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짝짓기가 일단 끝나고 나면 커플이 유지될 만한 명백한 필연성은 없다. 이는 확실히 대부분의 포유동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동물행동학 연구가 전체적으로 보여주듯이 포유동물은 대부분 짝짓기 후에 재빨리 갈라진다. 대체로 함께 모여 살아가는 영장류의 경우에도 이성애가 사회조직의 밑바탕에 어떤 형태로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은 당최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 생식은 이성애적이지만, 사회생활은 지배, 경쟁, 협력, 그리고 제법 엄밀한 기능성에 따라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대개의 경우 이성애 커플은 집단의 조직을 위한 기본 세포가 아니고 새끼의 교육에 필요하지도 않다. 따라서 이성애는 동물사회를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원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아마 발정기 동안 개체들을 하나의 성에서 다른 성 쪽으로 몰아가는 일종의 ‘본능‘이 있을 텐데, 물론 이 행동은 이성애적이다. 그러나 사실 이성애를 토대로 사회를 건설한 동물은 정확히 인간밖에 없다.

뵈브 당통은 우정을 친구보다 훨씬 더 존중한다. 이 점에서 그는 대중의 감탄을 받을 만하다. 그는 복음서를 걸고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기를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이 맹세는 무조건적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정은 친구를 초월한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것과는 반대로, 사실은 남색이 언제나 교회가 규정한 주요 범죄이지는 않았다. 12세기까지 참회의 규정에는 남색이 그다지 언급되지 않았거나, 당시 이 행위에 대해 정해진 형벌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남색은 마땅히 화형에 처해야 할 죄악 중의 죄악은 아닐망정 주요한 침해로 간주되었다.

첫째, 서양에서 이성애 문화와 심지어 이성애에 대한 예찬은 12세기에 출현하는데, 이는 뒤비와 르고프 그리고 몇몇 다른 이가 막연하게 예감한 바이지만, 그들에게 이성애는 필시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이성애를 문제화하지 않았다.
둘째, 이성애 문화는 동성사회성의 문화를 대체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사들의 성적 관습이 무엇이건 그들의 수많은 저항을 야기하는데, 이 저항은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괄목할 만한 것으로 실재하게 된다.
셋째, 이 새로운 이성애 문화에서는 두 가지 현상, 즉 한편으로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남색에 대한 정죄가 병존하면서 상관관계를 맺기 마련인데, 전자는 허울일 뿐이고 후자는 종교에서나 세속에서나 갈수록 더 비난받는다는 점에서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이 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16세기에 궁정풍의 문학은 빈번히 패러디되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예는 <돈키호테>이다. 사랑의 책들로 인해 멍해지고 궁정풍의 몽상에 절은 이 늙은이는 상상의 애인, 매우 유명한 토보소의 둘치네아를 찾아 떠난다. 누구라도 이보다 이성애 문화에 더 충실한 주인공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활력은 기본적으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구성하는 남성 커플로부터 생겨나고, 많은 점에서 그들은 팡타그뤼엘과 파뉘르주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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