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사회, 여가사회는 특수한 시간적 양상을 나타낸다. 대대적인 생산성의 증가 덕택에 남아돌아가게 된 시간은 즉흥적이고 남는 것 없는 휘발성 사건과 체험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간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 모든 것이 가속화되는 듯한 인상이 생겨난다.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적이다. 소비재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소비재는 파괴를 구성적 요소로서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사물의 등장과 파괴의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성장을 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소비되기에 이른다. 소비의 강제는 생산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다. 경제 성장은 사물의 빠른 소모와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사물들을 잘 보존하고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사물들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는 당장 쓰러져버릴 것이다. - P149

잘 알려진 대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삶과 죽음을 둘러싼 싸움을 묘사한다. 이 싸움의 끝에서 한편은 노예가 되고 다른 편은 주인이 되어 전자가 후자를 위해 일하게 된다. 헤겔의 테제에 따르면 장래의 노예로 하여금 타인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그는 죽음보다는 복종을 택하는 것이다. 그가 생존하려고 아둥바둥 매달려 있다면, 주인은 단순한 생존보다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 주인은 권력과 자유를 추구한다. 노예와는 반대로, 주인은 생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한다. 그는 상대방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체로 만든다. 이제 노예가 된 자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기에, 주인도 자아도, 그의 권력도 제한하지 못한다. 주인은 노예를 통해 자신을 연장한다. 노예는 주인의 자아를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한다. 그리하여 주인은 노예 안에서 아무런 낯선 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연속성이 주인의 권력과 자유를 만들어낸다. - P152

권력의 변증법이기도 한 노동의 변증법의 요체는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억지로 일을 하던 노예가 바로 이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자유의 이념에 도달한다는 데 있다. 노예는 사물을 제작하는 노동의 과정에서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고, 이로써 자연에 자기 자신을 각인한다. 제작된 물건은 노예 자신의 형상이다. 그렇게 해서 노예는 사물 속에 자신을 연장시킨다. 그는 자신에게 자연을 예속시킨다. 처음에 자연은 저항하지만, 노예는 결국 저항을 깨뜨리고 자연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노예는 한때 단순한 생존을 위해 주인에게 굴종하며 일하게 되었지만, 이제 노동은 그런 단순한 생존과 구별되는 권력과 자유의 관념을 전해준다. 노동은 그를 "형성"한다. 노동은 의식 형성의 매체이다. 노동은 그에게 자유의 이념을 전달하며, 그는 역사의 과정에서 계급투쟁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이러한 자유의 이념을 실현할 것이다. - P152

그들은 사색적 삶에 접근하지 못한다. 아렌트 역시 이 부분에서 현저한 모순점을 발견한다. "마르크스는 사상의 모든 발전 단계에서 인간을 일하는 동물로 정의하는 데서 출발하면서도, 결국 이 일하는 생명체를 하필이면 그가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 쓸모없게 될 어떤 이상적 사회질서로 이끌어가려 했다." - P160

아렌트는 진정 새로운 것이 오직 행동을 향한 단호한 영웅적 주체의 결단에서만 나온다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 있다. 그러나 세계를 만들어내고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건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의 의식적 결단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그런 사건들은 대체로 한가로움의 결과이거나 강요되지 않은 놀이, 자유로운 상상력의 결과이다.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로흐의 침묵은 우리를 환대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타인을 경청하는 대신 모든 것을 듣기만 하는 분석가의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타인을 해방시켜 자신에게로 오게 한다. 경청만이 치유할 수 있다.
카네티에 따르면 경청자의 침묵은 "작게 들리는 숨소리들에 의해서만 중단된다. 이 숨소리들은 그가 나를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나는 내가 한 문장 한 문장 말할 때마다 어떤 집으로 들어서서 번거롭게 자리를 잡는 것처럼 느낀다." 이 작은 숨소리들은 환대의 표시이며 어떤 판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격려다. 최소한의 반응이다. 완전한 모습을 갖춘 단어와 문장은 이미 하나의 판단일 것이며, 하나의 입장 표명과도 같을 터이기 때문이다. 카네티는 판단 유보와 비슷한 "숨멎기"에 대해 언급한다. 마치 모든 판단이 타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편견과 다름없다는 듯, 경청자는 판단을 유보한다.
경청의 기술은 호흡의 기술로 수행된다. 타자를 환대하는 영접은 들숨이다. 하지만 이 들숨은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를 보호해준다. 경청자는 자신을 비운다. 그는 무명의 인물이 된다. 이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친절함의 핵심이다. "그는 지긋히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인내의 수동성이 경청자의 준칙이다. 경청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내맡긴다. 내맡김은 경청자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준칙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을 막는다. 에고는 경청하지 못항다.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나르시시즘적인 에고 대신 타자에 대한 몰입, 타자에 대한 욕망이 들어선다. - P110

경청자의 배려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와 반대로 타자를 향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는 자신에 대한 배려다. 카네티는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경청하고자 한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지의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데만 모든 행동을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의 죽음이다. 나의 말, 나의 판단, 심지어 나의 열광조차도 항상 타자의 무언가를 죽음으로 이끈다. "누구나 말하게 하라. 너는 말하지 말라. 너의 말은 타인으로부터 그들의 형상을 빼앗는다. 너의 열광은 그들의 윤곽을 흐린다. 네가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너다." - P112

‘좋아요‘의 문화는 모든 형태의 상해와 전율을 거부한다. 그러나 모든 상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모든 깊은 경험, 모든 깊은 인식에는 상해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단순한 ‘좋아요‘는 경험의 절대적 소멸 단계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정신을 두 가지 종류로, 즉 "상처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과 집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으로 나눈다. 상처는 타자가 입장하는 열린 곳이다. 그것은 또한 타자를 위해 자신을 열어놓는 귀다. 자기 안에서 완전한 안락함을 느끼고 자신을 집에 가두어 놓는 사람은 아무것도 경청할 수 없다. 집은 에고를 타자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준다. 상처는 집의 내면성, 나르시시즘적인 내면성을 찢는다. 그럼으로써 상처는 타자를 위한 열린 문이 된다. - P113

페이스북에서는 우리 모두와 상관이 있고,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제들이 거론되지 않는다. 여기서 전송되는 것은 무엇보다 광고들이다. 어떤 토론도 필요로 하지 않으묘 오로지 송신자를 알리는 데만 기여할 뿐인 광고들 말이다. 타인에게 걱정과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좋아요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만 만난다. 여기서는 어떠한 담론도 가능하지 않다. 정치적 공간이란 그 안에서 내가 타인들을 만나고,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다. - P115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타인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언어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 P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나에게 옳은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것은 아니다. - P114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속임수 감지기가 그냥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예민하게 작동한다. - P117

하지만 신비에는 결코 해답이 없다. 신비는 다 풀리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면 인생은 더 진부하고 더 희망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비의 영역은 결코 설명할 수 없으니까. - P118

나를 찾아왔던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호의로 찾아왔던 사람들이다. 또 내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행동은 ‘욥의 위안자‘와 같았다. 비참한 처지의 욥을 찾아와 ‘동정‘을 보여 그를 더 깊은 절망으로 빠뜨린 친구들 말이다. - P120

단절은 지옥처럼 끔찍하지만 잘못된 관계보다는 낫다. - P1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으로 존재함은 단순히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은 짐과 부담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자신으로 존재함의 부담스러운 성질을 이렇게 서술한다. "심리학적, 인간학적 서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자아는 이미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고, 자아의 자유는 은총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늘 무거움이며, 자아는 풀려날 길 없이 자신이다." 독일어의 재귀대명사 sich(프랑스어로는 soi)는 자아가 어떤 무겁게 짓누르는 도플갱어에 묶여 있다는 것을, 자아가 어떤 무게를, 과도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아는 실존하는 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실존적 상태는 "피로"로 나타난다. 피로의 자리는 "힘겹게 들어 올리는 무게를 내려놓는"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이 무게를 포기했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이 내려놓는 것에 매달려 있는 손 또한" 피로의 자리다. 우울증은 이런 현대적인 자아의 존재론이 병적으로 전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알랭 에랭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울증은 자기 존재의 피로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이 존재론적인 짐이 무한히 무거워진다. 짐의 최대화는 결국 생산성의 최대화를 목적으로 한다. - P102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다른 종류의 피로로, 타자를 위한 피로로 나타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피로 대신 무력함이라는 말을 쓴다. "근원적인 무력함"은 자아의 주도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근본적인 수동성을 말한다. 이 무력함은 타자의 시간이 시작되게 한다. 이에 반해 피로는 자아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근원적인 무력함은 어떤 능력도, 어떤 주도성도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연다. 나는 타자 앞에서 허약하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허약함 속에서 타자를 위한 욕망이 깨어난다. 타자는 자기-존재로서의 존재에 생기는 균열을 통해서만, 존재의 약점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설령 주체가 모든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도, 여전히 주체는 타자를 찾는다. 욕구는 자아에게만 해당된다. 욕망의 운행 궤도는 자아 바깥에 놓여 있다. sich의 중력은 자아를 자신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끌어들인다. 욕망은 이 중력에서 벗어나 있다. - P104

오로지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구원의 공식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마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나아가 타자를 향한 호출 혹은 "전향"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껍질을 깨는 형이상학적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05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 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 있다. - P106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의 음성은 자기 음성의 반복으로 전락한다.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속에 자본주의 정신이 예표되어 있다고 본다. 금욕주의는 축적의 강박으로도 나타나며, 이는 자본의 형성으로 귀결된다. 재산을 가지고 안장 편안히 쉬는 것, 부를 향유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오직 더 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만 우리는 신의 마음에 들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 따라서 엄청난 힘으로 분방한 부의 향유를 억압한다. 소비, 특히 사치품의 소비가 옥죄어진다. 반면 이러한 금욕주의는 심리적 효과 면에서 재화 획득을 전통 윤리의 부정적 시선에서 해방시켰다. 그것은 이윤 추구의 욕망을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 그것을 신이 원하는 것으로까지 간주함으로써 거기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 P145

세속화는 구원의 경제학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구원의 경제학은 근대 자본주의 속에 계속 살아 있다. 거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돈 모으기는 단순히 물질적 탐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축적 강박의 바탕에는 구원의 추구가 깔려 있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투자하고 투기하는 것이다. 이때 구원의 내용은 다양하다. 응고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끝없이 쌓아올림으로써 제한된 삶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부리고 싶은 소망도 있지만, 또한 권력욕도 확대와 축적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재산이라는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재산을 뜻하는 독일어 Vermogen은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ㅡ역자). 자본으로서의 재산이 증가함에 따라 능력도 증대된다. 마르크스에게도 화폐는 탈소여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즉 피투성을 폐지하고 이를 기투성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전능하다. 화폐는 사실로서 주어진 것의 전반적 해체를 초래한다. 추조차 화폐를 통해 폐기된다. "화폐를 통해서 내게 있는 것,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것, 즉 화폐가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나, 화폐의 소유자 자신이다. 화폐의 힘이 큰 만큼, 내 힘도 크다. 화폐의 속성은 나의ㅡ화폐 소유자의ㅡ속성이며 본질적 힘이다. 나인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결코 나의 개성을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하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미녀를 살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추하지 않다. 왜냐하면 추의 작용,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추의 힘이 화폐를 통해서 제거되기 떄문이다." - P146

"산업Industrie"이라는 단어는 근면을 의미하는 ‘industria‘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영어에서 ‘industry‘는 여전히 근면, 부지런함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Industrial School"은 청소년 교화 기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업화Industrialisierung는 세계의 기계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근면한 인간으로의 훈육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산업화는 기계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통해서 시간과 노동의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인간의 행태를 육체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최적화하라는 명령도 도입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768년에 필립 페터 구덴이 발표한 한 논문의 제목은 주목할 만하다. "산업 정책, 또는 주민의 근면성을 장려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고찰." - P147

기계화로서의 산업화는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게 인간을 개조하라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산업화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삶은 기계의 작업과정에, 기계의 기능 방식에 근접해간다. 노동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은 활동적 삶, 그것도 사색적 삶에서 완전히 차단된 삶이다. 그런데 사색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의 작업과정과 유사해진 인간의 삶은 오직 쉬는 시간, 일이 없는 막간, 일의 피로에서 회복하여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에 몸 바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밖에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긴장 이완‘이나 ‘마음 끄기‘는 일에 치우친 삶을 바로잡아주는 균형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연습은 무엇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 P148

한나 아렌트는 노동사회의 궁극적 목적이 삶의 필수적 요구라는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노동사회는 일이 삶의 필수적 요구에서 떨어져나와 자기 목적으로 독립한 사회, 그리하여 일이 절대적인 지위에 이른 사회이다. 일의 지배는 너무나 완벽해져서 노동 시간 바깥에는 오직 때우고 죽여야 할 시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일의 전면적 지배는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삶의 기획을 몰아낸다. 이제는 정신조차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다. ‘정신노동‘은 강제의 공식이다. 사실 노동하는 정신이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 P1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