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내동생이 보는 나.
이 글은 내가 여기에 올리려고 내 동생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나에 대해 써 달라고. 이에 내 동생은 며칠 뭉그적 거리다가 방금 이 장문의 글을 보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친구인 내 동생이 나에 대해 풀어놓은 썰을 여기 토시하나 고치지 않고 옮겨 본다.
플라시보라는 필명으로 여기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나의 언니다.
내게는 그런식의 필명이나 이름보다는 그냥 '언니' 라고 부르는것이 더 익숙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언니나 오빠에게 이따금 너라고 하거나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언니라는 대명사만 열심히 사용해왔다.
아마 여러개를 쓰면 혼동될것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 사람을 한가지 호칭(이름)으로 부르는 것조차도 헷갈려서, 항상 남을 엄한 딴 이름으로 부르는 실례를 저질러댄다. 하지만 '언니' 라는 호칭만큼은 헷갈려본 적이 없다. 워낙 어린시절부터 불러댔으니 헷갈릴수가 없다.
언젠가, 초등학교때 언니가 내게 서글픈 얼굴로 '나는 널 부를때 이름을 부르지만 넌 날 부를때 이름이 아니라 '언니'라고 부르더라. 나는 언제까지고 너한테 이름이 있는 존재가 아닌 그저 언니일수밖에 없겠지' 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언니에 비해 지능이 현저하게 딸렸던 나는 '그게 뭐 어쨌다고 저런 얼굴을 하는걸까.' 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지금은 언니가 그때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건지 잘 알고있다.
언니는 내게 있어서 한 사람의 개인이나 인격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나의 언니' 라는 입장만 기묘하게 두드러져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그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릴때부터 집밖을 잘 나가지 않았고, 항상 붙어있었다. 놀기도 우리끼리 놀았고, 싸움도 우리끼리 했고 말썽이나 장난도 늘 같이 쳤다. 내 유년시절의 기억 중 꽤 중요한 부분을 언니가 차지하고 있고,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년시절의 언니는 내게 있어 부모보다 더 큰 존재였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부모의 영향력조차 희미하게 할 만큼, 언니가 뿜어대는 에너지는 굉장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언니는 항상 아름답고 오만하고 도도하고 당당했다. 어린애 치고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생각이 확고했고, 또 그만큼 고집도 셌다. 눈치도 기묘하게 빨라서, 언제나 어른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귀신처럼 알아채곤 했다.
내가 전혀 이해할 수도, 아니 그런게 존재하는지도 몰랐었던 '어른들만 공유하는 코드' 를 언니는 감지할 수 있었기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도 못잡고있던 내 앞에서 언니는 슬퍼하거나 화내거나 흡족해하거나 기뻐했다. 대개는 슬퍼하고 화를 내는 쪽이었던 것 같다.
반면에 나는 항상 느긋하고 차분했다. 침착한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언니는 이런 나를 답답해하고 짜증을 내면서-지금은 그 심정 백번 이해한다- 많은 것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언니라는 필터를 통해 '어른들이 공유하는 코드', 다시말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해의 기준은 말할 필요도 없이 철저하게 언니에게 짜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나의 어린 시절에 언니가 끼친 영향력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언니는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내가 지식이나 지혜 등을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같은 존재였다. 나는 내 힘으로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시절부터 언니에게서 내가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말랑말랑해진 지식을 수혈받았다.
언니는 그걸 이용해 나한테 이상한 구라도 많이 쳤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사실은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고아였다는둥의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상한 구라들은 꽤 극적이었고 문학적인 허구성을 갖고 있었다. 언니는 속아넘어간 나를 보면서 '이야기꾼의 재미와 보람' 을 실컷 느꼈던 게 틀림없다.
최초로 내가 언니를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수단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감정을 지닌 한 명의 사람으로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심하게도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이후였다. 나는 지능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꽤 늦된 인간이었고 언니가 가진 고뇌나 슬픔을 이해하기까지 그 정도의 세월이 걸린것은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간의 불화는 내가 감정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아가도록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그때까지 집에서의 내 입장은 '항상 누군가 보살피고 보호해줘야 할 막내' 였지만 나이를 그쯤 먹고 나니 나와 가족들, 양쪽 모두 변하기 시작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몰개성한채였던 나는 그 때를 기점으로, 정신적으로 언니와 분리되면서 내가 누구이고 뭘 해야 하며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를 찾기 시작했다. 언니와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과정에서 내 눈에 비친 언니는 어린 시절에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거면 그저 그게 뭐든 죄다 진리겠거니 생각되었던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나의 생각과 틀린 의견을 말하고, 때로는 잘못된 지식을 주워섬기고, 감정에 북받쳐 실수를 하기도 하는 그냥 보통의 사람이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정신적으로 언니의 복제물처럼 살아왔었던 나로서는 정말 어떻게 그렇게까지 까마득하게 몰랐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런 것들이 보이질 않았었다.
그때의 실망감과 허탈감은 생각보다 그다지 굉장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간신히 '언니보다 뭔가 나은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나 자신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일단 시작하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게 아마 그런 종류의 일이었던 것 같다. 분리가 시작되자 그것은 되돌려지긴 커녕 점점 더 가속이 붙을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떨어져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재회할때마다 언니와 나는 서로가 많이 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내가 느끼기에 언니는 많이 둥글어졌다. 언니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꽤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다. 자신을 깎아서 세상의 모양에 맞추기보다는, 세상의 모양을 자신에게 맞게 깎아내고야 말겠다는 거의 불가능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고있는 지금의 둥글둥글한 언니가 되기까지, 아마 많은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언니는 아직도 나름대로 세상과 치열하게 맞짱뜨며 '내가 이 세상을 언제 한번 갈아엎어 주마' 라고 되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니의 그런 면을 존경한다. 굉장한 파워와 에너지를 갖고, 항상 배짱과 기개를 발산하는 언니를 보면서 나는 어릴때부터 감히 질투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감복하곤 했다.
언니는 끊임없이 자기 입으로 자기의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게 정말이 되는건 썩어빠진 일등지상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기준을 대입시켰을때 뿐이다.
내가 보기에 언니의 머리는 넘칠 정도다. 차라리 조금 더 머리가 나빴으면 딱 좋겠다 싶을 지경이다. 언니와 내가 서로에 대해 갖고있는 열등감은 뿌리가 깊다. 내 생각에 나는 지능의 기계적인 측면이 발달해있고, 언니는 그런 것을 제외한 실용적인 모든 것에 머리가 정말 아찔할 정도의 속도로 팽팽 돌아가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가 갖고있는 것의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만 상대의 모습에서 찾아내곤 언제나 그걸 서로 부러워하곤 했다.
언니는 자신의 머리로 인해 세상을 교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이란 수단은 모두 갖춘 셈이지만, 나는 언니가 교활해지는 것을 그다지 목격하지 못했다. 그런 쪽으로 머리가 좋아지면 오히려 진짜 교활해질 것은 내쪽일지도 모르겠다. 주위 사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언니가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고 자꾸 상기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가 정말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할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미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성적과 기억력 따위만으로 사람의 지능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있기 때문이다.
언니가 갖고있는 또하나의 거대한 특성 중 하나는 외형적인 것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어릴때부터 나는 외모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런거에 신경을 쓴다는 게 은근히 경멸스럽기도 했다. 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것은 이곳저곳에서 인용되다 못해 이제는 본래 의미조차 희미해져가는 '사어' 나 다름없는 문구였지만, 또 그렇게 많이 인용되기 때문에 그게 진리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만드는 글귀였다.
세상이 반드시 그런 식으로만 돌아가진 않는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간신히 이해하고 있다. 요즘 들어서 드는 생각은 '많이 인용되어 진리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문구일수록 그것이 실천되기는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라는 것인데, 이를테면 '사랑은 영원한 것' 이라든가 '부모님께 순종합시다' '학생은 공부만 열심히' 등의 말들이 그에 해당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말들에 속아넘어갈 정도로 가공할 순진함을 갖고있었고, 피암시성도 강한 편이라(한마디로 귀가 얇아서) 반복해서 주입되는 모든 것에 약했다. 사랑이 영원한 것인줄로 알았고, 부모님께는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학생은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하며, 진정한 아름다움인 내면의 미를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실천하며 살 수는 없다. 살기 위해서는 때로 저런 것들을 거스르거나 기호에 맞게 재단하여 자기 식으로 인용해야 할 때가 많다.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나로서는 그런 것 따위는 꿈에도 몰랐지만, 나와 같이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하던 언니는 신기하게도 저런 구호의 허무함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뒤늦게 저런 뻔한 진리들을 부정하느라 끙끙대는 동안, 언니는 어릴때부터 구축해온 미적 감각의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다듬고 있었다.
뭣도 모르는 채, '미대 중에서도 제일 경쟁율이 센 시각디자인을 지망하면 취직이 잘되겠지' 라는 근거없는 망상으로 디자인과에 입학한 나는, 자신이 오로지 줄기차게 만화만 그려온 덕분에 미에 대한 기준이나 감각이 턱도 없이 모호하다는 것을 깨달을수밖에 없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까지 언니가 나름대로 정교하게 쌓아왔던 미적 감각 덕분에 상당히 많은 득을 봤다. 그것조차 없었더라면 나는 디자인을 대하면서 기초에서부터 공황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빚 때문에 나는 아직도 언니에게 '디자인을 해볼 생각 없냐' 고 종종 권유한다.
예쁜 물건, 아름다운 환경, 잘 다듬어진 외모 등의 언니가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추구해왔던 가치들을 지금은 내가 고스란히 흉내내고 있다. 언니로서는 좀 기분나쁜 일일지도 모르겠다만은 어쩌면 이제 간신히 동생과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서 한편으론 기쁠지도 모른다. 우린 어쨌거나 만나면 수다로 회포를 풀고 서로의 의미를 공고히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는 아직도 많은 면에서 서로 담쟁이덩쿨마냥 얽혀있다. 이정도로 가까워지는덴, 업보도 보통 업보가 작용한 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떨어져 있지만 관계가 희미해질 징조조차 안 보인다.
이상이 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한 얘기이다. 아무래도 가족사를 읊다가 보니 말할수없이 장황해져버렸지만, 이런 걸 쓰면서 언니와 나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볼 계기가 되어 나름대로 즐거웠다. 어떤 사람들이 이 글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개인적이고 길기만 한 재미없는 고백을 늘어놓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꼭 덧붙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