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고용, 표준적인 가족상, 정해진 궤도로 운행하는 인생, ‘남자다움‘, 지배적인 남성성 등의 ‘정규성=정답‘에서 탈락하고 이탈한 다수자 남성 중 일부. 이들이 약자 남성이다. - P72

그렇다면 차라리 타인의 인정을 기대하지 말고, 좀 더 능동적으로 당사자 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자신을 소수자, 사회적 약자로 보지는 않겠지만 비정규 남성(약자 남성)임을 인지해야 한다.
 인정에서 자각으로. 그리고 책임으로. 약자 남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이러한 의식으로 각성해야 한다.
 비정규적이고 주변적인 남성들은 어쩌면 남성 특권에 보호받은 패권적인 ‘남자다움‘과는 다른 가치관, 즉 성과주의, 능력주의, 우생학, 가부장제 가치관을 대체할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가치관을 발견해낼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돈도 없고 무지하고 무능한 남성들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공격하는 행동을 극복하고, 행복하고 착실하게 살아간다면 그것 자체로 혁명적인 실천이 아닐까?
 이러한 생활 방식,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는 같은 길을 뒤따라올 남성들에게 작은 빛과 용기를 줄 것이다. - P77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삶에 매우 중요할지도 모른다. 일만 하지 말고 취미생활을 즐기고 주변에 관계를 쌓아 조금씩 인간관계를 확장한다. 그리고 ‘남자다움‘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나만의 생활 방식을 탐색해 간다. - P102

회사 일에 열정을 불태우는 남성상, 가부장적인 아버지상,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지적인 육아남, 사회적 기업가의 이미지만 주어진다. 오타쿠, 초식남 등의 모델도 있지만, 다수자 남성들에게도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그럭저럭 즐겁고 행복한, 그리고 폭력적이지 않은 인생 모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남성들에게도 해방감이 필요하다. - P107

일상에서 적절하게 자신을 돌보는 훈련과 연습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자신을 방치하거나, 눌려 있던 감정이 폭발해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게 폭력적인 공격을 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남성의 ‘폭발‘ 문제다. 평소에 꾹 참고 담아두다가 한 번에 폭력을 폭발시킨다. 어쩌면 하고 싶었던 말을 애써 누르고 참다가 ‘고백‘하는 일종의 ‘고백주의‘와 표리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터지기 일보 직전인 풍선의 바람을 조금씩 빼듯이, 일상의 관계에서부터 조금씩 감정과 불안을 꺼내고 얕지도 깊지도 않은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한꺼번에 모든 상처를 고백하고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꺼내어 공유한다. 이런 식으로 남성성을 부지런히 유지보수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 흘리기, 약함을 받아들이기, ‘남자답게‘ 참지 않고 싫으면 싫다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분명하게 말하기. 나보다 약한 사람을 감정적으로 대하기 전에 나의 상처받은 목소리와 내면의 감정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기.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P158

아무도 죽이지 않고, 자기 자신도 죽이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닌 무익하고 쓸모없는 일을, 죽음이 오는 그날까지 계속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의 ‘헛수고‘이자 급진적인 인내이며, 우울하고 시시한 인생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약자 남성의 존엄을 안고…….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삶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살에 에너지를 쓴다는 게 쓸데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생명이 소중하다거나 그들의 인생이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살인도 쓸데없기 때문이다. 자살이 쓸데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는 이런 소극적인 의미밖에 없다.
 그리고 이걸로 충분하다.
 온갖 구원과 인정에서 외면당하고 ‘괴로움‘ 속에 계속 머무르면, 이 괴로움은 남자의 자존심이 아니라 약자 남성의 존엄(dignity)으로 거듭난다.
 약자 남성의 존엄(dignity of incel).
 비록 사랑도 없고, 타인의 인정도 없고, 자기 돌봄도 없고, 남성 동성 친구들 간의 형제애가 없어도 ‘그냥 살기‘(조르조 아감벤)를 완수할 수 있다.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를 미워하지 않고, 인정 욕구가 비뚤어져 다크 히어로가 되지도 말고, 바냐 아저씨처럼 작은, 그래서 위대한 존엄을 끝까지 지켜내자.
 언젠간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을 수 있다든가, 속마음을 다 말할 수 있는 친구들과 취미를 함께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다든가, 그런 있지도 않은 희망을 꿈꾸느라 현실을 속이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그저 지루한 이 일을, 이 인생을,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죽이지도 죽지도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뤄내자.
 여기에도 존엄은 있다. 분명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내면에서는 이를 초월하는 ‘한낱 인생‘의 존엄이 있다. 분명 있다. 있어야만 한다.
 3장에서도 설명했지만, ‘가짜 적‘을 오인해 미워하거나 싸워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사회 구조에서 진짜 ‘적대성‘을 찾아내고 멈추지 않고 싸울 의지다(인셀 레프트의 길). 하지마 혹시 이마저도 좌절된다면, 완전히 쓸데없고 시시한 이 인생을 죽을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적으로 착각하고 절대 증오하지도 죽이지도 않는 것, 이 또한 약자 남성의 작은 존엄을 지켜나가는 일이다.
 이 인생을 ‘허무에게 바치는 제물‘(소설가, 시인 나카이 히데오의 표현)로 삼는 것이다.
 이 또한 인셀의 내면에 있는 ‘악‘,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에 나온 그 ‘악‘과 용감하게 맞서고 싸우는 방법이 아닐까? - P204

이 세상의 남성들은 자신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비폭력적인 호모소셜 우정과 취미를 공유해야 한다. 서로를 돌보는 관계만 있어서는 부족하다. 우정만 있어도 부족하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자 남성들이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제대로 절망하는 것이다. 이 절망 위에 올라서면 두 가지 길이 생긴다고 지금의 나는 믿고 있다. 나머지는 각자의 실존적 결단 문제다.
 한쪽에는 이 쓸모없는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고, 계속해서 ‘노동‘하는 ‘그냥 인생‘을 완수하겠다는 존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가짜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닌, 쓸모없음을 강요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가 있고, 사회 변혁으로 가는 실천이 있다.
 전자는 아무리 허무해도 일상의 일에 계속 전념하고, 이 허무를 타인과 자신을 향하는 폭력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4장에서 나온 바냐 아저씨의 길이자, ‘인셀의 품격‘이라 할 수 있는 비폭력적인 길에 해당한다.
 후자는 약자 남성이 강요받는 굴욕에 직면한 뒤 ‘절망하는 용기‘(지젝)를 안고 사회를 향한 분노를 점화시키는 것이다. 4장 마지막에 나온 인셀 레프트의 길에 해당한다. 『바냐 아저씨』에서는 아스트로프의 길에 가깝다.
 약자 남성들은 두 가지 길을 동시에, 왔다 갔다 하며, 모순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만약 아스트로프의 길(인셀 레프트)을 가지 못한다고 해 보자. 허무주의에 빠져 이상주의 사회로 바꾸고자 하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생활을 버티고, 그 누구도 죽이지도 증오하지도 않고, 자신을 죽이지도 않고, 평화롭게 조용하게 멸망하는 것, 허무한 인생을 완주하는 것, 남아 있는 길은 이것뿐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어딘가에 불지르는 길을 고르지 않는다면.
 하지만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수치와 굴욕이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겨우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바로 이 순간, 자기 부정으로 향하려는 수치심과 굴욕을 사회적 분노로 바꿔보자. 사회운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생각은 그만하고 행동하라는 말도 아니다.
 내 안의 굴욕과 분노를 공적인 장소에서 작은 말로 표현해 보자. 아주 짧은 말이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타인을 위해, 이 사회가 바뀌길 희망하며 시도해 보자. 그렇게 투쟁하는 것이다.
 지금의 내 안에는 둘로 분열된 감정이 있고, 세 가지 길이 있다. 이 감정들은 모순된다. 하지만 우선은 이 모순과 당혹감에 머물러 있자. - P216

모순에 찢겨 나가면서 이 시시한 인생을 살아가자.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 수 있다‘(오쿠다 다미오).
 꿋꿋이 살다 죽음이 오는 그날까지, 긴긴 시간에서 오는 지겨움을 견딜 수 없다 해도, 잔여물 같은, 덤 같은, 이유도 의미도 없는 시시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남도록 하자! - P218

그러나 나는 실제 인생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별 볼 일 없고, 부유하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 어떻게 하면 빈둥빈둥 한가롭게, 크게 무리하지 않고 그럭저럭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 죽을 수 있을까? - P220

화려하지도 훌륭하지도 않고,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인생이어도, 매일 숱한 약함과 우둔함에 괴로워하고 스스로 한심하다고 줄곧 고민하는 무딘 인생이어도, 가끔 ‘궤도‘에서 이탈하는 불안정한 인생이어도, 그럭저럭 즐겁고 재미있게, 그럭저럭 남들에게 잘해주면서 살다가 죽고 싶다.
 이런 걸 매일 소소히 바라면서 최대한 열심히 살려고 한다. 물론 가끔은 게을러지거나, 늘어지거나, 창피해하면서. - P221

현재를 살아가는 남성들 주변에는, 흔히 찾을 수 있는 인생의 모델,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델이 의외로 없는 것이 아닐까?
 왠지 이런 것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극단적인 마초의 ‘남자다움‘, 가부장적 아버지상, 자기 계발로 승자가 되려는 남성상, 자유주의 성향의 똑똑한 남성상……. ‘남성의 인생 모델은 있긴 있지만, 더 선택지가 다양해지고 ‘이야기‘가 늘어나면 좋겠다. 모델이 더 많아지고 다양해지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음지에 사는 별 볼 일 없는 중장년 남성들이 모여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서로를 돌보고 약점을 공유할 수 있다. 호모소셜도 형제애도 아닌 남성 간 관계가 더 많아지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남성들은 ‘남자답다는 갑옷‘ 안에 상처 입은 마음을 숨겨두는 것 같다.
 필요한 돌봄과 적절한 처치 없이 지내다간 ‘남자의 상처‘를 아내나 어머니, 젊은 여성 같은 ‘여성‘에게 치유받길 기대하거나 무의식중에 강요하게 된다.
 자신을 방치하거나 쌓아둔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타인과 자신을 폭력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상에서 적절한 자기 돌봄을 훈련하고 연습해두는 일은 중요하다.
 일상의 소통에서 솔직한 감정과 불안을 조금씩 꺼내거나, 미리 김을 좀 빼거나, 얕지도 깊지도 않은 관계 쌓기가 중요한지도 모른다.
 즉, 고통과 상처 일부를 조금씩 꺼내 일상에서 공유하고, ‘남자‘로서의 생활을 부지런히 유지해가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약함을 받아들이고, ‘남자답게‘ 참지 않고, 싫으면 싫다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
 이런 소박한 행동이 의외로 중요하지 않을까?
 둔하고 별 볼 일 없어도, 다시 오지 않을 이 인생에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상처와 약함을 꾹 눌러 담는 대신 껴안을 수 있는 생활 방식을 조금씩 일상에서 실천해 보고 시행착오를 겪고 싶다.
 그때가 오면 가끔은 사회적인 문제도 고민해 볼 수 있기를, 행동할 수 있기를.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이 책이 각자의 길을 찾는 데 약간의 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기쁘겠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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