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의 제주도 같은 독립 왕국의 오랜 꿈

수도권에서 강릉으로 가기 위해선 태백산맥을 넘어야 한다. 2015년 대관령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높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자동차로 가기도 꽤 힘들었는데, 사람이나 동물의 발에 의존해야 했던 옛날에는 얼마나 더 어려웠을까. 18세기 초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대관령을 넘던 소년 이중환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나흘이 지나서야 겨우 숲길을 빠져나왔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독립 왕국이 상당히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성정이 강릉에서 형성된 셈이다. 집집마다 글공부하는 면학 분위기와, 그러면서도 놀고 잔치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강릉의 풍습은 논리적으로 철저하면서도 동시에 기氣와 실용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그의 독특한 철학 세계가 이뤄지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푸른 바다가 일어났다가 구슬처럼 하얗게 빛나는 바다에 꺼져 들고
푸른 난새는 요란한 빛깔의 난새에 가려 버리네
부용꽃 삼 구, 이십칠 송이 붉게 떨어져 흩어져 버리니
이 한 밤 서리에 달빛 비쳐, 더욱 차갑기만 하여라

- 허초희(허난설헌), 「꿈에 광상산에 노닐다」

그러한 한가로움과 여유, 오래전 신선 화랑들과 몇백 년 전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발걸음의 이면에는 안보 도시로서 강릉의 숙명이 숨어 있다. 진정으로 강릉이 육지의 제주도로서 가벼운 마음으로 솔향을 즐기며 나들이도 하고, 커피도 즐기는 도시가 되려면 남북 간에 풀리지 않은 매듭을 풀어내는 일이 먼저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육로로는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으며 지금은 그 구간을 확장해 서울지하철 1호선이 달리고 있다.

1967년에 착공해 1968년에 개통한 경인고속도로도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통신에서도 1898년 서울 경운궁과 인천 사이에 한국 최초의 전화선이 가설되었다.

무의도에서 400미터쯤 떨어져 있으며 썰물 때는 무의도와 연결되는 작은 섬 실미도다. 1968 년 이곳에서 북파 특수부대를 양성하다가 계획이 취소되자 부대원들이 무기를 들고 서울까지 침입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군사정권 시기의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슬픈 역사였던 이 사건은 2003년 영화 「실미도」로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

경순왕(이제는 고려 상주국 김부)은 그의 부인이자 왕건의 딸인 경순공주가 지어준 도라산 영수암에 매일처럼 올라가 머나먼 경주 땅을 바라보며 한숨 쉬고 눈물지었다. 그래서 산 이름도 ‘신라의 수도를 돌아본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같은 산에서 천 년을 사이에 두고 나라 잃은 왕은 남쪽을, 고향 잃은 시민들은 북쪽을 애타게 바라보는 셈이다.

동인 계열이 주류였던 당시 조정에서 두 사람은 입지가 불안했으나, 선조가 ‘나도 이이, 성혼의 당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믿음이 두터웠으며 두 사람, 특히 이이의 사상적 깊이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후 성혼을 기리는 파산서원과 이이를 기리는 자운서원, 그리고 백인걸을 기리는 용주서원은 선비의 고향인 파주의 자랑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자운서원 일대만이 관광지처럼 번화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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