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 평 (605제곱킬로미터)이나 된다(참고로 제주도는 약 6억 평).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왕조의 멸망 이후 근현대에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넓은들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테네, 로마 같은 고대도시들과는사뭇 다른 지형적 이점이다. 특히 한강 남쪽의 드넓은 강남 지역으로 인구가 대이동하면서 서울의 넓이와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 - P5

이런 이유로 서울 사대문 밖의 역사문화 유적은 대부분 양주군·광주군·고양군·양천현 등 옛 조선시대 경기도 군현(郡縣)이 그대로 편입된것이어서 ‘서울적(的)‘이지  않은 것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순조의 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 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 이 왕릉들의 답사기를 쓰자면 미상불 별도의 한 권이 될 것이다 - P5

성북동은 여느 유적지와 다른 근현대사 답사처다. 이곳은 근대사회로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형성된 동네로 사대문 안의 북촌, 서촌과는 또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밖 10리 지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屯田)이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때 둔전 주민들이비단 표백과 메주 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집 주위에 복숭아를 많이심어 이곳은 ‘북둔도화(北屯桃花)‘라는 명승의  이름을 얻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 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다. - P7

1930년대 들어 경성(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일제가 택지 개발을적극 추진할 때 성북동은 신흥 주택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만해한용운의 심우장,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간송 전형필의 북단장,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조지훈의 방우산장,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 수화 김환기의 수향산방 등이 있었다. - P7

한국전쟁 이후에도 시인 김광섭, 작곡가 윤이상, 화가 김기창과 서세옥, 박물관장 최순우 등이 들어와 살면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를  형성했다. 거기에다 백석 시인의 영원한 사랑 김자야의 요정 대원각이 법정 스님의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고, 간송미술관과 함께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성북구립미술관이 들어서면서 품격 높은 문화예술의 동네가 되었다. - P7

‘망우리 별곡‘은 망우리 공동묘지 답사기다. 망우리 공동묘지 역시1930년대에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성 근교 이태원, 미아리, 노고산, 신사동(은평구 고택골) 등에 있던 기존의 공동묘지들을 멀리이장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40년간 4만 7,700여 기가 들어섰다. 1973년에 매장이 종료되고 이후 이장과 폐묘만 허용하면서 현재 약 7천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 P8

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죽산조봉암, 설산 장덕수, 종두법의 지석영, 독립운동가 유상규, 소설가 계용묵,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조각가 권진규,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락 등많은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할때 무연고 묘지의 시신을 화장하여 합동으로 모신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에는 유관순 열사의 넋이 들어 있기도 하다. - P8

망우리 공동묘지는 폐장된 이후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이곳을 역사문화 위인들을 기리는 묘원공원으로가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고, 독립유공자 여덟 분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호(1~8)로 일괄 지정되었다. 금년(2022) 4월 방문자 센터 ‘중랑망우공간‘이 개관하면서 이름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었다. - P8

이번에 서울 답사기 두 권을 펴냄으로써 서울편은 4권으로 완결되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은 총 12권이 되었다. 돌이켜보건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 나온 때가 1993년이었으니 그로부터 장장 30년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가 이제 12권째를 펴냈는데도 아직 수많은 답사처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답사기 시리즈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장 여기에서 끝내지 못하는 것은 경주남산, 남도의 산사, 경상도의 가야고분 등 시리즈 전체로 보았을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유적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마침표를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다음 답사기는 ‘국토박물관 순례‘라는 제목으로 그간 다루지않은 유적들을 시대순으로 펴내고 이 시리즈를 끝맺을 계획이다. 첫 번째 꼭지는 ‘전곡리구석기시대 유적‘이고, 마지막 장은 ‘독도‘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

2022년 10월 유홍준 - P9

서울 성북동
성북동은 한양도성 북쪽 성곽과 맞붙어 있는 산동네로 북악산(백악산)구준봉에서 발원한 성북천의 산자락에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집들이 무리 지어 들어서 있다. 타동네 사람들은 성북동이라고 하면 번듯한 외국대사관저와 높직한 축대 위의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부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이 전화를 걸 때 "여기는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 집들은 1970년 12월 30일,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꿩의 바다‘라는 길을 중심으로 들어선 신흥 저택들이다. 성북동에는 이곳 외에도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묵은 동네들이 따로 있다. - P13

성북동 주민의 마전과 메주
성북둔의 설치로 30여 호의 집이 들어서면서 성북동은 비로소 사람사는 골짜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산비탈의 골짜기인데다오랫동안 버려둔 거친 땅이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둔전사람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별도의 일감을 찾아주어야 했다. 이에 물이 맑고 풍부하다는 이점을 이용해 베나 무명을 빨아 볕에 말리는 마전 일을 맡기게 되었다. 마전은 희게 표백하는 작업으로 포백(白)이라고도 한다. 내용인즉 도성 안에 있는 점포의 무명, 베, 모시 전부와 송도(개성)의 모시전부를 독점적으로 마전하는 권리를 준 것이다. - P23

권세가들의 별장(別莊)과 별시(別)가 들어서게 됐다.  별장과 별서는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庭園), 정확히 말해서 원림(園林)으로 꾸며져 있다. - P29

무성한 송림 사이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
몇 리를 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네
연기 피어 올리는 집 몇 채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천길 절벽 위 망루 하나 외로운 봉우리에 기대 있네

一流水夾萬株松
數里行過人未逢
姻火幾家隱何處
城譙千仞倚孤峰 - P29

문화유산의 가치는 학문적 통섭을 통해 총체적으로  규명할 때 제빛을 발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 P32

망국의 왕손으로서 수난받은 일생이었으나, 그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은 기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의친왕 시절 성북동 별서의 일은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동아일보』 1927년 12월 23일자에는 ‘이강공 별저 화재‘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 P39

20일 오후 12시 경에 시외 숭인면 성북리 이강공 전하 별저에 불이나서 오전 1시까지에 안채열네 간이 전소하고 부속 건물 한 채가 반소하였는데 원인은 온돌을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며 손해는 건물2,000원에 가구 100원, 합이 2,100원이라더라. - P39

동소문 밖 성북동은 호수가 70여 호에 생업되는 바는 다만 포백 장사뿐으로 (・・・) 요사이 가뭄으로 인하여 동리 우물이 29개소나 말라버리고 또는 시냇물이 또한 말라서 포백을 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그 업을 폐지하다시피 전부 중지하고 그 대신 짚신과 미투리를 삼아서 겨우 호구하기 때문에 동민의 생활난을 부르짖는 소리가 창천하던바,
요사이로 가끔 비가 시작되어 다시 시냇물이 회복되었므로 전과 같이 포백업을 시작하고 동민들은 매우 낙관을 하는 모양이라 하더라. - P41

이런 추세 속에서 성북동 ‘성저십리‘에도 주택 붐이 일어났다. 그 실상을 이태준은 「집 이야기」(1935)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성북동과 혜화동에 짓느니 집이다. 작년 가을만 해도 보성고보에서부터 버스종점까지 혜화보통학교 외에는 별로 집이 없었다.
김장배추밭이 시퍼런 것을 보고 다녔는데 올 가을엔 양관), 조선집들이 제멋대로 섞이어 거의 공지(空地) 없는  거리를 이루었다. (안동네인) 성북동도 (・・・)  공터라고는 조금도 없다. - P54

이 쌍다리께의 문인촌 중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다.  이태준은 1933년에 초가집을 사서 들어와 이듬해에 이를 헐고 아담한 한옥을 지었다. 이후 1946년 7월 무렵 월북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문학을 꽃피우고 잡지 - P56

『문장(文章)』을 주관하며 생의 전성기를 여기서  보냈다. 특히 이곳은 근원 김용준, 인곡배정국등자칭 ‘호고일당(好古一黨,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성북동 근현대 문화예술인 거리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집 앞으로 난 길에는 ‘이태준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P57

이태준은 이 집을 지을 때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던 자신의 안목을 유감없이 구현했다. 이태준은 목재부터 생목을 쓰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철원의 고가를 해체한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목수도 고급인력을 썼다며 목수들」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 P58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전에 대어 온다. (…)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기뻐하며 바란다.(『문장』 1권 8호) - P59

이태준의 상고 취미
본래 이태준에게는 뿌리 깊은 상고(尙古) 취미가  있었다. 그의 상고취미는 한마디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인 취미를 이어받은 것으로 그의롤모델은 추사 김정희였다.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이 집 현판으로 새겼다.  - P60

건넌방에 걸린 ‘문향루(聞香樓)‘ 글씨는 ‘향기 맡는 누대‘ 라는 뜻으로 차 마시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추사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 P61

이태준은 「고완」에서 조선백자의 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첫눈에 화려하지 않은 대신 얼마를 두고 보든물려지지 않고, 물려지지 않으니 정이 들고, 정이 드니 말은 없되 소란한 눈과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선 서로 어루만짐을 받고, 옛날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 영원한 긴 시간선에 나서 호연(浩然)해 보게 하고,
그러나 저만이 이쪽을 누르는 일 없이 얼마를 바라보는 오직 천진한심경이 남을 뿐이다. - P63

성장소설 사상의 월야
소설가 이태준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는 아무래도 「달밤」(1933)을꼽아야겠지만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그의 성장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인 사상(思想)의 월야(月夜)」(1946)다.  이를 읽으면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역경을 헤쳐온 어린 시절 이태준의 삶에 무한한 동정과 존경을 보냈고, 그의 문학에 깔려 있는 짙은 인간애는 어린 시절 겪었던아픔을 승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장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 P64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 용담에서 큰 부잣집 서자로 태어났다.
개화에 눈뜬 아버지는 이태준 나이 5세 때인 1909년에 식솔(어머니 ·누나. 외할머니)을 전부 이끌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런데 부친은 가자마자 죽고 말았다. - P64

이에 유족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함경도 청진을 지날 때 임신 중이던 어머니가 배 안에서 누이동생을 낳았다.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청진에 정착했고 외할머니는 강원도집이라는 작은식당을 하면서 살아갔다. 이때 이태준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그런데 8세 되는 1912년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죽었다. - P64

이후 이태준이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외할머니의 극진한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는 과정은 애처로움을 넘어 소년 이태준의 불굴의 의지에 감탄을 보내게 한다. 철원 봉명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나 칭찬해줄 부모가 없는 것이 서러웠고, 새 옷이 없어 누나 결혼식에 가지 못하고 추석날이면 동네 아이들을 피해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 P64

이태준의 문학세계
누가 뭐라 해도, 또 누구나 말하듯 이태준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별이다.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이다. - P67

이태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밤」 「복덕방」 「가마귀」 「밤길」 「돌다리」 같은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주인공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에 가슴이 아려와 책장을 덮고 한동안 빈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모진 세월을 어처구니없는 아픔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인데 전편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는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 P68

그리고 그 문장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패강랭(浿江)」의 "하늘과 물은 함께 저녁놀에 물들어 아득한 장미꽃밭으로 사라져버렸다" 같은 자연에 대한 묘사라든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글쎄요‘ 하고 없는  정을 있는 듯이 웃어 보이니…" 같은 심리 묘사가 나오면 밑줄을 긋게 한다. 특히 이태준의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에서 그 미문(美文)의 진수를볼 수 있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달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패강랭」) - P68

이태준의 문학세계를 말할 때면 으레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립해김기림 · 정지용·박태원 이상 등과 순수예술을 추구한 ‘구인회(九人會)‘의 핵심 멤버였다가, 8·15 해방이 되자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즉 카프와 함께하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뜻밖의 사상의 전환처럼 회자되곤한다. - P68

그러나 이태준의 지향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수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한 카프 방식에 반대하면서도민중적 삶의 운명을 ‘진짜‘ 문학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시대상황이 돌변하면서 이를 적극 실현할 의지를 굳혔을 뿐이다. 최원식 교수의 표현대로 ‘평지돌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당시 이태준의 마음과 결심은 무엇보다도 「해방전후」에 명확히 드러나있다. - P69

그러나 이태준이 1946년 여름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와 월북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족이었다. 그의 문학이 망가진 것은말할 것도 없고 인생 자체가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 P69

차는 다시 떠난다. 객은 모두 다시 눕는다. ‘이곳을 누워서 지나거니!‘ 깨달으니 문득 나의 머리엔 성삼문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세종께서 지금 내가 쓰는 이 한글을 만드실 때 삼문을 시켜 명(明)의한림학사 황찬(黃瓚, 음운학자)에게 음운을 물으러 다니게 하였는데 황학사의 요동 적소(所)에를 범왕반십삼도운(凡往返十三度云)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1, 2왕반도 아니요 13도라 하였으니성삼문의 봉사도 끔직한 것이려니와 세종의 그 억세신 경륜에는 오직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 P71

"근원은 항시 거기는 어떤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 P91

"남에 있었으면 북으로 올라갔을 거고, 북에 있었으면 남으로 내려왔겠지."

일제강점기라는 불우한 시대를 살다가 마침내 희망찬 해방을 맞이했으나 어지러운 해방공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 결과적으로 불행하게 생을마감한 그분들과,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한 지식인들의 삶이 안타깝게 다가오기만 한다. - P92

문장 전 26호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답사하면서 이분들의 ‘호고일당‘으로서 모습만 말하고 정작 이들이 합심하여 혼신의 힘으로 펴낸 『문장(文章)』을 말하지 않는다면 성북동  근현대거리 답사로서 크게 부족한 것이다. - P92

『문장』은 민족문학의 계승과 발전을 기치로 내걸고 1939년 2월에 창간했다. 이태준이 편집주간이었고 발행인은 이태준의 휘문고보 동창생으로 그의 일본 유학을 도와준 김연만이었다. 표지화와 권두화는 주로근원 김용준이 맡았고, 인곡 배정국은 광고주로 지원했다. 『문장』은 성북동 문인들의 합작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매달 『문장』 편집을 위해 수연산방에 모여 술상, 찻상을 앞에 두고 의견을 나누었을 모습을 능히 상상할수 있다. 어쩌면 『문장』이 있어서 우정이 더욱 깊어갔는지도 모른다. - P92

총26호를 펴냈다. 『문장』은 창작(소설), 평론·학예, 시, 수필, 고전번역 등으로 구성 및 편집되었다. 총 26호에 실린 작품 편수는 각각 소설 162, 시 180편,  시조 34편, 수필 183편, 희곡 6편 시나리오 2편, 평론 119편등이다. - P93

이광수·김동인 · 이태준·이기영 · 채만식·한설야·현진건·유진오 ·박태원 · 계용묵. 이효석·김유정·이무영 ·정비석 · 나도향 등 기라성 같은 소설가의 명작이 실렸고, 정지용·김기림 · 김광균·이육사·오장환·백석·신석정·변영노유치환 등 당대 시인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고전문학 번역과논문에는 이병기 최현배·이희승·조윤제 · 양주동, 수필에는 김진섭·이양하·이하윤· 고유섭·김소운·이능화·이극노·김상용 등이 있으니 근대 지성사의 인물들이 대부분 필자 명단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93

『문장』은 2호부터 전선문학선(戰線文學)‘이라는  고정란이 있었다.
여기엔 간혹 일제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이른바 ‘친일문학‘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당시 책 간행의 조건이자 굴레였다. 마치 1970년대 음반 테이프에 ‘건전가요‘가 한 곡 들어가지 않으면 발매할 수 없었던 것과 똑같은 강압이었다. 이태준이 1940년 『문장』(2권 9호)에 기고한 지원병 훈련소의 1일은 어쩔 수 없이 잡지의 생존을 위해 편집인이 희생한글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 P96

그런데 급기야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여 1941년 4월, 『문장』. 『인문평론』ㆍ『신세기』를 병합하고 일본어와 조선어를 반씩 실어 황국신민으로서 황도(道)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조치가 내렸다. 이에 『문장』은불응하고 자진 폐간을 단행했다. - P97

『문장』 마지막호 표지에 ‘폐간호‘라고 굵게 쓰여 있는 세 글자에는 패전을 앞두고 장렬하게 자결하는 장수의 죽음을 보는 것 같은 처연한 비장미가 깃들어 있다. - P97

수화 김환기 예술에서 전통
수화는 1913년 전라도 신안 안좌도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1933년 니혼(日本)대학 미술과에 유학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대학 재학생 시절부터 동경유학생들과 백만회(白蠻會)를 결성하고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벌였다. 백만회라는 이름은 ‘백의민족(白衣民族)‘과  포비슴(fauvism, 야수파)의 ‘야만(野蠻)을 결합한  것이었다. - P105

 <16-IV-70#166>이라는 그의 유명한 점화(點畵)를  출품했다.
화면 전체가 무수한 점들로 가득 찬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을 수화가 재해석한 것이다. 대상의 표현을 ‘맥시멈‘이 아니라 ‘미니멈‘으로 절제하는단순성을 점이라는 형태로 나타냈지만 그 점을 그리면서 수화는 ‘서울의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보고 싶은 얼굴을 그리며, 고향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상상하며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부제를 붙였다.  - P107

이 제목은 그의 중동학교 선배이자 성북동의 시인인 김광섭의 "저녁에"(1969)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P107

길상사의 관음보살상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창건 법회 때 법정 스님이 대시주자인 김자야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자 그는 "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제가 대원각을절에 시주한 소원은 다만 이곳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 P122

1999년 11월 14일 자야는 임종을 앞두고 유언하면서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고 했다. 백석의 시 나와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구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 순애보를 이생진 시인은 「내가 백석이 되어로었다.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자야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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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으로 출판계였다. (…) 입이있어도 말을 못 하였고, 붓이 있어도 글을 못 써온 40년 통한이 뼈에사무쳤거든, 자유를 얻은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인가? 눌렸던 것이 일시에 터진 것이니 세고당연(勢當然, 진실로 당연한 형세)이라,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 무방하리라. - P222

고서점과 헌책방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농부 철학자 윤구병(尹九炳)은 9형제 중 막내로 형님이  일병이부터 팔병이까지 있는데, 바로위윤팔병(尹八炳, 1941~2018)은 본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넝마주이의 왕초이자 빈민운동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한문과일어를 익혔고 사회과학서도 많이 독파해 인생관과 사회관이 뚜렷했다.
그리고 학생운동 하다 수배당해 도망다니는 속칭 ‘도발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도 준 의리로 유명하다. - P226

만 드리고 가려는데 팔병이형 뒤쪽 책꽂이에 서울대 도서관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영인본으로 펴낸 두툼한 장정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3책이 꽂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형님, 저 책이나 내가 사드리고 싶은데요" 하니 정색을하고 안 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값을 후하게 쳐드릴 건데요" 했더니 팔병이형은 찬찬히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요.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 P228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원고료도 못 드렸수 옜수 받아주슈." - P232

선생은 아침이면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있는 옥인동 자택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하셨다. 그래서 통문관 2층 전시실을 상암산방이라 했다. 어느 날 내가 상암산방으로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낡은 책을한 장씩 인두로 반반하게 펴고 계셨다. 선생은 나에게 앉으라는 눈짓을보내고는 "이 일 좀 끝내고"라고 하시며 연신 접힌 책장을 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돌보아주던 낡은 책들이 내 노년을 이렇게 돌봐주고 있다오." - P232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
불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 P242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혹은 밖으로부터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 - P259

‘힘‘ 포스터와 ‘전 사태‘  
1985년 7월 박진화, 손기환, 박불똥 등이 기획한 ‘한국 미술 20대의 힘‘전은 당국의탄압으로 전시장이 폐쇄되어 젊은 미술인들이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 P260

노팅힐  
영국 런던에서는 영화 「노팅힐에도 나온 포르토벨로마켓이 가장 유명한 미술품, 민속품 시장이다. - P269

인사동길 북쪽의 르네쌍스 음악감상실
나의 체험에 입각해보건대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전통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거리.
그러나 내가 인사동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인 1950~60년대 초에 고서점 말고 어떤 문화적 분위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도 증언도 별로 없다. 그래서 나보다 10년 연상으로 『우리네 옛 살림집(열화당2016) 등 생활사 분야에 많은 저서를 펴낸, 친구보다 친한 선배인 김광언형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 P271

인사동의 한정식집
인사동의 한정식집은 과연 서울의 명소로 지칭할 만한 것이었다. 상차림도 훌륭했고 맛도 정갈해 각계각층에서 회식 장소로 이용하면서 인사동을 풍성하게 만든 근거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단가를 맞출 수없어 대부분 문을 닫거나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니 사실 우리 전통 요식업계의 큰 상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에도 선천집의 구순 넘은 박영규 여사가 한정식집의 사명감을 갖고 청탁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는 간소한 밥상을 차려 옛 손님들을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 P276

음식점이란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드시는 분의 마음속에 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이숙희 사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상차림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P277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P286

김지하가 만취한 상태에서 단숨에 써내려간 이 이용악의 시는 행이나연 구분 등이 원문과는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김지하는 ‘내 글씨가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
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음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절 ‘지하형‘의 웅혼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 P293

북한산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산맥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휘감아 내려오는 백두대간 중간지점의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내려오다가 솟구쳐 오른 것이 북한산이고 그 여백이 문득 멈춘 것이 북악산이다. 그래서 서울의 주산(主山)은 북악산이고  조산(祖山)은 북한산이다. - P311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壽峯), 남쪽에 만경대(景臺)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려왔다.
최고봉의 높이 836.5미터, 면적은 약 30만평 (77만 제곱킬로미터)으로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울특별시 도봉구·강북구 서대문구 ·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 양주시 의정부시 지역에 걸쳐있다. - P311

북한산은 지질학적으로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과 절리현상으로 형성된 많은 화강암 준봉들로 이뤄져 있다. 삼각산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상장봉(上將峯),  남쪽으로는 석가봉(釋迦峯)·보현봉(普賢峯)·문수봉(文殊峯) 등이 있고 문수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나한봉(羅漢峯)·비봉(碑峰)의 줄기가 백운대 서쪽  줄기인 원효봉(元曉峯) 줄기와 만난다. 
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 740미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五峰)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하고 있다. - P312

북한산은 서울시민과 수도권 주민에게 홍복(洪福)이 다. 시내에서 차로 30분안에 도착해 한나절 등산을 즐기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런 큰 산을 갖고 있는 대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등산 모임이 있어 나만 해도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초일회, 대학 때친구들의 문우회 멤버로 북한산 등산을 즐기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 P313

숙종 37년(1711)에 완공한 북한산성은 둘레 7,620보의 석성으로 대남문(大南門)·대동문(大同門) 등 13개의 성문, 동장대 · 남장대·북장대 등의 장대(將臺),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軍),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북한산성은 나한봉에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8킬로미터에걸쳐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문도 절반은 남아 있다. - P315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 이로써 한양은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산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 P315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불상은 그 불상이바라보는 곳이 아름다운 전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불상을 뒤로 하고앞을 내다보면 발아래 깔린 서울 시내는 물론 그 너머산세까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서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면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가 바라보인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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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을 말하자면 할 얘기가 너무 많다. 여운형이 1947년 암살되었을 때 그를 따르던 많은 분들이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1945년 잡지『선구(先驅)』가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여론조사를보면 여운형(35%),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 이관술(12%), 김일성 (9%), 최현배(7%), 김규식 (6%), 서재필(5%), 홍남표(5%) 순이었다. - P169

몽양은 명연설가였고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육체미를 과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는 믿음직한 인간미가 있어 대중의 사랑과 지지를받았다. 소설가 이태준은 「악수」라는 글에서 "맹인이라도 몽양 선생의악수는 악수만으로도 몽양일 줄 알 것이다"라고 했다. 여운형이 살던 집은 계동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에 있었다. - P169

백인제는 평북 정주 태생이다. 조상 대대로 관서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재학 내내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그러나 3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했다가 10개월간 투옥되어 퇴학을 당했다. 다행히 학교 측의 노력으로 다시 복학해 1921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전과가 있어서 총독부의원에서 2년간 복무해야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면허가 없던 탓에 총독부의원에 근무하면서 의사들이 기피하는 마취를 2년간 맡았는데 이때 습득한 마취 기술이 외과의사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 P170

현상윤 집터
만보자는 다시 걷는다. 북촌로 비탈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이목화랑이 나오고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기당(堂) 현상윤(相允,1893~1945)이 살던  ‘현상윤 집터‘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현상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송진우, 김성수 등과 가깝게 지낸 인연으로 귀국 후중앙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및 민족 대표와 학생단체 사이의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여 2년간 옥살이도 했다. - P177

조선귀족회
조선귀족은 1910년에 강제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가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내린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에 의거해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와  한일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봉작하고자 만들어낸 특수 계급이다. - P181

처음 작위를 받은 수작자는 76명 (후사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이고 1924년에 추가로 수작한 이항구, 수작자의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 등 총 158명이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았다. 처음 수작한 76명 가운데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유길준등 8명이다. - P181

최고의 수혜자인 후작으로는 이재완·이재극. 이해창 이해승 · 윤택영·박영효 등과 백작에서 승작된 이완용이 있으며, 백작으로는 이지용∙민용린과 자작에서 승작한 송병준·고희경 등이 있다. - P181

수작자 중에는 반일활동이나 형사처벌로 박탈되거나 습작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김사준·이용직·김윤식·윤치호·민태곤 등은 반일적활동을 했거나 충순이 결여되었다고 작위가 박탈되었다. 김가진은 작위를 반납하지 않고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했고 습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P181

또 민영린과 김병익은 아편 흡입죄로 실형을 받은 이유로, 조민희는도박으로 파산을 선고받은 이유로 예우가 정지되었으며, 이지용은 도박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예우가 잠시 정지되었다가 해제되었다. 조동희는 집안  내 재산 분쟁으로 두 차례 예우 정지와 해제를 반복했다. - P181

일제가 조선귀족에게 베푼 경제적 혜택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후작50만 엔에서 남작 25,000엔에 해당하는 ‘은사(恩賜)공채증권‘이 교부됐다.  이 공채에는 연리 5%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됐다. - P182

그리고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및 삼림 불하 과정에서 무상으로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 또한 일제는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을 제정하여 세습재산을 설정하고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가회동 일대의대저택들이 왜 조선귀족들의 소유가 되었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 P182

조선귀족 수작자와 습작자는 1948년 9월에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와 제4조 1항에 의해 당연범으로 처벌 대상이 되었다. - P182

이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 신흥주택 건립이 붐을 이루어 많은 집이 지어졌지만 주택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동아일보』 1939년 4월21일자는 ‘집 없이도 사는 경성인‘이라는 제목하에 "물경(놀랍게도) 1만1천 동부족, 아무리 신축해도 부족이 연 2천 호, 주택난 실정의 첫 통계" 라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P189

이(통계)에 의하면 지난 3월 말 현재 경성부 주택 총수는 82,701동, 여기 거주자 148,656세대인데 차가(借家) 호수는 15,515호이고 가옥 소유자는 조선인 50,504인, 일본 내지인 8,319인, 기타 155인, 법인 523인이다. (...) 경성 인구 증가율은 연 3만 인의 증가로 적어도 매년 4천 동의 신축이 필요한데 지난 13년간 신축 가옥은 3,432호, 시가지 계획으로 철거된 가옥이 1,649호이니 결국 연 2,000호의 부족 상태다. - P189

북촌 한옥밀집지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밀집지구의 풍경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다. - P191

건축왕 정세권
정세권(鄭世權)은 1888년 경상남도 고성 하이면에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고 졸업 직후인 1905년 참봉에 제수되었다. 1910년에 하이면 면장이 되었으나 2년 만에 사임하고 한동안하이면에서 생활하다 1919년 서울로 올라와 1920년 9월 9일 건양사를설립했다. - P196

정세권은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해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특유의 통찰력으로 토지를 매입해 대단위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 및 실행하며 도시 개발과 주택공급에 영향력을 행사한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그는 1929년 『경성편람(京城便覽)』에서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했다고 밝혔다. 또 한옥을 더욱 개선하여1934년에는 ‘건양주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개량 한옥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그대로 건설했다. 당시는 개발업자들을 흔히 청부업자, 집장사라고 불렸지만 정세권은 북촌·익선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왕십리 · 행당동 등 서울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하면서 ‘건축왕‘이되었다. - P196

이렇게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려던 추세에 정세권은 도시형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해 오늘날북촌 한옥마을을 지켜낸 것이다. 그는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식민지 민족자본가이자 민족운동가였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일제에 맞서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언론인 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 등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 P197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 P197

이처럼 민족운동을 지원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고 뚝섬의 토지 3만 5천여 평을 강탈당하기도 하면서 정세권의주택사업은 자연히 쇠락의 길에 빠졌다. 8·15해방 이후에는 행당동에거주했는데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때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리고 1950년대 말 고향 고성으로 낙향하여지내다가 1965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년(2022) 5월 3일 경남고성군은 정세권의 생가를 정비한 준공식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그의위업을 기렸다. - P197

양반집으로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율곡 이이의 집 (인사동 137번지), 정암조광조의 집(낙원동 9번지),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의 집(낙원동 12번지), 충정공 민영환의 집(견지동 27-2번지) 등이 있어 집터 앞에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P206

그러다 1910년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이 지역은 크게 건지동, 관훈동, 인사동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처음 등장한 인사동이라는 이름은 기존 관인방의 인(仁)자와 대사동의 사(寺)자를 조합해서 생긴 것으로, 인사동네거리의 동쪽낙원동까지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 P208

기미독립선언서태화관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33인(지방에 있는 4인은 불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이날 태화관을예약한 것은 손병희(孫秉熙, 1861~1922)였다.  손병희에게는 몇 해 전에 후처로 들인 기생 출신 주옥경(朱鈺卿, 1894~1982)이 있었는데 그녀는 14세에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가 기예를 배우고 19세에 서울로 올라와 명월관에서 근무했다. 기명은 산월(山月) 이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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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삼거리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건물은 서촌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은행 지점치고는 대단히 중후한데, 이는 전신인 상업은행 시절엔 청와대의 주거래 은행이어서 여느 지점과는 격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 P77

자교교회  
통인시장 맞은편 창성동에 있는 자교교회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 캠벨이 내자동배화학당 기도실에 처음 설립한 뒤 1922년 현재의 터전에 2층 양옥의 붉은 벽돌집으로 세운 것이다. 어느덧 100년을 맞이한 오래된 교회다. - P81

신교 옛 모습  
신교동의 ‘신교‘는 선희궁 터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영조 40년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으로 선희궁을 지으면서 새 다리를 놓고 신교라 불렀다. 1920년 개천 복개 때 사라지고 지금은터만 남았다. - P82

 국립서울농학교 내 선희궁 터  
선희궁은 훗날 칠궁으로 합사되었지만 사당 건물 자체는 국립서울농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이름도 선희궁 터로 표시돼 있다. - P83

천막교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초량동 항도초등학교에 설치된 천막교실 모습이다. 내가 다니던 청운초등학교 건물 또한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2학년 때 국립서울농학교 안에 설치된 이런 천막학교에서 공부했다. - P84

국립서울맹학교  
신교동 안동네에는 국립서울농학교뿐만 아니라 국립서울맹학교도 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로 서울맹아학교라고 불리다가 2002년에 국립서울맹학교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85

청운초등학교 
청운초등학교는 제법 명문이었다. 나와 같은 37회 동창생으로는 개그맨 전유성과 여성 최초의 지방법원 부장판사였던 이영애 전 판사가 있다. - P86

동창생으로는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의 주인장이기도 한 개그맨 전유성이 맹활약을 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법조계에서 유리천장을 뚫고여성 최초로 지방법원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 교수가 된 이영애 전 판사도 동창이다. 6학년 때는 모의고사가 끝나면 성적순으로 방(膀)이 붙었는데 나는 항상 6반 이영애와 9반 이영애 사이에 있어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물어보았더니 37회 동기는 맞지만몇 반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 P87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후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왼쪽으로 난 가파른 비탈길에 있는 그윽한 골짜기였다. 여기에는 김상용의 저택이 있었는데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 P89

원래 이름은 푸를 청(靑)과 단풍 풍(楓) 자의 청풍계(楓溪)였으나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계(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린후 바뀌었다. 
청풍계 더 가까이에는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 뜻을 기려 주희의 글씨를 집자해 새긴 ‘백세청풍(百世淸風)‘ 이라는 암각 글씨(청운기 52-111번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 P91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은 칠궁 담장과 맞대고 살면서 이 일대를 노래한 「근가십영」에서 ‘우리 형님이 청풍계 태고정을 지었다‘고 했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을 비롯한 수(壽)자 돌림 5명과 증손자 김창집을 비롯한 창(昌) 자 돌림 6명이 모두 출세하여 이 5 6창‘의 안동 김씨가문은 ‘장동 김씨‘라고 따로 불리었고, 김창집의 4대손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조선 최대의 세도가문을 이루었다. 김상헌의집터인 칠궁 담장 밖 효자동 무궁화동산(효자로 97 건너편)에는 김상헌 시비가 세워져 있다. - P92

청운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명사들이 많이 살았다. 청운초등학교 자리에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태어나  자하문로 길가(청운동 123번지)에표지석이 놓여 있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에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집터가 있다. 성수침의 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이니 단짝으로 유명한 송강과 우계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 살면서 얼마나 정을 나누었을까 안 보아도 본 듯하다. - P92

경복고등학교 뒤편 창의문로 큰길 건너편 북악산 기슭에는 중종 때 남곤(南袞)이 살던 집이 있었다. 남곤은  심정(沈貞)과 함께 기묘사화를일으킨 장본인으로  벽초의 『임꺽정』에서 무수한 흉떨림을 당했다. 이들을 미워하여 작은 새우로 만드는 젓갈을 ‘곤쟁(袞貞)이 젓‘이라고 하여 소인배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 P93

정선의 <대은암도> 
대은암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의 집에 있던 큰 바위로, 승지가 된 남곤이업무에 바빠 함께 어울릴 수 없게 되자 그의 친구 박은이 크게 은거했다는 뜻으로 ‘대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 P94

그러나 이 설은 재고될 여지가 있다. 근래의 역사학계 연구를 보면 기묘사화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중종 본인이었다. 남곤의 경우 실제로는 김종직의 일파로 훈구파이면서도 사림파와 가까웠던 인물이고,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기묘사화 당시에도 조광조의 처벌을 주장하긴 했지만 사사에는 반대하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P94

동농은 청풍계 김상용의 후손으로 일찍이 관로에 진출해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독립협회의 위원으로선임되어 독립문에 걸려 있는 한자와 한글의 이름패를 쓴 명필이기도했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지낼 때 창덕궁 후원 공사를 차질 없이수행한 공로로 고종이 목재를 하사해 이듬해에 이곳에 백운장(白雲莊)이라는 한옥과 몽룡정(夢龍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 P98

동농 김가진의 장례식
동농 김가진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 지 3년 뒤인 19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임시정부는최고 원로였던 동의 장례식을 이처럼 성대하게 치렀다. - P99

스스로 충청도 관찰사로 좌천해 지방으로 내려갔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제2대 회장으로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고 나섰다. 1910년 강제한일합병 후 일제가 예우 차원에서 남작 작위를 수여하여 받았다. - P99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0월, 동은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허름한 늙은이로 위장하고서 육로로 몰래 빠져나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선원 김상용의 후손다운 애국심과 기개가 느껴지는 망명길이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동농의 망명 사실을보도하면서 그가 망명하는 심정을 노래한 한시 2편까지 실었다. (임형택「동농 김가진, 그의 한시」, 『역사비평』 2022년 가을호) - P99

나라가 깨지고 임금도 잃고 사직이 무너졌으되
치욕스런 마음으로 죽음을 참으며 여태껏 살아왔는데
늙은 몸이 상기도 하늘 찌를 뜻을 품어
단숨에 하늘 높이 몸을 솟구쳐서 만리길을 떠났노라 - P100

國破君亡社稷傾
包羞忍死至今生
老身尙有沖霄志
一舉雄飛萬里行

올해(2022)는 등농 서거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 P101

안평대군은 풍류를 좋아하여 부암동 무계정사와 용산 담담정을 지은바 있는데 이곳 수성동에도 별서를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성동계곡에서는 친형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낭만의 왕자 안평대군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 P111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다. 단경왕후는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연산군 5년(1499)에 진성대군과 결혼했는데 그가 왕(중종)이 되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고 폐위되어 궁궐에서쫓겨났다. - P111

사연인즉 아버지 신수근은 권세가문의 명신으로 그의 누이동생은 연산군의 비였다. 일설에는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의 주모자인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물어보며 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내가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은 못하겠다"고 거절하자 박원종은 자객을 보내 신수근을 철퇴로 쳐 죽였다. 그래서 단경왕후는 졸지에 역적의딸이 되었다. - P111

단경왕후는 명종 12년(1557)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나 양주에 있는 친정집 거창 신씨 묘역에 묻혔다. 그후 영조 15년(1739)에 복위됨으로써 새로이 왕릉으로 조성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수근 또한 복권되어 사람으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와 같은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 P112

중인 시인인 장혼(張混)도 송석원 곁으로 이사해 집을  짓고 이이엄(而巳嚴)이라 했다. 이후 중인들이 이  일대에 모여들었다. 중인문학을 위항문학(委巷文學),  또는 여항문학(巷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꼬불꼬불한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나 중인들은 좁은 골목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 P123

벽수산장의 윤덕영 
친일귀족 윤덕영은 나라를 일제에 넘긴 공로로 막대한 하사금을 받아 송석원과 그 일대의 집을 모두 사들이고 벽수산장을 지었다. ‘벽수산장‘이라는 글씨 옆에는 추사가 쓴 ‘송석원‘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 P127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오늘 저는 선생님께 크게 배운 것이 있어요.
그건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라는 점요. 저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거든요. 사실 저는 인사동길이 S자로 휘었다는 것을 여태 의식하지 못했어요. 제가 느끼는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나온다는 것도요." - P137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불우하기는 구본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급성폐렴으로 누하동 이 집에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벗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푸른 머리의 여인> <여인>이라는 주옥같은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예술가 유전자는 후손에게 전해져 외손녀 강수진이 희대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 P143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어렸을때에 대 아래에 사는 원수 권율의 집에 처가살이하였으므로 자신의 호를) 필운이라 불렀다.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백사의 글씨다. 대곁 인가에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이 봄철 꽃구경할 곳으로 반드시 먼저 여기를 꼽았다. - P144

인왕산은 2018년 5월부터 완전 개방되어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등반할 수 있게 되었다. 청와대의 경호·군사 목적 시설물이 배치돼 일반인접근이 부분적으로 통제된 인왕산 지역을 완전히 개방하기에 앞서 인왕산의 폐쇄적인 군사시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함께 검토하기 위해2018년 3월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나, 건축가 승효상이 함께 등반에 나섰다. - P147

이때 본래 초소란 사방 경계를 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전망대로 활용하는 것이 역사성도 살리는 방안이라고 건의하여 지금 등반객들이 가장 애용하는 ‘초소책방‘이 탄생했다. - P147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을 배울 때 소년 어니스트가 바라보며 살았다는 얼굴바위보다 우리 인왕산의 부처바위가 더 미덥고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인왕仁王)이 부처님 세계의 수호상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우리 부처바위가 서울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바위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다 산자락에 서울성곽이 둘러 있어 더 믿음이 갔다. - P149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 P152

북촌이라고 하면 우리는 막연히 조선왕조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동네를 떠올리기 쉽다. 북촌이라는 말의 유래 때문이다. 예부터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남쪽 남산 아랫동네는 남촌, 북쪽 동네는 북촌이라고 불러왔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三色)이 섞여살았다. - P154

근대의 지성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살면서 북촌에서는 개화사상이일어나고, 갑신정변이 모의되었고, 동학·대종교·불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동아일보』 창간되고, 진단학회 · 조선어학회 · 조선민속학회 등이 창립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대표적인 정치인인 우익의 송진우,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살았으니 북촌은 우리 개화기와 근대 지성의 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55

왜 공공기관 건물의 정원은 다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되었는가를조사해보니 이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관에서 건축비 예산을 잡을 때조경 비용을 아주 낮게 책정하고 또 관급공사는 이렇게 해야 뒷말이 없어 ‘공무원표‘로 귀착된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일컬어 돌과 영산홍과 회양목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돌·영·회‘라고 한다나. - P158

박영효는 1931년 이광수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내 일가인 박규수대감 집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박영교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 집 사랑에서 모였지요. - P159

재동 백송을 보고 헌법재판소를 나오면 바로 재동초등학교 네거리다.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 (灰洞)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洞)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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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토박이
1993년, 서울시는 정도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조사했다. 선정 기준을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계속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으로 확정해 조사한바, 서울시민 1,100만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 명에 불과했다.
- P59

나는 그중 한 명인 서울토박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에도 사대문 안 서울 알토박이를 조사한다며 윤보선 대통령도 했고 누구도 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했다. 그때 큰아버지께 우리 집안도신고하자고 했더니 "그런 거 신고하면 주민세만 더 내라고 할지 모르니쓸데없이 신고할 생각하지 마라" 하셔서 못했다. 당시 결과는 모르지만 아마도 몇 천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 P60

갑자기 서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북촌의 가회동 한옥마을이요즘 말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자 여기에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내세우기 위해 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가 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북촌의 시가가 올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생기고 들어갈 여지가 좁아지자골목골목 전통마을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쪽으로눈길을 돌리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다. - P61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https://naver.me/Ft8uF08j

인왕산 아랫동네 서촌 
조선시대에 서촌은 한양의 서쪽인 서소문 정동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요즘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른다. 필운대에서 백운동까지 인왕산 자락 아랫동네를 옛날엔 장동이라고 불렀다. - P62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소녀>는 생활은 가난했지만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이 시절 골목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소녀의 마음을 가장 잘표현한 시는 이오덕 선생이 펴낸 『일하는 아이들』에 실려 있는 문경 김룡초등학교 6학년 이후분 어린이의 「아기 업기」이다.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P69

선생님은 비록 이름을 세상에 널리 펼치시지 못했지만 이 세상의속물적인 부와 명성을 뛰어넘는 더 큰 사도(道)를 이루셨습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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