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스티븐 킹은, 재능이란 엄청난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는 무딘 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고 불평을 터뜨린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그 감독이나 작가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웬만해선 그 사람들처럼 영화를 만들거나 책을 쓰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완벽한 결과물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은 영화감독 봉준호가 <괴물>을 찍으면서 했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다니 ‘나는 분명 지옥에 갈 것‘이라는 괴로움의 웅덩이에 수백 번은 빠지고 나서야 지나가는 것이다. 또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와 그의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 리건 톰슨처럼 자신이 가진 재능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정신병자처럼 환청에까지 시달리는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는 건 쉽지만 그걸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데는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력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뭔가를 해낸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자신이 가진 재능을 결국 꺼내보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것도 운명의 장난이나 시대적 한계가 아니라 게으름과 의지박약이라는 한심한 이유 때문에.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재능의 100%를 발휘하라!‘며 등을 떠민다. ‘이것만 따라하면 당신도 ㅇㅇㅇ가 될 수 있다!‘ 류의 성공에 이르는 수많은 공식들은 그저 노력만 한다면 우리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재능을 모조리 끌어내서 쓸 수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영화 <위플래쉬>에서 최고의 재즈 드럼 연주자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찬 열여덟 살 청년 앤드류는 음악학교 최고의 교사인 플레처의 밴드에 보조 드러머로 뽑힌다. 그런데 이 플레처라는 인간이야말로 지독한 선생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의 수업은 한마디로 살벌 그 자체. 플레처는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는 식으로 학생들을 거세게 압박하면서 자신의 템포에 맞출 것을 주문한다.
심지어 그는 비열하기까지 하다. 상대를 추켜세우다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짓이겨 버리는 것이 그의 특기다. 자신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한 제자의 죽음을 교통사고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눈물까지 보이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런데 제자 또한 만만치 않다. 반드시 최고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앤드류는 메인 드러머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 말 그대로 피땀을 흘리며 연습한다.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는 이유도 그녀가 성공에 방해되어서다. 도무지 열정이라고는 없는 그녀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다 불운의 연속으로 연주를 망치고 플레처의 밴드에서 쫓겨난 앤드류는 드럼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얼마 후 그는 우연히 재즈 바에서 플레처와 마주치는데 플레처는 그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언제나 내 학생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바랐다. (중략)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은 ‘그만하면 잘했다‘는 말이야."

사실 나는 일찌감치 성공 같은 건 포기한 사람이다. 나도 내게 영 재능이 없지는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최소한 대한민국 남쪽 끄트머리의 시골 도시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탈 정도는 됐다. 20년 평생을 갑갑한 모범생으로 살다가 이제 한 번 사는 것처럼 살아 보자는 마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것만 해도 내 인생 전체를 돌이켜 볼 때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나 정도의 재능이야 시장 바닥에 널렸고 이걸 제대로 갈고 닦으려면 비상한 머리와 기이할 정도의 집념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는데, 동시에 내게는 그런 게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그걸 결정적으로 깨닫게 해준 것이 그 남자였다.
20대 중반에 잠깐 만난 그 남자는 콤플렉스만큼이나 집념도 대단했다. 정상적인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상종을 말아야 할 찌질이, 콤플렉스덩어리에 쓰레기 같은 놈인데,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내 눈에는 대단한 재능의 아티스트로 보였다(과거에 사귄 남자들을 회상할 때는 언제나 문체가 과격해지는 걸 보면 내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놀다 보면 나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며 자 버리는 인간이었지만, 그는 밤을 새고서라도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 자신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만한 일들을 기어코 하는 인간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아, 저렇게 독한 놈이 성공하는 거구나. 그러니까 나는 성공을 못하겠구나.
그러나 동시에 이런 것도 깨달았다. 그는 정말 불행한 남자였다. 그는 영혼 깊숙이에 뿌리박힌 결핍과 트라우마와 콤플렉스 따위를 호소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를 쑤셔 대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것은 자기 자신, 그리고 성공 뿐이었다. 그는 우리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다.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 진실한 친구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를 떠올릴 때마다 미간부터 찌푸렸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성격에 모가 났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대단히 열심히 한다는 건 제정신으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 고흐처럼 단 한 장도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거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우울증과 발작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는 일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정도의 수준이다. 사실은 침대에 누워서 리모컨을 드는 게 훨씬 쉽고 훨씬 기분 좋으며 건강에 보탬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그만하면 잘했어‘의 순간은 웬만해서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쉽게 찾아왔더라면 그들이 잔인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고통스러웠던 덕분에,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다가 고립되면서 더더욱 고통스러워지는 바람에, 우리는 그들이 신의 눈으로 만들어 낸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일지도 모른다.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은 <위플래쉬>가 들춰내는 야심의 다른 면을 그린 이야기다. 무명의 포크 가수 르윈 데이비스는 한겨울에 코트 한 벌 없이 기타 하나와 우여곡절 끝에 맡게 된 남의 집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오늘 밤 자신을 재워 줄 소파를 찾아 거리를 떠도는 처지다. 성공의 순간은 언제나 그가 손을 뻗어 보기도 전에 달아나 버린다. 자꾸만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성공에 필요한 것이 재능과 노력과 운이라면 그는 지질이도 운이 없는 남자다. 어쩌면 그 자신이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파에서 신세를 지다 눈이 맞아 함께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동료 여가수 준은 그에게 임신을 했는데 네 아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기분이 더럽고 너는 살 가치도 없는 쓰레기 루저이니 당장 아이를 지울 돈을 마련해 오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사람들은 그가 부르는 어둡고 궁상맞은 노래보다는 준의 애인인 짐이 부르는 가벼운 사랑 노래를 더 좋아한다.
그는 거의 마지막이다시피 한 기회에 자신의 운을 건다. 유명한 프로듀서 버드 그로스맨을 만나기 위해 시카고로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도착한 시카고에서 하루 종일 벌벌 떨며 버드를 기다려 겨우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은 르윈이 부른 노래는, 끝내주는 노래로 이 프로듀서를 넉다운시켜 주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 것도 아니고 충족시킨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다.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곡 선택에 ‘미스‘가 있었다고나 할까. 창법이 ‘올드‘하다고나 할까. ‘한 방‘이 없었다고나 할까. 자신만의 매력을 찾지 못했다고 할까. 본인이 잘할 수 있는 노래와 잘하고 싶은 노래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나 할까. 그냥 네 노래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한없이 처진다고나 할까.
르윈이 부른 노래의 가사는 제인 왕비의 이야기다. 임신한 왕비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진통을 앓는다. 괴로워하다 못해 왕비는 헨리 왕에게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달라고 애원하지만 결국 낳지 못하고 죽는다. 이 뜨악한 노랫말 속에 인사이드 르윈, 즉 르윈의 내면이 있다.
르윈은 그런 사람이다. 아니, 수많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실패자, 그러니까 루저들이다. 그들 모두가 허황된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드가 말했듯이 르윈에게도 재능이 전혀 없지는 않다. 노력도 안 한 게 아니다. 그런데 별로 운이 없었다. 듀엣으로 좀 잘나가나 했더니 파트너가 다리에서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다. 솔로로 서자니 어쩐지 매력이 부족하다. 그건 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의 운명은 결국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포크의 시대라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갈, 세월이 흐르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그저 그런 무명 가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르윈은 그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재능을 꺼낼 수가 없다. 저절로 나올 생각도 않는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누구라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에서 르윈은 애크론이라는 이정표를 지나친다. 그곳은 르윈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사라진 옛 여자 친구의 고향이다. 저 멀리 불 켜진 집들이 보인다. 그곳은 눈보라 치는 어둡고 황량한 고속도로보다 따뜻해 보인다. 어쩌면 저 집에서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 엄마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도 여자 친구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자동차 수리를 하거나 전자제품 외판원으로 착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인생도 어쩌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가 살 수도 있었을 인생은 지나가 버린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야 한다. 그의 앞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1960년대의 미국, 포크의 시대에 밥 딜런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그림자에 가린 얼마나 많은 르윈 데이비스들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포크송에 인생을 바치고 그것에 걸려 넘어졌을까.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나이 들었을까.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르윈이 아버지에게 불러 주는 노래의 가사처럼, 청어 떼를 잡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바다와 싸워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잔잔해도, 돌풍이 불어도, 땀에 젖어도, 추워도, 나이 들어 늙어가도, 결국 죽을 때가 되어서도 우리는 청어 떼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청어 떼를 만날 수 있든 없든.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나를 쥐어짜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깨달음은 그 쥐어짬의 과정에 어떤 희열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로 인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을 때의 희열 말이다. 등산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바벨을 들어 올리는 것이나, 달리기와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매일 만원 전철에 오르는 것이나, 보고서의 마감 기한을 맞추는 것이나 비슷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앤드류가 언제나 동경하던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 일명 ‘버드‘는 그의 엉망인 연주를 듣다 못한 드러머가 던진 심벌즈에 맞을 뻔한 사건을 겪은 후 수치심을 못 이겨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전화기를 끈 채 잠수를 타는 대신,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래서 버드는 최고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성공 뒤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약물에 찌들어 살다 이른 나이에 죽었다.
정말 위험한 것은 그런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을 때 엄청난 쾌감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쾌감은 언제나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조금 더 강한 쾌감을 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중독된다. 쾌감과 자극으로 가득 찬 특별한 인생과 밋밋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인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다.
젊어서 산화해 버리고 싶지도, 늙어서 회한에 젖고 싶지도 않다. 천재도 아니고 배짱도 없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만 여전히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루하루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반 고흐도, 도스토옙스키도 필요 없다. 그런 내가 ‘그만하면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패자의 섣부른 자기 합리화인 걸까?

<위플래쉬> 속 앤드류의 아버지는 아들이 열정과 욕망에 사로잡혀 산화해 버리는 대신, 특별하지도 않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소소한 삶의 기쁨을 누리다 조용히 사라지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실패했든 성공했든 우리를 안아 주고 다독여 줄 것이다. 그는 우리가 패배했을 떄 돌아갈 곳이다. 그러나 또 우리에게는 플레처처럼 사회적인 아버지도 필요하다. 그는 우리가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가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도록 이끌고 채찍질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필요하다. - P88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_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 - P132

어쩌면 사람들이 달리는 이유는 자기만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파에 퍼져서 TV 채널이나 돌리거나 두둑한 뱃살을 부여잡고 치킨을 뜯는 나태한 인간이 아니라, 고된 정신노동을 마친 후 달리기로 육체를 단련하는 금욕적 지성인이라는 자기만족. 이유야 뭐든 과하지만 않으면 됐다. 달리지 않는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좀처럼 몸 쓸 일 없는 현대인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머리는 완전히 방전되었지만 몸은 조금도 에너지를 소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부조화가 각종 질환과 정신적 피로, 우울증, 망상 등을 낳지 않았을까?
마음이 복잡할 때, 까닭 없이 우울할 때, 에너지가 정체된 기분이 들 떄 나는 운동화 끈을 묶고 달리러 나간다. 에너지를 완전히 방전시키자는 마음으로 달린다. 그 에너지는 몸속에 남아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 달리고 나면 그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흙탕물로 뒤덮인 유리창을 말끔히 씻어 낸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인생이 조금 가벼워진다. 내 두 다리로 이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 P134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거"라는 마사코의 말에 사치에는 야무진 답을 내놓는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안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려면 좋아하는 일을 정말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 P168

만약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면 어떤 분야가 되었든,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일은 상상 이상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런 부분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 해 나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칠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 하나가 있어야, 나머지 수백, 수천 가지의 어렵고 힘든 부분을 견뎌 낼 수가 있어요. 또 그렇게 미쳐서 힘든지도 모르고 해 나가야 성공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본성이 악착 같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악착같이 버티게 됩니다. _회사 가기 싫은 날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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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 일단 결정되고 나면 그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업을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만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법구경」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업은 개인의 의지작용에 의해 짓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선업의 과보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 P117

왕사성의 비극이라고 불리어지는 연유는, 이 경의 첫머리에 태자 아자따사뜨루가 그 아버지를 가두고 어머니마저 가두어 버리고, 감옥에 갇힌 어머니가 부처님을 부르는 장면이, 현대에도 있을 수 있는 비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자따사뜨루가 그런 끔찍한 사건을 왜 일으켰는지에 대하여 경에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먼저 그런 비극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아사세왕국경」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발췌하도록 하자.
마가다국의 왕인 빔비사라왕은 어진 정치를 펴고 국민의 절대적인 신망을 받고 있는 왕이었다. 부처님께 귀의하여 항상 진리에 접하였으며, 곁에는 언제나 아름답고 총명한 왕비 위제희 부인이 있었다. 이 세상에 행복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나이가 이미 50을 바라보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 슬하에 아들이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점 치는 사람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더니,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왕자를 얻게 됩니다. 저 건너 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선인(仙人)이 있는데, 그 선인이 수명이 다하면 부인의 몸에 왕자로 잉태될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3년 후의 일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왕비는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앞으로 3년이나 지나야 한다는데, 그것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왕비는 이미 40이 넘은 여성으로서 도저히 3년을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여러 모로 생각한 끝에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3년 후에 아이를 갖게 된다는 것은 선인이 앞으로 3년을 더 산다고 하는 말이지요. 그 말은 바꿔 말하면 그 선인이 죽기만 하면 곧 태자로 태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선인도 나이 들어 그렇게 서글프게 사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태자로 태어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왕은 곧 사신을 보내서 그 선인을 죽였다. 그러나 아무리 선인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에 임해서 그 선인은 원한을 품고 반드시 두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다짐하였다.
그런 저런 일이 있은 다음달에 부인은 아이를 갖게 되었다. 위제희 부인이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은 금방 온 성 안에 퍼졌다. 왕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이 기뻐하였으며,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이윽고 해산달이 다가오자 왕은 다시 점을 치도록 하였다. 점 치는 사람은 점괘를 보고는 안색을 바꾸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분명히 왕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 아이는 두 분을 몹시 원망하고 있으며, 성인이 된 다음에 반드시 두 분에게 복수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과 왕비는 매우 두려워하였다. 잔인하게도 자기네의 행복을 위해 무고한 선인을 죽인 일이 있으며, 그 선인이 죽음에 임해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매일 밤마다 그 선인이 꿈에 나타나서는 무서운 형상을 하고서 복수하겠다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왕과 왕비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무서운 계획을 세웠다. 산실을 높은 누각에 마련하고 그 밑에 칼을 빽빽이 세우고서 아이를 낳아 떨어뜨렸다. 참으로 끔찍한 일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았다. 새끼손가락 하나만 잘리고 기적적으로 살았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소리를 들은 왕비는 모성이 살아나 그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왕은 이 아이의 이름을 아자따사뜨루(未生怨, 태어나기 이전부터 원한을 가졌다는 뜻)라고 지어 주었다. 아이는 예쁘게 자랐으며, 어느덧 왕도 왕비도 끔찍한 일들은 말끔히 잊어버렸다. 태자는 어엿한 성인이 되도록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성인이 된 태자는 총명하였으며, 부모를 존경하고 따랐다.
여기에 조달(調達=提婆達多, Devadatta)이 등장한다. 조달은 붓다의 사촌 동생이며, 뛰어난 수행자였다. 그러나 붓다의 교단을 탐내고 분열을 조장했던 악인이다. 그가 아자따사뜨루 태자를 현혹시키고, 과거에 두 번이나 자신을 죽이고, 죽이려 하였던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종용하였다. 그래서 태자는 부왕인 빔비사라를 감옥에 가두어 죽게 하고, 왕을 살리려고 애쓰는 그의 어머니마저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관무량수경」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자기의 잘못은 깊이 뉘우치지 못하고, 순전히 남의 탓만 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성, 위제희 부인을 통해서, 불교의 깊은 신앙 세계를 열어 보인 경전이 바로 이 「관무량수경」이다.
이 경전의 특징은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악인을 구제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인이란, 진실을 구하면서도 진실과 거리가 멀고, 선(善)을 가까이하려 하지만 선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과 공간에서, 죄업이 막중한 범부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는 수행중인 선인(仙人)마저도 죽일 수 있고, 또 자기의 명예와 안락을 위해서는 자식마저 죽일 수 있는 그런 최저, 최하의 악인(惡人) 범부(凡夫)이기는 하지만, 현실 생활 가운데서는 왕비라고 하는 최고의 지위에 있는 위제희 부인이 바로 그런 악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악인이야말로 아미타 붓다의 구제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여인성불(女人成佛)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예를 들면, 원효의 「무량수경종요」에서는 당시 중국의 담란이나 혜원을 비롯해서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서 제기된 위제희 부인의 성불론을 결론지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성(女性)은 왕생하지 못하지만 여인(女人)은 왕생할 수 있다. 그것은, 악성(惡性)은 왕생할 수 없지만 악인의 왕생을 부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 P252

인간은 현재라고 하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행동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는 언제나 ‘현재’라고 하는 시대상을 통해서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선과 악이 그것이다. 그것은 다시 현재의 ‘나의 행동’에서 분별되지만 ‘나의 생활’ 속에서는 보수적인 의미의 가치체계가 형성된다.
현재라는 시대상을 통해서 ‘나의 행동’은, 혁신적이며 고답적인 가치체계가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양상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오히려 부자유를 초래하고 만다.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를 구축한 출가비구들이 그랬으며, 삼독(三毒)번뇌를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치면서 더욱 삼독번뇌 속에 빠져들게 되는 위제희 부인이 그랬다. 자유를 추구한 기연(機緣)을 다라 쫓아서 가다 보면 거기에는 부자유라고 하는 올가미가 기다리게 마련인 것이다.
현재라는 시대상에 비치는 ‘나의 생활’은 무수한 가치의 엄습으로 인해 자기 중심적인 보수적 가치체계를 지향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 사회 가운데에서 수용과 반발을 통해서 안온(安穩)을 추구하게 되지만, 삼독번뇌 속에 안온함이란 없는 것을 깨달아 알 뿐이다. 거기에서 시대적인 불안과 좌절이 대두하여 ‘나의 괴로움’이 형성된다. 그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할 때, 하나의 가치 지향이 나타난다. 괴로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것은 전일(專一)한 것으로 응결된다. 바로 이 때에 ‘구제(救濟)의 기연’이 성립되는 것이다. 마치 「열반경」 범행품(梵行品)에서 반열반(般涅槃)을 앞둔 붓다가, 오직 아자따사뜨루 왕의 이고득락(離苦得樂)만을 위하여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ㅇ기연: <불교> 부처의 교화를 받을 만한 인연. - P262

인간이 행복해지고 싶다, 자유를 획득하고 싶다고 하는 바람[願]은 근원적인 것이며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바람이 성취될 수 없는 상태의 어리석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진실한 의미의 행복과 자유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떠나서는 사유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삼독번뇌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인간 존재가 내 자신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한히 묻고[問] 묻는 과정에서 생기는 절망과 좌절은 결국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량수경」의 앞 부분에서는 그 과정마저도 여래의 위력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무량수경」에서 아난다가 붓다께서 다섯 가지의 서상(瑞像)이 현현(顯現)함을 밝혔고, 붓다도 그것을 긍정하지만, 그 뒤에 여래의 출세(出世)의 의의와, 자비와 지혜의 무한함을 강조한 다음에 아래와 같이 여래의 위력을 표현하고 있다.
여래에게 그 뜻을 묻고자 하였던 그것도 실은 여래의 뜻(여래의 威力)인 것이다. - P263

풍토(風土)란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그 모두를 말한다. 인간은 예로부터 각자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 속에서 사유하고 노력하여 보다 좋은 생활의 지혜와, 정신적 육체적인 안정과 평안 그리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가라는 사유법도 고대 인도인들이 지리적·기후 풍토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생활의 지혜로 이룩한 종교 문화이기에 그러한 요가 사유의 명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환경과 조건 등을 선의 풍토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지형적으로 북쪽에는 히말라야산이 우뚝 가로질러 솟아 있고, 왼쪽에는 인더스강, 오른쪽에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으며, 기후적으로는 서남 계절풍이 부는 몬순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몬순지대는 약 반 년을 주기로 하여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으로, 여름에는 이와 반대로 대양에서 대륙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륙 변방지대이다. 인도에는 이러한 계절풍이 부는 4월에서 7, 8월까지의 우기에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닥치며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다닐 수도 없다.
인도뿐만 아니라 동양인들은 집을 짓고 가정을 꾸미며, 농사일을 하면서 안정되고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는 농경문화인이다. 따라서 대지나 흙, 산천초목은 물론, 눈·비·바람 등 모든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즉, 인도인들은 몬순이란 계절풍과 더불어 세차게 몰려오는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의 은혜를 참고 받아들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막에서나 농경지대에서나 비(물)는 그야말로 생명수이며 감로수이다. 산천초목 등 대지의 모든 존재를 양육시키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도인들은 대지의 생명수와 같은 그러한 자연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몬순의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조용히 집 안에서 요가 사유의 명상을 하며 몬순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보다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다니기 위해 항상 끊임없이 옮겨다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생활풍습에서 정신적인 안정으로 전개되는 요가 선정의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 인도인들은 몬순이라는 거센 비바람이 부는 우기에는 외부의 출입을 자제하고 가만히 집에서 안주하여 신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관찰하며, 괴로움의 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요가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몬순이라는 계절풍과 기후나 풍토가 인도인의 정신인 요가, 사유의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의 예지와 종교적인 정신이 그러한 풍토를 이용해서 신(神)을 사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사유·명상하며, 종교적인 인생과 삶의 지혜를 창조한 것이라는 점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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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한 조치는 결단코 피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의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주어야 합니다. - P24

의사들이 소모성 열병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 병은 초기에는 치료하기가 쉬우나 진단하기가 어려운 데에 반해서, 초기에 발견하여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일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문제를 일찍이 인지하면(이는 현명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되어 모든 사람이 알아차릴 정도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재난을 미리부터 예견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화근이 자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이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에게 유리하도록 지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인/역자) 이탈리아에서 필리포스와 안티오코스를 맞아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선수를 쳐서 그리스에서 그들과 전쟁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그리스에서 그 두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을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피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더욱이 로마인들은 우리 시대의 현인들이 늘상 말하는 "시간을 끌면서 이익을 취하라"는 격언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과 현명함에서 비롯되는 이익을 취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모든 것을 몰고 오며, 해악은 물론 이익을, 이익은 물론 해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 P27

강력한 도움을 준 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로부터 항상 또는 거의 항상 유효한 일반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즉 타인이 강력해지도록 도움을 준 자는 자멸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세력은 도움을 주는 자의 술책이나 힘을 통해서 커지는데, 이 두 가지는 도움을 받아 강력해진 자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 P34

역량 대 행운
그렇다면 새로운 군주가 전적으로 신생 군주국을 다스릴 때 부딪치는 어려움의 정도는 그의 역량이 어떤지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저는 주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일개 시민에서 군주가 된다는 것은 그가 역량이 있거나 행운을 누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둘 중의 어느 한 요소가 어느 정도까지 어려움을 더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법합니다. 그러나 그가 행운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 낮다면, 자신의 지위를 더욱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른 국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직접 그 국가에 거주하면서 다스릴 수밖에 없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 P44

역량의 사례들
행운 또는 타인의 호의가 아니라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 군주가 된 인물들을 살펴볼 때, 저는 모세, 키로스, 로물루스, 테세우스 등과 같은 인물들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모세는 단지 신의 명령을 행한 집행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과 대화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로 선택되었다는 신의 은총 자체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합니다. 그렇다면 왕국을 획득하거나 건국한 키로스 등과 같은 인물들을 검토해보겠습니다. 그들 역시 탁월한 인물들임을 알 수 있고, 그들의 특별한 행동들과 조치들 역시, 검토해보면, 위대한 신을 섬기고 있던 모세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행적과 생애를 검토해보면, 질료를 자신들이 생각한 최선의 형태로 빚어낼 기회를 가진 것 이외에는 그들이 행운에 의존한 바가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했더라면, 그들의 위대한 정신력은 탕진되어버렸을 것이고, 그들에게 역량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기회는 무산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출현을 위해서 유대인들은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노예상태에서 탄압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로물루스가 로마의 건국자이자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알바에서 태어나자마자 거기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내버려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키로스 왕 역시 메디아인들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페르시아인들과 오랜 평화로 인해서 유약해진 메디아인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테세우스도 아테네인들이 분열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회들이 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운좋게 다가온 것이라면, 그들이 지닌 비범한 역량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기회를 포착, 활용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나라는 영광을 누리며 크게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처럼 자신의 역량으로 군주가 된 인물들은 권력을 얻는 데에 시련을 겪지만, 일단 권력을 쥐면 쉽게 유지합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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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다 보면 한 저자가 쓴 글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글이 있습니다. 이런 글은 책이 발간되면 역시나 독자들에게도 오래도록 회자되는데요. 그 글들의 공통점은 다른 글들보다 주제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쓴 에세이가 잘 쓴 글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커피숍이나 술자리에서 수다를 떨다가 "아, 내가 얼마 전에 이런 글을 봤는데" 하면서 전해줄 만한 이야기라면 성공한 것이지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추상적인 이야기보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더 오래 남을 테고요.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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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일에 그 정도의 이별은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야. 혜인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녀가 온갖 종류의 상처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정도 일에 연연하지 말자. 다른 사람들이 겪는 일들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다 이러고 살아, 너만 겪는 일인 것처럼 유난 부리지 마, 스스로를 다그쳤다. - P228

그 사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환자들의 말도 잘 들어주고 좋은 표정도 지으려고 애를 썼지. 그런데 오랜 시간 삼교대로 일을 하고, 그것도 너무 많은 일을……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블록 하나가 빠진 거야. 아주 작은 블록이었는데 그게 빠져버리니까 중요한 부분이 무너진 거지. 근데 본인은 자기가 엉망이 된 것도 모르는 거야. - P271

해설_ 정말 우정은 사랑보다 가볍거나 손쉬운 것일까. 우리는 대개 운명처럼 서로에게 빠져들고 거센 정념에 휘말리는 관계에 낭만성을 부여하며 사랑이라 부른다. 이에 비해 우정은 보다 잔잔하고 느슨하게 거리를 둔 채 이어지는, 하지만 그렇기에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견고함을 지녔다고 여긴다. 그러나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우정에 대해서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시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천진함이란 연약하면서도 맹목적인 것이어서, 상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해석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희미한 낌새 하나에도 민감해지며 속없이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게 한다. 하지만 이 천진한 무방비함은 미숙함의 다른 말이기도 해서, 관계 끝에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상흔들이 남는다. 최은영은 인생의 가장 연한 시기에 순도 높은 우정들이 남긴 흔적들을 좇아 그 강렬한 감정의 밀도를 복구해낸다. - P306

해설_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극적인 각성과 도약의 순간이 없고, 특별한 치유의 순간 역시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소설의 바탕이 되는 주요한 생각 중 하나는 우리가 유일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부정적으로 치닫는 대신, 실망과 균열을 끌어안은 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의연하게 걸어가도록 한다. 시작도 끝도 분명치 않은 그들의 사랑과 이후의 삶은 여름날의 불꽃놀이보다는 이 불꽃놀이가 끝난 후의 기나긴 여운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주는 적막한 위로에 기대면서, 우리의 평범한 삶은 그 짧은 여름을 영원히 살아간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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