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는 이 꽃이 왜 피어오르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런 걸 17 따져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역》을 읽다가 무심히 올라오는 가지 끝의 흰 것 하나를 보고선 하늘의 뜻을 읽어냅니다. 이게 바로 통찰입니다.
 그 많은 선승들이 면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이치를 따지면 훨씬 더 많은 깨우침을 얻을 텐데 면벽을 하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법정스님은 입적하기 전까지 산에 암자 하나 지어 놓고 몇 권의 책을 들고 들어가서 실존철학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힘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습니다. 법정 스님은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핵심이었습니다. 저는 이게 동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따집니다. 따지고 알아보고 분석하고 그리하여 기어이 답을 찾아냅니다. 그게 그들의 아주 좋은 장점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우리를 화성까지 보냈습니다. 일례로 화성에 간 우주선의 이름이 "큐리어시티curiosity", 즉 "호기심"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인간을 화성에 보낸 겁니다. 두려움 없이 끝까지 파헤쳐 뚫고 가는 힘이 우리를 우주로 안내했습니다.
 반면 동양은 어떨까요? 동양에서 분석적인 삶의 태도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봄꽃에서 하늘의 뜻을 보는 이 능력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 P16

 반면 많은 중국 고전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에 중국은 유럽 고전에 대해서 거의 까막눈이었습니다. 유럽 고전을 번역한 게 별로 없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그 당시 중국 사람들은 "드디어 중국 문명의 위대함이 전 세계에 퍼지는구나. 오랑캐들이 찾아와서 배워 가는구나"라고 해석했을 겁니다. 대신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지고 있구나. 유럽인들이 총, 칼, 경제 이런 것으로 앞서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이미 더 앞서나가는 징표가 아닌가"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야 마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P33

18~20세기까지 이 세계를 호령한 것은 분명 서구 문명이었습니다. 서구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해서 세계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편적인 틀을 만들어서 전 세계에 강요했습니다. 물론 민주적인 가치를 비롯해 서구 문명의 많은 것들이 인류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런 것들이 사악한 측면과 동시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폭력적인 지배 상황으로 귀결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서구 문명이 세계의 보편적인틀이 되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뭔가 새로운 틀을 짜고 새로운 사고와 문화를 일궈내야 할 때입니다. - P33

 앞으로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란 말은 아마 맞는 말인 듯합니다. 34 21세기에는 한·중·일이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고 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아시아의 시대가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특히 이 말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강대국에 밀렸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근래 들어 ‘우리도 한번 이 세상을 지배해 봐?‘ 하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런 사고방식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잘살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앞서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당했던 만큼 갚아야지‘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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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해라, 말해라, 말해라. 그녀는 그저 사람들이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바랐다. 어울리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다. 이 끝없는 수다. 그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먼 옛날을 상상해 보았다. 다른 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말이 거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새벽 여명에 일어나 외양간에 가서 음매 소리를 내며 반기는 소의 젖을 짜는 일. 분홍빛 젖꼭지를 쥔 채 양동이에 떨어지는 젖줄기의 속삭임과 파리의 윙윙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일, 비, 발아래의 부드러운 풀, 겨울에는 뽀드득거리는 눈, 우물의 텅빈 메아리. 그녀는 우물에서 울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지금 수도꼭지 대신 우물이 있어서 기뻤다. 아연 양동이가 우물로 내려가 춤출 때면 들려오는 금속성 노래. - P70

 크리스티나는 병원에 잘 적응했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다른 일자리를 찾으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부모님보다 늘 몇 시간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5킬로미터 떨어진 병원으로 가서 청소도구 수레를 밀며 복도를 지나다녔다. 그녀는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다른 뭔가가 올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청소 일은 이 다른 뭔가를 향한 기다림이었고, 깨어나 귀를 기울이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거의 2년 동안 일했다. 그런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 P72

 세상에는 우리에게 오는 열쇠를 지닌 사람이 있다.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과 우리는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성별이 같고 연령도 어느 정도 맞으면 사랑에 빠진다. 다른 경우에는 마법에 걸린다거나 종속된다거나 표현이야 어떻든 하여간 그런 상황이 되지만, 사실은 두 경우 모두 똑같다. 나에게 안네 마리는 이런 열쇠를 지닌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그다지도 큰 의미가 있었다. 반면 안네 마리에게 나라는 의미는 그 정도로 크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질까봐 늘 두려웠다. - P84

 조선소 노동자는 벽에 단열 장치를 했다. 그는 1년 내내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조선소를 그만두었지만 예술가의 삶은 살지 못했다. 술에 빠져들면서 마을과도 마찰이 생겼다. 그는 그저 오두막에 누워 술을 마시며, 속도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죽어갔다. 그 뒤로 오두막은 비어 있었다. 권리를 주장하는 상속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 P103

 크리스티나는 오두막의 첫 겨울을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경험했다. 안개에 싸여 잠든 경작지, 안개 고동의 외로운 울부짖음. 자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노란색과 갈색, 내리기는 하지만 제대로 쌓이지는 않는 눈, 절벽을 거대한 털짐승처럼 보이게 만드는 축축한 서리, 밤새 얼었다가 파도에 부서지고, 다음날 밤에 다시 얼어붙는 만(灣)의 얼음. 차가운 공기 중에 떠도는 자작나무 향기.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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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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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12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아이디어 신선합니다!!
벌써 연말, 이란 말이 나올 때가 되었군요. 새 달력도 나왔더라고요.

베텔게우스 2023-11-12 17:1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귀여운 젤리곰입니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하나 다행인 점은 올해 겨울은 더 따듯하게 느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3년간의 거리두기가 끝나서요,^^
 
사회과학 에센스
김동환 지음 / 북코리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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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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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많은 자의 용기 -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
이문영 지음 / 삼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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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많은 자의 용기,
얼마나 값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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