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흐의 침묵은 우리를 환대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타인을 경청하는 대신 모든 것을 듣기만 하는 분석가의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타인을 해방시켜 자신에게로 오게 한다. 경청만이 치유할 수 있다.
카네티에 따르면 경청자의 침묵은 "작게 들리는 숨소리들에 의해서만 중단된다. 이 숨소리들은 그가 나를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나는 내가 한 문장 한 문장 말할 때마다 어떤 집으로 들어서서 번거롭게 자리를 잡는 것처럼 느낀다." 이 작은 숨소리들은 환대의 표시이며 어떤 판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격려다. 최소한의 반응이다. 완전한 모습을 갖춘 단어와 문장은 이미 하나의 판단일 것이며, 하나의 입장 표명과도 같을 터이기 때문이다. 카네티는 판단 유보와 비슷한 "숨멎기"에 대해 언급한다. 마치 모든 판단이 타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편견과 다름없다는 듯, 경청자는 판단을 유보한다.
경청의 기술은 호흡의 기술로 수행된다. 타자를 환대하는 영접은 들숨이다. 하지만 이 들숨은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를 보호해준다. 경청자는 자신을 비운다. 그는 무명의 인물이 된다. 이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친절함의 핵심이다. "그는 지긋히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인내의 수동성이 경청자의 준칙이다. 경청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내맡긴다. 내맡김은 경청자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준칙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을 막는다. 에고는 경청하지 못항다.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나르시시즘적인 에고 대신 타자에 대한 몰입, 타자에 대한 욕망이 들어선다. - P110

경청자의 배려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와 반대로 타자를 향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는 자신에 대한 배려다. 카네티는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경청하고자 한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지의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데만 모든 행동을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의 죽음이다. 나의 말, 나의 판단, 심지어 나의 열광조차도 항상 타자의 무언가를 죽음으로 이끈다. "누구나 말하게 하라. 너는 말하지 말라. 너의 말은 타인으로부터 그들의 형상을 빼앗는다. 너의 열광은 그들의 윤곽을 흐린다. 네가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너다." - P112

‘좋아요‘의 문화는 모든 형태의 상해와 전율을 거부한다. 그러나 모든 상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모든 깊은 경험, 모든 깊은 인식에는 상해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단순한 ‘좋아요‘는 경험의 절대적 소멸 단계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정신을 두 가지 종류로, 즉 "상처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과 집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으로 나눈다. 상처는 타자가 입장하는 열린 곳이다. 그것은 또한 타자를 위해 자신을 열어놓는 귀다. 자기 안에서 완전한 안락함을 느끼고 자신을 집에 가두어 놓는 사람은 아무것도 경청할 수 없다. 집은 에고를 타자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준다. 상처는 집의 내면성, 나르시시즘적인 내면성을 찢는다. 그럼으로써 상처는 타자를 위한 열린 문이 된다. - P113

페이스북에서는 우리 모두와 상관이 있고,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제들이 거론되지 않는다. 여기서 전송되는 것은 무엇보다 광고들이다. 어떤 토론도 필요로 하지 않으묘 오로지 송신자를 알리는 데만 기여할 뿐인 광고들 말이다. 타인에게 걱정과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좋아요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만 만난다. 여기서는 어떠한 담론도 가능하지 않다. 정치적 공간이란 그 안에서 내가 타인들을 만나고,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다. - P115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타인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언어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 P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나에게 옳은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것은 아니다. - P114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속임수 감지기가 그냥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예민하게 작동한다. - P117

하지만 신비에는 결코 해답이 없다. 신비는 다 풀리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면 인생은 더 진부하고 더 희망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비의 영역은 결코 설명할 수 없으니까. - P118

나를 찾아왔던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호의로 찾아왔던 사람들이다. 또 내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행동은 ‘욥의 위안자‘와 같았다. 비참한 처지의 욥을 찾아와 ‘동정‘을 보여 그를 더 깊은 절망으로 빠뜨린 친구들 말이다. - P120

단절은 지옥처럼 끔찍하지만 잘못된 관계보다는 낫다. - P1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으로 존재함은 단순히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은 짐과 부담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자신으로 존재함의 부담스러운 성질을 이렇게 서술한다. "심리학적, 인간학적 서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자아는 이미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고, 자아의 자유는 은총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늘 무거움이며, 자아는 풀려날 길 없이 자신이다." 독일어의 재귀대명사 sich(프랑스어로는 soi)는 자아가 어떤 무겁게 짓누르는 도플갱어에 묶여 있다는 것을, 자아가 어떤 무게를, 과도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아는 실존하는 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실존적 상태는 "피로"로 나타난다. 피로의 자리는 "힘겹게 들어 올리는 무게를 내려놓는"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이 무게를 포기했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이 내려놓는 것에 매달려 있는 손 또한" 피로의 자리다. 우울증은 이런 현대적인 자아의 존재론이 병적으로 전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알랭 에랭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울증은 자기 존재의 피로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이 존재론적인 짐이 무한히 무거워진다. 짐의 최대화는 결국 생산성의 최대화를 목적으로 한다. - P102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다른 종류의 피로로, 타자를 위한 피로로 나타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피로 대신 무력함이라는 말을 쓴다. "근원적인 무력함"은 자아의 주도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근본적인 수동성을 말한다. 이 무력함은 타자의 시간이 시작되게 한다. 이에 반해 피로는 자아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근원적인 무력함은 어떤 능력도, 어떤 주도성도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연다. 나는 타자 앞에서 허약하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허약함 속에서 타자를 위한 욕망이 깨어난다. 타자는 자기-존재로서의 존재에 생기는 균열을 통해서만, 존재의 약점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설령 주체가 모든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도, 여전히 주체는 타자를 찾는다. 욕구는 자아에게만 해당된다. 욕망의 운행 궤도는 자아 바깥에 놓여 있다. sich의 중력은 자아를 자신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끌어들인다. 욕망은 이 중력에서 벗어나 있다. - P104

오로지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구원의 공식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마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나아가 타자를 향한 호출 혹은 "전향"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껍질을 깨는 형이상학적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05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 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 있다. - P106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의 음성은 자기 음성의 반복으로 전락한다.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속에 자본주의 정신이 예표되어 있다고 본다. 금욕주의는 축적의 강박으로도 나타나며, 이는 자본의 형성으로 귀결된다. 재산을 가지고 안장 편안히 쉬는 것, 부를 향유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오직 더 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만 우리는 신의 마음에 들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 따라서 엄청난 힘으로 분방한 부의 향유를 억압한다. 소비, 특히 사치품의 소비가 옥죄어진다. 반면 이러한 금욕주의는 심리적 효과 면에서 재화 획득을 전통 윤리의 부정적 시선에서 해방시켰다. 그것은 이윤 추구의 욕망을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 그것을 신이 원하는 것으로까지 간주함으로써 거기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 P145

세속화는 구원의 경제학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구원의 경제학은 근대 자본주의 속에 계속 살아 있다. 거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돈 모으기는 단순히 물질적 탐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축적 강박의 바탕에는 구원의 추구가 깔려 있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투자하고 투기하는 것이다. 이때 구원의 내용은 다양하다. 응고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끝없이 쌓아올림으로써 제한된 삶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부리고 싶은 소망도 있지만, 또한 권력욕도 확대와 축적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재산이라는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재산을 뜻하는 독일어 Vermogen은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ㅡ역자). 자본으로서의 재산이 증가함에 따라 능력도 증대된다. 마르크스에게도 화폐는 탈소여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즉 피투성을 폐지하고 이를 기투성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전능하다. 화폐는 사실로서 주어진 것의 전반적 해체를 초래한다. 추조차 화폐를 통해 폐기된다. "화폐를 통해서 내게 있는 것,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것, 즉 화폐가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나, 화폐의 소유자 자신이다. 화폐의 힘이 큰 만큼, 내 힘도 크다. 화폐의 속성은 나의ㅡ화폐 소유자의ㅡ속성이며 본질적 힘이다. 나인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결코 나의 개성을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하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미녀를 살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추하지 않다. 왜냐하면 추의 작용,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추의 힘이 화폐를 통해서 제거되기 떄문이다." - P146

"산업Industrie"이라는 단어는 근면을 의미하는 ‘industria‘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영어에서 ‘industry‘는 여전히 근면, 부지런함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Industrial School"은 청소년 교화 기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업화Industrialisierung는 세계의 기계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근면한 인간으로의 훈육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산업화는 기계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통해서 시간과 노동의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인간의 행태를 육체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최적화하라는 명령도 도입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768년에 필립 페터 구덴이 발표한 한 논문의 제목은 주목할 만하다. "산업 정책, 또는 주민의 근면성을 장려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고찰." - P147

기계화로서의 산업화는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게 인간을 개조하라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산업화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삶은 기계의 작업과정에, 기계의 기능 방식에 근접해간다. 노동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은 활동적 삶, 그것도 사색적 삶에서 완전히 차단된 삶이다. 그런데 사색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의 작업과정과 유사해진 인간의 삶은 오직 쉬는 시간, 일이 없는 막간, 일의 피로에서 회복하여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에 몸 바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밖에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긴장 이완‘이나 ‘마음 끄기‘는 일에 치우친 삶을 바로잡아주는 균형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연습은 무엇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 P148

한나 아렌트는 노동사회의 궁극적 목적이 삶의 필수적 요구라는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노동사회는 일이 삶의 필수적 요구에서 떨어져나와 자기 목적으로 독립한 사회, 그리하여 일이 절대적인 지위에 이른 사회이다. 일의 지배는 너무나 완벽해져서 노동 시간 바깥에는 오직 때우고 죽여야 할 시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일의 전면적 지배는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삶의 기획을 몰아낸다. 이제는 정신조차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다. ‘정신노동‘은 강제의 공식이다. 사실 노동하는 정신이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 P1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모든 국민이 연줄 부패를 끊어줄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 건 아니다. 이미 자신의 삶이 그 연줄 부패라는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걸 "부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정"이라고 부른다. 연줄 부패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도 면책될 수는 없다. 우리 편과 반대편으로 나뉘어 편 가르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편엔 무한대로 관대하고 반대편엔 무한대로 엄격하다. 우리 편이 엄청나게 잘못한 일이라도 반대편이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금세 우리 편의 총화 단결을 부르짖으며 그 엄청난 잘못을 땅에 묻어버릴 뿐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순교자나 영웅으로 만들어버린다. - P139

공지영의 생각을 지지한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소수라는 게 다행이다. 이 소수는 스토리 상상력이 풍부한 동시에 엄청나게 착한 순정파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 공지영도 그래서 부엉이바위를 지지했을 것이다. 하긴 정치에선 늘 순정파가 문제다. 미국의 당파 싸움을 다룬 어느 책을 보니, 타협을 거부해 싸움을 격화시키는 주범으로 이 순정파를 지목했다. 그럴 법하다. 순정파는 누군가를 신화로 만들면 그 신화에 반하는 그 어떤 비평이나 비판도 참아내질 못함으로써 정치를 종교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신화는 현실 세계에 뛰어들지 않는 게 좋다. - P151

앞서 소개한 김상민의 새치기론은 표면상으론 그럴듯하긴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기득권 의식이다. 정치라는 물에서 오래 고생한 사람이 높은 자리도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몇몇 유권자들은 그 물이 담긴 통을 가리켜 ‘똥통‘이라고 하지 않는가? 똥과는 먼 삶을 살아온 사람이 똥을 치우기 위해 남들을 제치고 스스로 똥통에 뛰어드는 걸 가리켜 새치기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될 건 없지만 어째 좀 이상하다. 나도 드라마나 영화의 언더도그 스토리를 엄청 좋아하긴 하는데, 김상민처럼 그걸 곧장 현실 세계에 대입하는 건 좀 거시기 하다는 생각이 든다. - P151

"안철수는 안보와 성장의 두 축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박정희 패러다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선언의 상징이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이 2012년 2월 5일에 출간된 『정치의 몰락』에서 한 말이다. 그는 "안철수 현상의 이면에는 문명사적인 변화가 있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 이전 지식의 위계질서는 이제 물구나무를 섰어요. 맨 밑바닥에 신학이 있고, 그 위에 철학, 그 위에 과학 그리고 맨 위에는 놀랍게도 기술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그리고 안철수 같은 기술자들이 부와 명예 그리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힘을 갖고 있어요. 신학의 경우, 지배력은 고사하고 자기 영역을 방어하기도 힘겹습니다.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오랜 세월동안 축적한 경험이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세계화와 정보화로 환경 자체가 바뀌었는데, 어떻게 과거의 환경에 기반을 둔 경험이 문제 해결의 기준이 될 수 있겠어요? 당장 집에서 새로 나온 가전제품의 조작 방법을 습득하는 순서는 정확히 나이순과 반대잖아요."
그렇다. 탁월한 안목이다. 디지털 기술의 단절성은 본질적으로 아날로그형인 경험과 경륜을 조롱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구사 능력이 사용자의 나이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이 그 점을 드라마틱하게 입증하고 있다. 일상적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어른이 아이에게 배워야 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독특한 ‘빨리빨리 문화‘로 세계에서 가장 속도를 숭배하고 구현해 온 한국 사회는 늙음을 사회 진보에 역행하는 악덕으로 여기게 됐다. 지난 19대 총선 또한 늙음을 조롱하는 잔치판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선거 때만 추파를 받을 뿐 평소엔 취업 전쟁의 어두운 그늘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위로나마 갈구했지만, 위로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젊은 세대의 디지털 경험을 이끌어온 안철수가 위로와 비전을 주는 멘토로 나서면서 디지털 혁명은 정치사회 분야에까지 그 손길을 뻗치게 된 건 아닐까?
스티브 잡스가 출현하기 전에는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간극이 매우 컸다. 기술 회사는 창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직관적 사고의 가치도 몰랐는데, 음악, 그림, 영상, 컴퓨터를 모두 사랑한 잡스는 기술을 개발하려면 직관과 창의성이 필요하고 예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현실적 규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그는 이렇듯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었기에 융합 시대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 P181

사실 이 점에선 진보 언론 또한 성찰이 필요하다. 진보 언론은 정의에 집착한 나머지 미래의 비전 제시에서 보수 언론에 떨어진다. 진보 언론이 미래의 비전을 이야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마저 경제는 쏙 빼놓고 갈 때가 많다. 경제를 보수 진영에 넘겨주고 어찌 한국 사회를 이끌고 갈 수 있을까? - P1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