계)은 원시인이 지구상의 다른 동식물에 대한 지배적 위치를 확립한 뒤 식물 채취 경제 단계에 도달한 음의 상태 즉, 정적인 상태의 회상이다. 지혜의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유혹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일단 달성시킨 이 완전 상태를 저버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완전 상태가 생길지도 모르고, 또는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가라는 도전을 승낙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낙원에서 냉혹한 세계로 추방되어, 거기서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을 받고, 남자는 평생동안 이마에 땀 흘리며 빵을 구해야 하지만 그것은 뱀의 도전을 수락함으로써 생긴 당연한 시련이다. 그 뒤 아담과 이브의 성교는 사회 창조의 행위로, 그 결과 2개의 신생 문명의 의인적 상징인 양을 치는 아벨과 땅을 가는 가인이 그들이다.
인간 생활의 자연 환경 연구자로서 가장 유명한, 또 가장 창조적인 현대 학자의 한 사람도 같은 이야기를 전문가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옛날 옛적에 벌거벗었고 집도 없고 불도 모르던 야만인들이 봄이 시작되면서부터 여름이 끝날 무렵에 걸쳐 열대의 따뜻한 고향에서 나와 차차 북쪽으로 이동해 갔다. 9월로 접어들어 밤의 추위가 몸에 스며들어옴을 느끼게 될 때까지 그들은 언제나 여름이었던 나라를 등지고 온 데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나날이 추위는 심해져갔다. 원인을 모르는 채 그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일부는 남으로 갔으나 이전의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다.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거기서 전과 같은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손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원시 야만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다른 방향으로 헤매고 있던 무리들은 극히 작은 집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말았다. 이 작은 집단에 낀 사람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인간의 재능 속에서도 가장 높은 의식적 발명의 능력을 사용했다. 어떤 자는 땅 속에 구멍을 파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고, 어떤 자는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모아 오두막과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었고, 어떤 자는 잡은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감쌌다. ······잠시 사이에 이들 야만인들은 문명으로의 커다란 전진을 실현한 것이다. 벌거벗고 있던 자가 옷을 입게 되었고, 집이 없던 자가 숨을 장소를 갖게 되었고, 하루살이 생활을 하던 자들이 고기를 말리고 나무 열매를 저장하여 겨울에 대비할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열을 얻기 위하여 불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렇게 그들은 처음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고 여겼던 곳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가혹한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거대한 진보를 이루었고 열대 지방 사람들을 훨씬 뒤처지게 했던 것이다."

고전학자의 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를 현대의 과학적 용어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발명의 아버지는 고집이다. 적당히 단념하고 손쉽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보다 불리한 역경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진보의 역설적 진리이다. 즉 네 번 되풀이되었던 빙하 시대의 혹독한 추위와 동식물의 이변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울창한 숲이 말라죽는 상태로 되었을 때 ‘달아난 원시인들‘은 자연의 지배를 가장 심하게 받았을 뿐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난관을 뚫고 나가 인간이 된 것은, 이미 앉을 나무조차도 없어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무리였고, 또한 나무 열매가 익지 않자 고기로 대신 먹은 무리들, 햇볕을 쫓아가는 대신 불과 의복을 만든 무리들, 거처의 방비를 구축하고 아이들을 훈련시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합리성을 입증한 무리들이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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