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 "여기서 인간은 위대한 혁명의 일보 직전에 있으며 마침내 얼마 안 있어 가축을 소유하고 곡식을 경작함으로써 식량 공급을 스스로 관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혁명은 북쪽의 빙하가 녹고, 그 결과 유럽을 뒤덮고 있던 북극성 고기압이 후퇴하고 대서양 저기압의 진로가 남지중해 연관으로부터 현재의 중부 유럽을 통과하는 진로로 바뀜으로써 생긴 위기와 관련이 있따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확실히 지난날의 초원 지대의 주민들에게도 그 창의성을 극도로 발휘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유럽의 빙하 지대가 작아짐에 따라 대서양 온대성 저기압대가 또다시 북쪽으로 퍼졌기 때문에 서서히 진행되는 건조화에 직면하여 그때까지 수렵 생활을 해 오던 주민들에게는 3개의 길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익숙하던 기후대를 따라 먹이가 되는 짐승과 함께 북쪽 또는 남쪽으로 이동하든지, 아니면 살던 땅에 머물러 건조에도 살아남는 새나 짐승을 잡으며 그럭저럭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가든지, 아니면ㅡ역시 고국을 떠나지 않고ㅡ동물을 사육하고 농사를 지음으로써 변덕스러운 환경에 의존하는 상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야 했다."
결국 거주지도 생활 양식도 바꾸지 않은 사람들은 건조화의 도전에 응하지 않은 셈이어서 그 때문에 절멸이라는 벌을 받았다. 생활 양식을 변경하여 수렵자로부터 양치기로 전업함으로써 거주지를 옮기지 않은 사람들은 아프라시아 대초원 지대의 유목민이 되었다. 이들의 업적과 운명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논한다.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고 거주지를 변경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 중에 북쪽으로 이동하는 저기압대를 따라감으로써 건조를 피한 집단들은 뜻밖에도 북쪽의 계절적 차가운 공기라는 새로운 도전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도전에 굴복하지 않는 자 사이에 새로운 창조적 응전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남쪽의 몬순(계절풍) 지대로 후퇴함으로써 건조를 피한 집단들은 열대의 변화 없는 기후가 발산하는 최면적 영향을 받아 게으르게 잠자는 일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다섯 번째, 즉 마지막으로 건조화의 도전에 응하여 거주지와 생활 양식 양쪽을 다 바꾼 집단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보기 드문 이중의 반응이야말로 소멸해 가는 아프라시아 초원지대에 자리한 몇 개의 원시 사회로부터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의 동적인 활동이었던 것이다. 이들 창조적인 사회 집단의 생활 양식에 일어난 변화는 식물 채취자나 수렵자의 생활로부터 경작자의 생활로 완전히 전환한 일이었다. 변화가 일어났던 거주지는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내버리고 온 초원과 이주해 온 새로운 자연 환경과의 성격의 차이를 재어 본다면 매우 큰 것이었다. 나일 강 하류 유역을 내려다보고 있던 초원이 리비아 사막으로 변화했고,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두 강의 하류 유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초원이 룹알할리 사막(아라비아 동남부의 사막)과 루트 사막(이란 고원 중앙부의 사막)으로 변화했을 때, 이들 영웅적인 개척자들은 용감성인지 자포자기인지 아니면 이 지역에도 수분이 줄어드는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측때문인지 모르지만 일찍이 아무도 발을 들여 놓지 않은 골짜기 밑바닥의 늪지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동적인 행동은, 버려진 그곳을 이집트 땅과 시나이 땅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다른 길을 택한 그들의 이웃들이 볼 때 그들의 모험은 뻔히 알면서도 사지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아프라시아 대초원 지대로 변화하기 시작한 지역이 아직도 지상 낙원이었던 그 옛날,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의 정글 늪지대는 사람이 가까이 가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얼핏 보아 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의 황무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모험은 개척자들이 품었던 어떤 낙관적 기대보다도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변덕스러운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던 정글 늪지대는 모습을 갖추었고 정연하게 배치된 수로와 제방과 논밭으로 나타났다. 개간된 황무지는 이집트와 시나이의 국토가 되었고, 이집트와 수메르 사회가 그 위대한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 P100
103-4 나일 강 유역, 한 지방의 옛날 모습과 다른 지방의 오늘날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데 착안하여 잠시 가정을 해보자. 나일 강 유역의 현재 적도 강우권 밖에 있는 지방의 주민들에게 건조화라는 도전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삼각주와 나일강 하류 유역은 본디의 자연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을까. 그래도 이집트 문명이 결국엔 출현했을까? 이 지역의 주민이 현재 실루크족과 딩카족이 바르알 자발 강변에 웅크리고 있듯이 야성인 채로 지금까지 나일 강 하류 유역 주변에 웅크리고 있었을까? 또 한 가지, 이번에는 과거가 아니고 미래에 관한 가정적 문제를 생각해 본다. 우주의 시간적 척도는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생명·인류의 시간 척도로 재어본다 해도 6000년이라는 세월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 어제에 해당하는 빙하기의 끝 무렵에, 나일 강 하류 유역의 주민 앞에 나타난 도적과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 내일 6000년 아니 그 보다 몇천 년이 더 지난 뒤에 나일 강 상류 유역의 현재 ‘살아 있는 박물관 부족‘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그들이 그 도적에 대하여도 역시 창조적 결과가 생기는 동적인 행위로 응전할 능력이 없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이 실루크족과 딩카족 앞에 나타나는 가정의 도전이 이집트 문명의 창시자 앞에 나타난 도전과 같은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고 조건을 붙일 필요는 없다. 그 도전이 자연 환경에서 일어난 것, 즉 기후의 변화가 아니고 다른 문명의 침입에 의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현재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서유럽 문명의 침입ㅡ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모든 문명과 모든 원시 사회에 대하여 신화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간적 요인이다ㅡ에 의해 아프리카의 원시인에게 나타나고 있는 도전이 아닐까? 이 도전은 극히 최근에 시작된 것이어서, 도전을 받고 있는 나일 상류 지대의 어느 사회인가가 결국 행하고야 말 응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선조가 하나의 도전에 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자손도 그들의 차례가 왔을 때 다른 도전에 응할 수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P103
109-10 원시 사회의 어둠 상태에서 출현하여 ‘어버이‘ 문명을 갖지 않는 문명을 잠시 접어두고, 그 뒤에 출현한 선행 문명과 다양한 형태, 또는 다양한 정도로 관계를 갖는 문명에 눈을 돌려보면, 이들 ‘자식‘ 문명은 자연환경의 도전이 또한 어느 정도 자극을 주었겠지만 중요하고 본질적인 도전은 ‘어버이‘ 사회와의 관계로부터 생긴 인간 환경의 도전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도전은 ‘어버이‘ 사회와의 관계 자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분화로부터 시작되어 분리에서 정점을 이룬다. 분화는 선행 문명이 일찍이 그 성장기에 있어서 하층의 사람들이나 외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복종시키는 창조력을 잃기 시작하자 그 내부에서 일어난다. 이 창조력은 문화가 성장기에 있을 때는 하층 사람이나 국경 밖의 사람들에게 자발적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창조력을 잃은 병에 걸린 문명은 체력 감퇴라는 휴우증으로 이미 민중을 지도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차차 폭압의 도수를 높여 지배하는 소수 지배자와 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자기 영혼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영혼을 잃지 않으려고 결의하는 프롤레타리아(내적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열된다. - P109
115 그런데 실론에 인도 문명을 전파한 사람들은 원래 계절풍이 몰아치는 고지의 메마르고 황폐한 자연상태에 있던 평지에 물과 생명과 부를 강제로 부여한다는 기발한 행위를 이행헀다. "골짜기의 물이 모아져 산기슭의 거대한 저수지ㅡ개중에는 크기가 16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다ㅡ로 모아졌다. 거기서부터 수로가 연장되어 구릉지대에서 좀 떨어진 더 큰 저수지까지 이르고, 거기서 또 더 먼 다른 저수지로 갈려 나가고 있다. 대저수지와 대수로의 아래쪽에는 수백 개나 되는 소저수지가 있어 그 하나하나가 마을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저수지 모두가 결국은 비가 많은 산악지대로부터 공급을 받고 있던 것이다. 고대 실론 인은 이렇게 하여 서서히 현재에는 인적이 드문 평야 지대의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정복했었다."
본디 불모지였던 이 평지를 인간이 만든 문명을 위해 유지하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야 했는가를 나타내는 것은 오늘날 실론 섬의 경관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현저한 특색이다. 그 하나로서 예전에는 관개 사업이 잘 이루어지고 다수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던 지역이 원시 그대로의 불모지로 되돌아가버린 사실이며, 또 하나는 현대의 차·커피·고무 재배자들이 불모지를 피해 비 오는 이 섬의 절반에 이르는 다른 부분에 집중해 있다는 사실이다. - P115
119-20 카푸아의 배신 지금까지 우리는 실제로 문명의 발생 또는 기타 눈부신 인간 업적의 무대가 된 몇 개 환경들의 특성을 고찰하고, 그 환경이 인간에게 제공한 조건은 결코 다루기 쉬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음을 발견했으므로 이번에는 보충적인 연구를 하기로 하자. 즉 쉬운 조건을 제공한 다른 몇 개의 환경들을 보고, 이들 환경이 인간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초래했나 하는 것을 조사해 보자. 이 연구를 시도함에 있어,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활한 뒤에 용이한 환경으로 인도되는 경우이다. 둘째는 익숙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으며, 우리가 아는 한 그 인간 이전의 선조가 인간이 된 이래 한번도 어려운 환경에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다시 말해 용이한 환경이 문명화 과정에 있는 인간에게 끼친 영향과 원시인에 끼친 영향을 구별해 보자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대조되는 곳이 카푸아(이탈리아 남부 캄파냐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카푸아 평원은 로마 평원이 사람에게 꽤 까다로웠던 만큼 인간에 대해 인정이 많았다. 그리고 로마 인은 그 살기 어려운 고국 땅을 벗어나 차례차례 이웃 나라를 정복한 데 비해, 카푸아 인은 그들의 향토에 주저앉은 채 이웃 나라에 차례차례 정복당하고 있었다. 최후의 정복자인 삼니움 인(이탈리아 중부에 있었던 고대의 나라 삼니움의 주민)으로부터 카푸아가 해방된 것은 카푸아 자신이 간청한 로마의 간섭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그 뒤 로마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쟁의 가장 중대한 순간, 즉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 로마 군이 한니발 군에게 패한 곳) 다음 날에 카푸아는 한니발에게 성문을 열어 줌으로 해서 로마의 은혜에 배반했다. 로마도 한니발도 카푸아의 거취가 대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결과이며, 또 전쟁 그 자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점에선 일치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카푸아에 입성하여 그곳을 동계 영지로 정했다. 그러자 참으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한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낸 한니발 군은 완전히 사기가 해이해져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그전처럼 승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템바레스의 진언 12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에 이 점과 관련된 참으로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르템바레스라는 사람이 친구와 함께 키로스(키로스 2세, 재위 기원전 559~30, 페르시아의 아카이메네스 조의 왕)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했다. "이제야말로 제우스신께서 아스티아게스(메디아 왕 키로스의 옛왕에 해당됨. 키로스는 옛 왕을 체포하고, 메디아 왕국을 멸망시킴)를 왕좌에서 쫓아내고 그 영토를 페르시아 국민과 폐하 한 분께 주셨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좁다란 바위투성이의 국토에서 떠나 더 좋은 토지로 이주하면 안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가까운 곳에도, 또 조금 먼 곳에도, 알맞은 토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좋은 곳을 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그렇게 하면 현재 이상으로 세계에 우리 국위를 빛낼 수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우리 제국 국민이 당연히 취해야 할 방책이며, 더구나 우리 제국이 많은 국민을 지배하고 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일체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이 진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키로스 왕은 청원자들에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의 피정복자들과 자리를 바꿀 각오를 하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유순한 땅은 반드시 유순한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덧붙였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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