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범죄인을 찾아간 기자들이 감금이나 폭행 또는 그 이상의 해를 입어 언론의 역할이 꾸준히 위축돼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테러범을 만났고, 그가 대중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살상을 곧 저지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신고밖에 선택 사항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결국 원칙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딱히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 기준을 제시해본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기자도 한 명의 보통 시민 역할을 한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은 미국 법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유보하고 그에게 도덕적 의무를 강제할 때 활용한 개념이다. 이에 비춰본다면 정씨 신고 문제에는 어떤 답이 나올까. 내가 덴마크 현장에 있었다면 계속 기다리는 쪽을 택했을 것 같다."
고려대학교 공대 교수 윤태웅은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이라는 칼럼에서 이 문제를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을 분리하는 문제‘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훌륭한 방송사의 기자가 선의로 좋은 일을 했으니 괜찮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 극우 언론사의 기자가 수배 중인 해고 노동자를 뒤쫓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경찰에 알리는 경우는 어떤가요? 기자의 가치관이 판단의 기준일까요? 간단치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신고하고 기자로서 취재한 제이티비시 기자의 선택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제기된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겠다 싶습니다(참고로 제가 제이티비시 기자였어도 신고는 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영상을 방송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P259

이 기자들은 "왜 진작 나서서 이 사태를 막지 못하고 이제 와서 이러냐고 혼내셔도 좋다. 일선에서 취재한 우리 막내 기자를 탓하셔도 좋다. 다만 엠비시가 다시 정상화될 수 있도록 욕하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달라"고 했다. "(시청자 여러분들이) 엠비시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영상 말미의 자막에는 "‘보도 정상화‘를 위해 김장겸 보도본부장, 최기화 보도국장 사퇴, 해직 · 징계 기자의 복귀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2012년 파업 이후 MBC에서 해고된 박성제 기자는 페이스북에 "아마 이 영상을 만든 후배들은 중징계를 받겠지만 MBC 뉴스를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썼다. - P262

손석희는 25년 전 공정방송을 위한 50일 파업을 마친 뒤, 1992년 12월호 『말』과의 인터뷰에서 ‘생에서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실체는 분명하지 않더라도 지금껏 제 일생에 지켜온 어떤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싶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지위가 달라진다고 해서 제 자신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 P274

"권력은 종편에서 나온다?"
‘손석희 현상‘에 대한 나의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이 글은 이제 여기서 끝맺어야 할 것 같다. 종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지어보자. 변호사 정정훈은 2015년 12월 16일 『한겨레』에 「권력은 종편에서 나온다?」는 칼럼을 기고했는데, 이 칼럼에 대해 ‘konstar‘라는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이 장문의 댓글 반론을 폈다. 그 내용이 재미있다. 잠시 감상해보자.
"나도 그 <내부자들> 이런 영화를 봤습니다. 거기 보면 보수 언론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 분)가 국가 운영의 디자이너처럼 묘사됩니다. 집권당 후보나 재벌 회장까지 그가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죠. 매우 비현실적인 과장입니다. 지금 종편 운운하는데, 글쓴이, 국민은 종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종편이 내가 하고픈 말을 해주니까 시원하게 생각하면서 보는 거요. 아무리 김대중이라도 『한겨레』같은 헛소리해보세요. 독자들이 당장 떠나갑니다. 명심하세요.
예전에 강준만이란 자가 안티조선운동을 할 때, 그 세력들은 국민들이 『조선일보』를 보고 세뇌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국민들은 『조선일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의견을 시원하게 대변해주니까 애독하는 거예요. 이젠 종편 탓을 합니다. 이 글쓴이는 종편을 보면, 아 박근헤 지지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던가요? 아니지요? 당신도 생각이 있으니까. 보슈, 다른 국민들도 당신만큼은 알고 선택합니다. 그걸 아세요.
이 글쓴이와 친노들에게 좀 묻지요. 종편을 보면 새누리당과 박근혜를 지지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던가요? 아니라구요? 그런데 왜 다른 시청자들은 종편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나요? 당신네들이 국민들보다 지적 능력이나 판단력에서 더 우월하고 소신도 있다는 건가요?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가당치도 않은 자만심은 지나가는 개구리에게 던져주길 바랍니다. 친노들, 당신들보다 못한 국민은 없어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제 파악을 하길 바랍니다.
나는 일개 서민에 불과하지만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라도 내 생각과 다르면 그냥 웃고 넘깁니다. 『한겨레신문』의 무슨 저 곽병찬, 성한용, 김종구니 무슨 김의겸이니 이런 사람들 글……읽어보고 내가 현혹되겠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나도 그런데 다른 국민들은 어떨까요? 대한민국에 이 Konstar보다 못한 국민은 없습니다. 다들 소신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주관이 있는 거예요. 누가 언론에 넘어간다는 가당치도 않은 억지부터 접어야 글을 제대로 쓸 겝니다." - P276

‘의제설정‘과 ‘순진한 냉소주의‘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망정 ‘konstar‘의 댓글은 꽤 일리도 있고 그럴듯한 주장이다. ‘konstar‘가 의제설정議題 設定, agenda-setting 이론을 좀더 깊이 있게 알고 썼더라면 더욱 좋은 반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신문의 1면 머리기사나 TV의 저녁 뉴스 첫머리에 어떤 기사를 내보낼 것인가? 언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어떤 기사는 크게 보도할 수도 있고 작게 보도할 수도 있다. 즉, 기사의 중요성을 언론이 결정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의제설정이다.
의제설정 권한은 언론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론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의제설정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언론의 영향력이 결정되기 떄문이다. 미국의 대선 캠페인을 분석한 저서를 여러 권 낸 바 있는 정치 전문 저널리스트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언론의 의제설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에서 언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공중 토론의 의제를 제공하며, 이 대단한 정치적 힘은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다. 언론은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독재자, 성직자, 정당, 정당 총재에게나 부여될 수 있는 권한이다."
언론이 특정 이슈를 강조하거나 부각함으로써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슈들을 중요하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효과 또는 기능을 가리켜 ‘의제설정 기능‘이라고 한다. 즉, 언론이 수용자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도록what to think‘ 하기보다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what to think about‘ 이끈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버나드 코헨은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데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다" 고 했다. 이 말은 디지털 혁명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konstar‘가 잘 지적한 것처럼,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혹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konstar‘의 말마따나 그런 가당치도 않은 자만심은 지나가는 개구리에게 던져주는 게 좋겠다. 물론 지나가는 개구리 보기가 쉽진 않을 테니, 지나가는 개에게 던져주는 게 무난하겠다.
이와 관련된 ‘konstar‘의 주장에 대해선 나는 대체적으로 지지를 보낸다. 아니 지지를 보낼 뿐만 아니라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일각(진보 진영)이 거대 보수 언론을 평가할 때에 보이는 ‘순진한 냉소주의naive cynicism‘도 의심의 대상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순진한 냉소주의‘는 다른 사람이 실제보다 이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향이나 편견을 가리키는 말로, 심리학자 저스틴 크루거와 토머스 길로비치가 1999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냉전 시 소련의 군축 협상 제의를 미국이 거절한 것이나 정치에서 상대편에게 무슨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떤 제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을 악화시키는 효과를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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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비의 자에 들어 있는 덕(德)이라는 개념이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되어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한비자』라는 책을 넘길 필요가 있다. 한비자는 "덕은 득(得)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덕은 단순히 도덕적인 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얻는 대상은 사람이다. 통치자의 덕이라면 그것은 탁월한 신하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고, 스승의 덕이라면 그것은 탁월한 제자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 P268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微明]‘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36장
노자의 통치술이 압축되어 있는 구절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하나 있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는 구절이다. 이제 명확해진다. 아두를 땅바닥에 던질 때, 유비는 바로 이 교훈을 실천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보다 더 총애한다는 마음을 주었기 때문에,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아들을 던졌다는 것을 조자룡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조자룡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정으로 여겨져야 한다. 만약 이것을 눈치 챘다면, 조자룡은 자신을 얻기 위한 유비의 속내를 혐오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얻기 위해 아들까지 던지다니 무서운 군주로군!" 그래서 노자는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 P269

유비는 노자의 가르침, 즉 덕은 ‘은미한 밝음‘이어야 하다는 가르침을 잊지 않았던 군주였다. 여기서 은미함[微]이란 자신의 속내를 조자룡에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노자의 경고였다면, 밝음[明]은 아두를 던진 이유가 조자룡이란 장수를 얻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노자의 경고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야 분명해지지 않는가? 유비의 자가 왜 현덕이었는지 말이다. 현(玄)은 어둠을 상징한다. 물론 이것은 덕으로 얻으려는 사람에게 자신의 속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결국 현덕이란 자는 유비가 얼마나 노자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군주였는지를 보여준다. 상대방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주는 자신의 속내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노자의 가르침. 유비는 이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 P270

동양의 통치술은 노자의 ‘은미하지만 밝은‘ 덕의 논리로 요약된다. 집현전에서 숙직을 서다가 졸고 있던 성삼문에게 야단은커녕 곤룡포를 벗어주었던 세종대왕이 기억나는가? 결국 이런 세종의 덕은 나중에 성삼문으로 하여금 세종의 손자 단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탁월한 제왕들은 자신의 후예들에게 유비나 세종대왕이 실천했던 덕의 논리를 전했다. 그렇지만 모든 군주들이 유비나 세종대왕처럼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능력 있는 사람을 간파하지 못한 안목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에게 유비처럼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을 얻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심지어 군주들은 구변이 좋은 사람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결국 인간을 통찰할 수 없는 눈을 가진 군주에게 덕의 논리는 자멸로 가는 지름길일 수도 있었던 셈이다. 국운을 쇠망하게 했던 군주들 옆에는 항상 능력이 없거나 구변이 좋은 신하들이 가득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 P270

슈미트의 정치철학적 냉소주의는 그가 인간은 결코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다. 만약 그의 냉소주의가 옳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무서운 일 아닌가? 세계 평화와 인류애의 꿈은 단지 꿈으로만 남을 뿐인가? 그러나 슈미트는 역설적으로 세계 평화와 인류애로 향하는 길을 가르쳐준다. ‘적과 동지‘가 갈등과 대립의 근원이라면,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제거하면 평화와 공존은 가능한 것 아닌가? 이미 이 사실을 2,000여 년 전 알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무력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는 순간, 우리에게 모든 타인은 동지, 즉 친구로 변하기 때문이다. 예수보다 먼저 동양에서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폐기하는 인류애의 길을 제시했던 철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묵자다.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으로 얼룩진 혼란과 살육의 시대였다. 이때 묵자는 핏빛 세계를 구제하는 원칙으로 사랑의 길을 역설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자는 반드시 약자를 핍박할 것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신분이 높은 자는 비천한 자를 경시할 것이고, 약삭빠른 자는 반드시 어리석은 자를 기만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전란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반대하면 무엇으로 그것을 바꾸겠는가? 묵자가 말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하는 원칙으로 그것을 바꾼다."
-『묵자』「겸애·중」
갈등과 대립에 대한 묵자의 진단은 단호하다. "세상의 모든 전란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당연히 그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안한다. 묵자는 인류애를 외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학파는 몸소 인류애,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겸애의 길을 실천했다. 강자와 약자가 전쟁을 치를 때, 묵가는 약자를 도와주었다. 묵가는 약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도와주는 약자가 겸애 정신을 수용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묵가가 약자의 편을 든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강자는 약자뿐만 아니라 묵가마저도 전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가는 죽음의 공포마저도 인류애의 제단에 바쳐버렸다.
헌신적이고 초인적인 묵가의 인류애는 『장자』의 제일 마지막 「천하」편에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묵자는 만인의 사랑과 이익을 말하고 투쟁에 반대했으니 그는 서로 분노하지 않을 것을 설파한 것이다. (......) 묵자는 자신의 도를 설명한다. "옛날 우임금이 홍수를 막고자 양자강과 황하의 물줄기를 터놓아서 사방의 야만족과 구주를 소통시켰다. 그때 큰 강이300이요, 지류는 3000이나 되었고, 작은 물 흐름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우임금 스스로 삼태기와 보습을 가지고 천하의 물줄기를 서로 이어놓고 갈라놓았다. 장딴지는 마르고 정강이에는 터럭이 없었다. 폭우에 목욕하고, 강풍에 머리 빗으며, 모든 거주 지역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우임금은 큰 성인이면서도, 천하를 위해 몸을 수고롭게 하기를 이와 같이 했도다!" 후세의 묵자들은 대부분 천한 짐승 가죽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과 짚신을 신고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스스로의 고생을 철칙으로 삼고서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임금의 도를 실현할 수 없으며 묵자라 할 수 없다."
-『장자』「천하」
우임금은 치수 사업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군주였다. 군주였음에도 그는 궁정 생활의 매혹적인 쾌락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몸소 치수 사업에 헌신한다. 반복되는 홍수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만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임금의 장딴지는 마르고 정강이에는 터럭이 자랄 틈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비바람이 불어도 치수 사업 현장을 떠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자신의 삶을 돌보는 만큼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우임금의 실천을 자신의 행동 원칙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천한 옷과 가장 거친 음식을 먹으며 휴식마저 거부했던 것이다. 자신이 고생스러울수록 그만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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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나 타자기로 공들여 편지를 작성하는 사이에 즉각적인 흥분은 이미 수그러든다. 반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간적 특성만으로도 이미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매체는 감정 매체이다. - P118

디지털 매체를 통한 네트워크의 확산은 대칭적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한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참여자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정보를 생성하기도 한다.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명백한 위계질서는 없다. 모두가 송신자이자 수신자이고,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것이다. 그러한 대칭성은 권력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은 한 방향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환류가 일어나면 권력의 질서는 파괴된다. 악플은 온갖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 일종의 환류라고 할 수 있다. - P119

소음 또는 잡음은 권력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청각적 신호다. 악플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이다. 권력의 아우라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카리스마는 악플에 대한 최상의 방패막이다. 권력의 카리스마가 있는 곳에서는 애초에 악플 같은 것이 불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 P120

권력이 있다면 나의 행위 선택, 나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개연성이 줄어든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권력은 거절보다 승낙의 가능성을 높이는 작용을 한다. 승낙은 거절보다 훨씬 잡음이 덜하다. 거절은 언제나 시끄럽다.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은 잡음과 소음, 즉 커뮤니케이션의 엔트로피를 현저하게 줄인다. 그리하여 권력의 말은 불어나는 소음을 일거에 제거한다. 권력의 말은 고요함을 산출하는데, 그것이 곧 행위를 위한 여유 공간을 이룬다. - P120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존경심도 권력과 유사한 작용을 한다. 존경받는 사람의 견해나 행위 선택은 종종 이견이나 반론 없이 받아들여진다. 존경받는 사람은 심지어 모범으로 여겨지며 모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방이란 권력의 차원으로 표현한다면 미리 앞서 가는 복종에 해당된다. 시끄러운 악플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존경심이 사라져갈 때다. 존경받는 사람이 악플로 뒤덮이는 일은 없다. 존경심이 형성되는 것은 인격적, 도덕적 가치의 부여를 통해서다. 그래서 전반적인 가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존경의 문화까지 침식시킨다. 오늘날 모범이 되는 인물들은 내적인 가치와 관계가 없다. 외적 특질이 그들을 모범으로 만든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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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텅 빈 부재의 공간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주체들로서, 이들에게는 연극적 거리두기의 능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세넷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찾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ㅡ무엇을 대면하든지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상호작용, 모든 연극적 장면을 폄하한다. [......]" 세넷에 따르면 오늘날 나르시시즘에서 기인하는 심적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사회가 내적인 표현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조직화하고, 개개인의 경계 밖에서 일어나는 의미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 P76

루소는 이러한 가면과 역할의 유희에 마음과 진실의 담론을 맞세운다. 그는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연극은 "위장의 기술, 본연의 성격과 다른 성격을 취하는 기술, 진짜 자기 자신과 다른 모습을 연기하는 기술, 냉정한 상태로 흥분하는 기술,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기술"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정말 그러하다고 믿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야 한다.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처지에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망각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연극이 투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장과 가상과 유혹의 장소라고 비난한다. 표현은 포즈가 아니라, 투명한 마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 P90

전면적 투명성의 도덕이 폭정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루소에게서 드러난다. 모든 베일을 찢어버리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미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발효된 바 있는 극장과 미메시스 금지령(플라톤에게 서사시와 연극은 미메시스적 예술이다.)으로 인해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루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를 선호한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첨예화되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P90

신뢰는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한다. 신뢰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아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투명성이란 모든 무지가 제거된 상태를 뜻한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라는 구호는 사실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진다. - P98

거리가 소멸한 결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디지털 매체 자체가 정보의 생산을 공공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시키고, 이로써 커뮤니케이션을 사적인 과정으로 만든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겐 사적 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이미지가 되지 않는 영역,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구글 글래스는 인간의 눈 자체를 카메라로 만든다. 눈 자체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사적 영역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이미지에 대한 포르노적 강박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사적 영역은 완전히 철폐되고 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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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가 자신의 자본 일부를 임시적으로나마 우리에게 월급 형식으로 주고 다시 상품 판매 대금으로 회수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자본가는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혈안이 된다. 이미 월급으로 우리에게 준 돈을 강제로 뺏을 수 없다면, 남은 길은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유혹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 P248

어두운 밤바다의 집어등처럼 화려하기만 한 대중문화는 바로 이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오징어를 잡을 때, 선원들은 배에 가득 화려한 등을 밝힌다. 이것이 바로 집어등이다. 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오징어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마련된 치명적인 유혹의 장치인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오징어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 드라마, 축제, 대중음악, 광고 등등 대중매체가 던져 놓은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가장 모던하고 새로운 것, 이것들을 가지기만 하면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주는 것들이다. - P249

그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보다는 자본주의가 우리 내면을 길들이는 방식에 주목했다. 기 드보르의 진단은 차갑기까지 하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P253

왕충은 마차 바퀴와 잡초의 마주침, 들판을 뒤덮은 화마와 잡초의 마주침, 거미줄과 날벌레의 마주침에서도 사건의 우발성에 주목한다. 물론 이 모든 사례들은 인간의 삶이 우발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이 예기치 않은 마주침에 의해 요동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인간을 깨우려는 것, 그래서 그들을 삶의 진실에 이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왕충이 하려는 것이었다. - P256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조자룡은 황망히 허리를 굽히고 팽개쳐져 우는 아두를 끌어안고서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제가 이제 간뇌도지하더라도 주공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지연의』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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