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3 "생물은 바다 속에서 시작된다. 바다 속에서 생물은 대단한 능률화의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 어류는 기능과 외형이 대단히 잘 되어 있으므로, 오늘날까지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존속해 온 형태(예를 들면 상어와 같은)를 그대로 낳고 있다. 그러나 계속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진화의 과정은 없었다. 진화의 면에서 보면 ‘성공만큼 실패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잉그 박사의 경구가 항상 타당한 것 같다. 환경에 완전히 적응한 생물, 그 능력과 생명력의 전부를, 지금 일에 집중하고 소모해 버리는 동물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경우에 그 변화에 적응할 여력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된다. 시대가 그러한 동물은 점점 계획된 대로의 현재 기회에 이전의 능력을 습관적으로 맞추어 나간다. 결국에는 전혀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또 불필요한 가외 운동도 하지 않고 생존에 필요한 모든 활동만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반면에 만일 그 장소의 환경이 변화하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그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습관적 기능화에 성공하는 일이 오히려 많은 수의 종류가 절멸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후 조건이 변화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변하기 전의 기후 조건에 자신을 적응하기 위해 생활력의 여분을 완전히 써 버렸다. 여분의 여력이나 자극에의 도전도 없다. 예의 생각이 얕은 처녀(<마태> 25:1~13)처럼 더 이상의 적응을 하기 위한 여분의 기름을 남겨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한 가지에 너무너무나 집착했고 새로운 적응에 여력이 없어 결국 멸망해 버린 것이다." - P402

428 약탈자가 된 변경 태수(일부)
티무르와 샤를마뉴, 그리고 후기 앗시리아 왕들의 생애를 분석한 결과 우리는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모두 동일한 현상이 있음을 관찰했다.
한 사회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변경민들에게 발달시킨 뛰어난 군사력이 본래 영토인 변경 바깥쪽의 주인 없는 지대로부터 자신들의 형제인 내부 동포에게로 향하게 되면 군국주의자라는 도덕적 병폐로 전환하여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런 사회적 해악의 다른 몇 가지 예가 곧 우리들 머리에 떠오른다. - P428

433-5 11세기에 그리스도교 공화제를 수립했고 서유럽 사회를 봉건적 무정부 상태로부터 구출하려고 했던 로마 교회의 창조적 인물은 오늘날 국제적 무정부 상태를 해소하여 세계 질서를 세우려고 한 그들의 정신적 후계자가 빠진 것과 같은 딜레마에 처했다. 그들의 목적의 본질은 정신적 권위에 의해 물리적인 힘을 배제하는 데 있었고, 정신적 칼이 그들의 더할 나위 없는 승리를 거두게 한 무기였다. 그러나 물리적인 힘을 믿는 기성 체계가 정신적인 칼을 무시하고 태연한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위기에 로마 교회의 투사들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대해 답을 내라는 도전을 받았다. 신의 병사는 비록 그 전진이 정지되는 위험에 부닥치더라도 결코 정신적 무기 이외의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니면 악마에 대항하는 신의 싸움을 위해 상대편과 같은 무기를 써서 수행할 것인가?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우스 6세(재위 1045~46년)로 부터 교황청 재산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을 때, 교황청의 재산이 끊임없이 비적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후자를 택하여 군대를 모집하고 무력으로 비적을 근절시켰다.
힐데브란트가 이런 조치를 취했을 때, 그위 행위의 내적인 도덕적 성격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40년 뒤에 그의 최후의 시기가 오자 마침내 이 수수께끼에 대한 뚜렷한 답이 나왔다.
1058년 힐데브란트가 교황으로서 살레르노(이탈리아 서남부의 도시)에서 망명 중에 숨을 거두려 할 때, 로마 자체는 교황의 정책이 초래한 무거운 재앙 때문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때 로마는 성 베드로 사원 제단ㅡ교황청의 보고ㅡ의 층계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휩쓸었던 군사적 투쟁에서 교황이 원조를 청한 바 있었던 노르만 인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타 버린 직후였다. 힐데브란트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싸움은 150년이 지난 뒤에 인토켄티우스 4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큰 재해를 초래했던 싸움의 예고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법률가에서 군국주의자로 돌변한 인노켄티우스 4세(재위 1243~54년)의 시대에 이르러서 이미 우리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힐데브란트 자신이 힐데브란트 교회를 결국 그의 적들ㅡ현세·혈육·악마ㅡ이 그가 지상에 세우려고 노력했던 신의 나라를 이겨내는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정치는 믿지도 믿은 적도 없다.
가르치는 자는 교회조차 믿지 않는다.
교회마저 교권조직이 비밀회의를 거듭하여
성 베드로를 황제의 자리에 앉혀놓고, 그것으로써
그를 위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숭배해 온 약속을 인간을 위해 얻으려고 꾸미며,
교회의 지상에서의 지배권을 확대하기 위해 그리스도
천국의 계율을 늦추었다.

이상으로써 교황청이 어떻게 하여 자신이 물리치려고 노력했던 물리적 폭력의 악마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동시에 교황청의 미덕이 반대의 악덕으로 바뀌게 된 다른 여러가지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결과가 된다. 물질적인 칼이 정신적인 칼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변화이며, 그 뒤는 모두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황청은 성직자의 재정 문제에 관하여 11세기에는 주로 성직 매매의 근절에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13세기에는 고위의 성직을 사기 위해 부정하게 세속적인 권력에 교회의 수입을 넘기는 악습의 뿌리를 애써 뽑아내고 교황청의 서임된 성직자들을 위해 그 수입을 나누어 주었는데, 14세기에 와서 교황청 자신을 위해 세금을 부과시키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답은 간단하다. 교황청은 군국주의적으로 변했고 전쟁은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 P433

465-7 현재 <마카베오 하후서>(경의 성서 「아포크리 파산」에 수록되어 있는 책) 중에 전해지는 저 온순한 순교자들ㅡ노 율법 학자 엘르아잘과 7인의 형제 및 그들의 어머니(안티오코스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함)ㅡ이 고지식한 바리새인의 정신적 조상이었다. 이 바리새라는 것은 ‘분리하는 자‘라는 뜻으로 그들이 스스로 칭한 명칭이다. 헬라스 사회에서 오리엔트 출신의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2세기 이래 폭력과 비폭력이 서로 사람들의 혼을 지배하려고 다투지만, 결국 폭력은 자멸하고 비폭력만이 남았음을 볼 수 있다.
폭력을 택하느냐 비폭력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었다. 기원전 167년 초기의 순교자들이 취한 비폭력적 태도는 곧 성급한 유다스에 의해 버려졌다. 그리고 이 프롤레타리아의 ‘무장한 힘 있는 사람‘이 거둔 직접적 물질적 성공이ㅡ그것은 표면적일 뿐 가짜요, 일시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ㅡ후세 사람들의 눈을 현혹했다.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그들의 스승이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을 듣고 분개했으며, 그 예언이 실현됨에 이르러서는 일어설 기운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불과 수 개월 후에 가말리엘(국민 전체로부터 존경받은 율법학자)이 처형된 예수의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기운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신이 그들의 옆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시 그 수년 후에는 가말리엘 자신의 제자 바오로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그리스도교도가 이렇듯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전향하는 일은 물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떨쳐 버림으로써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부활에 대한 신앙과 같은 일이, 기원 70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기점으로 정통파 유대교의 유대인들 사이에 지켜지는 일로 일어났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막 실현되려는 어떤 외면적 관념‘을 부정한 새로운 유대교의 일파가 나타난다. 유대인의 폭력주의가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묵시록적 문서는 <다니엘> 하나만 빼놓고 이제 율법과 예언자의 시로 이루어지는 유대교 정전에서 추방되어 버렸다.
그리고 인간의 활약으로 신의 의지를 이 세상에서 실현·촉진시키려는 일체의 노력을 삼간다는 그와 반대의 원칙이 유대교의 전통 속에 든든하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현재에도 엄격하게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아구다스 이스라엘‘파는 시온주의자의 운동을 옆눈으로 흘겨보고 20세기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건설하는 시온주의 사업에 전혀 참가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이다.
정통파 유대교도에게 일어난 보수적 믿음이 유대 민족을 화석의 형태로 존속하게 했지만, 예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그와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교를 위해 더욱 큰 승리에의 길을 열어 주었다. 박해의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교회는 엘르아잘이나 ‘7인 형제‘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응전하여 그 대가로서 헬라스 사회의 지배적 소수자를 개종시키고, 또 나중에는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야만족 전투 단체를 개종시킬 수 있었다.
성장하는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직접적 적대자는 가장 새로운 형태를 한 헬라스 사회의 원시 부족 종교였는데, 그것인즉 ‘신성한 카이사르‘의 인격에 의해 대표되는 헬라스 사회의 세계 국가에 대한 우상 숭배였다. 교회가 잇달아 관헌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결국 로마 정부가 도저히 누를 수 없었던 정신적인 힘으로 로마 정부를 굴복시킨 것은, 모든 성원에게 비폭력적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완강하게, 단지 단편적 형식일지라도 우상 숭배를 허용하지 않았던 단호한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 로마 제국의 원시적인 국가 종교는 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유지하고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인심을 얻을 수 없었다. 로마 당국자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 어떤 일정 의식을 행함으로써 표명하도록 명한 형식적인 존경이 이 국가 종교의 처음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비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서는 형식적인 것 이상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의무를 당연한 것으로 실행하였고, 그리스도교도가 어찌하여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별것 아닌 관습에 따르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앙 자체에 있어서ㅡ왜냐하면 정치적 강제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천적인 인심을 끄는 힘에 의한다는 의미에서ㅡ유력한 그리스도교의 경쟁 상대는, 이 국가 종교도 다른 어떠한 형태의 원시 종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자체와 마찬가지로 헬라스 사회의 내적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발생한 몇 개의 ‘고등 종교‘였다. - P465

470 해체기의 사회가 이처럼 외래 건설자에게 자기네 세계 국가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은, 그 사회 고유의 지배적 소수자가 전적으로 무능해져 창조력을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노쇠 현상에 대한 형벌은 굴욕적인 권리 상실이었다. 지배적 소수자의 일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은 극히 당연한 과정으로서 현지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특권을 가로챈다. 이리하여 외래자가 건설한 세계 국가의 토착민인 지배적 소수자는 모두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지위로 하락된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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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2 신화를 만들어 낸 고대인들도 잘 알고 있었듯이 사람은 대지의 자녀인 동시에 하늘의 자녀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살아오는 동안 인류는 못된 진화적 습성을 많이 길러왔다.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같이 오랫동안 유전돼 온 못된 요소들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좋은 천성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식의 자식도 아낀다.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노력하고 지적인 것을 향한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인류에게 영원한 생존과 번성을 확실히 약속할 도구요 방편이 될 것이다. 못된 습성과 좋은 천성 중에서 어느 쪽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지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미래를 보는 우리의 눈이 지구에 고착돼 있다거나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마음이 지구의 어느 한 지역에만 묶여 있다면 결국 저 못된 습성이 사랑의 마음과 이성의 예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광막한 코스모스의 바다 속에 감춰진 새로운 세상과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외계 문명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다. 우리와 같은 문명의 운명은 결국 화해할 줄 모르는 증오심 때문에 자기 파괴의 몰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하지만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 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이렇게 여행은 시야를 활짝 열어 준다. - P631

632-3 우주에는 생명이 전혀 서식한 적이 없는 세상이 있다. 우주적 재앙의 표적이 되어 새까맣게 타 버린 불모의 세상들이 우주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우리는 행운아이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고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문명의 미래와 하나의 종으로서 인류의 생존 문제가 우리 두 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지구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그렇게 해 주겠는가? 인류의 생존 문제를 우리 자신이 걱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대신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인가? - P632

633-4 인류는 현재 위대한 모험을 앞두고 있다. 이 모험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우리가 지금 감행하려는 모험은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이 뭍으로 진출한 사건이나, 유인원이 나무 위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땅으로 내려오기로 한 결정 등에 버금갈 만한 위대하고 중요한 사건으로 인류사에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구의 온갖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끙끙거리고 있다. 인류는 이미 지구의 속박에서 일시적 해방을 맛보기도 했다. 우리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내재된 원시성을 잘 길들이며 우리의 원시적 두뇌가 내리는 일방적 지시와 대결함으로써 지구가 사람에게 걸어 놓은 정신적 족쇄에서 탈출하려 하고 있다. 또 인류는 다른 행성들로의 여행을 감행하는 한편, 외계에서 올지도 모르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육체적 족쇄로부터 탈출을 꾀하고 있다. 정신적 해방과 육체적 탈출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자 없이 후자의 실현이 있을 수 없고 후자의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은 전자의 성공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에게 필요조건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전쟁 수행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인간은 상호 불신이란 최면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에 대한 염려 같은 것은 아예 할 줄 모른다. 상호 불신의 망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구도 하나의 행성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케 하여, 모든 국가를 죽음을 향해 서둘러 행진케 할 뿐이다. 우리가 지구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들은 너무나 무서운 결과를 불러올 짓거리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초래될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일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으며 거기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핵전쟁을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핵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은 단 한 나라도 빠짐없이 핵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나 핵전쟁이 미친 짓이라고 알고 있지만 국가는 국가대로 핵전쟁의 필요성에 대한 그럴듯한 구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음울한 인과의 고리를 보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독일인들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만들어야 했다. 미국이 갖고 있으니 (구)소련도 핵폭탄을 가져야만 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의 나라들이 가져야 했다. 아마 20세기가 끝날 즈음에는 수많은 국가가 핵폭탄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핵폭탄은 만들기 쉽다. 핵분열 물질은 원자로에서 쉽게 훔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핵폭탄 제조 기술은 거의 가내 공업의 범주에 들었다. - P633

634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블록 버스터라고 불리는 초대형 고성능 폭탄이 위력을 발휘했다. TNT 폭약 20톤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고성능 폭탄 하나가 대도시의 구역block 하나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 P634

635-6 핵폭탄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충격파는 투하 지점에서 수 킬로미터 밖에 있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한순간에 뭉개 버린다. 핵폭발에 동반되는 불기둥, 감마선 그리고 중성자에 노출되는 즉시 사람의 육체는 내부 속속들이 아주 철저하게 구워진다. 미국은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낼 수 있었다. 이 핵 공격에서 살아남은 한 여학생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지옥의 밑바닥 같은 암흑 속에서 엄마를 부르는 학우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교각 옆에 파놓은 큰 물통 안에는 온몸이 빨갛게 구워진 갓난아기를 한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힘겹게 흐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어머니는 화상을 입은 자신의 젖을 아이 입에 물리면서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물통 안에 있는 학생들은 머리만을 물 위로 내민 채, 두 손을 애원하듯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부모를 찾아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옆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성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짝 그슬려 곱슬곱슬 뒤말린 흰 머리카락은 온통 재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 P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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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다른 분야의 아이디어를 다룰 때 가져야 할 네 번째 태도를 말할 차례가 됐다. 그것은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설명이 좀 더 그럴듯한지‘, ‘무엇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비행접시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논박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을 반복해봤자 영양가 있는 논쟁이 되기 어렵다. 화성인들의 침략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 지금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정말 비행접시인지, 타당성이 있긴 한 건지, 정말 그럴듯한 설명인지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냥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할 때보다 더 많은 실제 데이터를 기초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평범한 개인은 그저 가능성이 있기만 한 사건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많은 사건들 중에서 굉장히 많은 수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 가능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것은 물리 법칙의 일반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누가 무엇을 생각해 내었든, 그건 대개 틀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랜 물리학의 역사에서 올바른 이론은 겨우 5개에서 10개 정도에 불과하며, 그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다. 제기된 모든 이론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언제나 매우 낮다. 나중에 가서 알게 되겠지만. - P108

126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세상은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사람들이 비행기에 타게 될 때 보험에 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보험 회사 직원들은 점성술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의 보험료를 바꾸는 데 아주 관심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성술사들이 가면 안 좋다는 날에 간 사람들이 더 잘못될 가능성이 높은지 테스트해 본 적이 없다. 오늘이 장사하기에 좋은 날인지 나쁜 날인지 하는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뭐를 해 본 거지? - P126

127 그렇다. 그래도 어쩌면 점성술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옳지 않음을 지적하는 정보는 정말 많다. 사물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사람들은 어떤 존재이고, 세상은 또 무엇인지, 별들은 무엇이고, 여러분이 쳐다보고 있는 행성들은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회전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아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 이천 년 동안 그 별들이 어디에 있을지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도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점성술사들의 말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수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거 믿지 말자! 그게 옳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순전히 말도 안 되는 넌센스nonsense일 뿐이다. 그걸 믿는 것이 정당하던 유일한 시기는 별들과 이 세상과 나머지 것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뿐이었다. 점성술이 사실이라면 진짜로 존재하는 다른 현상들을 감안했을 때 정말 놀라운 일일 것이며 실질적인 실험, 실제 시험을 통해 누군가가 이를 증명하고, 이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택해서 시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 말을 들어 봤자 배울게 하나도 없다. - P127

127-8 덧붙이자면, 과학의 초창기에는 이와 비슷한 실험들을 실제로 했었다. 꽤 흥미로운 일이었는데, 마치 이런 실험을 통해서 산소를 발견했던 것처럼 선교사들은 배가 난파됐을 때 바다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더 낮은지 측정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 이를 시험하는 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보같이 들리는 것일 게다 – 선교사들처럼 착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들이 탄 배가 난파될 가능성이 더 낮은지, 그리고 선교를 하러 먼 나라로 떠나갈 때 그들이 탄 난파선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더 낮은지 측정해 보았던 것이다. 결과는 ‘선교사라고 해서 크게 차이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난파 확률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게 됐다. - P127

129 나는 신앙 요법이 진실인지 알고 싶다. 이를 위해 면밀히 조사를 해 봐야 한다. 모든 사람은 알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치료 능력을 믿음으로써 상처를 입게 되는 사람이 더 많은지 도움을 얻게 되는 사람이 더 많은지, 혹은 신앙 요법으로 인해 치료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지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지 따져봐야 한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조사를 해 봐야 답을 알 수 있다. 조사 없이 사람들이 믿도록 내버려 두면 위험하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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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6 다음으로 우리들이 불균형이라고 이름 붙인 문명 속의 분업 현상이 비창조적 다수자의 생활에 미치는 효과를 고찰할 일이 남았다.
은퇴로부터 시작해서 또 다시 한패의 대중과 섞이는 창조자를 기다리고 있는 사회 문제는, 창조자가 평균 수준의 많은 사람들을 자신이 도달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창조자는 이 일에 착수하자마자, 일반 대중의 대부분이 감정·의지·정신·체력의 전부를 들여 그런 높은 수준에 서서 생활할 수가 없다는 현실에 부닥친다. 그런 경우 창조자는 자칫하면 지름길을 택하게 된다. 전인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단념하고, 어느 것이든 하나의 능력만을 그 높은 수준까지 올려놓는 수단에 호소할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에게 불균형한 발달을 강요하게 된다. 좀 더 쉽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계 기술면에서인데, 그것은 모든 문화 요소 가운데서 기계적 재능만큼은 다른 것에서 분리시키기 쉽고, 또 전달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 P375

377-8 헬라스 사회는 ‘바나우시아‘의 위험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다른 사회의 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유컨대 유대교의 안식일과 그리스도교의 일요일은, 적어도 7일 중 하루만은 그 창조주를 기억에 떠올리고 완전한 인간 영혼으로서의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그 사회적 기능이다. 6일간 생계를 위한 직업에 전적으로 종사하고, 마차를 끄는 말처럼 옆도 보지 않고 계속 일해 온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휴식일이다. 또 영국에서는 산업주의의 출현과 함께 조직적인 경기가 시작되었고, 각종 스포츠가 왕성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스포츠는 산업주의하의 분업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전문화에 대항한 의식적인 노력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스포츠를 통해 생활을 산업주의에 합치하도록 조절하려는 이 기획은, 산업주의의 정신과 리듬이 스포츠 그 자체에 침입해서 오히려 해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반쯤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날의 서유럽사회에는 공업 기술보다도 한층 더 전문화되고 엄청난 보수를 받는 직업적 운동가가 있어서, 놀랄 만한 극치의 ‘바나우시아‘적 표본을 제공한다. 이 연구의 저자가 방문한 일이 있는 아메리카의 두 대학 구내에서 본 2개의 축구 경기장을 기억한다. 하나는 주야 겸용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축구 선수를 길러 낼 수 있도록 조명 장치가 비치되어 있었다. 또 다른 하나에는 날씨에 관계없이 연습할 수 있도록 지붕이 있었다. 그것은 세계에서도 가장 큰 지붕으로 그것을 만드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든 모양이다. 주위에는 기진했거나 부상당한 전사를 수용하는 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이 2개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인원은 전 학생 중 불과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 학생들은 시합에 출전하기 전에 그들의 형 뻘이 되는 청년들이 1918년에 참호로 들어갈 때에 느낀 것과 큰 차이 없는 불안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이들 앵글로 색슨의 축구는 결코 유희가 아니었던 것이다. - P377

382
창조성의 응보는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사회적 쇠퇴를 야기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전의 도전에 대한 응전에 성공한 자를 제외함으로써 다음 도전부터는 창조자 자격을 갖춘 인간의 수를 감소시킨다. 또 한편으로는 이처럼 이전 세대에 창조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 창조자의 자격을 잃음으로써 이전의 창조자는 새로운 도전에 현재 응전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반대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다.
더구나, 이들 지난날의 창조자는 이전에 창조력을 발휘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과 새로운 창조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속해 있는 사회의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이미 그들은 사회를 전진시키는 일에 쓸모가 없다. 그들은 ‘노 젓는 손을 쉬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노 젓는 손을 쉬는‘ 태도는 창조성의 응보에 굴복하는 수동적인 형식이라고 해도 좋으나, 이 심적 상태가 소극적이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에 대해 멍청하게 속수무책으로 수동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과거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며, 과거에 심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는 창조자가 아니라 피창조물에 대한 숭배로서, 지적·도덕적으로 맹목적인 숭배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382

390-1
새로운 땅이 풍작을 가져오는 일이 많은 데에는 적극적인 이유 외에 소극적인 이유가 있다. 즉 새로운 땅은 이미 유해무익한 것이 된 씻을 수 없는 전통이나 지난 기억의 악몽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회적 현상, 앞서 연구에서 사회적 쇠퇴와 해체의 현저한 징후로 지적된 바 있는 현상ㅡ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는 경향ㅡ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 확실히 창조적 소수자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타락한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창조자는 창조성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이 방향으로 이끌리기 쉬운 것이다. 창조적 능력이 처음에 발동될 때에는 하나의 도전을 훌륭히 극복하는 응전이 나타나지만, 다음에는 재능을 모두 발휘한 이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새로운 도전이 나타난다. - P390

399-400
사실 왕이 신으로서 숭배를 받으려면, 교육받은 학자 계급(비서진)의 존재가 필요조건이 된다. 그러한 뒷받침이 없으면 왕은 대좌 위에 조상인 양 앉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이집트 사회의 학자들은 국왕의 배후 세력이며, 한 술 더 떠서 시간적으로는 국왕보다 앞선 시대까지 떠맡아야 하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으며, 또 자신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를 이용하며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였다"(<마태> 23:4) 학자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일반 국민들의 운명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받고 있던 일이, 이집트 사회의 모든 시대를 통해 관료 계급이 자기를 예찬하는 주제가 되었다. 이짐트 사회의 동란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1000년 후에 ‘신왕국‘의 학생이 습자 연습용으로 옮겨 쓴 몇 종류의 사본 형태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두아우프의 교훈」이라는 책 속에서도 싫증날 정도로 그 점이 강조되어 있다. 이 책은 ‘케티의 아들 두아우프가, 그의 아들 페피가 대관 자제들 사이에 끼어 서기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유학 길에 오를 때 쓴 글‘로서, 이 교훈 속에서 야심적인 아버지가 청운의 뜻을 품고 한 훈계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매 맞는 자를 보았다. 맞는 자를. 너는 오로지 책에만 마음을 쏟기 바란다. 나는 강제 노동에서 면제된 자를 보았다. 봐라, 책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 ······글을 쓰는 직업은 흙을 파는 것보다 힘이 든다. ······ 석공은 모든 종류의 단단한 돌에서 일을 찾아야 한다. 일을 끝마치고 나면 팔은 힘이 빠지고 녹초가 되어 버린다. ······ 들일을 하는······ 자, 그도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해진다. ······ 작업장의 직공은 어떤 여자보다도 불행하다. 그의 두 다리는 배에 붙어 숨도 쉴 수 없다. ······ 또 어부의 생활에 대해 말하마. 그는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물 위에서 일하고 있지 않느냐? ······봐라, 학자[라는 직업]를 제외하고는 지휘자 없는 직업은 없으니, 학자야말로 지휘자인 것이다······"
이집트 사회의 ‘학자 정치‘와 비슷한 것으로서, 동아시아 세계에도 선행 중국 사회의 말기에 이어받은 만다린(중국의 관리계급) 계급이 존재한다. 유학자들은 붓을 잡는 일 이외의 모든 일에 손을 사용할 수 없도록 손톱을 길게 기름으로써, 노역에 괴로워하는 몇 백만이라는 민중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들지 않는 냉혹한 태도를 과시했다. 그래서 동아시아 사회 역사의 모든 변천을 거치며, 이집트 사회의 같은 계층과 마찬가지로 끈기 있게 그 압제적인 지위를 유지해 왔다. 서유럽 문명의 충격도 그들을 그 지위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고, 유교 고전의 시험은 없지만 시카고대학이나 런던대학 정경학부의 졸업증서를 자랑하며 옛날 그대로 효과적으로 농민들을 위압하고 있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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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반대로 그들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다면 그 메시지가 인류에게 주는 효과는 참으로 놀랄 만할 것일 게다. 그들의 메시지는 과학과 기술, 미술과 음악, 정치와 윤리 그리고 철학과 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어 인간의 통찰력을 크게 키워 줄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우리를 우리의 고질적 편협성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하게 할 수 있는 결정적 정보를 담고 있을 것이다. 아, 그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새로운 보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P621

622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문제는 해독이 아니라 외계 생명을 탐색하는 연구에 예산을 배정해 달라고 미국 의회나 (구)소련의 중앙 위원회를 설득하는 일이다. 문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과학자들이 비과학자들을 설득하여 외계 생명의 탐색 사업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얻어 내기가 불가능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내부에만 투자하고, 통념이 사회를 철저하게 지배하여 별 세계의 탐색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사회이다. 다른 하나는 외계 문명과 접촉해 보고 싶다는 희망을 꿈꿀 수 있으며, 또 시민 전체가 위대한 이 꿈을 공유하여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위한 대규모의 연구가 실행될 수 있는 사회이다. - P622

622-3 외계 문명의 탐색이야말로 실패해도 성공하는 사업이다. 인류사에서 절대 밑지지 않는 사업은 흔하지 않다. 우리가 외계로부터 오는 신호를 잡기 위해서 수백만 개에 이르는 별들을 모두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아무런 신호도 검출할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은하에서 문명의 발생이란 것이 참으로 드문 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적어도 하나의 확고부동한 척도가 마련되는 셈이다. 따라서 지구 생명의 고귀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 한 명 한 명이 개체로서 반드시 존중돼야 할 존재가 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외계 문명이 발견된다면 인류사와 지구 행성의 의미는 그 근본에서부터 변혁을 겪게 될 것이다. - P622

629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노예 제도의 야만성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별 세계의 비밀을 캔다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 몽테뉴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가 피타고라스에게 던진 힐문이라고 한다. - P629

629 지구 도처에서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끝없는 바다를 정복한다고 법석을 떨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지구의 모습은 바깥 세상의 천체들에 비해서 더욱더 초라해 보일 뿐이다. 제왕과 왕자 들은 반성할지어다. 그대들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그래서 어쩌면 불쌍해 보이기조차 하는 보잘것없는 한구석의 주인이 되고자 그렇게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야만 하는가?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천상계의 발견』, 1690년경 - P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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