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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나크와─어두워진 후 매일 밤─
꿈같은 착란 상태에서 싸움을 합니다.
그 어렴풋한 곳에서 나는 채소를 먹이고
불을 피우는 데 스나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만일 부점을 만나면, 그날,
단 한 순간에(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조용히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루이스 캐럴
<스나크 사냥>, 여덟 장章으로 이루어진 사투

그날 저녁까지만 해도 지도는 아직 공백이었고, 예정된 유혈 사태는 단 하나뿐이었다. 거기서 죽어갈 사람의 이름도 정해져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정된 행동, 예정된 운명에 따를 뿐, 변경의 여지는 없을 듯했다.

후리소데
공식 석상에 입고 나가는 일본 전통 복장

조젯georgette
촘촘하게 꼰 명주실로 오글오글하게 짠 얇은 천

사냥이 취미인 고향의 오빠는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하나, 제대로 된 사격장의 회원으로 가입할 것. 둘, 차는 벤츠나 볼보로 바꿀 것. 셋, 그 차에 탄약을 종이 케이스째로 수납할 수 있는 완충재가 든 전용 박스를 달 것.

아까 주차장에서 느꼈던 화약 냄새. 그건 트렁크 안에서 났던 게 아니다.

게이코의 마음속에서 났던 것이다.

"마치 다시는 못 만날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오리구치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래?"

"그래요. 내일 밤에는 돌아오시는 거죠?"

"물론이지. 그럴 생각으로 돌아올 비행기 티켓도 예약해 두었는걸. 이벤트 준비를 시작해야 하잖아.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는데 쉴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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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을 쥐려면 박작성을 손에 넣어라

단둥은 (신)의주와 붙어 있다. 그래서 『고려사』 등에 "압록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가는 곳에 있었다"라고 묘사된 고구려 국내성의 후보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국내성을 의주 부근 어딘가로 믿는 게 보통이어서 단둥이 바로 국내성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1965년까지 안동安東이라 불렸던 이 도시는 사서를 살펴보면 국내성과 다른 도시였다고 보기 쉬웠다. 지안과는 달리 연행사 등이 두루 다녔는데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흔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박작성은 당의 안동도호부 치하에 있다가 8세기 초쯤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기록에 나오지는 않으나 732년에 발해가 서해를 건너 당의 산동반도에 있는 등주를 공격했을 때, 아마 이곳에서 병력을 모아 출정시켰을 것이다. 발해의 강역으로 볼 때 중국으로 대규모 수군을 출정시킬 수 있는 곳은 압록강 어귀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칠 때마다 수군을 출정시킨 곳이 등주였으니 고구려도 하지 못한 복수를 발해가 해낸 셈이다.

"6·25 전쟁은 한반도 내부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야욕을 드러내 개입하여 북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침략하려 했다. 그래서 용맹무쌍한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조선을 지키고 중국을 지켰다"라는 메시지이다.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한국사의 모든 전쟁을 다루기는 했지만, 전시의 3분의 2 이상이 6·25 전쟁에 맞춰져 있다)이 "6·25 전쟁은 무력으로 동족을 살육해서라도 적화통일을 이루려는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돕고, 우리 국군이 목숨 바쳐 싸워서 대한민국을 지켰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밤이 되면 묘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다리의 중간쯤이 끊어진 듯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둥은 현대 도시답게 밤에도 야경이 휘황찬란한데, 전력난을 겪는 북한은 대부분의 조명을 끄기 때문에 북한 관리구역인 다리 중간부터 시꺼멓게 바뀌어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때는 이 풍경이 정반대였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문화대혁명 등에 시달리던 중국 단둥의 불은 꺼져 있고, 신의주의 불빛은 찬란했다고 한다. 역사는 때로 반전된다. 그러면서 반복된다.

국내성은 어디인가?

퉁화 일대가 옛 고구려와 발해의 땅인데, 특별히 지안을 살펴보는 까닭은 그곳이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사실 삼국의 역사는 확신할 수 없는 게 많다. 각 나라에서 역사를 남겼지만 전해지지 않으며, 삼국이 망하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 쓰인 고려의 사서들과 중국, 일본의 자료에 겨우 의존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그래도 400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어야 할 듯하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4세기 말부터는 고구려의 힘이 치솟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왕에 이르는 약 140년은 고구려의 최전성기가 되었고, 한국 역사상 주변 국가들에 가장 큰 국력을 떨쳤던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고구려는 이미 한계를 드러낸 수도 방위 문제를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했다. 첫째는 요동을 차지한 것이고, 둘째는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이제 적들은 요하를 건너고, 요동반도를 꿰뚫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서 한참을 들어와야만 수도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수와 당의 무지막지한 침공을 잇따라 물리칠 수 있었던 데는 이 천도의 효과도 컸다. 하지만 국내성이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는 3경 체제라 해서 평양과 함께 국내성과 한성을 국가의 중심지로 삼고 특별 관리 했다.

고구려의 역사는 끝났다. 그러면 국내성의 역사도 끝났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땅에 9도독부 42주 100현을 설치하고, 국내성 - 지안에는 가물주도독부를 두었다. 그리고 약 반세기가 지날 무렵, 고구려의 후예들이 지안을 다시 차지했다. 발해였다.

(압록강을 넘어서 탈출하는 탈북자들을 막고 돌려보내기 위한 검문소의 설치, 2019년 지안에 세워진 윈펑雲峰검문소는 중국 유일의 5G 검문소로, 드론, 열추적 모니터, 가상현실 추적통제장치 등 첨단기술을 총동원해 죽음을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을 샅샅이 살핀다).

고구려의 영광과 패망의 역사를 읽으며 가슴 뛰어본 적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의 변두리 소도시로 남은 지안시에 남다른 감회가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물론 낭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며, 도시는 역사를 넘어서 계속 살아간다. 고구려의 국내성, 발해의 서경압록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안시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단순한 감상 이상의 뭔가를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땅에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갈 디딤돌이 될 것이다.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쏘아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고,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고,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룽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간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과 닮았지만, 다른 꼴이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용감하게 찾아간 서민들이 갖은 애를 써서 문명과 도시의 발전을 이뤄낸 것은 닮았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원주민들 학살과 박해 과정이 일본의 손으로 이주민들에게 자행되었음은 다르다. 룽징은 어쩌면 현대 한국인들에게 또 하나의 두고 온 산하일 수 있다. 과연 국적을 초월한 민족 화합과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에서 조선족이라고 하면 으레 따라붙는 멸시와 의심의 눈초리를 생각한다면, 어려울 듯하다.

조선의 매운 시선, 닝구타寧古塔

닝구타는 다소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고장이다. 바로 청나라를 이루게 되는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여진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닝구’는 만주어로 여섯, ‘타’는 개로 6개 지명이다. 청나라를 세우는 누르하치의 증조부가 6명의 아들을 낳아서 이 지역에 할거했으며, 이들은 청 건국 이후 육조六祖로 존숭된다. 그래서 이곳 이름을 닝구타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후금 - 청이 아니라 금을 건국한 아구타의 육조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도 하며, 본래의 닝구타는 지금의 닝안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도 한다. 명나라는 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여진족을 셋으로 구분했는데, 백두산을 경계로 서쪽을 해서여진, 오른쪽을 건주여진, 그 북쪽을 야인여진이라고 했다.

언젠가 나의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젊은 우리 힘들이 모이면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우리가 서로 손을 잡은 것으로 큰 힘인데
우리 몸을 반을 가른 채 현실 없이 살아갈 건가
치유할 수 없는 아픔에 절규하는 우릴 지켜줘
갈 수 없는 길에 뿌려진 천만인의 눈물이 있어
워! 나에겐 갈 수도 볼 수도 없는가
저 하늘로 자유롭게 저 새들과 함께 날고 싶어
우리들이 항상 바라는 것 서로가 웃고 돕고 사는 것
이젠 함께 하나를 보며 나가요

-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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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왕이 태어날 땅인가?

개성은 고려왕조 500년의 수도였으나 고려 이전의 역사는 그리 풍부하지 않다. 온조 재위 10년(기원전 9년)에 말갈이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자 직접 출정해 싸웠는데 패배하고 청목산으로 후퇴해 겨우 패망을 면했다고 전해지며, 이 청목산이 바로 송악(옛 개성)이라는 게 『신동국여지승람』의 추정이다. 이후 어느 시점에 고구려로 편입되면서 부소갑扶蘇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555년에는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부소갑도 신라의 땅이 되었고, 694년 ‘송악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아 그 이전 어느 순간부터 ‘송악’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 같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조선왕조의 천대, 전쟁, 일제의 침략 등도 꿋꿋이 버텨냈던 개성 송상의 끈기와 지혜를, 창의성과 연대 의식을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남북한 사이에 다시 봄이 오고, 그 봄이 여름도 견뎌내 마침내 가을의 결실을 보게 될 때, 통일 수도의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개성은 다시 찬연히 빛나게 될 것이다. 수백 년 전 고려의 황도인 개경에서 연등회가 벌어지던 밤처럼.

사마천은 『사기』에서 군주를 제외한 역대 유명 인물들을 엮은 「열전」 중 1번째로 백이와 숙제를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은 고죽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형제였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할 때 "아무리 주왕이 무도해도 신하 된 도리로 임금을 칠 수는 없습니다"라며 말렸다. 하지만 끝내 무왕이 은나라를 치자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긴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이와 숙제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해주 경내의 가장 높은 산 이름이 수양산이고 앞바다에는 형제도라는 섬도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고죽국은 지금의 요서 지방, 그러니까 베이징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죽국과 고조선, 고구려와의 연관성도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고려 이후 오랫동안 한반도 사람들은 해주에 가서 여기가 고죽국이거니, 수양산을 바라보며 저기서 백이와 숙제가 절개를 지켜 죽었겠거니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수양산에는 두 사람을 기리는 청성묘淸聖墓가 있고, 묘 앞에는 "영원히 맑은 기풍이 남아 있네百世淸風"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임금이 총제 이숙번과 대언 박신을 불러 넌지시 말했다. "경들! 요즘 날이 참 좋소이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놀겠소?" 그리고 해주에 가서 놀며 사냥하자는 계획을 풀어놓으니 이숙번이 조용히 말했다. "해주에서 사냥이라! 매우 즐거울 겁니다. 다만 민폐가 꽤 있겠지요."
- 『태종실록』

율곡도 스무 살에 노씨盧氏와 혼인한 뒤로는 벼슬에서 물러나면 처가의 해주로 가서 연구하고 후학을 키웠다. 조선 대표 향약 중 하나인 『해주향약』도 그가 만든 것이고, 그의 호 중 하나인 석담石潭도 해주의 석담동에서 딴 것이다.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옛날의 평양

고구려 국내성이 부루내(너른 강)로 불렸다면 평양은 부루나(너른 벌판)로 불렸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아사달 혹은 왕검성이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땅이 아사달인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먼저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가 나중에 아사달로 옮겼다고 한다. 두 도시는 서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에서는 아사달이 곧 평양이라고 보고 있다. 애당초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없다 보니 아사달이 평양인지, 평양이라 쳐도 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인지도 불확실하다. 또한 중국의 『사기』에 우거왕이 한나라와 싸우다가 멸망한 고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이라고 적혀 있지만, 평양과 아사달, 왕검성, 세 도시의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

오늘날의 평양과 비슷한 도시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서울? 아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자 혈맹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평양과 가장 비슷한 도시는 미국의 워싱턴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잔혹했던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힘을 잃기는커녕 신이 되었다. 그리고 평양을 신의 도시로 만들어갔다. 앞서 평양의 면적은 서울의 3 배라고 했지만 대부분은 평양 행정 구역에 속한 산업 지구들이며 대동강 중류의 능라도 - 양각도 - 두루섬을 중심으로 한 진짜 평양시는 그 4분의 1 남짓이다.

김일성과 그가 주도한 혁명역사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심을 둘러싸고 김일성의 인생 역정(개선문), 김일성의 사상(주체사상탑), 김일성의 인민들(인민대학습당)이 삼위일체를 이루며 옹위하는 구도이다. 평양 - 북한의 시간은 김일성의 시간(환갑, 고희)에 맞춰 의미를 가지며, 평양 - 북한의 공간은 김일성의 생애와 성취, 생각에 따라 배치된다. 세상에 그 어떤 도시도 이렇게 장엄할 정도의 역사와 조경 철학을 동원해 개인숭배에 헌신하고 있지 않다.

김정은의 평양 그리고 그 이후의 평양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점점 더 정상으로 다가갈 것인가, 김일성 삼각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될 것인가? 확실한 점은 평양이 변하면 북한도 변할 것이고, 평양이 근본적으로 변하기 전에는 북한의 변화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별 볼 일 없던 작은 마을

원산은 홍콩과 비슷하다.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제국주의 세력이 들어오면서 조그마한 포구를 대도시로 키웠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근대적인 도시계획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세종시와도 비슷하다. 그러면 근대 이전의 한국사에는 원산이라는 도시가 없었는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덕원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려온 내륙의 도시와 가까운 원산포구, 원산진으로 존재해 왔다. 이후 원산이 커지면서 원래 덕원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포괄했다. 가령 노량진이 점점 커져서 한양을 잡아먹고 노량특별시가 되었다면 이해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과도 비슷한다. 일단은 덕원의 역사를 살펴보자.

결국 사람은 전쟁을 위해(무력이든, 경제든) 도시를 만들고, 길을 닦고, 건물을 짓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평화와 휴식을 위해서도 같은 일을 한다. 1880년 개항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원산은 이 모순에 근거한 발전과 파멸, 재건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네 나라가 깃발을 꽂다

함흥이 번화한 대도시가 된 지는 제법 오래되었지만, 그보다 더 오래 변방 도시라는 정체성이 있었다. 북쪽은 함경산맥, 서쪽은 낭림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보다 북쪽으로 가면 험하고 추워서 사람이 살기도, 지나다니기도 어려운 한편, 가운데로 성천강이 흐르고 그 성천강이 동해로 나가며 비옥하고 널찍한 평야를 만들어 주었기에 쌀 생산이 많았다. 그래서 변방의 번화한 도시라는 모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는 땅

일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신석기) 유물을 제외하면 의주의 고대사는 상당히 불분명하다. 가장 먼저는 이 땅에 고구려가 우마성이라는 성을 세웠다는 것인데, 고려 시대에 이르러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여 강감찬이 내성을 덧대어 쌓았으며(1017년) 그 뒤로 백마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다만 1018년 이후 거란과의 전쟁 때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쉬파람 분다

- 송몽규, 「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윤동주, 「별 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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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의 제주도 같은 독립 왕국의 오랜 꿈

수도권에서 강릉으로 가기 위해선 태백산맥을 넘어야 한다. 2015년 대관령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높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자동차로 가기도 꽤 힘들었는데, 사람이나 동물의 발에 의존해야 했던 옛날에는 얼마나 더 어려웠을까. 18세기 초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대관령을 넘던 소년 이중환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나흘이 지나서야 겨우 숲길을 빠져나왔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독립 왕국이 상당히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성정이 강릉에서 형성된 셈이다. 집집마다 글공부하는 면학 분위기와, 그러면서도 놀고 잔치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강릉의 풍습은 논리적으로 철저하면서도 동시에 기氣와 실용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그의 독특한 철학 세계가 이뤄지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푸른 바다가 일어났다가 구슬처럼 하얗게 빛나는 바다에 꺼져 들고
푸른 난새는 요란한 빛깔의 난새에 가려 버리네
부용꽃 삼 구, 이십칠 송이 붉게 떨어져 흩어져 버리니
이 한 밤 서리에 달빛 비쳐, 더욱 차갑기만 하여라

- 허초희(허난설헌), 「꿈에 광상산에 노닐다」

그러한 한가로움과 여유, 오래전 신선 화랑들과 몇백 년 전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발걸음의 이면에는 안보 도시로서 강릉의 숙명이 숨어 있다. 진정으로 강릉이 육지의 제주도로서 가벼운 마음으로 솔향을 즐기며 나들이도 하고, 커피도 즐기는 도시가 되려면 남북 간에 풀리지 않은 매듭을 풀어내는 일이 먼저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육로로는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으며 지금은 그 구간을 확장해 서울지하철 1호선이 달리고 있다.

1967년에 착공해 1968년에 개통한 경인고속도로도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통신에서도 1898년 서울 경운궁과 인천 사이에 한국 최초의 전화선이 가설되었다.

무의도에서 400미터쯤 떨어져 있으며 썰물 때는 무의도와 연결되는 작은 섬 실미도다. 1968 년 이곳에서 북파 특수부대를 양성하다가 계획이 취소되자 부대원들이 무기를 들고 서울까지 침입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군사정권 시기의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슬픈 역사였던 이 사건은 2003년 영화 「실미도」로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

경순왕(이제는 고려 상주국 김부)은 그의 부인이자 왕건의 딸인 경순공주가 지어준 도라산 영수암에 매일처럼 올라가 머나먼 경주 땅을 바라보며 한숨 쉬고 눈물지었다. 그래서 산 이름도 ‘신라의 수도를 돌아본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같은 산에서 천 년을 사이에 두고 나라 잃은 왕은 남쪽을, 고향 잃은 시민들은 북쪽을 애타게 바라보는 셈이다.

동인 계열이 주류였던 당시 조정에서 두 사람은 입지가 불안했으나, 선조가 ‘나도 이이, 성혼의 당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믿음이 두터웠으며 두 사람, 특히 이이의 사상적 깊이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후 성혼을 기리는 파산서원과 이이를 기리는 자운서원, 그리고 백인걸을 기리는 용주서원은 선비의 고향인 파주의 자랑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자운서원 일대만이 관광지처럼 번화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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