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흰 사람들의 법과 관습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이 우리의 몸을 해부용으로 사겠다고 해도 우리는 무슨 일인지조차 모른 채 깃털 펜을 잡고 종이에 서명했을 것이다. 나와 우리 부족이 처음 깃털 펜을 잡았을 때의 사정이 바로 그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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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떤 이유없는 허무감과 슬픔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마치 어느 전생에선가 무척이나 힘든삶을 살았던 것처럼 원인 모를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 P31

하지만 이제 인도 사회 역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세대인 20대 버스 운전사는 성자들 시바 신이든요금을 내지 않으면 절대로 버스에 태워줄 수 없다는 완강한 자세였다. - P32

"나는 그대를 만나려고 이 버스에 탔다. 그러니 그대가 내 대신차비를 무는 것이 당연한 일이로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성자의 복장을 한 사람이 차비 몇 푼을 빼앗으려고 거짓말을 하다니! 나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P33

"난 당신을 만나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허튼 소리 그만두고 저리가요. 남의 돈으로 버스를 타려거든 차라리 걸어서 다니라구요." - P33

"그대는 표면적으로 볼 때 지금 데라둔으로 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아. 데라둔은 공간 속의 한 지점일 뿐이지. 지금 그대가 향해 가고 있는 시간 속의 지점은 그곳이 아닌 다른 곳이야." - P35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생에 나는 그의 첼라(제자)였고 그는 나의 구루(영적 스승)였다는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중에 내가 도망쳐서 어디로 갔나 했더니 한 생이 지난 이제서야 버스 안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인연의 고리는 너무도 단단해서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노라고 성자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 P36

성자의 축복을 받고 나니 내 자신이 신에게로 성큼 다가섰음을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절망과 슬픔에 젖었던 한 여행자는 빈털터리 성자의 유머와 재치 덕분에 마음이 한결 밝고 여유로워질 수있었다. 그 밝고 여유로운 세계가 내게는 곧 신의 자리였다. - P39

성자가 내려준 그날의 축복은 까닭 없는 허무감에 흔들리던 한 젊은이의 영혼을 간단히 치유해주었다. 데라둔까지 가는 아니 신에게로 가는 버스 여행은 그렇게 두 시간이 걸렸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 P39

인도에서 불교를 전공하던 어떤 한국인 교수가 하인에게 행주와 걸레를 구분해서 쓰라고 충고했더니, 그 인도인 하인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차별하는마음도 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불교를 전공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교수에게 되려 큰소릴 쳤다고 한다. - P40

또 인도인들은 대부분 손으로 밥을 먹는다. 왜 스푼을 사용하지않고 더러운 손으로 먹느냐고 했다가 나는 된통 설교를 들어야만했다. 누구의 입에 들어갔었는지도 모르는 스푼으로 먹는 것보다자기 손으로 먹는 게 훨씬 위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자기들은 손가락으로 음식의 맛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 P41

"잠깐 차를 세워주세요. 배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얼른요." - P42

버스에서 뛰어내린 나는 배낭을 들쳐안고 무의식적으로 도로옆 들판을 향해 10여미터 달려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북인도의 들판지대는 수평에 가까운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언덕 하나없는 평지에다 나무들조차 구경하기 어렵다. 공교롭게도 내가 버스에서 내린 지점이 바로 그런 지대였다. - P43

어쨌든 위기는 면했다. 바지에 실례를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볼일을 마친 나는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어깨에 힘을 주고 천천히 버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도중에 괜히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멀리 던지는 여유까지 부려 보였다. 인도인들은 내 마음속을 다 간파하고 있다는 듯, 저 친구가 정말 왜 저러나 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P44

"인도인들은 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들판이나 철둑길이나 강변에 마구 볼일을 보니 더럽기 짝이 없잖아요.
전염병의 원인이 될수도있구요. 화장실을 더 많이 지으면 한결깨끗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건너편에 앉은 50대 남자가 내 말을 받았다. - P45

"자연속에서 자연적인 일을 처리하는데 뭐가 나쁘다는 겁니까? 왜 당신들외국인들은 성냥갑만한 공간 속에 숨어 냄새를 맡아가며 똥 위에 똥을 누고 있지요? 우린 아침마다 대자연 속에 앉아 바람과 구름을 바라보며 볼일을 봅니다. 그것이 우리에겐 최고의 명상이지요."
다른 남자가 말을 받았다. - P45

"그래요. 자연스러움을 혐오하고 인위적인 것들을 추종하는 세상이 됐어요. 우리처럼 물로 닦지 않고 화장지를 사용해야 문명생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어디 정말로 그런가요. 강은 더 더러워졌고, 나무들은 더 없어졌지요."
그 옆의 남자도 한탄을 했다. - P45

"그 결과 세상은 점점 위선적이 되어버렸어요. 명상적인 생활이무엇인지도 모르구요. 무엇으로든 자신을 가려야만 문명인이라고 생각하게 됐지요." - P45

버스는 창피함으로 얼굴이 붉어진 한 외국인 여행자와 묵묵히창밖을 응시하는 사리 입은 여인, 흰 두건쓴 시크교 노인, 이마에점을 찍은 처녀, 그리고 또다시 옆사람의 호주머니를 훔쳐보는 손이 시커먼 소매치기 등을 싣고 광활한 북인도 대륙을 달려갔다. - P46

나를 숨겨줄 아무런 은폐물도 없는 들판지대가 야속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저 따사로운 평원의 햇살과툭 트인 바람 속에서 내 온존재를 마음껏 드러낸 채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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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나는 지금 낯선 마을에 와 있다. 마을의 이름은 ‘쿠리‘이다. 북인도 라자스탄 사막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 몇 안 되는 흙벽돌 집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엎드려 있다. - P19

나는 눈을 감고 지도 위에 한 점을 찍어 그 장소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 P19

그러나 남에게 한 약속도 아니고 스스로 내린 결정을 시도조차하지 않고 포기할 순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캘커타에서 비행기를내리자마자, 마치 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떠난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처럼 전속력으로 인도 대륙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P20

모두 걸린 시간은 8일 반나절하고도 세 시간이었다. 쿠리까지가는 데만 무려 2백 시간이 넘게 걸린 셈이었다. 도중에 기차를 갈아탄 것이 일곱 번이었으며, 4일은 기차역에서 잤고, 나머지 3일은 기차 안에서 배낭을 끌어안고 잤다. 더구나 쿠리로 가는 시외버스는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배낭을 깔고 앉아 하루 온종일기다려야만 했다. - P20

여행 가이드북에 40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적힌 거리가 왜 그토록 오래 걸렸는가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인도이니까!" - P20

마을에는 뜻밖에도 호텔이 하나 있었다. 집이 열 채 정도밖에없는 곳에 호텔이 있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누구를 위해 그 호텔이 거기 존재하는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인도는역시 수수께끼의 나라였다. - P22

내가 바냔나무 아래 가서 앉자 개 두마리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개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한껏 애처로운 표정으로 먹을 걸 달라고 나를 쳐다보았다. 한 마리는 허기가 져서 죽겠다는 듯 아예옆으로 픽 쓰러졌다. - P25

세상은 결국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나름 아닌가.  - P25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먼여행을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내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사막 지방에선 자살 행위와도 같다는 것이었다. - P29

가진 게 없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은 따뜻한 사람들의 토담집 위로 별똥별이 하나둘 빗금을 그으며 떨어져내렸다.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역시 저 하늘 호수로부터 먼 여행을 떠나온 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들때까지 별을 구경할 수 있는 구멍 뚫린 방이 나는 너무 좋았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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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아름답다.

내 앞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내 뒤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

내 아래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내 둘레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

인디언 노래_나바호 족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류시화 편

옳은 것을 틀리다고 말하고 틀린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얼굴 흰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에는 얼마나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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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지도와 돈과 신발을 빌려준 이들에게,
그리고 나의 여행에 대해 "그만 말하고
이제 글로 쓰라"고 충고해준 아내에게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여행자를 위한 서시
1997년 여름 류시화

빈자의 행복

차루는 허풍쟁이였다. 걸핏하면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말끝마다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 P11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업이에요. 이미 수천년전부터 정해져있는 일인 걸 내가 어쩌란 말인가요. 어쨌든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여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차루는 한낱 릭샤 운전사가 아니었다. 인생의 문제를 초월한 성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도 사회의가장 밑바닥 계층에서 어느덧 깨달음을 얻은 힌두 명상가로 변신해 있었다. - P16

희랍의 철학자 제이 상인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의 집에는특별한 노예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제논이 화가 나서 노예의 뺨을 때리자 노예는 평온한 목소리로 제논에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순간에 주인님에게 뺨을 맞도록되어 있었고, 주인님은 또 제 뺨을 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 P17

제논은 훗날 스토아 학파의 대철학자가 되었는데, 인도인으로짐작되는 이 노예에게 영향을 받은 듯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흔들림 없는 현실 수용‘이 그의 주된 사상이었다. - P17

한편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 - P17

세네카, 제논의 노예든, 또는 차루든, 이들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 P17

"노프라블럼!"
그러면서 차루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1루피만 줘서 내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자기의 친구이니까, 자기한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내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잠시만의 행복이 아니라 돈을 준 내자신이 오래도록 행복할 수있을 만큼 돈을 달라고 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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