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그냥 제멋대로 살도록 건드리지 않고 놔 두는 것을 동시에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럭저럭 별탈없이 살고 있다면 우리는 대개 사랑받지 못 하고 있는 셈이다.
연인들 사이가 공공연한 적대감 이상으로 잔인한 상황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는 가능성조차 고려해 보지 않는 것일까.)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세워진 혐오의 벽을 감싼다.
모든 농담에는 차이와 실망의 경고가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뇌관이 제거된 차이라서 학살의 필요성을 못 느끼며
그럭저럭 눈감아 줄 수 있는 차이이다.
그녀에게 별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과연 설득시킬 수 있을까.
美란 결국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美는 다른 사람을 유도해서 도저히 반박하지 못할 결론에 도달하는 수학공식과는 다르다.
완벽함에는 독재의 요소가 숨어 있고, 보는 사람에게 창조적 역할을 박탈하면서,
독단적이고 확고부동한 진술로 자신을 강요하는 피곤한 요소가 들어 있다.
진정한 美는 결고 측정될 수 없다.
진정한 美는 추(醜)와 위태로운 희롱을 벌이고 아름다움과도 대결을 불사한다.
진정한 美는 수학적 조화의 규칙에 편안하게 안주하지 않으며 추(醜)에도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그런 곳에서 매력을 끌어 온다.
진정한 美는 추(醜)와 계산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과 취향이다.
어떤 재앙이 닥칠 때면 어김없이 우리는
왜 그처럼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형벌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려고
일상적인 인과적 설명을 넘어선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 사건이 압도적이면 압도적일수록
우리는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그것에 부여하려 하고,
일종의 심리학적 운명론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