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은 샘물이랑 똑같은 거여. 쓰면 쓸수록 솟는 거구, 안 쓰면 마르는 거구." - P103

깔끔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뭔가 개운하지 않은 게 당연한건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의 어떤 일이 칼로 자른 무처럼 깨끗한 시작과 결말을 갖는 걸 본 적이 없다. 낮과 밤은 분명 구분할 수 있지만 낮이 밤이 되는 순간을 특정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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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서 정당한 불만이 있는데도 불만을 제기하거나 싸움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렇게 했을 때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예측되거나, 허투루 덤볐다가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관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어서일 것이다. 또는 싸워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고 더 실망했던 경험만 있어서일 수도 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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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령도 또한 앞서의 "고향을 버리라"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비문맥적으로 주어진다. 아브라함은 이때 절대적 방식으로 고독하다. 왜냐하면 그는 주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라는 주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뜻 그대로 "이삭을 죽여서 태우라"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그 무슨 은유인 건가. 아비에게 자식을 죽이는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주는 무엇을 얻게 되는가. 이 난문에 애당초 정답은 있는 건가. 이런 까다로운 일에 말려들게 하면서 신은 아브라함의 무엇을 시험하고자 하시는 건가.
어느 물음에도 답은 없다. 그것은 "타자"와 나를 동시에 포섭하고, 각 행위의 의미나 적부를 가르쳐 줄 객관적 판단틀=전체성이 여기에는 결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한 결락도 아닌, "행위의 의미나 적부를 가르쳐줄 결의론적 판단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것,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주는 말씀하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공공적 준칙을 아브라함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말씀의 의미를 그는 오직 혼자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아브라함은 그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이 결단에 대해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 이 결단의 책임을 아브라함 대신에 떠맡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주조차도 아브라함의 행위의 책임을 떠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가 고한
"수수께끼" 의 말씀을 해석하고 결단한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아브라함의 결단이다. 유일한 신에게 이르는 도정에는 신 없는 역참이 있다.(DL. p.203.)

이 "신 없는 역참"을 지나는 자의 고독과 결단이 주체성을 기초지운다. 이때 주라고 하는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아브라함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 불가능한 유책성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일어선다. 이렇게 해서 자립한 자를 레비나스는 "주체" 혹은 "성인adute" 이라 부르게 된다.

질서 없는 세계, 즉 선이 승리할 수 없는 세계에서의 희생자의 위치를 수난이라 부른다. 이 수난이 어떤 형태로든, 구주로서 현현하는 것을 거부하며, 지상적 부정의 책임을 일신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을 요구하는 신을 개시하는 것이다.(DL, p.203.)

"성숙한 인간", 그것이 아브라함적 주체의 별명이다.

부재한 신에 여전히 믿음을 둘 수 있는 인간을 성숙한 인간이라 부른다. 그것은 스스로의 약함을 헤아릴 줄 아는 자를 말한다. (DL, P.205.)

신 없는 세계에서 여전히 선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구주가 현현해서 현실의 인간적 부정을 바로잡아준다고 믿는 자나, 역사의 심판력이 언젠가 모든 것을 정돈해준다고 믿는 자, 그들은 전체성을 믿는다. 그런 합당치 않은 경신이나 절대적 이성에의 귀의는 결코 주체성을 기초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행위를 "신/역사가 명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그런 무책임으로부터는 어떠한 유책적 주체성도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주체성은 이해를 초월한 주의 말씀을 오직 혼자서받아들이고, 그것을 오직 혼자의 책임으로 해석하고, 살았다는 대체불능의 유책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초지어진다. 이 주체성은 신이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었기 때문에 획득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행동을 근거지어주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무근거를 견뎌냄으로써, 그가 신과 가까이했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과의 접근 안에서 절망적인 고독을 맛봄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 P86

레비나스 사고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의 정식이 제시되자마자 곧바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언어가 용출한다는 "전언철회前言撤回, se dédire"의 무궁한 운동성 안에 있다. 싱싱하고 생성적이었던 사고가 견고하고 일의적인 언어의 틀 안에 고착되고 타성화되는 것을 레비나스는 거의 강박적으로 회피하려 한다. 사고를 끊임없이 "성운星雲 상태"에 놓아두려는 바람은 거의 이 철학자의 숙업이었다. 이만큼 "고착되지 않는 것에 고착하는" 정신을 나는 일찍이 만난 적이 없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탈무드 랍비들의 "쟁론Mahaloket"의 태도로부터 이어받았다. 탈무드의 시대에는 언제나 동시기에 두 사람의 위대한 랍비들이 쌍벽을 이루어 존재하고, 서로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는, 그러나 생산적인 논쟁적 대화를 펼치고 있었다. 힐렐Hillel과 삼마이Shammai, 랍비 아키바와 랍비 이슈마엘Ishmael, 라바Rava와 슈무엘Shmuel, 라브 후나Rav Huna와 라브 히스다Rav Chisda ...... 그들의 대화는 어떤 논건에 결코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을 목표로 전개되었다. 중요한 것은 결론을 얻는다든지 최종적 화해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미래의 율법수학자에게 개방상태로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동시대의 철학자와 나누는 대화도 본질적으로는 "마할로케트(쟁론)"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레비나스가 비판할 때조차, 그는 결코 그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것은 어떤 학지를, 그것이 생성됐던 때의 싱싱한 상태로 되살리기 위한 것이다. 닫혀 있는 지知의 체계에 생산적인 출입구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비판은 언제나 모종의 경의를 동반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비판이 합법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비판된 것"이 충분한 형태로 그 자리에 함께 있을 필요가 있다. "전언철회"가 의미가 있으려면, "철회되어야 할 전언"이 적절한 방식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으로 엄중한 비판은, 비판되어야 할 바로 그 사고의 지순至純한 부분을, 상세히 그것도 거의 칭찬을 포함해서 언술함에 있다. 물론 가차없는 비판이란 논적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조준하게 된다. 비판이 엄중하면 할수록, 비판되어야 할 사고가 품고 있는 가장 풍요한, 가장 사정거리가 먼 지견이 거기서 말해지는 것이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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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속감이 주는 확실성과 안정감은 상당한 대가를 수반한다. 즉, 극단적인 시각이 강화될 뿐 아니라 동시에 타인을 향한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대한 견해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은 상당한 대가를 부른다. "타자화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불안, 트라우마를 초래한다.
그렇지만 생존에 필수적인 학습과 관련하여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각주에 가까운 글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진화는 "적자생존"이라는 한 줄의 트윗으로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윈은 지배권을 쟁취하려는 투쟁 이상의 무언가가 생존을 이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에서 "공감 능력이 가장 강한 구성원들을 가장 많이 포함하는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며, 가장 많은 자손을 기른다"라고 썼다. 이 말은 생존에 있어서도 자애가 비열함을 이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관점을 극단으로 밀고 갈 수 있을까?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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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실재론자는 ‘정신없이 무대를 보는 관객‘과 비슷하다. 그 의식은 무대 위에 전개되는 드라마에 몰입되어 있어, 어떠한 연출적 기교의 효과로 그와 같이 ‘보이게 되어 있는지‘는 우선 의식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관객은 자진해서 ‘몰입하는 것‘을 바라기조차 하고 있다.
한편 회의론자는 ‘시시해진 관객‘과 비슷하다. 그는 무대 위에 있는 것이 골판지에 그린 배경이며, 배우들이 무대를 내려오면 그냥 보통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드라마에 몰입하지 못한다.
현상학자는 ‘연출가‘이다. 연출가는 ‘김빠진‘ 눈길로 배우의 연기나 조명이나 음향이나 무대장치를 체크한다. 그것이 꾸민 것이며, 가상일 뿐임을 그는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무대를 분석적으로 보는 일에 역으로 너무 ‘몰입‘해버리면, 관객이 무대 위에서 ‘정말로 보는 것‘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무대 위에는 비판적 눈길이 미처 보지 못하고, 마음을 빼앗긴 관객만이 환시幻視하는 극적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연출가에게는 깨어 있음과 동시에 몰입해 있음이 필요해진다. 현상학자의 일은 이것과 유사하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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