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으로 출판계였다. (…) 입이있어도 말을 못 하였고, 붓이 있어도 글을 못 써온 40년 통한이 뼈에사무쳤거든, 자유를 얻은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인가? 눌렸던 것이 일시에 터진 것이니 세고당연(勢當然, 진실로 당연한 형세)이라,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 무방하리라. - P222
고서점과 헌책방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농부 철학자 윤구병(尹九炳)은 9형제 중 막내로 형님이 일병이부터 팔병이까지 있는데, 바로위윤팔병(尹八炳, 1941~2018)은 본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넝마주이의 왕초이자 빈민운동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한문과일어를 익혔고 사회과학서도 많이 독파해 인생관과 사회관이 뚜렷했다. 그리고 학생운동 하다 수배당해 도망다니는 속칭 ‘도발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도 준 의리로 유명하다. - P226
만 드리고 가려는데 팔병이형 뒤쪽 책꽂이에 서울대 도서관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영인본으로 펴낸 두툼한 장정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3책이 꽂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형님, 저 책이나 내가 사드리고 싶은데요" 하니 정색을하고 안 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값을 후하게 쳐드릴 건데요" 했더니 팔병이형은 찬찬히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요.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 P228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원고료도 못 드렸수 옜수 받아주슈." - P232
선생은 아침이면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있는 옥인동 자택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하셨다. 그래서 통문관 2층 전시실을 상암산방이라 했다. 어느 날 내가 상암산방으로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낡은 책을한 장씩 인두로 반반하게 펴고 계셨다. 선생은 나에게 앉으라는 눈짓을보내고는 "이 일 좀 끝내고"라고 하시며 연신 접힌 책장을 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돌보아주던 낡은 책들이 내 노년을 이렇게 돌봐주고 있다오." - P232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 불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 P242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혹은 밖으로부터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 - P259
‘힘‘ 포스터와 ‘전 사태‘ 1985년 7월 박진화, 손기환, 박불똥 등이 기획한 ‘한국 미술 20대의 힘‘전은 당국의탄압으로 전시장이 폐쇄되어 젊은 미술인들이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 P260
노팅힐 영국 런던에서는 영화 「노팅힐에도 나온 포르토벨로마켓이 가장 유명한 미술품, 민속품 시장이다. - P269
인사동길 북쪽의 르네쌍스 음악감상실 나의 체험에 입각해보건대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전통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거리. 그러나 내가 인사동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인 1950~60년대 초에 고서점 말고 어떤 문화적 분위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도 증언도 별로 없다. 그래서 나보다 10년 연상으로 『우리네 옛 살림집(열화당2016) 등 생활사 분야에 많은 저서를 펴낸, 친구보다 친한 선배인 김광언형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 P271
인사동의 한정식집 인사동의 한정식집은 과연 서울의 명소로 지칭할 만한 것이었다. 상차림도 훌륭했고 맛도 정갈해 각계각층에서 회식 장소로 이용하면서 인사동을 풍성하게 만든 근거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단가를 맞출 수없어 대부분 문을 닫거나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니 사실 우리 전통 요식업계의 큰 상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에도 선천집의 구순 넘은 박영규 여사가 한정식집의 사명감을 갖고 청탁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는 간소한 밥상을 차려 옛 손님들을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 P276
음식점이란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드시는 분의 마음속에 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이숙희 사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상차림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P277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P286
김지하가 만취한 상태에서 단숨에 써내려간 이 이용악의 시는 행이나연 구분 등이 원문과는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김지하는 ‘내 글씨가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 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음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절 ‘지하형‘의 웅혼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 P293
북한산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산맥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휘감아 내려오는 백두대간 중간지점의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내려오다가 솟구쳐 오른 것이 북한산이고 그 여백이 문득 멈춘 것이 북악산이다. 그래서 서울의 주산(主山)은 북악산이고 조산(祖山)은 북한산이다. - P311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壽峯), 남쪽에 만경대(景臺)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려왔다. 최고봉의 높이 836.5미터, 면적은 약 30만평 (77만 제곱킬로미터)으로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울특별시 도봉구·강북구 서대문구 ·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 양주시 의정부시 지역에 걸쳐있다. - P311
북한산은 지질학적으로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과 절리현상으로 형성된 많은 화강암 준봉들로 이뤄져 있다. 삼각산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상장봉(上將峯), 남쪽으로는 석가봉(釋迦峯)·보현봉(普賢峯)·문수봉(文殊峯) 등이 있고 문수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나한봉(羅漢峯)·비봉(碑峰)의 줄기가 백운대 서쪽 줄기인 원효봉(元曉峯) 줄기와 만난다. 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 740미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五峰)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하고 있다. - P312
북한산은 서울시민과 수도권 주민에게 홍복(洪福)이 다. 시내에서 차로 30분안에 도착해 한나절 등산을 즐기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런 큰 산을 갖고 있는 대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등산 모임이 있어 나만 해도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초일회, 대학 때친구들의 문우회 멤버로 북한산 등산을 즐기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 P313
숙종 37년(1711)에 완공한 북한산성은 둘레 7,620보의 석성으로 대남문(大南門)·대동문(大同門) 등 13개의 성문, 동장대 · 남장대·북장대 등의 장대(將臺),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軍),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북한산성은 나한봉에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8킬로미터에걸쳐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문도 절반은 남아 있다. - P315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 이로써 한양은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산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 P315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불상은 그 불상이바라보는 곳이 아름다운 전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불상을 뒤로 하고앞을 내다보면 발아래 깔린 서울 시내는 물론 그 너머산세까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서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면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가 바라보인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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