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 살고 있던 주몽의 첫 부인 예씨와 원자 유류(유리)가 고구려에 오고, 유류가 태자로 책봉되면서 연씨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몽이 죽자 자신의 족속들과 함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백제를 세운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재사’라고 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무골’이라고 했고, 수초로 옷을 만들어 입은 사람은 ‘묵거’라고 했다. 하지만 성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의 성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졸본’으로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홀본(忽本)’, 『위서』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지명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를 졸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첫 번째는 오녀산성설이다. 지금의 만주 환인 북쪽 환인분지 안에 있는 해발 약 8백 미터의 산지에 축성된 이 오녀산성은 남북 약 1천 미터, 동서 너비 약 3백 미터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이다. 부근에는 환인현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의 적석총(積石塚,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일명 돌무지 무덤)을 비롯해 많은 고분군이 있다.

두 번째는 요동설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주장이다. 그는 ‘고구려’전에서 "고구려는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졸본주가 지금의 화주(함남 영흥) 또는 성주(평남 성천)라고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있다."고 쓰고 있다.

요동이란 요수의 동쪽을 일컫는다. 하지만 고구려 당시의 요수가 현재의 요하(랴오허)였다는 주장과 현재의 난하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때문에 요동을 랴오허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 아니면 난하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 아직 불분명한 상태다.

이들은 모두 동이(東夷)족에서 흘러나온 예맥(濊貊)족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국가들이다. 따라서 이 국가들을 형성한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는 동이와 예맥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에 동이, 예맥에 대해 언급하고 부여, 말갈, 비류, 해인, 옥저 등의 성립 시기 및 위치와 영토에 대하여 간단하게 기술한다.

동이(東夷)

‘동이’라는 말은 초기에는 하나의 민족을 의미하기보다는 중국의 한(漢)족이 자신들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른 명칭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후한 때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設文解字)』는 "큰 것을 따르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의 사람들이다(從大從弓東方之人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夷)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道)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가 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동이족은 대개 견()·우(于)·방(方)·황(黃)·백(白)·적(赤)·현(玄)·풍(風)·양이(陽夷) 등 9종족으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한(漢)족의 활동 영역이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중원에서 밀려나와 중국의 동해안(황해안)과 북방에 밀집된다.

예맥(濊貊)

예는 ‘예(穢)’ 또는 ‘예(濊)’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穢)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예(穢)라는 한자는 ‘벼농사를 지으면서 매해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예(穢)가 ‘물을 좇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예(濊)로 바뀌게 되는데, 이 또한 벼농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즉 벼농사를 위해서는 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예(穢)’와 ‘예(濊)’는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맥은 대개 ‘맥(貊)’ 또는 ‘맥()’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맥은 신화적인 동물인 ‘맥’을 의미하거나 ‘북쪽’을 의미한다. 맥은 불을 뿜는 동물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흡사 불을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이 경우 ‘맥’은 ‘맥을 숭배하는 사람들’ 또는 ‘맥이라는 동물을 연상케 하는 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을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예·맥 동종설(同種說)과 예와 맥을 따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예·맥 이종설(異種說)이 있다. 동종설에서는 예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고 맥은 국명이기 때문에 예맥이라 함은 ‘예족이 세운 맥국’이라고 주장하고, 이종설에서는 예와 맥은 동이에서 나온 다른 부족인데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예맥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부여(夫餘)

부여의 명칭이 최초로 보이는 곳은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인데, 거기에는 "연나라는 오환과 부여에 인접해 있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일을 기록한 『사기』의 「흉노전」에는 "흉노의 좌측왕과 장수는 동방 쪽에 있으며, 상곡으로부터 더 나아가는 자는 예맥과 조선을 만나게 된다."고 하여 당시에는 부여라는 나라가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부여는 서기전 4세기경에 성립되어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에 의해 멸망당하는 494년까지 약 800년 동안 지속된 나라이다. 그 영토는 남으로는 발해만 연안과 요서·요동, 북으로 흑룡강, 서로는 대흥안령산맥, 동으로는 우수리강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말갈(靺鞨)

말갈이라는 명칭은 두 글자 모두 가죽 혁(革)자가 부수인 점으로 미루어 가죽옷을 만들어 입는 부족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갈은 이미 고구려 성립 이전부터 부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삼국사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수서』 「말갈전」에는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말갈은 부여국의 변방에 흩어져 살며 가죽옷을 해 입는 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즐겨 입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말갈과 부여는 의복문화를 통하여 확연히 구분되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 자주 출현하여 백제 및 신라와 세력을 다퉜던 말갈은 백산 말갈이었으며, 고구려를 도와 중원 국가를 공략하던 말갈은 흑수 말갈이었다. 백산과 흑수는 고구려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병합된 상태로 한반도 북부와 두만강 및 송화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말갈족들은 후에 여진족으로 이어져 금과 청을 세운다.

비류(沸流)

비류는 고구려에 최초로 복속된 국가이며, 복속된 이후에는 다물도(多勿都)로 개칭된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서기 37년에 비류를 침략하였는데, 이 때 비류의 왕은 송양이었다. 즉, 비류는 대대로 송씨가 다스리던 국가였다는 뜻이다.

행인(荇人)

행인은 고구려가 두 번째로 복속한 국가이다.

동명성왕은 서기전 32년 10월에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행인국을 정복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인국은 송화강 주변의 하얼빈이나 다칭 지역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세 가지 가설 가운데 세 번째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옥저가 남옥저와 8백여 리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북옥저의 남쪽 경계가 읍루와 접해 있다고 했으므로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읍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루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동옥저와 접해 있고, 서남으로는 부여, 서북으로는 북옥저, 동북으로는 끝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할 때 북옥저의 위치는 흑룡강(아무르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이며, 이는 지금의 하바로프스크 서북방에 위치한 콤소몰스크나아무레 지역 일대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경계는 동남쪽과 북쪽은 읍루에 둘러싸이고, 서남쪽과 서쪽은 부여에 둘러싸인다. 따라서 북옥저는 사방이 흑룡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인 오각형 모양의 땅이 되는 것이다.

대소의 군림은 곧 예씨 모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류는 옥지, 구추, 도조 등의 친구들과 의논한 후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할 것을 다짐하고, 서기전 19년 4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 땅을 밟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유류파의 중심 인물은 주몽과 함께 망명한 오이, 마리, 협보를 비롯하여 대표적인 무장 세력인 부분노와 부위염, 고구려 토착 세력인 탁리, 사비, 설지 등이었고, 비류파의 중심 인물은 소서노의 지지기반인 계루부 출신의 관리들과 오간, 마려 등의 중신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두 파의 대립은 유류파의 승리로 끝났다. 고구려 개국 이후 계루부는 동명성왕에 의해 거의 장악당한 상태였고, 나머지 네 부족 역시 동명성왕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명성왕의 고향 친구들인 오이, 마리, 협보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유류파가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류파가 떠난 뒤, 유류는 동명성왕 측근들의 보필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태자 책봉 5개월 뒤인 서기전 19년 9월에 동명성왕이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2대 왕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리명왕이다.

2. 유리명왕의 정권 장악 노력과 고구려의 격변

(?~서기 18년, 재위기간:서기전 19년 9월~서기 18년 10월, 36년 1개월)

주몽의 원자 유리명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구려 조정은 한 차례 정쟁을 치른다. 조정을 장악하려는 유리명왕과 이를 저지하려는 개국공신들 사이에 팽팽한 힘싸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왕후 예씨 소생이며, 이름은 유류 또는 유리이고, 동부여에서 서기전 38년 또는 서기전 37년경에 태어났다. 이후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망명하였고, 서기전 19년 4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그해 9월에 동명성왕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고구려 제2대 왕에 즉위하였다.

황룡 왕이 해명을 살려놓자 유리명왕은 서기 9년 3월에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칼을 내주고 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해명은 순순히 명령에 복종하여 자결하였고, 이로써 유리명왕은 자신의 아들을 두 명이나 죽인 잔혹한 임금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된다.

"네 년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인 주제에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

이 말을 듣고 치희는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유리명왕은 말을 타고 치희를 뒤쫓아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리명왕이 지었다는 시가 ‘황조가’이다.

편편황조 鶣鶣黃鳥 (펄펄 나는 꾀꼬리는)

자웅상의 雌雄相依 (암수 서로 정다운데,)

염아지독 念我之獨 (외로운 이 내 몸은)

수기여귀 誰基與歸 (뉘와 함께 돌아갈꼬?)

도절(서기전 17년~서기 원년)

도절(都切)은 유리명왕의 맏아들이며, 제1왕후 송씨의 소생인 듯하다. 그리고 그를 송씨의 소생으로 볼 때 서기전 1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해명(서기전 12년~서기 9년)

해명은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이며, 제2왕후 송씨 소생으로 서기 4년 16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여진(?~서기 18년)

유리명왕의 넷째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서기 18년 4월에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재사(생몰년 미상)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로 제6대 태조의 아버지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또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봉작인 고추가(古鄒加, 조선의 대원군이나 부원군에 해당함)에 올라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첫째, 졸본은 구려의 옛 수도였기 때문에 구려시대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둘째, 졸본은 변방이 가까워 적의 침입이 용이한 곳이었다. 특히 부여와 아주 근거리에 있는 까닭에 항상 부여의 전쟁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셋째, 졸본은 자기 손으로 큰아들 도절을 죽게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졸본의 민심이 유리명왕에게서 멀어졌다.

선비(鮮卑)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년), 고구려는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선비를 정벌해 속국으로 만든다.

선비는 원래 사르모론(西喇木倫)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동호족의 지파로서 유목민이다. 이들은 요서 지역 및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요동 등 넓은 곳에 분포해 있었으며 유리명왕 당시에는 나라를 형성하지 못했다.

유리명왕 당시만 하더라도 선비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인구도 적었으며, 힘도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다. 하지만 2세기가 되면 선비족의 힘은 강성해진다. 이 시기의 선비족에는 흉노와 탁발, 정령, 오환, 한족 등이 일부 포함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양맥(梁貊)

유리명왕 33년(서기 14년)에 유리명왕은 오이와 마리에게 명령하여 군사 2만으로 양맥을 멸망시키고,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점령한다. 『삼국사기』는 이 고구려현이 현도군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룡국(黃龍國)

황룡국은 『삼국사기』 유리명왕 27년(서기 8년)과 28년(서기 9년)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이다. 이 황룡국 왕이 선물한 활을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 해명이 꺾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구려 조정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던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2.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대무신왕의 팽창정책

(서기 4~44년, 재위기간:서기 18년 10월~서기 44년 10월, 26년)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며, 다물후 송양의 차녀인 제2왕후 송씨 소생이다. 서기 4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무휼(武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총명하였고, 유리명왕 33년(서기 14년) 정월에 11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서기 18년 10월에 유리명왕이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3대 왕에 올랐다.

사신으로부터 이러한 해석을 전해들은 대소는 후회를 거듭하였고, 그런 가운데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준비하여 서기 21년 12월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정벌길에 오른 대무신왕은 9척 장신 괴유를 장수로 맞아들였는데, 이듬해 2월 그는 부여 왕 대소의 목을 벤다.

좌보로 있던 재상 을두지는 적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에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수초로 싸서 적장에게 보낸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 안에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물러간다.

이른바 을두지의 ‘잉어계책’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대무신왕은 그 이후로도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낙랑을 정복한다.

호동왕자(?~서기 32년)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이며(실제적으로는 장남), 제2왕후 해씨 소생이다(『삼국사기』는 둘째 아들 해우를 장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적통이고, 왕위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동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4월과 11월 기사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부여 정벌전쟁

대무신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부여를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한의 내분으로 대륙의 정치질서가 문란해진 가운데 고구려는 대륙의 맹주로 성장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부여를 치기로 한 것이다.

고·한의 위나암성 싸움과 을두지의 ‘잉어계책’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지속하는 가운데 이에 위기를 느낀 한나라는 서기 28년 7월에 1백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한다. 침략의 선봉장은 한의 요동 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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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까지 책은 사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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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讀

전체 118권(종이책 50권, 전자책 68권)
작년보다 42권 더 읽었으니 成功!?

에고 만화책이 많다 ㅠㅠ

送舊迎新! 謹賀新年!
甲辰年 靑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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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의 맏딸인 유화가 두 여동생과 함께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天王子, 곧 천자이므로 왕)이라고 자칭하는 해모수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는 유화를 압록강 가에 있는 어떤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떠나버린다. 그 후 유화는 임신을 하였고, 이 때문에 해모수와 관계한 사실이 탄로난다. 이에 유화의 부모는 그녀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남자와 관계를 가진 것을 질책하며 그녀를 우발수에 귀양 보낸다.

유화를 임신케 한 해모수는 이 무렵 이미 늙은 몸이었다. 그에게는 해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금와라는 손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손자인 금와 역시 장성하여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해모수가 유화를 취한 일은 유화가 북부여 왕 해모수의 눈에 들어 수청을 강요당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유화가 금와의 할머니뻘 된다는 사실은 동명성왕 14년인 서기전 24년에 유화가 죽자, 금와가 태후의 예에 준하여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유화의 이 같은 당부를 받아들인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졸본 땅으로 건너간다(‘『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성왕의 출생과 성장 이야기’ 참조).

주몽이 대소의 위협을 피해 망명한 졸본부여는 일명 ‘구려국(句麗國)’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구려국은 흔히 ‘고리’, ‘구리’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부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려는 부여, 한 등과 마찬가지로 고(古)조선 말기에 형성된 국가로 볼 수 있다.

대소의 군사들을 따돌린 주몽은 모둔곡이라는 계곡에서 세 명의 동지를 만난다. 모둔곡에서 주몽이 만난 세 명의 동지는 재사, 무골, 묵거 등이었다. 재사는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무골은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묵거는 수초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종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 등의 성을 내린다.

3. 동명성왕의 영토확장 전쟁과 고구려의 성장

(서기전 58년~서기전 19년, 재위기간:서기전 37년~서기전 19년, 18년)

고주몽이 왕위에 오르면서 구려라는 국호를 고구려로 개칭하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한다.

송양이 항복하자 주몽은 비류국을 ‘옛 땅을 회복했다’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 곳 왕으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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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종의 실리책과 고려의 안정

(1018~1046년, 재위기간:1034년 9월~1046년 5월, 11년 8개월)

정종(靖宗)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사회는 거란 침입으로 야기된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기를 정착시킨다. 국교를 단절하고 있던 거란과 다시 외교관계를 맺고 사회 전반에 팽배해진 위기의식을 불식시키는 한편,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일련의 안정책을 단행하게 되는 것이다.

정종은 현종의 차남이자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101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이다. 5세 때 내사령과 평양군으로 책봉되었고, 1034년 9월 19세의 어린 나이로 임종에 직면한 친형 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0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1.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

(1019~1083년, 재위기간:1046년 5월~1083년 7월, 37년 2개월)


정종시대에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문종(文宗)은 정치, 사회, 문화, 외교,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일궈낸다. 3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된 이러한 발전은 이른바 ‘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고, 이에 따라 고려 문화와 대외적 위상은 한층 격상된다.

문종은 현종의 셋째 아들이자 원혜태후 김씨 소생으로 1019년(현종 10년) 12월 계미일에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이다. 1022년(현종 13년)에 낙랑군에 책봉되었고, 1037년(정종 3년)에 내사령에 올랐다가 1046년 5월 정유일 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1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혈기 왕성한 28세였다.

1. 순종의 병상 3개월 치세

(1047~1083년, 재위기간:1083년, 7월~10월, 3개월)

순종(順宗)은 문종의 장남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7년 1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훈(勳), 자는 의공(義恭)이다.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12대 왕에 올랐다.

1. 선종의 중도정치와 고려 문화의 융성

(1049~1094년, 재위기간:1083년 10월~1094년 5월, 10년 7개월)

순종이 즉위 3개월 만에 죽자 동복아우 선종이 왕위에 올라 문종의 정치 형태를 이어간다.

선종(宣宗)은 문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운(運), 자는 계천(繼天)이다. 1056년 3월 국원후에 책봉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쳐 상서령으로 있다가 1083년 7월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순종이 재위 3개월 만에 죽자 고려 제13대 왕에 올랐다.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감성이 풍부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하지만 전하는 것은 거의 없고, 다만 거란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시가 남아 있다.

 

찬이슬 내려 바람은 거세지만

가을 하늘 하도 맑아

피향전 깊은 밤에도 노래소리 들리는구나

분분한 인생은 한낱 꿈과 같으니

영화를 탐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

금잔에 술이나 부어 마음껏 즐기세나

1.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

(1084~1097년, 재위기간:1094년 5월~1095년 10월, 1년 5개월)

선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신의 11세 된 어린 아들 욱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렇게 되자 왕권은 자연히 사숙태후 이씨에게로 넘어가 섭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태후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헌종(獻宗)은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욱(昱)이다. 1094년 5월 선종이 서거하자 그 유언에 따라 중광전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4대 왕에 올랐다.

1.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1054~1105년, 재위기간: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나이 어린 헌종이 밀려나고 숙종(肅宗)이 즉위함으로써 고려 조정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휘말리지만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여진족의 성장으로 변방이 불안해짐에 따라 외교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그 때문에 군사제도의 개편이 단행되는 등 고려 사회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이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희(熙)였으나, 거란의 9대 왕 천조제와 이름의 발음이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인 1101년 3월에 옹()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천상(天常)이다.

1. 예종의 영토확장 노력과 여진의 성장

(1079~1122년, 재위기간:1105년 10월~1122년 4월, 16년 6개월)

숙종시대부터 급속도로 성장한 여진이 예종시대에 이르러 더욱 강대해지면서 중국대륙은 전운에 휩싸인다. 이러한 여파는 고려의 변방을 불안하게 만들고, 예종은 성장하는 여진의 남하를 막는 동시에 거란에게 잃었던 압록강변을 되찾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때문에 예종 초기는 여진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속되지만 압록강변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전쟁을 종결하고 안정을 되찾음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다.

예종은 숙종과 명의왕후 유씨의 맏아들로서 1079년(문종 33년) 정월 정축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우(), 자는 세민(世民)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에 밝고 시를 좋아해 학문이 깊었으며, 침착하고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094년에 검교사공 주국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받았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태위에 올랐다가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인 1100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1107년 윤 10월 고려 조정은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 경비군관의 보고에 따라 선제 공격을 결정하고 17만 대군으로 여진정벌을 단행한다. 이를 위해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에 임명하고 예종은 천문관의 건의에 따라 서경으로 떠난다. 왕이 몸소 서경에 가서 변방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17만을 이끌고 간 윤관은 그해 12월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등을 장악하고 그곳에 성을 쌓았으며, 이듬해 초에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또다시 3월에 의주, 통태진, 평융진 등에도 세 성을 쌓아 백성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고려는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되었다.

3.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

동북 9성은 1107년 윤관(尹灌)의 건의에 따라 조직된 별무반이 고려 동북쪽의 변방 바깥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축출하고, 그 지역에 쌓은 9개의 성을 일컫는다. 이 9성은 흔히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진양진, 통태진, 숭녕진을 가리키는데 그 위치와 지역 명칭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기록에 따라서는 열거한 9성 중 숭녕진과 진양진 대신 의주와 평융진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의 절대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여진의 추장들을 거의 섬멸시킨 윤관은 출동명령을 내렸다. 윤관 자신이 군사 5만 3천을 거느리고 정주 대화문을 나섰으며, 중군병마사 김한충이 3만 6천7백을 이끌고 안륙수로 나아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이 3만 4천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으로 향했다.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4천을 이끌고 선덕진의 안해, 거방 두 초소의 중간 지점으로 나아갔으며, 선병별감 양유송과 원흥, 도부서사 정숭용과 진명, 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은 해군 2천6백을 인솔하고 도린포로 떠났다.

1. 인종의 우유부단한 정치와 고려왕조의 위기

(1109~1146년, 재위기간: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예종이 죽고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권력암투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묘청이 이끄는 서경 세력과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세력 사이에 끼어 수동적인 정치로 일관한다.

인종은 예종의 맏아들이자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1109년 10월 기해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구(構), 이름은 해(楷), 자는 인표(仁表)이다. 그는 1115년 2월 7세의 나이로 왕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122년 4월 예종이 죽자 14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7대 왕에 올랐다.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서경의 승려 묘청이었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이 묘청의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묘청을 위시한 서경 세력의 주장에도 문제는 없지 않았다. 대금정벌론을 내세워 잃었던 민족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높게 평가될 수 있으나 당시 국제정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지나치게 풍수사상에만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

『삼국사기』는 이들 편찬자들의 독자적인 저술이 아니라 『고기』, 『삼한고기』, 『신라고사』, 『구삼국사』, 김대문의 『고승전』과 『화랑세기』, 『계림잡전』,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 『후한서』, 『진서』, 『위서』, 『송서』, 『남북사』,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기술되었다.

1. 향락주의자 의종의 환관정치와 정중부의 난

(1127~1173년, 재위기간:1146년 2월~1170년 9월, 24년 7개월)

묘청의 난 이후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즉위한 의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친위 세력 형성에 주력한다. 이 때문에 환관(宦官)과 내시(內侍)들의 힘이 막강해져 그들과 언간들 사이에 치열한 힘겨루기가 전개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멸시당하던 무신들이 반란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의종(毅宗)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3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4월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철(徹), 이름은 현(晛), 자는 일승(日升)이다. 114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146년 2월 정묘일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대관전에서 고려 제18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1.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

(1131~1202, 재위기간:1170년 9월~1197년 9월, 27년)

정중부의 반란으로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로 접어든다. 왕은 존재하나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일부 무신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잇따른다. 이로 인해 국가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른다.

명종은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31년 10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흔(昕), 이름은 호(晧), 자는 지단(之旦)이다. 1148년에 익양후에 봉해지고 후에 다시 익양공으로 승진되었으며, 1170년 9월에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 등이 의종을 몰아내고 동복아우인 그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고려 제19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2. 무신정권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정중부의 무신난 이후 조정의 권력은 무신난을 주도한 일부 무장들에 의해 장악된다. 이들 무장들은 과격파와 온건파로 구분될 수 있는데 정중부, 양숙, 진준, 기탁성, 이소응, 홍중방 등의 무반 고위 인사들은 온건파에 속했고, 이의방, 이고, 채원 등 하급 무장들은 과격파에 속했다. 흔히 정중부가 무신난을 주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의 하급 무장들이 난을 주도하고 정중부는 그들의 계획에 동의했을 뿐이다. 따라서 하급 무장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반란을 꾀하고 있었던 데 반해 정중부 등의 고위직 무장들은 반란을 실행할 의지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신정권의 성립

(1144~1204년, 재위기간:1197년 9월~1204년 1월, 6년 4개월)

신종(神宗)시대는 비록 6년여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는가 하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아 고려 사회는 건국 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다.

신종은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4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민(旼), 이름은 탁(晫), 자는 지화(至華)이다.

1. 왕권 회복을 꿈꾸는 희종과 최충헌 제거 계획

(1181~1237년, 재위기간:1204년 1월~1211년 12월, 7년 11개월)

희종(熙宗)은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로 1181년 5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덕(悳), 이름은 영(), 자는 불피(不陂)이다. 1200년 4월에 왕태자에 책봉되고, 1204년 1월에 병상에 누운 신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 강종의 황혼녘 짧은 치세

(1152~1213년, 재위기간:1211년 12월~1213년 8월, 1년 8개월)

강종(康宗)은 명종의 맏아들이자 의정왕후 김씨 소생으로 1152년 4월 을사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숙(璹), 개명은 정(貞), 이름은 오(), 자는 대화(大華)이다. 1173년 4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97년 9월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쫓겨날 때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줄곧 강화에서 지내다가 1210년 12월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1211년 정월에 한남공에 봉해졌다가 그해 12월에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그를 옹립함에 따라 고려 제22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1. 고종시대의 계속되는 변란과 대몽항쟁

(1192~1259년, 재위기간:1213년 8월~1259년 6월, 45년 10개월)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든 고종(高宗)시대는 몽고의 흥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다. 서쪽으로 밀려났던 거란이 다시 동으로 쫓겨왔으며, 남으로 밀려났던 송이 망국에 직면하고, 북쪽의 맹주로 자리한 금도 몰락한다. 몽고의 이 같은 무서운 팽창정책에 맞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영토수호 전쟁을 수행한다. 그런 가운데 무신정권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왕실은 무신들의 암투를 이용하여 왕권을 회복하려 한다.

1. 원종의 친원정책과 무신정권의 종식

(1219~1274년, 재위기간:1259년 6월~1274년 6월, 15년)

원종(元宗)시대는 무신정권의 말기이자 원의 고려복속정책이 본격화되던 시기로서 고려 조정은 왕실 중심의 친몽파와 무신들이 이끄는 반몽파로 갈라진다. 원종은 몽고의 힘을 빌려 왕권을 회복하려 하고 무신정권은 그 같은 왕실의 정책을 경계하며 몽고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려 한다. 이것은 결국 쌍방간의 힘대결로 번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몽고의 내정간섭의 빌미만 확대시키게 된다.

원종은 고종의 맏아들이자 안혜왕후 유씨 소생으로 1219년 3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전(倎), 이름은 식(), 자는 일신(日新)이다. 그는 1241년 정월에 태자에 책봉되어 1259년 4월에 몽고와의 화의조약에 따라 고종을 대신해서 몽고에 입조했다.

1.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

(1236~1308년, 재위기간:1274년 6월~1298년 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 7월, 1298년 1월부터 동년 8월 초까지는 충선왕 재위기간이므로 총 재위기간은 33년 6개월)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철저한 친원정책 덕분으로 고려 왕실은 오히려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신들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차림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간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 2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심(諶) 또는 춘(賰), 이름은 거(昛)이다. 그는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 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1272년에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이 죽자 귀국하여 고려 제25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1. 충선왕의 전지(傳旨)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1275~1325년, 재위기간:1298년 1~8월, 1308년 7월 복위~1313년 5월, 총 5년 3개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고, 한편에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된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자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소생으로 1275년 9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원(謜),이름은 장(璋), 자는 중앙(仲昻), 몽고식 이름은 이지리부카다. 1277년 1월에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8년 정월에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하지만 왕비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 충렬왕의 뒤를 이어 복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1.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위

(1294~1339년, 재위기간:1313년 3월~1330년 2월, 1332년 2월 복위~1339년 3월, 총 24년)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물려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이 같은 충선왕의 이해 못할 행동은 고려 조정을 왕위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간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몰린다.

충숙왕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녀 의비 소생으로 129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도(燾), 이름은 만(卍), 자는 의효(宜孝), 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실리다. 1298년에 강릉군 승선사에 봉해졌다가 장성해서는 강릉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27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1.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

(1315~1344년, 재위기간:1330년 2월~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1344년 1월, 총 6년 10개월)


충혜왕(忠惠王)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다. 1328년 정월에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 제28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는 16세에 불과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즉위 후 6일 동안이나 정사를 폐하고 사냥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 또한 배전, 주주 등에게 국가의 중책을 일임하여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되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1.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녕공주의 섭정

(1337~1348년, 재위기간:1344년 2월~1348년 12월, 4년 10개월)

충목왕(忠穆王)은 충혜왕의 맏아들이자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 소생으로 1337년 4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흔(昕), 몽고식 이름은 팔사마타아지다.

1. 충정왕의 짧은 치세와 비참한 최후

(1338~1352년, 재위기간:1349년 7월~1351년 10월, 2년 3개월)

충정왕(忠定王)은 충혜왕의 둘째 아들이자 희비 윤씨 소생으로 133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저(), 몽고식 이름은 미사감타아지다. 1348년 4월에 경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2월에 충목왕이 죽자 덕녕공주가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왕후에게 서무를 대행시키고 충목왕의 죽음을 원에 알렸다. 부고를 받은 원의 순제는 이듬해 2월에 왕자 저를 입조하라고 했다.

1.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

(1330~1374년, 재위기간: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14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에 고려 국왕에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은 배원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한다. 이로써 고려는 1백여 년간 지속된 원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충혜왕의 동복아우이며 초명은 기(祺), 이름은 전(顓), 몽고식 이름은 백안첩목아다. 그는 1330년 5월에 태어나 강릉대군에 봉해졌으며, 1341년 원나라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줄곧 연경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1344년 조카 충목왕이 즉위하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다. 1348년 12월 충목왕이 사망함에 따라 조신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원나라가 충정왕을 세움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충정왕이 나이가 어린 탓으로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원 순제는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하고 그를 고려 제31대 왕에 봉했다. 이 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1.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우왕과 고려 조정의 혼란

(1365~1389년, 재위기간:1374년 9월~1388년 6월, 13년 9개월)

공민왕이 살해당하자 어린 우왕(禑王)을 즉위시킨 이인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한다. 한편 명나라의 개국으로 북원과 명나라 사이에서 고려는 외교적 난관에 부딪혀 명나라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처지가 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왜구의 노략질로 민심은 동요하여 민간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진다.

우왕은 공민왕의 장남이자 시비 반야 소생으로 136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모니노, 이름은 우(禑)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야 했다. 공민왕은 원래 자식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신돈이 자신의 여종 반야를 바쳐 아이를 얻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공민왕이 반야와 동침했고 얼마 뒤에 그녀가 아이를 잉태했다. 반야가 만삭이 되자 신돈은 자신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맡겼다.

창왕의 짧은 치세와 신진 세력의 득세

(1380~1389년, 재위기간:1388년 6월~1389년 11월, 1년 5개월)

이성계와 조민수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 세력에 의해 장악된다. 하지만 이들은 조민수 세력과 이성계 세력으로 갈라져 패권다툼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들 양 세력의 대립은 차기 왕을 세우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자고 하였는 데 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조정 내 세력이 크지 않았던 조민수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조민수의 도움 요청을 받은 이색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왕을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로써 우왕의 맏아들이자 근비 이씨 소생인 왕자 창이 고려 제33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1.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과 고려왕조의 최후

(1345~1394년, 재위기간:1389년 11월~1392년 7월, 2년 8개월)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 복위사건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이로써 조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고 급기야 그들은 역성혁명을 노리게 된다.

공양왕(恭讓王)은 제20대 왕 신종의 6세 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제34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45세였다.

그를 왕으로 세우기 앞서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은 흥국사에 모여 창왕을 폐위하고 종실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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