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자세, 경학 위주의 공부,
사색을 통한 원리 탐구,
<소학> 중시,
근본을 앞세우는 원칙적 자세………...
조광조가 몰고온 바람은젊은 유생들을 매료시켰다. - P81

문묘란 공자를 받드는 사당으로,
공자의 주요 제자들과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유(名儒)들이 종사된 상태였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유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는 의미죠. - P82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으로 세종 15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고종 때 중건되었다. 
북쪽은 음기가 많다 하여 평소에는 닫아두는데남곤, 심정, 홍경주가 이 문을 통해 들어가 중종과 모의하여 ‘기묘사화‘를 불러왔다. 461년  뒤 신무문 안에 주둔하고 있던 신군부들은 쿠데타를 모의하여 12.12 사태를 일으킨다. - P90

오로지 근본에 힘쓰고 원칙과 정도만 걸어온 인생이다. - P121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집같이 근심했네.
하얀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 비추리라.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조광조 趙光祖 - P123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마라.
먼 길가기 어려우니라.

하고는 술에 탄약을 마셔 세상과 작별했다.
향년 38세.
과거에 급제하여 정치개혁의 길에 들어선 지 4년 남짓 만의 일이었다. - P123

공신, 대신, 왕자, 부마들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갖은 사치를 행했지만,
백성들은 그만큼 땅에서 유리되었으며,
상당수는 도둑이 되어 세상을 불안케 했다. - P131

결국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였고,
중종의 실패였다. - P133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2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시 불타고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복원하면서 새로 지었다. 중종은 주로 창덕 궁에서 지내고 가끔씩 경복궁을 이용하였다.
궁 안에서는 연이은 옥사로 인해 비명소리가  잦았고, ‘동궁작서의 변‘ 같은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 P134

비방이 산처럼 쌓였는데도 끝내는 용서 받으니
내 인생에 다시는 성은에 보답할 길 없겠구나.
열번을 높은 재 오르노니 두 줄기 눈물이요
세 번을 긴 강을 건너노니 홀로 애통하여라.
아득한 높은 봉우리엔 구름이 먹빛이요
망망한 넓은 들엔 큰 비가 쏟아지누나.
해질녘에 임해 동성 밖을 들어서니
쓸쓸한 초가집엔 대나무 문을 달았구나.

정광필 - P169

정릉
중종의 능으로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처음에는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묻혔으나 문정왕후의 질투로인해 이곳으로 천장되었다. 문정왕후는 사후 이곳에 같이 묻히고 싶어했지만 터에 문제가 많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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