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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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 P122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 P154

"만약 당신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 안으로 뛰어드세요!" - P160

왜 사람들은 위압적이고 험난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려 하느냐고? 왜냐하면 자기가 처한 내적인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P160

그늘을 드리우는 첫 번째 괴물은 자기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이다. 많은 리더들이 외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이 그늘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외향성은 때로 자기 불신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아니면 단지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외적 활동으로 뛰어든다. 이것은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증후군으로 나타난다.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어떤 외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역할을 빼앗기면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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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지배 전략은 고통을 사유화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성을 은폐하여 고통의 사회화와 정치화를 가로막는 것에 주력한다. 정치화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해체된다. 공공성은 사적 공간들로 분해된다.
공적 공간과 경청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정치적 경청자 집단을 만들어내려는 정치적 의지는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킨다.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으로 해체되고, 이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 P116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우리는 경청의 윤리학을 읽어낼 수 있다. 모모의 우선적인 특징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모모가 넉넉히 갖고 있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모모의 시간은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모모가 타인들을 경청함으로써 그들에게 주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모모의 뛰어난 경청 능력을 칭찬한다. 모모는 경청자로서 등장한다. "어린 모모가 누구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경청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딱히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경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모모터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모모밖에 없었다." 모모는 그저 거기에 앉아 들을 뿐이다. 그런데도 모모의 경청은 기적을 낳는다. 모모는 사람들이 혼자서는 결코 떠올릴 수 없었을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실로 모모의 경청은 헤르만 브로흐의 환대하는 경청, 타인을 그 자신에게로 해방시키는 경청을 연상시킨다. "그럴 때 모모는 그 크고 짙은 눈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았고, 상대는 자기 안에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경청하면 혼란에 빠지거나 어찌할 줄 모르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자유롭다고, 용기가 솟는다고 느꼈다. 불행하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기쁨을 느꼈다. 또 자신의 삶은 완전히 실패했고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자기는 수백만의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고장 난 냄비처럼 다른 사람들로 금세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린 모모에게 가서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말하는 도중에 이미 자기가 자신을 아주 잘못 생각했고, 정확하게 자신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고, 그래서 자신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모모는 그렇게 경청할 줄 알았다!" 경청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 준다. 모모는 순수한 경청만으로 싸움도 조정한다. 경청은 화해시키고, 치유하고, 구원한다. "언젠가는 어린 소년 하나가 모모에게 노래를 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데리고 왔다. 모모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모모는 일주일 내내 그 새를 경청해야 했다. 그러자 결국 새는 다시 지저귀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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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들이 가장 행복하고 복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그들의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이를테면 정의로운 행동? [......] 아니면 용기있는 행동? 마치 신들도 무시무시한 대상이나 위험 앞에서 꿋꿋이 버티는 것이 윤리적으로 아름다운 행위라서 그렇게 해야 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 살아 있는 자(이 문맥에서는 신을 가리킴ㅡ역자)에게서 미덕과 영리함에 따른 행동의 가능성을 빼고 나면 [......] 사유밖에는 남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복된 활동으로서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신의 활동은 사유하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 P170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떄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 P170

"모든 인간사를 경멸하고 지혜의 한참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그리고 언제나 사유 속에서 오직 영원한 것과 신적인 것에만 몰두한다면, 대체 어떤 장군의 자리가, 어떤 공직이, 어떤 왕좌가 이보다 더 높이 보일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사람이라도 불리기는 하지만, 진정한 사람은 오직 사람으로서 고유하게 지닌 능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더 뛰어난 형태로 발전시키는 자뿐이라는 것을." - P171

거친 일을 기꺼워하는 너희,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모든 자들아,ㅡ너희는 잘 참지 못한다, 너희의 부지런함은 도피이며 자기 자신을 잊으려는 의지이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을 위해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일도 적어지리라. 하지만 너희에게는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내용이 속에 담겨 있지 않구나ㅡ게으를 수 있을 만한 내용조차 없구나!
ㅡ프리드리히 니체 - P172

아렌트가 『활동적 삶』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사유는 소수의 특권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소수는 오늘날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사상가들이 그나마 더 줄어들었다는 것이 아마도 오늘날의 특징적인 징후일 것이다. 어쩌면 사유는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에 자리를 내주고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큰 손상을 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유는 활동 과잉의 초조, 부산함, 불안함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사유는 점점 커져가는 시간 압박 때문에 그저 동일한 것만 재생산한다. 니체도 이미 자기 시대에 위대한 사상가가 거의 없음을 한탄한다. 그는 이러한 결핍에 대한 원인을 "사색적 삶이 퇴조하고, 그러한 삶이 곧잘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노동과 부지런함이ㅡ보통은 위대한 건강의 여신을 추종하지만ㅡ때로 질병처럼 날뛴다." 사유를 위한 시간, 사유 속에서 평정을 찾을 시간이 없는 까닭에, 어긋나는 견해들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전반적인 초조와 불안 때문에 사유는 깊어지고 과감하게 멀리 밖으로 나아가며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향해 뛰어오를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못한다. 사유가 시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유를 좌우한다. 이로써 사유는 잠정적이고 무상한 것이 된다. 사유는 더 이상 지속적인 것과 의사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니체는 "명상의 신령이 막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이런 한탄도 잠재울 것이라고 믿는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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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린스키는 "타협은 허약함, 우유부단함, 고매한 목적에 대한 배신, 도덕적 원칙의 포기와 같은 어두움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지만,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라고 주장한다. 그는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 보통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무에서 출발한다면 100퍼센트를 요구하고 그 뒤에 30퍼센트 선에서 타협을 하라. 당신은 30퍼센트를 번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이며, 갈등은 간헐적으로 타협에 의해서만 멈추게 된다. 일단 타협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 타협은 갈등, 타협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권력의 통제는 의회에서의 타협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사이에서의 타협에 바탕을 두고 있다. 타협이 전혀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 - P226

정상용은 공개적인 글이라 점잖게 이야기한 것일 뿐, 여론 주도층에 속하는 호남인들은 사석에선 친노를 아주 매섭게 비판한다. 노무현 정권 시절 권력 핵심에 있던 친노 그룹이 얼마나 오만하게 횡포를 부렸는지를 보여주는 증언과 실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여론 주도층과 일반 시민 사이에 격차가 나타나는 이유다. - P302

일개 지식인도 자신에 대한 언론 보도에 만족하는 법은 드물다. 기사는 학술 논문이 아니다. 자꾸 "맥락을 제거하고 특정 발언만 부각해 왜곡했다"라고 분통을 터뜨릴 게 아니라 특정 발언이 자극적이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노 정권은 조중동 프레임을 탓하기 전에 노 대통령이 스스로 만든 ‘노무현 프레임‘을 깊이 성찰해야 했다. 그걸 하찮게 여겨 계속 그대로 가려면 ‘언론 탓‘은 그만둬야 했다. 언론을 탓할 수도 없고 해선 안 될 일까지 언론 탓을 하는 건 언론 개혁 담론을 희화화해 외려 언론 개혁을 망치는 일이었고 그건 현실로 나타났다. - P306

박근혜는 보이지 않는 측근들, 즉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 비밀주의가 매우 심해 ‘철의 장막‘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베일 속에 있어 눈을 맞추기가 어렵다. 자신에게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데, 그 절대 충성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라도 자신에 대해 깍듯하게 말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계가 끝난다. 그래서 직언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박근혜에게 잘못 보일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 P373

375, 8 "이념과 국가 안보로 보면 이석기는 ‘불량 의원‘이다. 그는 반국가 단체 민혁당 활동으로 징역을 살았다. 사면 · 복권돼 의원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종북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는 북한 3대 세습은 내재적으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종북보다 종미가 더 문제라고 하며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한다. 그런 이가 국회를 활보하고 국민 세금으로 세비를 받는다는 현실에 분노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량이어도 법적으로 그는 국회의원이다. 법이 그를 보호하는 한 한국 사회는 그를 인정해야 한다. 설사 그가 악마라고 해도 그를 다루는 방법은 비악마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이석기 같은 비뚤어진 이념 운동가가 넘볼 수 없는 자유 · 민주 사회의 강점이다." (중략)
재미있지 않은가? 이석기 의원직 제명 반대는 야권에서도 진보파들이 하는 주장이다. 피상적인 편 가르기 논리로만 보자면 김진은 진보파다. 노무현 정권의 위선과 나꼼수의 막말에 대한 비판은 주로 보수파가 하는 주장이다. 이 또한 피상적인 편 가르기 논리로만 보자면 김진은 보수파다. 그런데 이런 피상적인 편 가르기 논리가 타당한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정작 이념적 원칙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이석기 의원직 제명 반대는 보수파가 더 나서야 하는 일이고 노무현 정권의 위선과 나꼼수의 막말에 대한 비판은 진보파가 더 나서야 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김진의 이석기 의원직 제명 반대가 돋보인다. 평소 그의 박정희 존경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는 진정한 보수 논객이다. 그의 칼럼에 동의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도 그의 칼럼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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