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흑백의 방이라는 객실에 손님을 초대하여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 왔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리고."

사람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밝은 내용이든 어두운 내용이든 상관 없이. 그리고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에,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꾼이 찾아온다.

이이치로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히시야’의 중매로, 좋은 자리인 것 같았지만 본인의 뜻에 맞지 않는 데가 있어 무산되었다. 본인은 물론이고 미시마야로서도 깊이 고민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인연이 없었을 뿐이다――.

네리키리
고운 팥소에 참마 가루나 찹쌀가루를 섞어 반죽한 것에 여러 가지 소를 넣고 다양한 모양으로 만든 생과자

괴담의 맛은 거의 없고, 굳이 말하자면 시어머니가 귀신보다 무서웠다는 내용뿐이다.

고슈 가도甲州街道
에도 시대의 5대 가도 중 하나. 에도 니혼바시에서 고후甲府를 지나 시모스와下諏訪까지 가는 길이다

임신 5개월째의 술일부터, 임신한 여성이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흰 천(복대)을 배에 두르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십이지 중 술戌에 해당하는 동물인 개가 순산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사평간사大師平間寺
고보 대사弘法大師를 모신 절. 액운을 막아 주는 것으로 유명하여 전국에서 참배객이 찾아온다

사카만주酒饅頭
밀가루나 쌀가루 등으로 만든 반죽에 팥을 넣고 쪄서 만드는 과자를 만주라고 하는데, 사카만주는 밀가루에 술을 넣고 반죽하여 만든 것을 말한다

누라리횬
붙잡을 곳이 없이 매끈한 요괴. 요괴의 총대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간바리뉴도
화장실에 나타나는 요괴로 입에서 새를 토하는 대머리의 모습이라고 한다. 섣달 그믐날에 ‘간바리뉴도 호토토기스’라고 외면 이 요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도 한다

기류桐生 종이
기류는 군마 현 남동부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종이는 예로부터 두껍고 튼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현재도 기류시市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에마키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을 펼쳐 가며 차례차례 나타나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그림책

내심 무릎을 쳤다. 정사――동반 자살. 이 세상에서 함께할 수 없는 남녀가 내세를 맹세하며 같이 죽을 때, 특히 물에 빠져 죽을 때는 시체가 떠내려가다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천이나 끈으로 손목을 묶곤 한다. 눈앞에 있는 남녀의 모습처럼.

이노코모치
음력 10월 첫 번째 해일亥日 해시亥時에 햇곡식으로 떡을 빚어 먹는 이노코 축제亥の子の祝い가 있는데, 이노코모치는 이때 먹는 떡이다

"오쓰기 씨, 빨랫대로 뭘 하시려고요?"

신고는 이 집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별명인 ‘오쓰기 씨’는 경칭이다‘오’는 존경이나 공손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 ‘쓰기次’는 ‘다음’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요미노이케 연못을 둘러싼 괴이와 위협의 모든 시작이었다.

*

끌어올려 보니, 여러 가지로 기묘한 점이 눈에 띄는 익사체였다.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요리키与力
에도 시대에 치안을 담당하는 여러 부서에 소속되어 하급 관리인 도신을 지휘하며 상관의 업무를 보좌하던 직책
도신同心
요리키 밑에서 서무나 경찰 등의 업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

간평
농작물을 수확하기 전에 미리 작황을 조사하여 소작료를 정하는 일

상사上士
무사의 신분 중 하나. 상급 번사藩士로, 무사의 가문을 상사, 평사, 향사 등으로 나누었을 때 가장 높은 지위다. 말을 타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騎士라고도 했다

사쿠지作事
막부 관련 건물을 건조, 수리하는 일을 맡았던 조직

에도 시대의 무사는 ‘대소大小’라고 부르는 길이가 다른 두 자루의 칼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이중 길이가 긴 것을 대도, 또는 타도打刀라고 하고 길이가 짧은 쪽을 와키자시脇差라고 하였는데, 편의상 대도와 소도로 번역하였다.

조스이
채소, 된장 등을 넣고 끓인 죽

편안한 생활은 구자키 번에는 있고 에자키 번에는 없다. 그러면 구자키 번에 없고 에자키 번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이 아닌 자’였다.

‘야마반쇼山番所
번이 소유하고 있는 산림을 감독하는 관청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

시루시반텐印半纏
옷깃이나 등 부분에 상호, 이름 등을 물들인 한텐. 주로 무명으로 만든 짧은 웃도리로, 직인들 사이에서 사용하거나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지급하여 입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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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자세, 경학 위주의 공부,
사색을 통한 원리 탐구,
<소학> 중시,
근본을 앞세우는 원칙적 자세………...
조광조가 몰고온 바람은젊은 유생들을 매료시켰다. - P81

문묘란 공자를 받드는 사당으로,
공자의 주요 제자들과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유(名儒)들이 종사된 상태였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유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는 의미죠. - P82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으로 세종 15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고종 때 중건되었다. 
북쪽은 음기가 많다 하여 평소에는 닫아두는데남곤, 심정, 홍경주가 이 문을 통해 들어가 중종과 모의하여 ‘기묘사화‘를 불러왔다. 461년  뒤 신무문 안에 주둔하고 있던 신군부들은 쿠데타를 모의하여 12.12 사태를 일으킨다. - P90

오로지 근본에 힘쓰고 원칙과 정도만 걸어온 인생이다. - P121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집같이 근심했네.
하얀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 비추리라.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조광조 趙光祖 - P123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마라.
먼 길가기 어려우니라.

하고는 술에 탄약을 마셔 세상과 작별했다.
향년 38세.
과거에 급제하여 정치개혁의 길에 들어선 지 4년 남짓 만의 일이었다. - P123

공신, 대신, 왕자, 부마들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갖은 사치를 행했지만,
백성들은 그만큼 땅에서 유리되었으며,
상당수는 도둑이 되어 세상을 불안케 했다. - P131

결국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였고,
중종의 실패였다. - P133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2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시 불타고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복원하면서 새로 지었다. 중종은 주로 창덕 궁에서 지내고 가끔씩 경복궁을 이용하였다.
궁 안에서는 연이은 옥사로 인해 비명소리가  잦았고, ‘동궁작서의 변‘ 같은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 P134

비방이 산처럼 쌓였는데도 끝내는 용서 받으니
내 인생에 다시는 성은에 보답할 길 없겠구나.
열번을 높은 재 오르노니 두 줄기 눈물이요
세 번을 긴 강을 건너노니 홀로 애통하여라.
아득한 높은 봉우리엔 구름이 먹빛이요
망망한 넓은 들엔 큰 비가 쏟아지누나.
해질녘에 임해 동성 밖을 들어서니
쓸쓸한 초가집엔 대나무 문을 달았구나.

정광필 - P169

정릉
중종의 능으로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처음에는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묻혔으나 문정왕후의 질투로인해 이곳으로 천장되었다. 문정왕후는 사후 이곳에 같이 묻히고 싶어했지만 터에 문제가 많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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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읍성
경남 진해시에 있는 웅천읍성은 세종 16년에 왜구의 침탈로부터 민가를 보호하기 위해  축성한 것이다. 이후 3포를 왜인에게 개방하면서 이웃한 제포 왜인부락과의 경계선 역할도 하였다. 중종 5년 3포왜란시 함락되었었다. - P10

조광조 유허비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있다. 조광조는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불과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았다. 
이 추모비는 현종 8년에능주 목사가 조광조를  기려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앞면에는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뒷면에는 유배 내력이 적혀 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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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로구에 자리한 종묘는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헌하는 곳으로, 왕조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곳이다. 태조 때 처음 건립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는 바람에 광해군 때 새로 지었다. 군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종묘에 부묘되지 못했다. - P10

함양 학사루
유자광이 시를 지어 벽에 걸어두었는데 김종직이 이를 떼어내버림으로써 김종직과 사람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무대가 바로 이곳 학사루다.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건물은 197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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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 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묘,  역모죄로 능지처참된 후 7일간 효수되어 있었던 까닭에 제대로 장사지낼 수는 없었으리라.  남이가 실제 이곳에 묻혔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이곳을 남이 장군의 묘로조성해놓았다. 춘천 남이섬에도 남이가 묻혀 있다는 전설을 가진 돌무더기가 있었다. - P8

白頭山石磨刀畫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앤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

남이 - P26

수령칠사란
수령의 임무를 명문화한 것으로
농상을 성하게 할 것(農桑盛)
호구를 증가시킬 것(戸口曾)
학교를 일으킬 것(學校興)
군정을 바르게 할 것(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할 것(賦役均)
송사를 간명하게 할 것(詞訟簡)
간활을 없앨 것(奸滑息)
이상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 P88

망원정
마포구에 있는 이 정자는 애초에 세종이 효령대군을 위해 지어준 것으로, 후에 월산대군이 넘겨받았다. 성종은 형 월산대군을 위로하기  위해 자주 이곳을 찾았다. 1989년에 복원되었다. - P90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월산대군 - P132

통명전의 샘과 못
수통을 구리로 설치했다가 대가들의 반발로 인해 철거하고 돌로 다시 만들었다. 이렇듯 소소한 것까지 반대하고 나서는 대간의 활동은 뒷날 연산군으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강력한 문제의식을 갖게 만든다. - P140

선릉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성종의 능이다. 성종은  세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마지막 왕비인 정현왕후 윤씨만 성종 옆에 동역이강 양식으로 함께 묻혀 있다.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는 파주에, 폐비된 윤씨는 경희대학교가 있는  회기동에 묻혔다가 1967년 서삼능 자리로 옮겨졌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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