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학살을 거론하고, 맥아더의 동상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게 배은망덕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북한이 만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동상을 세웠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지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노병의 동상을 보며 나는 자꾸 숨이 막힌다.

"양쪽은 마치 휴전이 아니라 전쟁선포에 합의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보도했다. 정전체제하의 또 다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전쟁의 달 6월을 기념하지 말고 불완전하나마 전쟁의 정지를 가져온 7월을 기억하자. 2003년은 정전협정 체결 50돌이 되는 해다. 우리는 그 불완전한 50돌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가해자 쪽인 주한미군이 뻔뻔스럽게 나온 데는 역사적·구조적 배경이 있다. 약칭으로는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또는 소파(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정식명칭으로는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라는 아주 긴 이름의 협정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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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姜禎求, 1945년 3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사회학자이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후학을 양성하면서 통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3월 18일(79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 시절
2001년 8월 17일 8·15 축전 때 만경대에 들러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라고 써 친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방명록으로 말미암아 그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에 저촉돼 구속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만경대의 사립문

강 교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떠올리고 만경대정신을 방명록에 썼지만, 나는 아마도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서술한 바 있는 만경대의 사립문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직하고 고향을 떠날 때에는 모두들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오겠다면서 씩씩하게 사립문을 나섰”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면서, “나는 그때부터 남의 집 사립문에 들어설 적마다 이 사립문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몇이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이 나라의 모든 사립문들에는 눈물에 젖은 이별의 사연이 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혈육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국 땅에서 쓸쓸히 병사한 아버지 어머니, 유해도 찾지 못한 전사한 동생 철주, 그리고 옥사한 작은삼촌 김형권, 13년 8개월의 오랜 감옥생활 끝에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난 외삼촌 강진석 등을 그리면서 김일성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독립을 찾기 위해 나선 모든 가정의 사립문에 서린 아픔을 그렸던 것이다.

필자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살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며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면 필자도 결코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락없이 김일성 일가의 ‘날조된’ 항일투쟁을 찬양한 몸이 되었을 터이니 말이다.

대한민국사 1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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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만, 어쩌면 100만 명이 ‘빨갱이’라는, ‘반동’이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심지어 그런 가족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모든 학살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학살은 괜찮고 어떤 학살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살은 다 나쁜 것이다. 설혹 빨갱이라 할지라도 그가 민간인이라면 국가권력이나 국가의 비호를 받는 무장집단이 한국전쟁 전후의 빨갱이사냥처럼 그런 식으로 마구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그늘 아래 빨갱이 자식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유가족들의 이야기야 어찌 무딘 필치로 제한된 지면에 담을 수 있으랴. 이 땅에 살기 위해 부모를 처형한 우익반공단체의 열성 간부가 된 아들의 심경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한국 현대사에는 두 가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었다. 하나는 친일파 청산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문제가 상호 관련되어 있다 함은 친일세력이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나 지원자로 등장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에서 최대규모의 학살인 보도연맹원 집단처형, 크고 작은 집단학살을 숱하게 낳은 ‘공비토벌’ 전술, 그리고 학살의 주체로 등장한 군과 경찰, 청년단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짙게 묻어난다.

더불어 사는 사회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또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빨갱이, 공산주의자라는 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나 일상화 되어 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있음에도 이 나쁜 버릇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민주화의 진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 수구세력들의 위기감이 진전되면서 이 나쁜 버릇이 오히려 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동학농민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을 난에 이르게까지 한 학정을 더 매섭게 비난한 사람이 이건창이다.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이 고려와 조선 천년을 통해 아홉 사람의 문장가를 꼽았을 때 그 마지막을 장식한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그는 조선 후기 사상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황현은 시골 선비라 차별을 받아 과거에 떨어지고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부모의 원을 풀었으나 도무지 벼슬길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친놈들 속에 들어가 미친 도깨비가 되라 하느냐며 황현은 초야에 남았다.

"그대 홀로 누운 것 서러워 마소, 살아서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고향에 돌아온 황현에게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아편을 준비했다. 그 밤 조선의 마지막 대시인인 황현은 절명시(絶命詩)를 짓는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지식인이 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秋燈俺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몇 해 전 첫 손자를 보았을 때 갓난아이에게 글 아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축원해 주었던 그 황현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李石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들. 모두 판서의 자제로 한 분은 양자로 가서 영의정의 아들이요, 한 분은 고종의 측근이요, 다른 한 분은 영의정 김홍집의 사위였다.

그 6형제가 지금으로 치면 재벌 부럽지 않을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더 속좁은 우리 사회는 통일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남쪽의 ‘관제 주사파’에 대해 수구세력은 호들갑을 떨지만, 우리가 함께 통일을 이루려 하는 이북에는 철두철미한 주사파가 2천만 명이나 있다.

친일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를 이념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북은 남을 고무·찬양해야 하고 남은 북을 고무·찬양해야 한다. 북은 남이 거둔 물질적 성과를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로 찬양해야 한다. 남은 또 북이 큰 나라들에 대해 큰소리쳐온 역사를 연개소문 죽고 처음이라고 부추겨주어야 한다.

요즈음도 연좌제란 말을 많이 쓰는데 한자로는 緣坐制와 連坐制 두 가지가 혼용되다가 요즈음은 連坐制로 굳어져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緣坐라 함은 혈연관계로 인해 당사자가 아닌 친족들이 처벌받는 것이고, 連坐는 스승과 제자, 친구 등 비혈연적 관계에 의해, 또는 다른 관리의 문제에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분명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원래 3족이란 3대에 걸친 친족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인 조족(祖族), 형제와 그 소생인 부족(父族), 그리고 본인의 아들 및 손자를 가리키는 기족(己族)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법률체계의 모법이 되는 『대명률직해』나 『경국대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에서 연좌제의 적용을 받는 친족의 범위도 친가, 외가, 처가의 3족이 아니라, 조족, 부족, 기족의 3족으로 국한되어 있다.

아끼던 김일성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화성의숙에서 중퇴하려 하자 최동오는 몹시 노여워하였지만, 결국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운동권‘의 반미와 청소년, 네티즌들의 반미는 그렇게 만나고 있었다. 아직까지 미군보고 당장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그 엄청난 촛불의 바다에서도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따위로 하려면 나가라‘는 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어머님, 아버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습니다"를 외칠 때 우리는 서로 반미냐 미국 반대냐를 따지지 않았다. 호들갑을 떠는 수구세력에 하나가 되어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모두 외치는 듯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는 재조지은을 강조할수록 당시 권위가 실추된 선조나 대신들은 어려운 입장이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었다고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

즉, "위기를 극복해낸 공로의 대부분을 명군의 것으로 돌리고, 나아가 명군을 불러온 주체가 자신들임을 부각함으로써 전쟁 초반의 연이은 패배 때문에 실추된 권위를 어느 정도 만회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이순신이나 권율 같이 정규군을 이끈 명장들이나 김덕령(金德齡), 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을 이끈 진짜 구국영웅들의 역할과 의미는 축소되고, 명군을 불러들인 조정 신료들이나 왕을 호종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된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봉한 선무공신(宣武功臣)에는 이순신·권율 등 18명만이 책봉되었는데 그나마 의병장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했다.

반면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에 파병을 청해 불러들인 공로로 정곤수(鄭崑壽)를 일등공신에 봉한 것을 필두로 무려 86명이 공신이 되었다.

명군의 노략질이 오죽했으면 민중 사이에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돌았을까? 명군의 행패가 심해지자 민심의 이반은 극에 달해 "어찌하여 왜적이 오지 않아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가?"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임재해 교수는 당시 민중은 "대국과 소국 간의 종속관계란 혈연의 친연성이나 혈맹관계 운운으로 호혜평등의 원칙에 의한 선린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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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모든 방법이 동원된 한국전쟁

참으로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때려죽이는 타살(打殺), 구살(毆殺), 주먹으로 쳐죽이는 박살(搏殺),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박살(撲殺), 격살(擊殺), 쏘아죽이는 사살(射殺), 총살(銃殺), 포살(砲殺), 칼로 찌르거나 베어죽이는 자살(刺殺), 찢어죽이는 육살(戮殺), 육시(戮屍), 생매장해 죽이는 갱살(坑殺), 바퀴로 치어죽이는 역살(轢殺), 단근질해 죽이는 낙살(烙殺), 밟아죽이는 답살(踏殺), 깔아죽이는 압살(壓殺), 독을 먹여죽이는 독살(毒殺), 껍데기를 벗겨죽이는 박살(剝殺), 끓는 물에 삶아죽이는 팽살(烹殺),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焚殺), 소살(燒殺), 베어죽이는 참살(斬殺), 여기서도 머리를 베어죽이는 참수(斬首), 허리를 끊어죽이는 요참(腰斬)이 있다. 또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익살(溺殺), 수장(水葬), 잡아죽이는 포살(捕殺), 굶겨죽이는 아살(餓殺), 목졸라 죽이는 교살(絞殺), 액살(縊殺), 채찍질하여 때려죽이는 추살(捶殺), 철퇴로 쳐죽이는 추살(鎚殺), 몽둥이로 쳐죽이는 추살(椎殺), 발로 차죽이는 축살(蹴殺), 높은 데서 내던져 죽이는 척살(擲殺), 곤장으로 때려죽이는 장살(杖殺), 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폭살(爆殺),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죽이는 책살(磔殺), 꾀어내어 죽이는 유살(誘殺),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 등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 등 인류의 역사에 있었던 사람 죽이는 방법이 모두 동원된 것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현실이었다.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고, 학살이 일어난 곳도 전국 방방곡곡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문자 그대로 죽은 자들의 뼈도 못 추렸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사 1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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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널리 퍼져 있다. 1960, 70년대에 비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라는 말은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 분의 조상으로부터 퍼져나와 혈연적으로 연결된 단일민족일까?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 분의 조상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이 모두 퍼져나왔다는 것은 극단적 민족주의와 부계 혈통주의가 결합된 아주 난폭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뻗어나온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처음 출현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올려잡아도 한말 이상 거슬러올라갈 수 없고, 이런 의식이 전 국민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좀더 세밀히 연구해 보아야겠지만 신분제와 신분의식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들어와서일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이에요"라고 한다. 여기에 "월급은 왜 안 줘요?" 같은 말들이 실제로 이들이 사용하는 한국어 교재에 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일민족국가 한국의 현실이다.

국회의원으로서의 김두한은 뉴스 메이커이자 트러블 메이커였다. 정책 입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자유당 시절 국회에서 이승만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두목으로 몰아붙인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두한이 이승만을 친일파 두목으로 비판한 것이 말인즉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정작 이승만이 두목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온갖 파괴공작을 일삼은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유족들은 호소한다. 학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부디 이 땅의 풀 한 포기 함부로 밟지 말아 달라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가족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온 국토가 그들의 무덤이라고. 온 국토에 학살의 흔적이 널려 있고, 현대사의 거의 모든 사건이 학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흔히 ‘유격대국가’라고 불리는 이북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항일무장투쟁에서부터 찾고 있으며,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은 주체사상과 더불어 이북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사회의 운영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61년 11월 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가 주최한 공식만찬에 특별한 손님을 초청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南雲) 장군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다카키 마사오로 돌아간 박정희는 나구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일본의 만주인맥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자, 이남에 만주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됨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최근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두 가지 이유에서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언론개혁운동 과정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재조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우익들에 의한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심화되면서 이 문제를 우리 사회 내의 친일잔재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 점이다.

이렇게 땅에 묻힌 친일의 어두운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쳐 지금 부족한 대로나마 우리가 친일잔재 문제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진 분은 임종국(1929∼89) 선생이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자료를 뒤져가며 친일파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추적한 임종국 선생과 그 제자들의 엄청난 노력에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

이북의 지도부가 채택한 방식은 탄백(坦白)이었다. 탄백이란 일제 통치 아래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당과 인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감춘 것이 뒤에 드러날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용서를 받았다.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한-일관계는 미국이 내세운 반공의 깃발 아래 이렇게 살아남은 군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의 야합의 역사였다. 친일파 박정희의 기념관을 짓지 못해 안달하는 나라, 제국주의의 베트남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민간인 학살의 과오를 범하고서도 사과하지 않는 나라, 친일파의 행위를 비롯하여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하나도 가르치지 않는 나라, 과연 우리가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우경화에 제대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우익들이 비웃을 일이다.

백민태는 바로 이들이 선택한 하수인이었다. 그런데 백민태는 항일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테러리스트였기에 백민태를 하수인으로 고른 것은 이들 암살모의자들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이승만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재직시 직접 그를 이화장으로 불러 "자네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을 뻗고 잔다"고 격려한 이승만은 노덕술이 검거되고 얼마 뒤인 1949년 2월12일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고 지령하시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국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종철이 아버님 말씀처럼 "아무 할말이 없데이…"다. 노덕술이 가고, 박처원도 가고, 이근안도 사라진 마당, 그러나 그들이 남긴 씨는 아직도 이 땅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그들과 똑같은 논리, 똑같은 수법으로 민주인사를 탄압한 자들이 남아 있는 곳이 어디 경찰뿐이겠는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과거청산을 모범적으로 행했다는 독일에서도 신나치가 생겨나는데, 단 한번도 과거청산을 하지 못하여 미청산된 과거의 만물상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로 이어진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친일잔재의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친일잔재는 군부독재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되었다. 친일잔재의 청산은 이 어정쩡한 민주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군부독재잔재의 청산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친일문제는 50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지나도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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