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지도와 돈과 신발을 빌려준 이들에게, 그리고 나의 여행에 대해 "그만 말하고 이제 글로 쓰라"고 충고해준 아내에게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여행자를 위한 서시 1997년 여름 류시화
빈자의 행복
차루는 허풍쟁이였다. 걸핏하면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말끝마다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 P11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업이에요. 이미 수천년전부터 정해져있는 일인 걸 내가 어쩌란 말인가요. 어쨌든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여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차루는 한낱 릭샤 운전사가 아니었다. 인생의 문제를 초월한 성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도 사회의가장 밑바닥 계층에서 어느덧 깨달음을 얻은 힌두 명상가로 변신해 있었다. - P16
희랍의 철학자 제이 상인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의 집에는특별한 노예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제논이 화가 나서 노예의 뺨을 때리자 노예는 평온한 목소리로 제논에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순간에 주인님에게 뺨을 맞도록되어 있었고, 주인님은 또 제 뺨을 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 P17
제논은 훗날 스토아 학파의 대철학자가 되었는데, 인도인으로짐작되는 이 노예에게 영향을 받은 듯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흔들림 없는 현실 수용‘이 그의 주된 사상이었다. - P17
한편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 - P17
세네카, 제논의 노예든, 또는 차루든, 이들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 P17
"노프라블럼!" 그러면서 차루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1루피만 줘서 내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자기의 친구이니까, 자기한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내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잠시만의 행복이 아니라 돈을 준 내자신이 오래도록 행복할 수있을 만큼 돈을 달라고 했다. - P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