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을 말하자면 할 얘기가 너무 많다. 여운형이 1947년 암살되었을 때 그를 따르던 많은 분들이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1945년 잡지『선구(先驅)』가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여론조사를보면 여운형(35%),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 이관술(12%), 김일성 (9%), 최현배(7%), 김규식 (6%), 서재필(5%), 홍남표(5%) 순이었다. - P169
몽양은 명연설가였고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육체미를 과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는 믿음직한 인간미가 있어 대중의 사랑과 지지를받았다. 소설가 이태준은 「악수」라는 글에서 "맹인이라도 몽양 선생의악수는 악수만으로도 몽양일 줄 알 것이다"라고 했다. 여운형이 살던 집은 계동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에 있었다. - P169
백인제는 평북 정주 태생이다. 조상 대대로 관서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재학 내내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그러나 3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했다가 10개월간 투옥되어 퇴학을 당했다. 다행히 학교 측의 노력으로 다시 복학해 1921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전과가 있어서 총독부의원에서 2년간 복무해야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면허가 없던 탓에 총독부의원에 근무하면서 의사들이 기피하는 마취를 2년간 맡았는데 이때 습득한 마취 기술이 외과의사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 P170
현상윤 집터 만보자는 다시 걷는다. 북촌로 비탈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이목화랑이 나오고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기당(堂) 현상윤(相允,1893~1945)이 살던 ‘현상윤 집터‘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현상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송진우, 김성수 등과 가깝게 지낸 인연으로 귀국 후중앙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및 민족 대표와 학생단체 사이의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여 2년간 옥살이도 했다. - P177
조선귀족회 조선귀족은 1910년에 강제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가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내린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에 의거해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와 한일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봉작하고자 만들어낸 특수 계급이다. - P181
처음 작위를 받은 수작자는 76명 (후사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이고 1924년에 추가로 수작한 이항구, 수작자의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 등 총 158명이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았다. 처음 수작한 76명 가운데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유길준등 8명이다. - P181
최고의 수혜자인 후작으로는 이재완·이재극. 이해창 이해승 · 윤택영·박영효 등과 백작에서 승작된 이완용이 있으며, 백작으로는 이지용∙민용린과 자작에서 승작한 송병준·고희경 등이 있다. - P181
수작자 중에는 반일활동이나 형사처벌로 박탈되거나 습작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김사준·이용직·김윤식·윤치호·민태곤 등은 반일적활동을 했거나 충순이 결여되었다고 작위가 박탈되었다. 김가진은 작위를 반납하지 않고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했고 습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P181
또 민영린과 김병익은 아편 흡입죄로 실형을 받은 이유로, 조민희는도박으로 파산을 선고받은 이유로 예우가 정지되었으며, 이지용은 도박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예우가 잠시 정지되었다가 해제되었다. 조동희는 집안 내 재산 분쟁으로 두 차례 예우 정지와 해제를 반복했다. - P181
일제가 조선귀족에게 베푼 경제적 혜택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후작50만 엔에서 남작 25,000엔에 해당하는 ‘은사(恩賜)공채증권‘이 교부됐다. 이 공채에는 연리 5%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됐다. - P182
그리고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및 삼림 불하 과정에서 무상으로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 또한 일제는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을 제정하여 세습재산을 설정하고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가회동 일대의대저택들이 왜 조선귀족들의 소유가 되었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 P182
조선귀족 수작자와 습작자는 1948년 9월에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와 제4조 1항에 의해 당연범으로 처벌 대상이 되었다. - P182
이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 신흥주택 건립이 붐을 이루어 많은 집이 지어졌지만 주택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동아일보』 1939년 4월21일자는 ‘집 없이도 사는 경성인‘이라는 제목하에 "물경(놀랍게도) 1만1천 동부족, 아무리 신축해도 부족이 연 2천 호, 주택난 실정의 첫 통계" 라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P189
이(통계)에 의하면 지난 3월 말 현재 경성부 주택 총수는 82,701동, 여기 거주자 148,656세대인데 차가(借家) 호수는 15,515호이고 가옥 소유자는 조선인 50,504인, 일본 내지인 8,319인, 기타 155인, 법인 523인이다. (...) 경성 인구 증가율은 연 3만 인의 증가로 적어도 매년 4천 동의 신축이 필요한데 지난 13년간 신축 가옥은 3,432호, 시가지 계획으로 철거된 가옥이 1,649호이니 결국 연 2,000호의 부족 상태다. - P189
북촌 한옥밀집지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밀집지구의 풍경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다. - P191
건축왕 정세권 정세권(鄭世權)은 1888년 경상남도 고성 하이면에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고 졸업 직후인 1905년 참봉에 제수되었다. 1910년에 하이면 면장이 되었으나 2년 만에 사임하고 한동안하이면에서 생활하다 1919년 서울로 올라와 1920년 9월 9일 건양사를설립했다. - P196
정세권은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해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특유의 통찰력으로 토지를 매입해 대단위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 및 실행하며 도시 개발과 주택공급에 영향력을 행사한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그는 1929년 『경성편람(京城便覽)』에서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했다고 밝혔다. 또 한옥을 더욱 개선하여1934년에는 ‘건양주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개량 한옥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그대로 건설했다. 당시는 개발업자들을 흔히 청부업자, 집장사라고 불렸지만 정세권은 북촌·익선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왕십리 · 행당동 등 서울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하면서 ‘건축왕‘이되었다. - P196
이렇게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려던 추세에 정세권은 도시형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해 오늘날북촌 한옥마을을 지켜낸 것이다. 그는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식민지 민족자본가이자 민족운동가였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일제에 맞서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언론인 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 등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 P197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 P197
이처럼 민족운동을 지원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고 뚝섬의 토지 3만 5천여 평을 강탈당하기도 하면서 정세권의주택사업은 자연히 쇠락의 길에 빠졌다. 8·15해방 이후에는 행당동에거주했는데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때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리고 1950년대 말 고향 고성으로 낙향하여지내다가 1965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년(2022) 5월 3일 경남고성군은 정세권의 생가를 정비한 준공식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그의위업을 기렸다. - P197
양반집으로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율곡 이이의 집 (인사동 137번지), 정암조광조의 집(낙원동 9번지),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의 집(낙원동 12번지), 충정공 민영환의 집(견지동 27-2번지) 등이 있어 집터 앞에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P206
그러다 1910년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이 지역은 크게 건지동, 관훈동, 인사동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처음 등장한 인사동이라는 이름은 기존 관인방의 인(仁)자와 대사동의 사(寺)자를 조합해서 생긴 것으로, 인사동네거리의 동쪽낙원동까지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 P208
기미독립선언서태화관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33인(지방에 있는 4인은 불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이날 태화관을예약한 것은 손병희(孫秉熙, 1861~1922)였다. 손병희에게는 몇 해 전에 후처로 들인 기생 출신 주옥경(朱鈺卿, 1894~1982)이 있었는데 그녀는 14세에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가 기예를 배우고 19세에 서울로 올라와 명월관에서 근무했다. 기명은 산월(山月) 이었다. - P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