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왜 일상적 삶에서 권위주의는 건재할까? 권위주의적 성격 中

*권위주의: 어떤 일에 있어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


우리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보호와 권위에 의존하는 삶을 살다가 자립할 때에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자유가 부담스러워진다. 이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보호와 권위를 찾게 되는데, 이렇듯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권위에 기대려는 심리 상태가 바로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프롬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권위주의적 생각의 공통적인 특성은 삶이 자기 자신, 자신의 관심, 자신의 소망 등이 아니라 그 밖에 있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확신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힘에 굴종하는 데 있다.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오는 용기란 본질적으로 운명 또는 그의 상관이나 지도자가 그에게 요구한 것을 견뎌내는 용기다. 그 괴로움을 끝내거나 적어도 완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용기는 금물이다. 불평 없이 견디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다. 운명을 바꾸지 않고 운명에 복종하는 것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영웅주의다." - P100

영국 심리학자 애드리언 펀햄Adrian Furnham은 "권위주의자는 복잡성, 혁신, 새로움, 모험이나 변화를 옹호하는 대상을 혐오한다. 갈등과 의사결정을 싫어하며, 자신이ㅡ 개인적인 감정과 욕구를 외부적인 권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규칙, 규범, 관습에 복종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정리하고 통제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는 단순하고 경직된, 즉 융통성이 없는 법이나 도덕, 의무와 규칙, 과제를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예술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투표를 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 P104

옳건 그르건 우리는 이런 경우 별 고민 없이 갑질을 저지른 사람에게 갑질의 책임을 묻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갑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중요한 건 갑질을 저지르는 상사를 둘러싼 개인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회사 전체,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면, 제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져달라고 등을 떠밀어도 그런 성격을 가질 리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 고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가? 왜 ‘갑질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갑질을 저지르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 도움이 된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조직 생활에서 널리 떠도는 속설 가운데 "잘해주는 사람보다는 못살게 구는 사람에게 잘해주려 애쓴다"는 말이 있다. 물론 약자의 처지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처세술 메커니즘은 권위주위적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그런 토양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권위주의 시대는 갔다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권위주의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이기도 하다. - P106

128 160여 년 전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자신의 마지막 책인 『부록과 추가』(1851)에서 "고슴도치들은 겨울에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제시했다. 고슴도치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모여들어 체온을 나누는 습성이 있다는데, 같이 붙어 있게 되면 가시에 찔리고 떨어져 있자니 추운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답은 가시에 찔리지 않을 정도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이는 가까움과 멂의 균형이다.
인간 역시 인간관계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고슴도치와 같다.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는 곧 ‘인간의 딜레마‘인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그런 말을 했나 보다 하는 정도로 묻힐 수도 있었던 이 개념을 널리 알린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다. 프로이트가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1921)에서 쇼펜하우어를 인용함으로써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심리학의 영역에 편입되었고, 이후 수많은 저자에 의해 자주 거론되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떤 개념이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하다보면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점점 더 확장되어가기 마련이다. 정성훈은 "쇼펜하우어는 이 현상을 통해 외부로부터 따뜻함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비관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여성을 비하하여 결혼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한편 인간관계가 점점 더 계산적이 되어가는 현대에 와서, 고슴도치 딜레마는 쇼펜하우어가 쓴 의미와는 달리 아무리 타인에게 다가가려 해도 두려움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고민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인간관계에 큰 부담을 느끼는 젊은이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용도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예컨대, 이주형은 "서로 알아가고 신경 써주면서 시간과 돈과 정신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혼자 편하게 지내는 것이 낫지"라고 생각하는 ‘신인류 고슴도치‘들이 늘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오늘도 온라인상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과의 적당한 거리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매일 메신저와 댓글을 통해 소통하는 동안 가시는 더욱 뾰족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앞으로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소통하는 ‘관계의 편식‘이 일반화될 것이다. 이것이 당장은 세상 살아가는 데 별 불편함을 주지 않을 것이다. 갈수록 쿨한 사람, 쿨한 관계들로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단거리경주가 아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거시적 관점에서 사회 전체의 문제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사회의 재창조: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2007)에서 이 딜레마는 ‘인간 협력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독립성의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상호 의존성을 인정한다. 우리는 온기와 우정과 도움을 나눌 다른 누군가를 펼요로 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한편으로 지나친 접근성은 긴장을 유발한다. 우리는 개인성을 개발하기 위한 사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서로의 비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밀실 공포증을 유발할 만큼 숨 막히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논의를 연장시키면 결국 ‘공동체주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겠지만, 공동체주의 문화가 강했던 한국에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주의가 야기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다. 그 딜레마는 ‘가족 파시즘‘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혜성의 장편소설  『마요네즈』에 나오는 "가족은 안방에 엎드린 지옥", 배수아의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에 나오는 "가족은 흡혈귀"라는 표현 등이 말해주듯이, 이미 여러 작가가 ‘가족 파시즘‘을 고발하고 있다.
한국인에겐 평소 잠재된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겉으로 불거져 나오는 특별한 기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명절이다. 가족 또는 친족이라는 미명하에 말로 상처를 주는 한국형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은 ‘적정거리‘를 무시함으로써 "추워도 좋으니 뿔뿔이 흩어져 살자"는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포용적 개인주의 inclusive individualism‘다. 포용적 개인주의는 물리적 접촉 없이 홀로 존재하지만 상호 연결되어 있는 개인주의로, 그 핵심은 ‘따로 그러나 같이‘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포용적 개인주의는 ‘강한 연결‘을 추구했던 이전의 방식을 탈피해 개인주의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는 배척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ties‘과 친화적이다.
포용적인 개인주의는 이미 온라인에선 예외 없이 작동하는 법칙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오프라인에선 고립된 개인임에도 온라인에선 ‘사회적 실재감social presence‘을 느끼는 방식으로 사회의 구성원 지위를 만끽하는 것이다. 사회적 실재감은 매개된 커뮤니이션에서 사람을 ‘실제 사람real person‘으로 느끼는 정도, 또는 타인과 같은 공간을 공유할 때 느끼는 기분을 말한다. 온라인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은 ‘홀로 함께 플레이하기playing alone together‘에 빠져드는데, 한 플레이어는 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주위에 실제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고, 서로 자기 할 일 하다가 우연히 마주치는것도 재미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온라인 세계의 삶이 실제로 오프라인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27퍼센트를 넘어섰고(2015년 기준 27.2퍼센트), 통계청 추계로 본다면 당장 2019년에 1인 가구(590만 7,000가구)가 ‘부부+미혼 자녀‘(572만 1,000가구) 가구를 추월하고, 2045년(1인 809만 8,000가구, 부부 + 자녀 354만 1,000가구)이면 그 차이를 2배 이상 벌리게 됨으로써 가족의 범위가 사실상 ‘개인‘으로 수렴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가수 나미는 늘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에 대해 ‘좋아하는 우리 사이‘ 멀어질까 두렵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도 없이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고슴도치 이야기는 우화였지만, 인간은 점점 고슴도치를 닮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그녀가 사라지기를 원했다. 나는 <안정>을 갈망했다. 나는 지하에 혼자 있고 싶었다. 나는 <실제의 삶>을 사는 데 매우 서툴렀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숨도 못 쉴 정도까지 나를 짓눌렀다. - P598

정말 우리는 참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속으로 책에 씌어진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때때로 소란을 피우며, 왜 변덕을 부리며, 왜 바라는 것일까? 우리 자신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만약 우리의 변덕스러운 소원들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나쁘게 될 그런 위인들이다. 그래, 한번 시험해 보자, 우리에게 예를 들면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라, 우리들 중 누구라도 손을 풀어 줘 봐라, 우리의 행동 영역을 확장시켜 봐라, 감독을 약하게 해봐라,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곧 다시 한번 감독받게 해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 말 때문에 당신이 내게 화를 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내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당신은 발을 구를 것이다. 「네 이야기만 해라, 지하에서의 너의 불쌍한 삶을, 그러나 감히 우리 모두라고는 말하지 마라.」 잠깐만, 신사 양반, 나는 그 모두라는 표현으로 나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관련되어 있는 한, 나는 단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신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에 의해 위안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욱더 <살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 자세히 봐라!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정확히 이 <살아 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둬 봐라, 책 없이. 그러면 우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합류해야 할지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이, 진정한 자신의 육체와 피를 가진 그런 인간들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가 없는 일반적인 인간 같은 것이 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 P602

물론 불협화음이란 가공할 만한 것이며, 사회가 우리 안에 조성하는 불균형도 소름끼치는 것이다. 외부적인 일들과 내부적인 일들은 평형 상태에 있어야 한다. 외부적인 경험들이 결여되면 내면적인 삶의 체험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기 때문인데 이것은 가장 위험한 것이다. 신경 과민과 환상이 인간의 의식 안에 너무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모든 외부의 돌발 사건들은, 습관의 결여 때문에 거대해 보이며 어쨌든 놀라운 것이다. 우리는 삶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 P6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자연이 인간을 상이한 얼굴들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이한 종류의 심성과 기질로 만든다고 믿는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심성과 기질의 경향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러므로 시대와 상황이 다양함에 따라서, 어떤 인간들은, 자신들의 처신방식이 시대와 부합하면, 자신들의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한다. 반면에 자신의 처신방식이 시대와 상황에 잘 부합하지 않는 인간은 성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한 두 사람이 동일한 결과를 얻는 사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방식은 주어진 상황이 나라나 국가마다 광범위하게 다르다는 점을 전제할 때, 각자가 행동하는 상황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은 종종 변화하고(일반적으로도 그렇고 또한 특정한 장소에서도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관념이나 방법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어떤 때는 성공하고 다른 때는 실패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기실 시대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사려 깊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성공할 수 있을 것이며(아니면 적어도 실패는 면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현명한 사람은 별과 숙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 셈이 된다. 그러나 그토록 사려 깊은 사람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 이유란, 첫째, 인간은 근시안적이고, 둘째, 자신들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은 가변적이고 인간을 자신의 굴레에 씌우며 인간 위에 군림한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이 견해를 확인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견해는 그러한 사례들에 근거한 것이며, 그 사례들은 나의 결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 P1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연히 나는 내 동료들과 교제를 지속하지 못했고 서로를 욕한 후 우리는 곧 헤어졌다. 그때 아직 경험이 적은 청년기의 미숙함 때문에,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까지 그만두었다. 나는 쉽게 그들과 절교를 했다. 그런 일은 딱 한 번 있었던 것이고 나는 보통 언제나 혼자였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독서로 보냈다. 나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외부의 감각들로 잠재우기를 원했다. 외부의 감각들 중에서 내게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은 독서였다. 독서는 물론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나를 흥분시켰고, 기쁘게 했으며, 괴롭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나를 대단히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행동을 원했다. - P498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 친구들에 대한 필요가 많아졌다. 나는 그들 중 몇 명을 가까이 끌어들이려고 노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드러났고 저절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한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폭군이었다. 나는 그의 영혼에 대해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길 원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에 대한 경멸감을 불러일으키길 원했다. 나는 그에게 그 환경과 당당하고 최종적인 결별을 하도록 요구했다. 나는 나의 정열적인 우정으로 그를 겁먹게 만들었다. 나는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고, 경련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그는 순진하고 복종하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완전히 굴복하자 나는 곧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마치 그를 패배시키고, 오직 그의 굴복만을 정확히 필요로 했던 것처럼. 그러나 나는 아무도 패배시키지 못했다. 내 친구 또한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고 매우 보기 드문 예외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내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예정되어 있던 특별 근무를 떠나는 것이었고, 과거에 저주를 퍼붓고 먼지 속에 그것을 버려 두는 것이었다……. - P524

「말라깽이가 되었군! 쟤 바지 좀 봐!」 <오, 빌어먹을 바지! 바로 조금 전에 즈베르꼬프는 이미 무릎 위에 묻어 있는 노란 얼룩을 발견했다……. 오, 무슨 상관이냐!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야 한다. 모자를 집어 들고는 말없이 떠나야 한다……, 경멸하기 때문에. 내일 결투가 있을지는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악당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확실히 7루블이 아니야. 그들은 생각하지도 모르지……. 제기랄! 나는 7루블에 관해선 신경 안 써! 나는 이 순간에 떠날 거야!>
물론 나는 남았다. - P533

「리자, 넌 날 경멸하니?」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어 몸을 떨며 말했다.
그녀는 당황했고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차 마셔!」 나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물론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가를 치를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에 대한 무서운 분노의 감정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끓어 올랐다. 나는 내가 그녀를 죽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는 그녀가 여기 있는 동안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맹세를 했다. 나는 <그녀가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 P590

그런데 갑자기 그때 이상한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책에서 읽은 대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몽상들 속에서 미리 꾸며 놓은 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속에 그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그 이상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상한 상황이란 내가 모욕하고 짓밟았던 리자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이해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그녀는, 여자가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다면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즉, 나 또한 불행하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 P5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두뇌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며, 둘째는 남이 그 이치를 설명했을 때 깨우치고, 셋째는 전혀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첫째 부류가 가장 탁월하며, 둘째는 뛰어나고, 셋째는 무용지물입니다. - P159

대신의 윤리와 군주의 시혜
군주가 한 대신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데에는 아주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그가 당신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마음을 더 쓰고 그의 모든 행동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면, 그는 결코 좋은 대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결코 그를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과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항상 군주에 관해서 생각해야 하고 군주의 일에만 관심을 집중해야 됩니다. 한편 군주는 대신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를 우대하고, 재부를 누리게 하며, 그를 가까이 두고 명예와 관직을 수여하는 등 그를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군주는 대신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오직 군주에게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이미 얻은 많은 명예와 재부로 인해서 더 많은 명예와 재부를 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자신이 맡은 많은 관직들을 잃을까 염려하여 변화를 두려워하도록 대우해야만 합니다. 만약 대신과 군주가 그러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들은 서로를 계속 신뢰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둘 중의 어느 한 쪽은 항상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것입니다. - P160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제3의 방도를 따라야 하는데, 자신의 나라에서 사려 깊은 사람들을 선임하여 그들에게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그것도 군주가 요구할 때만 허용해야지 아무 때나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군주는 그들에게 모든 일에 관해서 묻고, 주의 깊게 그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그 뒤에 자신의 방식에 따라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아가서 군주는 그의 조언자들의 말이 솔직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들의 말이 잘 받아들여진다고 믿게끔 처신해야 합니다. 군주는 그가 선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고, 그의 목표를 확고하게 추구하며, 그가 내린 결정에 관해서 동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처신하지 않는 군주는 아첨꾼들 사이에서 몰락하거나 아니면 그에게 주어지는 상반된 조언 때문에 결정을 자주 바꾸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 P163

군주는 자신의 역량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오랫동안 다스리던 국가들을 잃게 된 우리 시대의 군주들은 운명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화의 시대에 그들은 사태가 변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날씨가 좋을 때 폭풍을 예상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약점입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어 역경에 처하면, 그들은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도망갈 궁리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복자의 오만무례한 횡포에 분노한 인민이 그들에게 권력을 되찾아주리라고 희망했습니다. 이 책략은 다른 모든 책략이 가능하지 않을 때에는 온당할 수 있지만, 다른 해결책들을 등한시하고 이 책략에만 기대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일으켜 세워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이러한 책략은 당신의 안전을 도모해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러한 방어책은 당신의 능력 밖에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취약하고 비겁한 것입니다. 당신의 주도하에 있고 당신의 역량에 기초한 방어책만이 효과적이고 확실하며 영구적입니다. - P168

제25장 운명은 인간사에 얼마나 많은 힘을 행사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운명에 대처해야 하는가

운명은 우리의 행동의 반 이상을 통제한다
저는 본래 세상일이란 운명의 신에 의해서 다스려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신중함으로써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런 사태에 대해서 인간이 어떠한 해결책도 강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에 땀을 흘리며 애써 노력해보았자 소용이 없으며, 운명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인간의 예측을 넘어선 대격변 때문에 우리 시대에 더욱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생각할 때, 저 자신도 간혹 어느 정도까지는 이 의견에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운명이란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반만 주재할 뿐이며 대략 나머지 반은 우리의 통제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이 진실이라고 판단합니다.

운명의 범람은 통제될 수 있다
저는 운명의 여신을 험난한 강에 비유합니다. 이 강은 노하면 평야를 덮치고, 나무나 집을 파괴하며, 이쪽 땅을 들어 저쪽으로 옮겨놓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격류 앞에서는 도망가며, 어떤 방법으로도 제지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온한 시기에 인간이 제방과 둑을 쌓아 예방조치를 취함으로써, 나중에 강물이 불더라도 수로로 물줄기를 돌려 제방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제방을 넘어왔을 때 그 힘을 통제할 수 없다거나 덜 피해가 가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운명은 자신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아무런 역량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그 위력을 떨치며, 자신을 제지하기 위한 아무런 제방이나 둑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을 덮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러한 격변의 근원이자 무대인 이탈리아를 살펴보면, 당신은 이 나라가 바로 제방이나 둑이 없는 들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나라가 독일, 스페인, 프랑스처럼 적절한 역량에 의해서 제방을 쌓았더라면, 홍수가 그렇게 커다란 격변을 초래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아예 홍수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대체로 이 정도면 일반적인 차원에서 운명에 대처하는 일에 관해서 충분히 말한 셈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시대에 잘 적응시키는 사람들은 행운을 누린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군주가 성격이나 능력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흥했다가 내일은 망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가 우선 이미 상세하게 논한 원인, 즉 전적으로 운명에 의존한 군주가 그 운명이 변할 때 몰락하게 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믿습니다. 게다가 저는 군주의 대처방식이 시대와 상황에 적합할 때 성공하고, 그렇지 못할 때 실패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 곧 영광과 부에 대해서 상이한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한 사람은 신중하게 다른 한 사람은 과감하게, 한 사람은 난폭하게 다른 한 사람은 교활하게, 한 사람은 참을성 있게 다른 한 사람은 그 반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상이한 행동방식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중한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합니다. 또한 상이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신중하게 다른 한 사람은 과감하게 행동하는데, 모두 성공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이한 결과가 발생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양식이 그들이 행동하는 상황에 부합하는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말한 것처럼, 상이하게 행동하는 두 사람은 동일한 결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똑같은 방법으로 행동했지만, 한 사람은 성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흥망성쇠가 거듭됩니다. 어떤 사람이 신중하고 참을성 있게 행동하고 시대와 상황이 그의 처신에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하면,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다시 변화하면, 그는 자신의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것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런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 만큼 지혜로운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기질이 그러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거나, 아니면 일정한 방법으로 행동함으로써 항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우리의 방법을 변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이 신속하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지를 못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실패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대와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운명은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명은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선호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항상 과감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는데, 일처리 방식이 시대와 상황에 적절하게 알맞았기 때문에 항상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조반니 벤티볼리오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율리우스가 볼로냐에 대해서 감행했던 첫 원정을 생각해봅시다. 베네치아인들은 그 계획에 반대했고, 스페인 왕 역시 반대했습니다. 그 작전에 관해서 율리우스는 프랑스 왕과 아직 협상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특유의 기개와 과감성을 과시하면서 교황은 친히 그 원정을 지휘했습니다. 이러한 진격은 스페인 왕과 베네치아인들의 허를 찔렀고 이로써 그들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수동적인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자는 두려워서, 전자는 나폴리 왕국 전체를 재탈환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서 수수방관했던 것입니다.
한편 교황 율리우스는 프랑스 왕을 끌어들였습니다. 프랑스 왕은 베네치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고 교황과의 친선관계를 확립하고 싶어하던 참인데, 교황이 이미 작전을 개시한 이상 공공연하게 교황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군대 파견을 거부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속한 진격으로 율리우스는 사려 깊은 어떤 다른 교황도 불가능했던 업적을 성취했습니다. 그가 만약, 다른 교황이 그렇게 할 법했던 것처럼, 모든 조건을 합의하고 해결한 후에 비로소 로마를 떠나려고 했더라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왕은 군대 파견을 거절할 수 있는 수많은 핑계를 어떻게 해서든지 꾸며댈 수 있었을 것이고, 다른 나라들은 교황이 두려움을 느끼고 신중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를 내놓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의 이와 비슷한 다른 행동을 여기에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그의 모든 행동들은 비슷했으며, 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생애가 짧았기 때문에 그는 실패를 맛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중한 행동이 요구되는 상황에 처했더라면, 그는 몰락했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타고난 성질과는 다른 행동을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운명은 대담한 자들과 벗한다
따라서 저는 운명은 가변적인데 인간은 유연성을 결여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인간의 처신방법이 운명과 조화를 이루면 성공해서 행복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해서 불행하게 된다고 결론짓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은 여성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성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운명은 여성이므로 그녀는 항상 청년들에게 이끌립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고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 P1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