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본 무성 생식과 유성 생식의 간략한 자연사는 이 책의 주제인 무성애적 인간과 약간의 관계가 있을 뿐이다. 한 종의 유성 혹은 무성의 생식 유형은 인간을 비롯하여 유성 생식만을 하는 종들의 무성애 현상과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성과 번식 능력도 별개의 것이다. 대부분의 무성애자들은 그들이 성적 메커니즘을 통한 번식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성을 통해 번식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여전히 유성 생식을 하는 인간이라는 종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인간에게 성이란 번식과 관계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무성애는 무성 생식과는 부분적으로 다른 현상이다. - P66
가장 유명한 현대 수학자 중 한 사람인 폴 에르디쉬Paul Erdos는 무성애자였다. 뉴턴이 그랬듯이 그도 수학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전기를 쓴 한 작가는 그 책 제목을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The Man Loved Only Numbers』라고 했다. 에르디쉬는 자신이 수학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미학적으로 더 아름다웠는지 이렇게 이야기했다. "숫자가 아름답지 않다면, 그 어떤 것이 아름답겠는가!" 또한 그는 섹스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성적 쾌락이 정말 싫다." 이것은 성의 모든 양상, 즉 매혹, 욕망, 흥분에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단지 흥분과 쾌락의 요소만 싫다는 것인지 알려진 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에르디쉬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의 미학적 관심이 수학에만 국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성적인 혹은 로맨틱한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 P75
나는 성애자들에 비해 무성애자들이 대체로 전통적인 성 역할을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성적 발달은 여성을 보다 여성스럽게 만들고 남성을 보다 남성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성애 여성들은 로리 브로토와 내가 말한 ‘욕망의 대상 자의식Object-of-Desire Self-Consciousness‘이라고 명명한 것이 없기 때문에, 복장과 태도와 언어에서 보다 덜 여성적일 수 있다. 우리는 이성애 여성들의 성애는 종종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는 이런 여성들은 욕망의 대상을 주제로 한, 성적 시나리오를 발전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믿는다. 실제로 이것에 대해서 나의 제자들과 내가 이성애 여성과 이성애 남성의 판타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증거가 있다. 이성애 여성들은 이성애 남성에 비해, 다른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는 것보다는 파트너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보는 것에 더 흥분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여성들의 언어는 이런 주제들을 반영하는데, 예상대로 이러한 성적 시나리오는 우리의 인식에 스며든다. 결국 언어와 우리의 생각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P142
댄 새비지는 여기서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앞서 일부 이성애자들이 언급한 게이 혹은 레즈비언들이 게이 퍼레이드를 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과시‘하는 것에 대한 의문에 일정 부분 대답을 해 주고 있다. 이들은 어쩌면 금지될 수도 있는 행위들을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대중에게 정체성을 공표하는 것은 게이 혹은 레즈비언들에게는 중요하지만, 무성애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이러한 견해는 많은 무성애자들에게 어느 정도는 유지되고 있다. 내 생각에 일부 무성애자들이 퍼레이드를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공표하는 반면, 대다수의 무성애자들은 무성애자 문제를 다루는 웹 사이트에 접속하지도 않고 성 소수자들의 퍼레이드에 참가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댄 새비지의 요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가 주장하는 것의 일부는 옳기도 하지만, 나는 더 중요하고 일반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의 타당성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지될 수 있는 행위를 인정받아서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어떤 근본적 질문인 ‘나는 누구일까?‘,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등과 관계가 있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고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라고 말이다. 성 정체성을 포함한 정체성 형성은 인간 발달의 근본적인 양상이다. 주변에 아는 청소년들이 있거나 혹은 자신의 10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체성 형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회, 문화, 종교 단체들이 ‘성년식‘을 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생식과 성의 성숙이라는 맥락에서 발달에 미치는 정체성 형성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성 정체성 및 기타 정체성 문제는 무성애자들과도 관계가 있다. - P156
나와 카롤린 하퍼는 세상에 대한 신뢰가 커밍아웃 시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이 남성은 세상이 공정하고 또 사람들이 공평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을 때, 이런 신뢰가 없는 사람들에 비해 보다 빨리 커밍아웃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믿는 게이 남성들은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에 비해 인생의 후반기까지 벽장 속에 머물거나 혹은 거기에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우리가 세상의 정의에 대한 믿음이 게이 남성의 커밍아웃 경험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게이 남성들이 종종 차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 앞에 있는 세상이 불공평함으로 가득 차 있고 이런 불공평이 차별의 모습으로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믿거나 인식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이라는 무대에 멋지게 등장하지 못하고 피하게 될 것이다. "지연된 정의는 부인된 정의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 금언을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자 한다. "지연된 등장은 부인된 불공평이다." 이는 일부 게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인식할지도 모른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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