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을 쥐려면 박작성을 손에 넣어라

단둥은 (신)의주와 붙어 있다. 그래서 『고려사』 등에 "압록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가는 곳에 있었다"라고 묘사된 고구려 국내성의 후보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국내성을 의주 부근 어딘가로 믿는 게 보통이어서 단둥이 바로 국내성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1965년까지 안동安東이라 불렸던 이 도시는 사서를 살펴보면 국내성과 다른 도시였다고 보기 쉬웠다. 지안과는 달리 연행사 등이 두루 다녔는데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흔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박작성은 당의 안동도호부 치하에 있다가 8세기 초쯤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기록에 나오지는 않으나 732년에 발해가 서해를 건너 당의 산동반도에 있는 등주를 공격했을 때, 아마 이곳에서 병력을 모아 출정시켰을 것이다. 발해의 강역으로 볼 때 중국으로 대규모 수군을 출정시킬 수 있는 곳은 압록강 어귀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칠 때마다 수군을 출정시킨 곳이 등주였으니 고구려도 하지 못한 복수를 발해가 해낸 셈이다.

"6·25 전쟁은 한반도 내부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야욕을 드러내 개입하여 북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침략하려 했다. 그래서 용맹무쌍한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조선을 지키고 중국을 지켰다"라는 메시지이다.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한국사의 모든 전쟁을 다루기는 했지만, 전시의 3분의 2 이상이 6·25 전쟁에 맞춰져 있다)이 "6·25 전쟁은 무력으로 동족을 살육해서라도 적화통일을 이루려는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돕고, 우리 국군이 목숨 바쳐 싸워서 대한민국을 지켰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밤이 되면 묘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다리의 중간쯤이 끊어진 듯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둥은 현대 도시답게 밤에도 야경이 휘황찬란한데, 전력난을 겪는 북한은 대부분의 조명을 끄기 때문에 북한 관리구역인 다리 중간부터 시꺼멓게 바뀌어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때는 이 풍경이 정반대였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문화대혁명 등에 시달리던 중국 단둥의 불은 꺼져 있고, 신의주의 불빛은 찬란했다고 한다. 역사는 때로 반전된다. 그러면서 반복된다.

국내성은 어디인가?

퉁화 일대가 옛 고구려와 발해의 땅인데, 특별히 지안을 살펴보는 까닭은 그곳이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사실 삼국의 역사는 확신할 수 없는 게 많다. 각 나라에서 역사를 남겼지만 전해지지 않으며, 삼국이 망하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 쓰인 고려의 사서들과 중국, 일본의 자료에 겨우 의존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그래도 400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어야 할 듯하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4세기 말부터는 고구려의 힘이 치솟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왕에 이르는 약 140년은 고구려의 최전성기가 되었고, 한국 역사상 주변 국가들에 가장 큰 국력을 떨쳤던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고구려는 이미 한계를 드러낸 수도 방위 문제를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했다. 첫째는 요동을 차지한 것이고, 둘째는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이제 적들은 요하를 건너고, 요동반도를 꿰뚫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서 한참을 들어와야만 수도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수와 당의 무지막지한 침공을 잇따라 물리칠 수 있었던 데는 이 천도의 효과도 컸다. 하지만 국내성이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는 3경 체제라 해서 평양과 함께 국내성과 한성을 국가의 중심지로 삼고 특별 관리 했다.

고구려의 역사는 끝났다. 그러면 국내성의 역사도 끝났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땅에 9도독부 42주 100현을 설치하고, 국내성 - 지안에는 가물주도독부를 두었다. 그리고 약 반세기가 지날 무렵, 고구려의 후예들이 지안을 다시 차지했다. 발해였다.

(압록강을 넘어서 탈출하는 탈북자들을 막고 돌려보내기 위한 검문소의 설치, 2019년 지안에 세워진 윈펑雲峰검문소는 중국 유일의 5G 검문소로, 드론, 열추적 모니터, 가상현실 추적통제장치 등 첨단기술을 총동원해 죽음을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을 샅샅이 살핀다).

고구려의 영광과 패망의 역사를 읽으며 가슴 뛰어본 적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의 변두리 소도시로 남은 지안시에 남다른 감회가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물론 낭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며, 도시는 역사를 넘어서 계속 살아간다. 고구려의 국내성, 발해의 서경압록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안시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단순한 감상 이상의 뭔가를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땅에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갈 디딤돌이 될 것이다.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쏘아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고,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고,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룽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간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과 닮았지만, 다른 꼴이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용감하게 찾아간 서민들이 갖은 애를 써서 문명과 도시의 발전을 이뤄낸 것은 닮았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원주민들 학살과 박해 과정이 일본의 손으로 이주민들에게 자행되었음은 다르다. 룽징은 어쩌면 현대 한국인들에게 또 하나의 두고 온 산하일 수 있다. 과연 국적을 초월한 민족 화합과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에서 조선족이라고 하면 으레 따라붙는 멸시와 의심의 눈초리를 생각한다면, 어려울 듯하다.

조선의 매운 시선, 닝구타寧古塔

닝구타는 다소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고장이다. 바로 청나라를 이루게 되는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여진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닝구’는 만주어로 여섯, ‘타’는 개로 6개 지명이다. 청나라를 세우는 누르하치의 증조부가 6명의 아들을 낳아서 이 지역에 할거했으며, 이들은 청 건국 이후 육조六祖로 존숭된다. 그래서 이곳 이름을 닝구타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후금 - 청이 아니라 금을 건국한 아구타의 육조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도 하며, 본래의 닝구타는 지금의 닝안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도 한다. 명나라는 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여진족을 셋으로 구분했는데, 백두산을 경계로 서쪽을 해서여진, 오른쪽을 건주여진, 그 북쪽을 야인여진이라고 했다.

언젠가 나의 작은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젊은 우리 힘들이 모이면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우리가 서로 손을 잡은 것으로 큰 힘인데
우리 몸을 반을 가른 채 현실 없이 살아갈 건가
치유할 수 없는 아픔에 절규하는 우릴 지켜줘
갈 수 없는 길에 뿌려진 천만인의 눈물이 있어
워! 나에겐 갈 수도 볼 수도 없는가
저 하늘로 자유롭게 저 새들과 함께 날고 싶어
우리들이 항상 바라는 것 서로가 웃고 돕고 사는 것
이젠 함께 하나를 보며 나가요

- 서태지와 아이들, 「발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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